역사 서술 형식과 사서가 바르게 짝지어진 것은 기사본말체 - 『연려실기술』이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사본말체로 조선의 정치·문화를 정리하였다.
- 『고려사』: 세가·지·열전 등을 갖춘 기전체 사서이다.
- 『삼국사기』: 본기·열전 등을 갖춘 기전체 사서이다.
- 『동국통감』: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를 다룬 편년체 통사이다.
고려 토지 제도에 대한 옳은 설명은 민전은 매매·상속·증여가 가능한 사유지로 양반과 백정 모두 소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민전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개인 소유지로, 국가에 조세를 냈다. 고려의 백정은 일반 농민을 가리킨다.
- 한인전: 6품 이하 하급 관리의 자제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이에게 준 토지이며, 하급 관리·군인의 유가족에게 준 것은 구분전이다.
- 태조의 구분전 지급: 태조가 통일 공신에게 준 토지는 역분전이다.
ㄱ.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ㄴ. 수의 위협을 받던 고구려는 돌궐, 백제와 연합 세력을 구축하였다.
ㄷ.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대가야를 병합한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시대순은 백제의 웅진 천도 →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대가야 병합 → 고구려·돌궐·백제의 연합이다.
백제는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신라 진흥왕은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562년 대가야를 병합하였다.
그 뒤 6세기 말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이에 맞서 고구려는 돌궐·백제와 연결하는 남북 연합 세력을 형성하였다.
3사의 언론 기능이 영조 때 폐지되었다는 내용이 조선 후기 정치 구조 변화와 거리가 멀다.
영조는 탕평책을 펴며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정리하고 이조 전랑의 권한을 줄였지만, 3사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3사의 언론 기능은 붕당 간 대립 속에서 변질되었을 뿐 존속하였다.
- 의정부·6조 체계의 유명무실화: 비변사가 국정 최고 기구가 되면서 나타났다.
- 전랑권 혁파: 영조·정조의 탕평 정치 과정에서 이조 전랑의 통청권·자대권이 폐지되었다.
- 비변사 기능 강화: 비변사는 고위 관직 인사에도 관여하였다.
-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조정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의 4국 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제시된 결정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12)의 내용이며, 옳지 않은 것은 좌익이 처음부터 찬탁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내용이다.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와 '최고 5년 기한' 신탁 통치가 알려지자 좌익도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곧 3상 회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 우익의 반탁 운동: 김구·이승만 등 우익은 대대적인 반탁 운동을 벌였다.
- 좌우 대립: 신탁 통치 문제로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 열렸으나 미·소의 이해 대립으로 결렬되었다.

도표와 관련해 옳지 않은 설명은 진골이 처음 받는 관등이 대아찬이었다는 내용이다.
도표에서 대아찬(5등급) 이상은 진골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며, 진골의 첫 관등을 나타내지 않는다. 진골은 가장 낮은 등급부터 이벌찬까지 모든 관등에 걸쳐 있다.
- 관등에 따른 공복 색: 자색·비색·청색·황색 공복이 관등 구간에 따라 정해졌다.
- 5두품의 공복: 5두품은 대나마(10등급)까지 오를 수 있어 청색과 황색 공복을 입었다.
- 골품에 따른 승진 한계: 6두품은 아찬, 5두품은 대나마, 4두품은 대사까지로 한계가 있었다.
18세기 초 노론학계 내에서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송시열의 직계 제자들이 벌인 사상 논쟁인데 권상하와 그의 제자 한원진이 중심이 된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이 주장한 이론을 호론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사람의 본성인 인성(人性)과 물질의 본성인 물성(物性)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과 김창협이 중심이 된 낙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말한다.
인물성동론에 기초하여 나타난 사상계의 동향은 북학 사상의 형성이다.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은 오랑캐와 중화의 구분을 완화하는 논리로 이어져,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 양명학 도입: 양명학은 16세기에 전래되어 호락 논쟁과 관계가 없다.
- 동학 사상의 대두: 동학은 19세기 최제우가 민간 신앙과 유·불·선을 결합해 창시하였다.
- 화이론적 사유체계 확립: 인성과 물성을 구별한 호론이 화이론을 강조하여 뒤에 위정척사 사상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문학·예술의 새 경향과 거리가 먼 것은 『필원잡기』와 『용재총화』 편찬이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성현의 『용재총화』는 조선 전기(15세기)의 설화 문학 작품이다.
- 산대놀이: 조선 후기 도시 상인층의 후원을 받아 민중 오락으로 자리 잡았다.
