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8~7세기 무렵에 ( ㉠ )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 일반적으로 ( ㉡ )은 식량 채집 단계로부터 식량 생산 단계로의 변화를 낳은 농업혁명을 말한다.
- ( ㉢ )과 뒤를 이은 ( ㉣ )을 대표적인 유물로 하는 청동기 문화는 황하나 내몽골 지역의 것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개성을 지닌 것이었다.
순서대로 벼농사, 신석기혁명, 비파형동검, 세형동검이 들어간다.
청동기 시대에는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본격화되었다(㉠). 식량 채집 단계에서 생산 단계로 바뀐 농업혁명은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의 변화이므로 신석기혁명이라 부른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대표 유물은 요령 지방까지 분포한 비파형동검이고(㉢), 그 뒤를 이어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세형동검이다(㉣).
- 청동기혁명을 넣은 배열: 식량 채집에서 생산으로의 변화는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 두 동검의 순서를 바꾼 배열: 비파형동검이 먼저이고 세형동검이 뒤이다.
- 보리농사를 넣은 배열: 청동기 시대에 본격화된 농경으로 사료가 가리키는 것은 벼농사이다.
삼한은 정치적 지배자와 제사장이 분리된 제정 분리 사회였으므로 제정일치 사회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삼한에서는 제사장인 천군이 신성 지역인 소도를 따로 다스렸고, 이곳에는 군장의 힘도 미치지 못하였다.
- 저수지 축조·벼농사 발달: 철제 농기구 보급과 함께 김제 벽골제 등 저수지가 만들어져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 철 생산과 수출: 변한에서 철이 많이 나 낙랑과 왜에 수출하고 화폐처럼 쓰기도 하였다.
- 5월·10월 계절제: 씨뿌리기를 마친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 처음으로 소를 이용한 밭갈이가 시작되었다.
- 국호를 한자식 표현인 ‘신라’로 바꾸었다.
우경 실시와 국호 '신라' 확정은 지증왕의 업적이며, 같은 왕 때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지증왕은 '소를 이용한 밭갈이'(우경)를 장려하고, 국호를 '신라'로,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다. 또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왕호 변경: 김씨 왕위 세습을 확립한 내물왕 때의 일이다.
-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 법흥왕 때의 일이다.
- 대가야 정복과 낙동강 유역 확보: 진흥왕 때의 일이다.
발해가 일본과 교류한 통로는 동경 용원부를 거치는 일본도였으므로, 서경 압록부를 통해 일본과 사신이 왕래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서경 압록부는 압록강 물길을 따라 당으로 향하는 조공도의 거점이었고, 일본으로 가는 사신은 동해 쪽의 동경 용원부를 거쳐 바다를 건넜다.
- 돌궐과의 외교: 건국 초기 발해는 당과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 손을 잡았다.
- 빈공과 급제: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냈고, 당의 외국인 대상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여럿 나왔다.
- '고려왕' 표현: 발해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였고, 일본도 국서에서 발해왕을 고려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동도서기론과 문명개화론은 위정척사 세력이 아니라 개화파의 주장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위정척사 운동은 성리학 질서를 지키고(위정) 서양·일본 세력과 문물을 배척(척사)하려는 보수 유생층의 운동으로, 시기마다 통상 반대론→개항 반대론→개화 반대론→항일 의병으로 이어졌다. 동도서기론은 온건 개화파, 문명개화론은 급진 개화파의 노선이다.
- 쇄국정책 뒷받침: 1860년대 이항로 등의 통상 반대론은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뒷받침하였다.
- 영남 만인소: 『조선책략』 유포와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발해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다.
- 왜양일체론: 강화도 조약 체결 무렵 최익현 등은 일본이 서양 오랑캐와 다를 바 없다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하였다.
국왕께서 왕위에 즉위한 첫 해에 맨 먼저 도서집성 5천여 권을 연경의 시장에서 사오고, 또 옛날 홍문관에 간직했던 책과 강화부 행궁에 소장했던 책과 명에서 보내온 책들을 모았다. … 창덕궁안 규장각 서남쪽에 열고관을 건립하여 중국본을 저장하고, 북쪽에는 국내본을 저장하니, 총 3만권 이상이 되었다.
