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국가직 한국사] 13년 1회차
9급 국가직 한국사 기출문제

13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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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정답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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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 자료의 (가), (나)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으며, 이를 어기면 우마로 배상하였다.
(나)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1(가) -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지냈다.
2(나) -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속이 있었다.
3(가), (나) - 왕권이 강화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4(가), (나) - 대가들이 제가 회의라는 부족장 회의를 운영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동예, (나)는 옥저이며, 민며느리제는 옥저의 혼인 풍속이므로 (나)에 대한 설명이 옳다.

(가)의 '산과 내마다 구분', '어기면 우마로 배상'은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나 소·말로 갚게 한 동예의 책화이고, (나)의 '가매장 후 뼈를 추려 가족 공동 무덤인 목곽에 안치'는 옥저의 골장제(가족 공동 무덤) 풍습이다.

  • 12월의 제천 행사 영고는 부여의 풍속이다.
  • 옥저와 동예는 왕이 없이 읍군·삼로 같은 군장이 각 부족을 다스려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 대가들이 모인 제가 회의는 고구려의 귀족 회의이다.
문제 2
조선 영조 때의 역사적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1「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체계를 정비하였다.
2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3산림(山林)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상당수 정리하였다.
4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각 붕당의 시비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 탕평책은 영조가 아니라 정조의 준론 탕평에 해당하므로 옳지 않다.

영조는 붕당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온건한 인물을 고루 등용하는 완론 탕평을 펼쳤고, 정조는 이를 넘어 의리와 명분의 시비를 분명히 가리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 「속대전」 편찬으로 법전 체계를 정비한 것은 영조 때의 일이다.
  •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균역법은 영조가 시행하였다.
  •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도 영조의 탕평 정책이다.
문제 3
밑줄 친 '여러 단체와 기관'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1907년 설립된 신민회 회원들은 1909년 말 이후 일본의 한국 병합이 목전에 있다고 보고,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에 따라 신민회 회원들은 1910년 초 이후 국외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신민회의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등은 1911년 압록강 건너 서간도로 옮겨가 삼원보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여러 단체와 기관을 설립하여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다.

1경학사
2권업회
3부민단
4신흥무관학교
정답 및 해설

신민회 인사들이 서간도 삼원보에 세운 단체·기관이 아닌 것은 연해주에서 조직된 권업회이다.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서간도', '삼원보'를 통해 신민회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임을 알 수 있다. 권업회는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조직된 단체로 서간도와는 지역이 다르다.

  • 경학사는 삼원보에서 조직된 한인 자치 단체로 서간도 기지 건설의 출발점이다.
  • 부민단은 경학사를 이어 서간도 한인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이끈 단체이다.
  • 신흥무관학교는 삼원보에 세운 신흥 강습소에서 발전한 독립군 양성 기관이다.
문제 4
(가)와 (나) 사이의 시기에 만주에서 전개된 무장 항일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경신년에 왜군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나도 가옥 9칸과 교회당, 학교가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11월 1일에는 왜군 17명, 왜경 2명, 한인 경찰 1명이 와서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죽인 뒤 …(중략)… 남은 주민들을 모아 일장 연설을 하였다.
(나) 상해의 한국 독립투사 조직에 속해 있는 한국의 한 젊은이는 비밀리에 도쿄로 건너갔다. 그는 마침 군대를 사열하기 위해 마차에 타고 있던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그는 영웅적인 행동 후에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전일본에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한국인들은 결코 그들에게 지배될 수 없다는 것을 당당히 보여 준 것이다.

1남만주에 조선 혁명군이 창설되었다.
2한국광복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3독립군이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4동북 항일 연군을 중심으로 치열한 항일 유격전이 전개되었다.
정답 및 해설

(가) 간도 참변과 (나) 이봉창 의거 사이에 있었던 사실은 남만주에서 조선 혁명군이 창설된 일이다.

