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조개 껍데기 가면 ㄴ. 거친무늬 거울
ㄷ. 비파형 동검 ㄹ. 미송리식 토기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알려 주는 유물은 거친무늬 거울,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이다.
이 유물들은 요동 지방과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함께 분포하여, 이 지역이 같은 청동기 문화권이었음을 보여 준다. 탁자식 고인돌도 같은 근거로 꼽힌다.
- 조개껍데기 가면: 신석기 시대의 예술품으로 고조선의 세력 범위와 관계가 없다.
백제 건국 세력이 부여·고구려계 이주민이었다는 근거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 정복이다.
마한 정복은 백제가 성장하며 영토를 넓힌 사실(근초고왕 때)로, 건국 주도 세력의 출신과는 관계가 없다.
- 왕족의 성 부여씨: 백제 왕실이 부여 계통임을 보여 준다.
- 비류·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건국 신화: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이 건국하였음을 보여 준다.
- 한강 유역 초기 무덤: 서울 석촌동의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초기 무덤 양식과 같다.
고려 대외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고려가 송의 군사적 제의에 응하여 거란을 협공하였다는 내용이다.
송은 거란을 함께 치자고 제의하였으나 고려는 응하지 않았다. 고려는 송과 문화·경제적 교류를 이어 가면서도 군사적으로는 실리 외교를 폈다.
- 송과의 유대: 고려와 송은 문화적·경제적으로 긴밀히 교류하였다.
- 광군 조직: 정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광군을 조직하였다.
- 송 판본의 영향: 송에서 들여온 판본은 고려 목판 인쇄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사상계 동향으로 옳지 않은 것은 낙론이 대의명분을 강조한 북벌론으로 발전하였다는 내용이다.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본 낙론은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 사상의 철학적 기초가 되었다. 대의명분과 화이론을 강조한 쪽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본 호론이다.
- 북학 사상의 기초: 북학 사상은 인물성동론을 철학적 바탕으로 하였다.
- 인물성이론의 주장 세력: 충청도 지역 노론 학자(호론)들이 주로 주장하였다.
- 만동묘: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명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하기 위해 세웠다.
농지 개혁(1950 시행)으로 토지가 없던 농민이 토지를 갖게 되었다는 설명이 옳다.
농지 개혁은 유상 매수·유상 분배 방식으로 실시되어 많은 소작농이 자작농이 되었다.
- 1960년대 노동자의 생활: 저임금 정책으로 노동자들은 열악한 처지에 있었다.
- 1970년대 노동 3권 보장: 유신 체제 아래에서 노동 운동은 오히려 억압되었다.
- 1980년대 초 노조 자유 설립: 1980년대 초 신군부 정권은 노동 운동을 통제하였고, 노동 운동은 1987년 이후 크게 활발해졌다.
- 서예에서 간결한 구양순체 대신에 우아한 송설체가 유행하였다.
- 고려 태조에서 숙종 대까지의 역대 임금의 치적을 정리한 「사략」이 편찬되었다.
ㄱ. 2년 3작의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다.
ㄴ. 원의 「농상집요」가 소개되었다.
ㄷ. 우경에 의한 심경법이 확대되었다.
ㄹ. 상품 작물이 광범위하게 재배되었다.
제시된 문화 활동은 고려 후기의 일이며, 이 시기 농업 기술 발달로 옳은 것은 ㄱ, ㄴ, ㄷ이다.
원 간섭기에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이제현이 '사략'을 편찬하였다. 이 시기에는 2년 3작의 윤작법이 보급되고, 이암이 원의 『농상집요』를 들여왔으며,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심경법)가 확대되었다.
- 상품 작물의 광범위한 재배: 담배·인삼 등 상품 작물 재배가 널리 퍼진 것은 조선 후기이다.
'대흠무'는 발해 문왕이며, 이 시기 통일 신라에서는 귀족 세력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다(경덕왕, 757).
문왕은 8세기 중·후반에 재위하였으므로, 같은 시기 신라는 경덕왕~혜공왕 때로 전제 왕권이 흔들리던 때이다.
- 9주 5소경 완비: 7세기 후반 신문왕 때의 일이다.
- 의상의 부석사 창건: 7세기 후반 문무왕 때의 일이다.