사료의 '국왕'은 '규장각'을 세운 정조이며, 당파와 관계없이 인물을 고루 등용한 완론탕평은 영조의 정책이므로 옳지 않다.
정조는 즉위 직후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고금도서집성』을 들여오는 등 장서를 모았다. 정조의 탕평은 각 붕당의 시비를 명확히 가리는 준론탕평이었다.
- 대전통편 편찬: 정조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등을 통합한 『대전통편』을 편찬해 통치 규범을 재정리하였다.
- 초계문신제 시행: 정조는 젊은 당하관 문신을 규장각에서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 장용영 창설: 정조는 왕권을 뒷받침하는 친위 부대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 삼사에서 말하기를 “지난 해 밀성 관내의 뇌산부곡 등 세 곳은 홍수로 논 밭 작물이 피해를 보았으므로 청컨대 1년치 조세를 면제하십시오.”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
- 향 부곡 악공 잡류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익안폐현은 충주의 다인철소인데, 주민들이 몽고의 침입을 막는데 공이 있어 현으로 삼아 충주의 속현이 되었다.
- 고려사 -
충주의 '다인철소' 주민이 몽골 침입을 막은 공으로 현으로 승격되었으므로, 소가 현으로 승격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향·부곡·소는 일반 군현민보다 차별받는 특수 행정 구역이었다. 충주 다인철소 주민은 몽골군을 물리친 공으로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다.
- 소 주민의 생업: 소의 주민은 '철소'라는 이름처럼 광산물이나 수공업품을 생산해 바쳤으므로 주로 농사를 지었다고 볼 수 없다.
- 부곡민의 조세: 뇌산부곡의 1년치 조세 면제를 청한 기록은 부곡민이 평소 조세를 부담하였음을 보여 준다.
- 부곡민의 과거 응시: 향·부곡 사람의 자손은 과거 응시가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 호남의 백성들을 볼 때 대략 100호가 있다고 한다면, 그 중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자는 불과 5호에 지나지 않고, 자기 토지로 농사짓는 자는 25호이며, 타인의 토지를 빌려 지으면서 지대를 바치는 자가 70호나 된다.
정약용이 활동한 조선 후기 호적대장에서 급증한 호구는 양반호이다.
조선 후기에는 농민층 분화로 부를 쌓은 일부 농민이 납속·공명첩·족보 위조 등으로 신분을 끌어올리면서 양반 인구가 크게 늘었다. 대구 지역 호적대장 등에서도 양반호 비중이 급증하고 상민호와 노비호는 크게 줄어드는 변화가 확인된다.
사료에서 자기 땅을 빌려주는 지주는 소수이고 남의 땅을 빌려 짓는 소작농이 다수인 것처럼, 경제적 처지와 무관하게 호적상 양반의 수가 늘어난 것이 이 시기 신분제 동요의 특징이다.
그러면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에게는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제시문은 일제 지배를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정치 활동을 하자는 자치론으로, 식민 지배 아래에서 정치적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이 가장 적절하다.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자는 구절이 핵심 단서이다. 1920년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으로 대표되는 이 주장은 일제와 타협한 타협적 민족주의로 비판받았고, 이에 맞서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 무장 투쟁: 제시문은 일본을 적대하는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일이라고 하여 무장 투쟁과 거리가 멀다.
- 농민·노동자 단결과 일제 타도: 사회주의 계열의 노선으로, 일제와의 대결을 피하려는 제시문과 맞지 않다.
- 국제 외교를 통한 독립 호소: 외교 독립론에 해당하며, 제시문은 독립이 아닌 식민지 안의 정치 결사를 주장한다.
그는 함경도 단천 출신으로 한성으로 올라와 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시위대 장교로 군인생활을 시작하였다. 강화도 진위대 대장시절에는 공금을 횡령한 강화부윤이 자신을 모함하자, 군직을 사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군인이면서도 계몽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강화읍에 보창학교를 세워 근대적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을 전후하여 무력항쟁과 친일파 대신 암살 등을 계획하였으며, 강화 진위대가 군대 해산에 항의하여 봉기하자 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하였다.
'함경도 단천', '강화 진위대', '보창학교'로 보아 '그'는 이동휘이며,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진단』을 발간한 것은 그의 활동이 아니다.