(가)는 '경신년', 독립군 근거지 촌락을 불태우고 남자들을 학살한 내용으로 1920년의 간도 참변(경신참변)이다. (나)는 '상해의 독립투사 조직'(한인애국단) 소속 청년이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1932년 1월의 이봉창 의거이다. 조선 혁명군은 1929년 국민부 산하 군대로 남만주에서 창설되었다.

  •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 준비는 1945년의 일로 (나) 이후이다.
  •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1920년에 벌어져 일제가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가) 이후의 일이 아니다.
  • 동북 항일 연군은 1936년에 결성되어 (나) 이후에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문제 5
조선 전기 사림(士林)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서 산림(山林)이 존중되었다.
2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3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으로 표방하였다.
4중소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지방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 산림(山林)이 존중된 것은 붕당 정치가 전개된 조선 후기의 모습이므로, 조선 전기 사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다.

산림은 학덕을 갖추고 향촌에 머물면서 각 붕당의 사상적 지도자로서 여론을 이끈 인물로, 17세기 붕당 정치기에 그 영향력이 커졌다.

  • 사림은 향촌 자치를 내세우고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 성종 이후 중앙에 진출한 사림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공론으로 내세웠다.
  • 사림은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한 중소 지주 출신의 지방 사족이었다.
문제 6
삼국의 항쟁을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
ㄴ.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하였다.
ㄷ. 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면서 가야 연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ㄹ.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였다.

1ㄴ → ㄷ → ㄹ → ㄱ
2ㄴ → ㄹ → ㄷ → ㄱ
3ㄹ → ㄱ → ㄴ → ㄷ
4ㄹ → ㄴ → ㄱ → ㄷ
정답 및 해설

삼국의 항쟁은 ㄴ → ㄹ → ㄷ → ㄱ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ㄴ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 전사(371) → ㄹ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와 한성 함락(475) → ㄷ 신라 진흥왕의 대가야 정복(562) → ㄱ 백제 의자왕의 대야성 함락(642)이다.

대야성 함락은 7세기 중엽 의자왕 때의 일로 가장 늦고, 고국원왕 전사는 4세기 후반의 일로 가장 이르다는 점을 기준으로 잡으면 시기 순서를 쉽게 확정할 수 있다.

문제 7
조선 후기 호락(湖洛)논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18세기 중엽 노론 내부에 주기설과 주리설의 분파가 생겨 일어났다.
2호론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보는 인물성이론을 내세웠다.
3낙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4호론은 북학파의 과학 기술 존중과 이용후생 사상으로 이어졌다.
정답 및 해설

북학파의 과학 기술 존중과 이용후생 사상으로 이어진 것은 호론이 아니라 낙론이므로 옳지 않다.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본 인물성동론(낙론)은 청의 문물과 기술도 배울 수 있다는 북학 사상의 철학적 바탕이 되었고, 인물성이론(호론)은 화이론적 명분론과 연결되었다.

  • 호락논쟁은 18세기 노론 내부의 학설 분파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라는 설명은 맞다.
  • 호론(충청도 노론)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내세웠다.
  • 낙론(서울·경기 노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문제 8
연표의 (가)∼(라)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광복(가)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나)5·10 총선거(다)대한민국 정부수립(라)6·25 전쟁 발발
1(가)-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건국 강령을 제정하였다.
2(나)-북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3(다)-김구ㆍ김규식이 남북 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4(라)-국회에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정답 및 해설

국회의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의 일이므로 (라) 시기에 해당한다.

기준 사건은 광복(1945.8),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12), 5·10 총선거(1948.5),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6·25 전쟁 발발(1950.6)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 제정은 1941년으로 광복 이전이어서 (가) 시기가 아니다.
  • 북한 정부 수립은 1948년 9월로 (나)가 아니라 (라) 시기이다.
  •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은 1948년 4월로 5·10 총선거 이전인 (나) 시기이다.
문제 9
다음과 같은 역사인식에 따라서 편찬된 역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대저 옛 성인은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쳤으며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는 부명(符命)과 도록(圖錄)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남보다 다른 일이 있었다. 그래야만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연유하여 태어났다는 것을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신이(神異)로써 이 책의 앞 머리를 삼은 까닭이다.