- 진경산수화: 정선이 우리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려 유행시켰다.
- 시사 조직: 조선 후기 중인층이 시사를 조직해 문학 활동을 벌였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함이다. 양반과 호강(豪强)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 및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제시된 격문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의 격문이며, 그 배경에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농민들의 적개심이 있었다.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는 구절은 반봉건·반외세를 내세운 것이다. 개항 이후 일본 상인의 곡물 반출로 곡가가 오르고 농촌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농민의 반일 감정이 커졌다.
- 명성 황후 시해에 대한 반발: 을미사변(1895)은 동학 농민 운동 이후의 일로, 을미의병의 배경이다.
- 친위대·진위대 신설: 을미개혁 이후의 군제 개편이다.
-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1907년 정미의병의 배경이다.
ㄱ. 재판 없이 태형을 가할 수 있는 즉결 처분권을 헌병 경찰에게 부여하였다.
ㄴ. 한반도를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았다.
ㄷ.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하여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을 강화하였다.
ㄹ. 사상통제와 탄압을 위하여 고등경찰제도를 실시하였다.
시대순은 헌병 경찰의 즉결 처분권 → 고등 경찰 제도 → 병참 기지화 → 국가 총동원령이다.
1910년대 무단 통치기에는 헌병 경찰에게 즉결 처분권을 주어 태형을 가하였다. 1920년대 문화 통치기에는 보통 경찰제로 바꾸면서 고등 경찰로 사상을 통제하였다.
1930년대 만주 사변 이후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고, 중·일 전쟁 뒤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공포해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민무늬 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이 먼 것은 주민들이 평등하여 뚜렷한 계급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토기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사유 재산과 빈부 차이가 생겨 계급이 발생하였다.
- 석기 농기구: 반달 돌칼 등 간석기를 농기구로 썼다.
- 벼농사: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 고인돌: 지배층의 무덤으로 계급 사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
- 신문왕 7년(687) 5월에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 신문왕 9년(689) 1월에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여 이로써 영원한 법식을 삼았다.
- 경덕왕 16년(757) 3월에 여러 내외관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나누어 주었다.
제시된 사실을 통해 국왕과 귀족 사이에 권력 갈등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신문왕은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혁파'하여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으나, 경덕왕 때 '다시 녹읍'이 부활하였다. 이는 왕권 강화 정책에 맞선 귀족 세력의 반발이 커졌음을 보여 준다.
- 왕권 전제화의 지속: 녹읍 부활은 전제 왕권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귀족 경제력의 약화: 녹읍 부활로 귀족의 경제력은 다시 강해졌다.
- 농민 지배권 강화: 녹읍 부활로 귀족이 농민을 지배하는 힘이 커져 국가의 지배권은 약해졌다.
ㄱ. 왕건은 승려의 수를 제한하기 위하여 승과(僧科)를 실시하였다.
ㄴ. 의천은 국청사(國淸寺)를 중심으로 해동천태종을 창시하였다.
ㄷ. 지눌은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불교 개혁 운동을 주도하였다.
ㄹ. 요세(了世)는 백련사(白蓮社)를 조직하여 선종을 전파하였다.
고려 불교에 대한 옳은 설명은 의천의 해동 천태종 창시와 지눌의 수선사 결사, 곧 ㄴ과 ㄷ이다.
의천은 국청사를 중심으로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해동 천태종을 열었다. 지눌은 수선사를 중심으로 정혜쌍수·돈오점수를 내세운 불교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 왕건의 승과 실시: 승과를 처음 실시한 왕은 광종이다.
- 요세의 백련사와 선종: 요세의 백련사 결사는 천태종 계열로, 법화 신앙을 중심으로 하였다.
제1조 대한국은 세계 만국에 공인되어 온바 자주 독립한 제국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무한하온 군권을 지니나니 공법에 이른바 자립정체이니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고 편제를 정하며 계엄과 해엄을 명하니라.
제시된 내용은 대한 제국의 대한국 국제(1899)이며, 이 정권의 개혁 방향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은 이소사대이다.
'자주 독립한 제국'을 내세운 대한 제국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는 사대 관계를 부정하였다. 광무개혁은 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하였다.
- 동도서기: 전통 사상을 지키며 서양 기술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광무개혁의 성격과 통한다.
- 구본신참: 광무개혁의 기본 원칙이다.
- 식산흥업: 상공업 진흥을 위해 근대 공장·회사 설립을 지원하였다.
북한이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여 수령 유일 지도 체제를 확립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북한은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여 주석제를 신설하고 김일성 유일 체제를 제도화하였다.