-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9세기 전반 흥덕왕 때의 일이다.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으며 현도에서 천리 쯤 떨어져 있다. … 사람들의 체격은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용맹하며 근엄후덕해서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 좋은 밭이 없어서 힘들여 일구어도 배를 채우기에는 부족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은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했다.
- 삼국지 동이전 -
ㄱ.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불교 관련 기사가 거의 없다.
ㄴ. 「고려사」는 우왕을 부정적으로 기록하였다.
ㄷ.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문헌고증에 입각한 객관적인 역사 연구를 추구하였다.
ㄹ. 사마천의 「사기」는 기전체로서 역사를 본기, 세가, 지, 열전, 연표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사료에서 추론할 수 있는 특징은 역사 서술에 서술자의 입장(관점)이 반영된다는 것이며, 같은 맥락의 사례는 ㄱ과 ㄴ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중국과 우호적이던 부여는 '근엄후덕'하다고, 중국과 맞서던 고구려는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을 좋아한다고 서술하였다. 『삼국사기』가 유교적 사관에 따라 불교 관련 기사를 적게 다룬 것, 『고려사』가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고 우왕을 부정적으로 기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동국지리지』의 문헌 고증: 객관적 연구를 추구한 것으로 서술자의 주관이 반영된 사례가 아니다.
- 『사기』의 기전체 구성: 서술 형식에 관한 설명일 뿐 서술자의 관점과는 관계가 없다.
양인들의 군역에 대한 절목 등을 검토하고 유생의 의견을 들었으며, 개선 방향에 관한 면밀한 검토를 거친 후 담당 관청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핵심 내용은 1년에 백성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것이었다.
제시된 제도는 균역법이며, 이를 시행한 영조 때 청계천을 준설하여 도시를 정비하였다.
'군포 2필을 1필로' 줄인 균역법은 영조가 1750년에 시행하였다. 영조는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준천사를 두고 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준설하였다.
- 『증보문헌비고』 편찬: 영조 때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고, 『증보문헌비고』는 대한 제국 시기에 간행되었다.
- 노론 핵심 인물 처형: 경종 때 신임사화에 대한 설명이다.
- 통공 정책으로 금난전권 폐지: 정조 때 신해통공(1791)이다.
충청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며 전라도에서도 반군이 조직되었다. 반란에 참가한 주동자들은 비록 정쟁에 패하고 관직에서 소외되었지만, 서울과 지방의 명문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반군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안성과 죽산으로 향하였다.
제시된 사건은 이인좌의 난(1728)이며, 옳지 않은 설명은 반란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왕이 피난하였다는 내용이다.
'청주성을 함락'한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진압되어 한양에 이르지 못하였다. 반란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왕이 피난한 것은 인조 때 이괄의 난이다.
- 경종의 사인 의혹: 반란 세력은 영조가 경종의 죽음에 관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탕평책의 명분: 난을 진압한 뒤 영조는 붕당 폐해를 내세워 탕평책을 더욱 강하게 추진하였다.
- 소론·남인 강경파의 주동: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과 남인 강경파가 일으켰다.
노태우 정부 시기 남북 관계로 옳은 것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 외교를 추진하였고,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박정희 정부 때의 일이다.
- 6·15 남북 공동 선언: 2000년 김대중 정부 때의 일이다.
- 금강산 관광 사업: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시작되었다.
옳지 않은 설명은 일본이 청일 전쟁 중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는 내용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 중인 1905년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다고 고시하였다.
- 간도 협약: 일본은 1909년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 등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 간도 참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한인을 학살한 사건이다(1920).
- 105인 사건: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를 조작하여 신민회 등을 탄압한 사건이다.
- 신라 신문왕 :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다.
- 고려 광종 : 과거 제도를 시행하고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 조선 태종 : 6조 직계제를 확립하고 사병을 혁파하였다.
제시된 정책들의 공통 목적은 왕권 강화이며, 가장 유사한 것은 장용영 설치와 규장각 확대 개편이다.
신문왕의 녹읍 폐지, 광종의 과거제·공복 제정, 태종의 6조 직계제·사병 혁파는 모두 귀족·공신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이다. 정조도 친위 부대인 장용영과 규장각을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 상대등 권력 강화: 상대등은 귀족 세력을 대표하므로 왕권 약화와 연결된다.
- 향약·사창제·서원 설립: 사림의 향촌 자치 강화와 관련된다.