1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였다.
2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3고구려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4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서문은 일연의 『삼국유사』이며, 이 책은 우리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고 단군 신화를 수록하였다.

'괴력난신은 말하지 않았다'는 유교적 태도를 언급하면서도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괴이하다 할 수 없다며 '신이(神異)로써 이 책의 앞 머리를 삼은' 것은 기이편을 맨 앞에 둔 『삼국유사』의 역사 인식이다.

  •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한 것은 고려 말 이후 성리학적 사관에 따른 역사서의 특징이다.
  •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한 기전체 서술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 고구려 계승 의식을 담아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한 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
문제 10
다음 정치관과 관련이 깊은 정책으로 옳은 것은?

임금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정하는 데 있다 하였으니, 바로 총재(冢宰)를 두고 한 말이다. 총재는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것이니 직책이 매우 크다. 또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음과 현명함이 있고 강함과 유약함의 차이가 있으니, 옳은 일은 아뢰고 옳지 않은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相)이라 하니, 곧 보상(輔相)한다는 뜻이다.

1육조 직계제의 시행
2사간원의 독립
3의정부 서사제의 시행
4집현전의 설치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정치관은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론이며, 이와 관련이 깊은 정책은 의정부 서사제의 시행이다.

'임금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정하는 데 있다', '총재는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이라는 단서는 국정의 실권을 재상에게 두려 한 『조선경국전』의 주장이다. 의정부 서사제는 6조의 업무를 의정부 재상들이 먼저 심의한 뒤 국왕에게 올리는 제도로 재상의 권한을 보장한다.

  • 육조 직계제는 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로 왕권 강화책이다.
  • 사간원의 독립은 태종 때 간쟁 기능을 강화한 조치로 재상 중심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 집현전 설치는 세종 때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을 위한 기관을 둔 것이다.
문제 11
밑줄 친 '왕'의 업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왕 7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 왕 19년에 금관국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와 항복하였다.

1'건원'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2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3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4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왕'은 신라 법흥왕이며, 법흥왕은 '건원'이라는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을 제정', '금관국의 왕인 김구해가 … 항복'은 법흥왕 때의 율령 반포(520)와 금관가야 병합(532)이다. 법흥왕은 독자적 연호 '건원'을 사용해 왕권을 과시하였다.

  •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정복한 것은 지증왕 때이다.
  • 유학 교육 기관인 국학은 통일 후 신문왕 때 설립되었다.
  •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진흥왕 때이다.
문제 12
다음은 같은 해에 벌어졌던 사건들이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사실로 옳은 것은?

- 박종철 사건
- 4·13 호헌 조치
- 6·10 국민 대회 개최
-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

1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3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정지시켰다.
4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고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사건들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에 맞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6·10 국민 대회가 열렸다. 정부는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였고, 같은 해 여야 합의로 개헌이 이루어졌다.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이후 신군부가 구성한 기구이다.
  • 전국 비상계엄 선포와 정치 활동 정지는 10월 유신이나 5·17 비상계엄 확대 같은 1987년 이전의 조치이다.
  •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애고 간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은 1972년의 유신 헌법이다.
문제 13
㉠∼㉣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불국사와 석굴암, 수원 화성, 창덕궁,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 조선 시대 왕릉 등이다.
또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 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 등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2㉡-청동기시대의 돌무덤이다.
3㉢-태조에서 철종 때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4㉣-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게 약탈당하였다.
정답 및 해설

㉣ 직지심체요절은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것이 아니므로 옳지 않은 설명이다.

직지심체요절은 개항 이후 프랑스 외교관이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것이며,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약탈한 것은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이다.

  • ㉠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 ㉡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돌무덤이다.
  • ㉢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 때까지의 역사를 연월일 순의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문제 14
다음과 같은 정책이 시행되었던 시대의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해동통보를 비롯한 돈 15,000관을 주조하여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은 한 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딴 은병을 만들어 통용시켰는데, 민간에서는 이를 활구(闊口)라 불렀다.