대동보국단과 잡지 『진단』은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이 중심이 되어 벌인 활동이다.
- 신민회 참여: 이동휘는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 한인사회당 결성: 이동휘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이동휘는 이상설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혼인하는 풍속을 보면, 구두로 약속이 정해지면 신부집에서 본채 뒤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 한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집 문 밖에 와서 이름을 밝히고 꿇어앉아 절하며 안에 들어가 신부와 잘 수 있도록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청하면 신부의 부모가 별채에 들어가 자도록 허락한다. …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간다.
- 삼국지 -
'서옥(婿屋)'으로 보아 이 나라는 고구려이며,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소나 말로 갚는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므로 옳지 않다.
고구려에는 신랑이 신부집 뒤에 지은 서옥에서 지내다가 자식이 장성하면 아내와 함께 돌아가는 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다.
- 주몽과 유화부인 제사: 고구려는 시조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다.
- 대가와 관리: 고구려의 왕 아래 상가·고추가 등 대가들은 각자 사자·조의·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다.
- 동맹과 국동대혈: 고구려는 10월에 제천 행사인 동맹을 열고, 국동대혈에서 함께 제사를 지냈다.
허생은 안성의 한 주막에 자리 잡고서 밤, 대추, 감, 귤 등의 과일을 모두 값을 배로 주고 사들였다. 그가 과일을 도고하자, 온 나라가 제사나 잔치를 치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과일 값은 크게 폭등하였다. 그는 이에 10배의 값으로 과일을 되팔았다. 이어서 그는 그 돈으로 곧 호미, 삼베, 명주 등을 사 가지고 제주도로 들어가 말총을 모두 사들였다. 말총은 망건의 재료였다. 얼마 되지 않아 망건 값이 10배나 올랐다. 이렇게 하여 그는 50만 냥에 이르는 큰 돈을 벌었다.
제시문은 박지원의 「허생전」으로 조선 후기 상업을 묘사하며, 보부상 보호를 위한 혜상공국은 개항 이후인 1883년에 설치되었으므로 이 시기의 사실이 아니다.
허생이 과일과 말총을 사들여 값을 올린 '도고'는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 발달 속에 나타난 독점적 도매 상업이다.
- 도고 상업 성행: 조선 후기 사상과 공인 등이 특정 상품을 사재기해 독점 판매하는 도고 상업이 성행하였다.
- 선박 운수업 발전: 경강상인 등이 선박을 이용해 곡물·소금 등을 운송하며 성장하였다.
- 장시와 사상의 성장: 전국에 장시가 늘어나 장시를 거점으로 한 사상이 크게 성장하였다.
신 부식은 아뢰옵니다. 옛날에는 여러 나라들도 각각 사관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 해동의 삼국도 지나온 세월이 장구하니, 마땅히 그 사실이 책으로 기록되어야 하므로 마침내 늙은 신에게 명하여 편집하게 하셨사오나, 아는 바가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 부식'으로 보아 이 책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며, 몽골 침략의 위기 속에 전통 문화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에서 편찬되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으로 편찬된 관찬 사서로, 몽골 침입 이전인 고려 중기에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따라 서술되었다. 몽골 침략과 원 간섭을 겪으며 자주 의식을 드러낸 사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이다.
- 현존 최고 역사서: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 기전체 구성: 본기·지·열전 등으로 나누어 서술한 기전체 사서이다.
- 신라 계승 의식: 고구려 계승 의식보다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되었다고 평가된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덧널 위에 돌을 쌓은 뒤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덮은 무덤이므로, 돌만 쌓았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덧널·돌무지·봉토의 구조라 도굴이 어려워 천마총·황남대총 등에서 많은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반면 입구와 통로가 없어 벽화는 그려지지 않았다.
- 고구려 돌무지무덤: 서울 석촌동 고분 등 백제 초기 한성 시기 무덤이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같은 양식이어서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 계통임을 보여 준다.
- 백제 벽돌무덤: 공주 무령왕릉 등 웅진 시기의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 굴식 돌방무덤: 돌로 방을 만들고 통로를 낸 굴식 돌방무덤은 고구려·백제·신라 모두에서 만들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농민의 조세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양난 이후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농경지의 황폐와 전세 제도의 문란이었다.