- 중방의 최고 권력 기관화: 무신 정권기 무신 세력의 권력 장악을 보여 준다.
ㄱ.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ㄴ.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을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ㄷ.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받들었다.
ㄹ. 재가한 여성이 낳은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ㅁ.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에 관한 설명으로 제시된 다섯 가지가 모두 적절하다.
고려에서는 재산을 자녀에게 균분 상속하였고, 호적에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 제사를 지냈고, 여성의 재가가 비교적 자유로워 그 자식의 사회 진출에도 차별이 없었다.
또 사위와 외손자에게도 음서의 혜택이 주어져, 고려 사회가 부계와 모계를 함께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마음(一心)을 깨닫지 못하고 한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중생인데 부처는 이 한마음을 깨달았다. 깨닫고 아니 깨달음은 오직 한마음에 달려 있으니 이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을 것이 없다. …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 10여 인과 약속하였다.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결사를 결성하자. 항상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골고루 하는 데 힘쓰자.
글을 쓴 승려는 지눌이며, 그는 깨달음 뒤에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결사를 결성하자', '선을 익히고 지혜를 골고루' 하자는 내용은 지눌의 정혜결사문으로, 정혜쌍수를 내세운 것이다. 지눌은 수선사를 중심으로 불교 개혁 운동을 펼쳤다.
- 불교와 유교의 통합 시도: 지눌의 제자 혜심의 유불일치설에 대한 설명이다.
- 백련결사 제창: 천태종 계열의 요세가 이끌었다.
- 교장 간행: 의천이 교장도감을 두어 간행하였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고구려)가 망한 다음 김씨(신라)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발해)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하였으니,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당연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제시된 역사서는 유득공의 『발해고』이며, 이 시기 정조는 서얼 출신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였다.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이라 부르고 '남북국사'를 써야 한다고 한 것은 『발해고』의 서문이다. 유득공 자신도 박제가·이덕무 등과 함께 정조 때 검서관에 등용된 서얼이었다.
- 양명학 수용 시작: 양명학은 16세기 중종 무렵 전래되었다.
- 성리학 수용 여론 조성: 고려 말 안향 등이 성리학을 소개한 시기의 일이다.
- 통사 체계의 첫 확립: 15세기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의 정치적 입장으로 옳지 않은 것은 『동사강목』이 성리학적 명분론을 비판하였다는 내용이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강목체로 서술되어 성리학적 정통론과 명분을 따르면서 고증을 중시하였다.
- 『여사제강』: 유계가 서인의 입장에서 북벌 운동을 지지하며 쓴 고려사이다.
- 『동사(東事)』: 남인 허목이 저술하였으며 붕당 정치를 비판하였다.
- 『동국통감제강』: 홍여하가 남인의 입장에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였다.
대한 제국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대한국 국제가 입헌 군주제를 추구하였다는 내용이다.
대한국 국제(1899)는 황제가 군통수권·입법·사법·행정권 등 무한한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한 전제 군주제 헌법이다.
- 구본신참과 양전 사업: 광무개혁은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양전 사업을 벌여 지계를 발급하였다.
- 시위대·진위대 증강: 황제 호위와 지방 방어를 위해 군대를 늘렸다.
- 간도 관리 파견: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여 교민을 보호하였다.
ㄱ. 북조선 5도 행정국 설치
ㄴ. 토지개혁 단행
ㄷ. 북조선 노동당 창당
ㄹ.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조직
연대순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조직 → 북조선 5도 행정국 설치 → 토지 개혁 → 북조선 노동당 창당이다.
광복 직후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조직되었고, 11월 북조선 5도 행정국이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들어선 뒤 3월 무상 몰수·무상 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어 1946년 8월 북조선 공산당과 조선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 노동당이 창당되었다.
3·1 운동 전후 정세로 옳지 않은 것은 일본의 산둥성 이권 계승 요구가 파리 평화 회의에서 승인받지 못하였다는 내용이다.
파리 평화 회의가 산둥성의 옛 독일 이권을 일본이 계승하도록 인정하자, 이에 반발하여 중국에서 5·4 운동이 일어났다.
-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러시아 혁명 뒤 일본은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내 일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 볼셰비키 정권 수립: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세워졌다.
- 민족 자결주의: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질서를 위해 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