1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2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제한하였다.
3대도시에 주점, 다점 등의 관영 상점을 두었다.
4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으로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해동통보와 은병(활구)을 만든 시대는 고려이며, 이 시대에는 대도시에 주점·다점 같은 관영 상점을 두었다.

'해동통보', '우리나라 지형을 본뜬 은병(활구)'은 고려 숙종 때의 화폐 정책이다. 고려 정부는 개경 등 대도시에 서적점·약점·주점·다점 같은 관영 상점을 두어 화폐 유통을 꾀하였다.

  •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한 것은 대동법 시행 이후인 조선 후기이다.
  •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제한한 신해통공은 조선 후기 정조 때의 일이다.
  • 시장 감독 관청 동시전은 신라 지증왕 때 설치되었다.
문제 15
다음 민요에서 보이는 경제활동에 대한 조선 전기의 모습을 설명한 것으로 옳지 않은 것은?

짚신에 감발차고 패랭이 쓰고
꽁무니에 짚신 차고 이고 지고
이 장 저 장 뛰어가서
장돌뱅이들 동무들 만나 반기며
이 소식 저 소식 묻고 듣고
목소리 높여 고래고래 지르며
…(중략)…
손잡고 인사하고 돌아서네
다음 날 저 장에서 다시 보세

115세기 후반 이후 장시는 점차 확대되었다.
2보부상은 장시에서 농산물, 수공업제품 등을 판매하였다.
3정부가 조선통보를 유통시킴으로써 동전화폐 유통이 활발해졌다.
4농업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지방에서 장시가 증가하였다.
정답 및 해설

조선 전기에는 조선통보를 주조하였으나 동전 유통이 부진하였으므로, 동전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민요 속 '이 장 저 장 뛰어가서', '장돌뱅이들'은 장시를 돌아다니며 활동한 보부상의 모습이다. 조선 전기에는 쌀과 무명이 주된 교환 수단이었고, 동전이 널리 쓰인 것은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조선 후기의 일이다.

  • 장시는 15세기 후반 전라도 지방에서 등장한 뒤 점차 확대되었다.
  • 보부상은 장시를 돌며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등을 판매하였다.
  •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지방의 장시가 늘어났다.
문제 16
다음 기구에서 추진한 개혁 내용으로 옳은 것은?

총재 1명, 부총재 1명, 그리고 16명에서 20명 사이의 회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밖에 2명 정도의 서기관이 있어서 활동을 도왔고, 또 회의원 중 3명이 기초 위원으로 선정되어 의안의 작성을 책임졌다. 총재는 영의정 김홍집이 겸임하고, 부총재는 내아문독판으로 회의원인 박정양이 겸임하였다.

1은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하였다.
2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3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다.
4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과 행정권을 분리시켰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기구는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한 군국기무처이며, 이 기구는 은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하였다.

'총재는 영의정 김홍집', '회의원', '의안의 작성'은 1894년 설치된 초정부적 회의 기구 군국기무처의 구성이다. 군국기무처는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을 통해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도량형 통일, 과거제 폐지, 신분제 폐지 등을 의결하였다.

  •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은 흥선 대원군의 개혁이다.
  •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한 것은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다.
  • 재판소를 설치해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한 것은 군국기무처 폐지 후 제2차 갑오개혁 때이다.
문제 17
(가)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관리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租)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나) 여러 관리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나누어 주었다.

1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였다.
2화백회의에서 국왕을 폐위시킨 일이 있었다.
3호족이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46두품이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국왕의 조언자로 활동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 녹읍 혁파와 (나) 녹읍 부활 사이는 신라 중대이며, 이 시기에는 6두품이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국왕의 조언자로 활동하였다.