- 1948년 북한 정부 구성: 정부 수립 당시에는 남로당·연안파 등 여러 세력이 참여하였고, 이들의 숙청은 그 뒤에 이루어졌다.
- UN군으로 베트남 파병: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UN군 자격이 아니었다.
- 1971년 간접 선거 당선: 1971년 대통령 선거는 직접 선거였고, 간선제는 1972년 유신 헌법 이후이다.
불로장생과 현세의 구복을 추구하는 이 종교는 여러 가지 신을 모시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며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크게 위축되어 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제천 행사가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점이 인정되어 참성단에서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ㄱ. 임신서기석 ㄴ. 초제
ㄷ. 백제 금동대향로 ㄹ. 팔관회
밑줄 친 '이 종교'는 도교이며, 관련 있는 것은 초제, 백제 금동대향로, 팔관회이다.
'불로장생', '참성단에서 일월성신에게 제사'는 도교의 특징이다. 초제는 하늘과 별에 지낸 도교 제사이고, 금동대향로에는 도교의 신선 세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팔관회는 도교와 민간 신앙·불교가 어우러진 행사였다.
- 임신서기석: 신라 청년이 유교 경전 학습을 맹세한 비석으로 유교와 관련된다.
"신이 오랑캐에게 패한 것은 그들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왕에게 건의하여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다. 문무 산관, 이서, 상인, 농민들 가운데 말을 가진 자를 신기군으로 삼았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20살 이상 남자들 중 말이 없는 자를 모두 신보군에 속하게 하였다. 또 승려를 뽑아서 항마군으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밑줄 친 '새로운 군대'는 별무반이며, 그 활약으로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 지방에 9성을 쌓았다.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이루어진 별무반은 숙종 때 윤관의 건의로 편성되었고, 예종 때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쌓았다.
- 귀주 대첩: 강감찬이 거란의 3차 침입을 물리친 싸움이다.
- 홍건적 격퇴: 공민왕 때의 일이다.
- 처인성 전투: 김윤후가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한 싸움이다.
지방 고을의 향전(鄕戰)은 마땅히 금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수령이 일에 따라 한쪽을 올리고 내리는 경우가 없지 않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반드시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양쪽의 주동자를 먼저 다스려 진정시키고 향전을 없애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 옳다. 일부 아전들도 한쪽으로 쏠리는 일이 있으니 또한 반드시 아전의 우두머리에게 엄하게 타일러야 한다. 향임을 임명할 때 한쪽 사람을 치우치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거관대요』
제시된 시기는 향전이 벌어진 조선 후기이며, 이때 향임직이 요호부민에게 매매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부를 쌓은 신향(요호부민)이 향촌 지배권을 둘러싸고 기존 사족인 구향과 다툰 것이 '향전'이다. 수령은 이를 이용해 '향임' 임명 등에 개입하며 향촌 지배력을 키웠다.
- 향리 폐지 시도: 조선 후기 수령은 오히려 향리를 통해 향촌을 지배하였다.
- 수령의 향촌 지배력 약화: 사족의 힘이 약해지면서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커졌다.
조선 후기 경제 상황에 대한 옳은 설명은 경영형 부농이 나타난 반면 영세농의 이농 현상이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이앙법·광작으로 일부 농민은 부농으로 성장하였으나, 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잃고 임노동자가 되거나 도시·광산으로 떠났다.
- 상품 작물 재배 위축: 인삼·담배·면화 등 상품 작물 재배가 오히려 활발해졌다.
- 타조법으로 전환: 실제로는 일정 지대를 내는 도조법이 일부 지역에서 확산되었다.
- 양반 관료의 토지 집적 완화: 양반 지주의 토지 집적은 계속되었다.
(가)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지방관아를 습격하여 단발을 강요하는 친일 수령들을 처단하였다.
(나) 일본의 외교권 박탈을 계기로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항전을 전개하였다.
(다) 유생과 군인, 농민, 광부 등 각계각층을 포함하여 전력이 향상된 의병은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였다.
(나)는 을사의병이며,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이 시기의 사실이 아니다.
'외교권 박탈'(을사늑약, 1905)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이 을사의병이다. 13도 창의군은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1907) 뒤 일어난 정미의병 때 결성되었다.
- 민종식의 홍주성 점령: 을사의병 때의 일이다.
- 신돌석의 활약: 평민 의병장 신돌석은 을사의병 때 등장하였다.
- 최익현의 부대 해산: 을사의병 때 순창에서 진위대와 맞서게 되자 부대를 해산하고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