양난 이후 농경지 황폐와 전세 제도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였다.
양전 사업은 토지를 다시 측량해 경작지와 소유 실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전세 수취 대상 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울러 개간을 장려하고 전세를 정액화한 영정법도 시행하였다.
- 군적수포제: 군역 대신 군포를 거두는 제도로, 양난 이전 16세기에 이미 시행되었으며 토지·전세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다.
- 연분 9등법: 풍흉에 따라 전세를 9등급으로 나눈 세종 때의 공법 규정으로, 양난 이후의 대책이 아니다.
- 오가작통제: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호구를 파악하고 주민을 통제하는 제도로, 농경지 황폐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공민왕은 성균관을 순수 유교 교육 기관으로 정비·부흥시켜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개혁과 함께 이색을 중심으로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정몽주 등 신진 사대부를 등용해 개혁 세력을 키웠다.
- 만권당 설립: 원의 수도 연경에 만권당을 세워 고려와 원 학자의 교류를 이끈 것은 충선왕이다.
- 요동 정벌: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에 맞서 요동 정벌을 단행한 것은 우왕 때이다.
- 정치도감 설치: 정치도감을 두어 부원 세력의 불법 토지를 조사하는 등 개혁을 시도한 것은 충목왕 때이다.
세도정치기의 향회는 수령과 향리를 견제하기는커녕 수령이 세금 부과를 묻는 부세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으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조선 후기 수령권이 강화되면서 재지 사족의 향촌 지배력은 약해졌고, 수령과 향리가 향촌 운영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세도정치기에는 수령·향리의 수탈이 심해졌다.
- 유향소: 지방 양반들이 조직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의 비리를 감찰하며 풍속을 바로잡았다.
- 향안: 지방 사족의 명단인 향안은 임진왜란 전후 시기에 군현마다 널리 작성되어 사족 지배 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 부농층의 향회 장악: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성장한 부농층은 수령과 결탁해 기존 사족과 향전을 벌이며 향회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서구의 종두법을 처음 소개한 인물은 『마과회통』을 쓴 정약용이며, 지석영은 개항 이후 종두법을 보급한 인물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지석영은 개항 이후 일본인에게서 종두법을 익혀 실제 접종을 널리 보급하고 『우두신설』을 지었다. 따라서 지석영을 최초 소개자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 기하원본: 마테오 리치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옮긴 『기하원본』이 청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 곤여만국전도: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세계지도가 전래되어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난 보다 정밀한 지리 지식을 얻게 되었다.
- 서호수: 『해동농서』를 지어 우리 농학을 중심으로 중국 농학을 선별 수용해 농학의 체계화를 꾀하였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영주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문무왕의 정치적 자문도 맡았다. 그는 모든 우주만물이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포용하는 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해 유명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는 독특한 논리를 폈다. 즉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다.
'지엄', '부석사', '일즉다 다즉일'로 보아 '그'는 의상이며, 그의 저술은 『화엄일승법계도』이다.
의상은 당에서 화엄종을 배우고 돌아와 부석사를 세워 화엄 사상을 전파하였고, 『화엄일승법계도』에서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는 화엄의 원융 사상을 정리하였다.
- 십문화쟁론: 여러 종파의 대립을 조화시키려는 화쟁 사상을 담은 원효의 저술이다.
- 해심밀경소: 당에서 활동한 원측의 저술이다.
- 천태사교의: 고려 초 제관이 천태종의 교리를 정리한 저술이다.
미국의 무상 원조가 경제의 주요 재원이던 시기는 1950년대이므로, 1960년대 경제 상황으로는 옳지 않다.
1950년대 원조 경제에서는 밀가루·설탕·면화 등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삼백 산업이 성장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면서 1960년대 경제 개발 재원은 차관과 외자 도입으로 마련되었다.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2년부터 추진되어 기간산업과 사회 간접 자본 확충에 힘썼다.
- 베트남 특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미국의 경제·군사 지원과 건설·용역 진출이 늘어 베트남 특수를 누렸다.
- 한·일 협정: 1965년 한·일 협정이 체결되어 청구권 자금 등 경제 개발 재원을 확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