(가)는 신문왕이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조(租)를 지급한 조치(689)이고, (나)는 경덕왕이 월봉을 없애고 녹읍을 부활한 조치(757)이다. 전제 왕권이 강화된 중대에 6두품은 왕권과 결합해 정치적 조언자로 활약하였다.

  •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한 것은 법흥왕 때로 (가) 이전이다.
  • 화백회의에서 국왕을 폐위시킨 일은 진지왕 폐위로 (가) 이전의 일이다.
  • 호족이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한 것은 신라 말기로 (나) 이후이다.
문제 18
다음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입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먼저 규약문을 보여주고, 몇 달 동안 실행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헤아려 본 뒤에 가입하기를 청하게 한다. 가입을 청하는 자는 반드시 단자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적어 모임이 있을 때에 진술하고, 사람을 시켜 약정(約正)에게 바치면 약정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좋다고 한 다음에야 글로 답하고, 다음 모임에 참여하게 한다.
-『율곡전서』중에서 -

1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향촌의 자치 기능을 맡았다.
2전통적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였다.
3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고, 상두꾼도 이 조직에서 유래하였다.
4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조직은 향약이며, 상두꾼이 유래한 조직은 향약이 아니라 향도이므로 옳지 않다.

'규약문', '약정(約正)', 『율곡전서』를 통해 이이가 마련한 향약의 가입 절차임을 알 수 있다. 상여를 메는 상두꾼은 상장례를 함께 치르던 농민 공동체 조직인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 향약은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자치 기능을 맡았다.
  • 향약은 전통적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 중심의 유교 윤리를 가미하였다.
  • 향약은 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수탈하는 배경이 되는 부작용도 있었다.
문제 19
밑줄 친 '평량'과 '평량의 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골라 바르게 짝지은 것은?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의 사노비로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부유하게 되었다. 평량의 처는 소감 왕원지의 사노비인데, 왕원지는 집안이 가난하여 가족을 데리고 와서 의탁하고 있었다. 평량이 후하게 위로하여 서울로 돌아가기를 권하고는 길에서 몰래 처남과 함께 왕원지 부부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그 주인이 없어졌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고려사』중에서 -

ㄱ. 평량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ㄴ. 평량은 주인집에 살면서 잡일을 돌보았다.
ㄷ. 평량의 처는 국가에 일정량의 신공을 바쳤다.
ㄹ. 평량의 처는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1ㄱ, ㄴ
2ㄱ, ㄹ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평량은 주인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 평량의 처는 사노비이므로 옳은 것은 ㄱ, ㄹ이다.

평량은 김영관의 사노비이면서 양주에 따로 살며 농사로 부유해졌으므로 외거노비로서 자기 토지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ㄱ). 평량의 처는 왕원지의 사노비로,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 되었다(ㄹ).

  • ㄴ: 주인집에 살며 잡일을 돌본 것은 솔거노비의 모습이어서 따로 살던 평량에게 맞지 않는다.
  • ㄷ: 국가에 신공을 바친 것은 공노비이며, 평량의 처는 왕원지의 사노비이다.
문제 20
다음의 경제 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제1조 : 구 백동화 교환에 관한 사무는 금고로 처리케 하여 탁지부 대신이 이를 감독함
제3조 : 구 백동화의 품위(品位)·양목(量目)·인상(印象)·형체(形體)가 정화(正貨)에 준할 수 있는 것은 매 1개에 대하여 금 2전 5푼의 가격으로 새 화폐로 교환함이 가함

1한국 상인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2일본제일은행이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3액면가대로 바꾸어 주는 화폐교환 방식을 따랐다.
4구 백동화 남발에 따른 물가 상승이 이 조치에 영향을 끼쳤다.
정답 및 해설

화폐 정리 사업은 구 백동화를 품질에 따라 차등 교환하였으므로, 액면가대로 바꾸어 주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구 백동화 교환', '탁지부 대신', '정화에 준할 수 있는 것'은 1905년 재정 고문 메가타가 주도한 화폐 정리 사업이다. 백동화를 품위에 따라 갑·을·병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교환하고 질이 나쁜 것은 교환해 주지 않았다.

  • 교환 기준이 까다로워 백동화를 많이 가진 한국 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 교환 사무를 맡은 일본 제일은행이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하게 되었다.
  • 구 백동화 남발로 인한 물가 상승이 화폐 정리의 명분이 되었다.
9급 국가직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13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다음 자료의 (가), (나)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으며, 이를 어기면 우마로 배상하였다.
(나)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1(가) -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지냈다.
2(나) -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속이 있었다.
3(가), (나) - 왕권이 강화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4(가), (나) - 대가들이 제가 회의라는 부족장 회의를 운영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는 동예, (나)는 옥저이며, 민며느리제는 옥저의 혼인 풍속이므로 (나)에 대한 설명이 옳다.

(가)의 '산과 내마다 구분', '어기면 우마로 배상'은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나 소·말로 갚게 한 동예의 책화이고, (나)의 '가매장 후 뼈를 추려 가족 공동 무덤인 목곽에 안치'는 옥저의 골장제(가족 공동 무덤) 풍습이다.

  • 12월의 제천 행사 영고는 부여의 풍속이다.
  • 옥저와 동예는 왕이 없이 읍군·삼로 같은 군장이 각 부족을 다스려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 대가들이 모인 제가 회의는 고구려의 귀족 회의이다.
문제 2
조선 영조 때의 역사적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1「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체계를 정비하였다.
2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3산림(山林)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상당수 정리하였다.
4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각 붕당의 시비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 탕평책은 영조가 아니라 정조의 준론 탕평에 해당하므로 옳지 않다.

영조는 붕당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온건한 인물을 고루 등용하는 완론 탕평을 펼쳤고, 정조는 이를 넘어 의리와 명분의 시비를 분명히 가리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 「속대전」 편찬으로 법전 체계를 정비한 것은 영조 때의 일이다.
  •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균역법은 영조가 시행하였다.
  •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도 영조의 탕평 정책이다.
문제 3
밑줄 친 '여러 단체와 기관'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1907년 설립된 신민회 회원들은 1909년 말 이후 일본의 한국 병합이 목전에 있다고 보고,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에 따라 신민회 회원들은 1910년 초 이후 국외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신민회의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등은 1911년 압록강 건너 서간도로 옮겨가 삼원보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여러 단체와 기관을 설립하여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다.

1경학사
2권업회
3부민단
4신흥무관학교
정답 및 해설

신민회 인사들이 서간도 삼원보에 세운 단체·기관이 아닌 것은 연해주에서 조직된 권업회이다.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서간도', '삼원보'를 통해 신민회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임을 알 수 있다. 권업회는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조직된 단체로 서간도와는 지역이 다르다.

  • 경학사는 삼원보에서 조직된 한인 자치 단체로 서간도 기지 건설의 출발점이다.
  • 부민단은 경학사를 이어 서간도 한인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이끈 단체이다.
  • 신흥무관학교는 삼원보에 세운 신흥 강습소에서 발전한 독립군 양성 기관이다.
문제 4
(가)와 (나) 사이의 시기에 만주에서 전개된 무장 항일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경신년에 왜군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나도 가옥 9칸과 교회당, 학교가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11월 1일에는 왜군 17명, 왜경 2명, 한인 경찰 1명이 와서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죽인 뒤 …(중략)… 남은 주민들을 모아 일장 연설을 하였다.
(나) 상해의 한국 독립투사 조직에 속해 있는 한국의 한 젊은이는 비밀리에 도쿄로 건너갔다. 그는 마침 군대를 사열하기 위해 마차에 타고 있던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그는 영웅적인 행동 후에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전일본에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한국인들은 결코 그들에게 지배될 수 없다는 것을 당당히 보여 준 것이다.

1남만주에 조선 혁명군이 창설되었다.
2한국광복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3독립군이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4동북 항일 연군을 중심으로 치열한 항일 유격전이 전개되었다.
정답 및 해설

(가) 간도 참변과 (나) 이봉창 의거 사이에 있었던 사실은 남만주에서 조선 혁명군이 창설된 일이다.

(가)는 '경신년', 독립군 근거지 촌락을 불태우고 남자들을 학살한 내용으로 1920년의 간도 참변(경신참변)이다. (나)는 '상해의 독립투사 조직'(한인애국단) 소속 청년이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1932년 1월의 이봉창 의거이다. 조선 혁명군은 1929년 국민부 산하 군대로 남만주에서 창설되었다.

  •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 준비는 1945년의 일로 (나) 이후이다.
  •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1920년에 벌어져 일제가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가) 이후의 일이 아니다.
  • 동북 항일 연군은 1936년에 결성되어 (나) 이후에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문제 5
조선 전기 사림(士林)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서 산림(山林)이 존중되었다.
2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3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으로 표방하였다.
4중소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지방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정답 및 해설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 산림(山林)이 존중된 것은 붕당 정치가 전개된 조선 후기의 모습이므로, 조선 전기 사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다.

산림은 학덕을 갖추고 향촌에 머물면서 각 붕당의 사상적 지도자로서 여론을 이끈 인물로, 17세기 붕당 정치기에 그 영향력이 커졌다.

  • 사림은 향촌 자치를 내세우고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 성종 이후 중앙에 진출한 사림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공론으로 내세웠다.
  • 사림은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한 중소 지주 출신의 지방 사족이었다.
문제 6
삼국의 항쟁을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
ㄴ.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하였다.
ㄷ. 신라가 대가야를 정복하면서 가야 연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ㄹ.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였다.

1ㄴ → ㄷ → ㄹ → ㄱ
2ㄴ → ㄹ → ㄷ → ㄱ
3ㄹ → ㄱ → ㄴ → ㄷ
4ㄹ → ㄴ → ㄱ → ㄷ
정답 및 해설

삼국의 항쟁은 ㄴ → ㄹ → ㄷ → ㄱ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ㄴ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과 고국원왕 전사(371) → ㄹ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와 한성 함락(475) → ㄷ 신라 진흥왕의 대가야 정복(562) → ㄱ 백제 의자왕의 대야성 함락(642)이다.

대야성 함락은 7세기 중엽 의자왕 때의 일로 가장 늦고, 고국원왕 전사는 4세기 후반의 일로 가장 이르다는 점을 기준으로 잡으면 시기 순서를 쉽게 확정할 수 있다.

문제 7
조선 후기 호락(湖洛)논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18세기 중엽 노론 내부에 주기설과 주리설의 분파가 생겨 일어났다.
2호론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보는 인물성이론을 내세웠다.
3낙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4호론은 북학파의 과학 기술 존중과 이용후생 사상으로 이어졌다.
정답 및 해설

북학파의 과학 기술 존중과 이용후생 사상으로 이어진 것은 호론이 아니라 낙론이므로 옳지 않다.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본 인물성동론(낙론)은 청의 문물과 기술도 배울 수 있다는 북학 사상의 철학적 바탕이 되었고, 인물성이론(호론)은 화이론적 명분론과 연결되었다.

  • 호락논쟁은 18세기 노론 내부의 학설 분파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라는 설명은 맞다.
  • 호론(충청도 노론)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내세웠다.
  • 낙론(서울·경기 노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문제 8
연표의 (가)∼(라)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광복(가)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나)5·10 총선거(다)대한민국 정부수립(라)6·25 전쟁 발발
1(가)-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건국 강령을 제정하였다.
2(나)-북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3(다)-김구ㆍ김규식이 남북 협상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4(라)-국회에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정답 및 해설

국회의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의 일이므로 (라) 시기에 해당한다.

기준 사건은 광복(1945.8),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12), 5·10 총선거(1948.5),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6·25 전쟁 발발(1950.6)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 제정은 1941년으로 광복 이전이어서 (가) 시기가 아니다.
  • 북한 정부 수립은 1948년 9월로 (나)가 아니라 (라) 시기이다.
  •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은 1948년 4월로 5·10 총선거 이전인 (나) 시기이다.
문제 9
다음과 같은 역사인식에 따라서 편찬된 역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대저 옛 성인은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쳤으며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는 부명(符命)과 도록(圖錄)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남보다 다른 일이 있었다. 그래야만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연유하여 태어났다는 것을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신이(神異)로써 이 책의 앞 머리를 삼은 까닭이다.

1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였다.
2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3고구려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4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서문은 일연의 『삼국유사』이며, 이 책은 우리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고 단군 신화를 수록하였다.

'괴력난신은 말하지 않았다'는 유교적 태도를 언급하면서도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괴이하다 할 수 없다며 '신이(神異)로써 이 책의 앞 머리를 삼은' 것은 기이편을 맨 앞에 둔 『삼국유사』의 역사 인식이다.

  •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한 것은 고려 말 이후 성리학적 사관에 따른 역사서의 특징이다.
  •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한 기전체 서술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 고구려 계승 의식을 담아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한 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
문제 10
다음 정치관과 관련이 깊은 정책으로 옳은 것은?

임금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정하는 데 있다 하였으니, 바로 총재(冢宰)를 두고 한 말이다. 총재는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것이니 직책이 매우 크다. 또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음과 현명함이 있고 강함과 유약함의 차이가 있으니, 옳은 일은 아뢰고 옳지 않은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相)이라 하니, 곧 보상(輔相)한다는 뜻이다.

1육조 직계제의 시행
2사간원의 독립
3의정부 서사제의 시행
4집현전의 설치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정치관은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론이며, 이와 관련이 깊은 정책은 의정부 서사제의 시행이다.

'임금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정하는 데 있다', '총재는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이라는 단서는 국정의 실권을 재상에게 두려 한 『조선경국전』의 주장이다. 의정부 서사제는 6조의 업무를 의정부 재상들이 먼저 심의한 뒤 국왕에게 올리는 제도로 재상의 권한을 보장한다.

  • 육조 직계제는 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로 왕권 강화책이다.
  • 사간원의 독립은 태종 때 간쟁 기능을 강화한 조치로 재상 중심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 집현전 설치는 세종 때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을 위한 기관을 둔 것이다.
문제 11
밑줄 친 '왕'의 업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왕 7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 왕 19년에 금관국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와 항복하였다.

1'건원'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2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3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4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정답 및 해설

밑줄 친 '왕'은 신라 법흥왕이며, 법흥왕은 '건원'이라는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을 제정', '금관국의 왕인 김구해가 … 항복'은 법흥왕 때의 율령 반포(520)와 금관가야 병합(532)이다. 법흥왕은 독자적 연호 '건원'을 사용해 왕권을 과시하였다.

  •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정복한 것은 지증왕 때이다.
  • 유학 교육 기관인 국학은 통일 후 신문왕 때 설립되었다.
  •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진흥왕 때이다.
문제 12
다음은 같은 해에 벌어졌던 사건들이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사실로 옳은 것은?

- 박종철 사건
- 4·13 호헌 조치
- 6·10 국민 대회 개최
-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

1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3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정지시켰다.
4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고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사건들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에 맞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6·10 국민 대회가 열렸다. 정부는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였고, 같은 해 여야 합의로 개헌이 이루어졌다.

  •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이후 신군부가 구성한 기구이다.
  • 전국 비상계엄 선포와 정치 활동 정지는 10월 유신이나 5·17 비상계엄 확대 같은 1987년 이전의 조치이다.
  •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애고 간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은 1972년의 유신 헌법이다.
문제 13
㉠∼㉣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불국사와 석굴암, 수원 화성, 창덕궁,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 조선 시대 왕릉 등이다.
또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 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 등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2㉡-청동기시대의 돌무덤이다.
3㉢-태조에서 철종 때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4㉣-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게 약탈당하였다.
정답 및 해설

㉣ 직지심체요절은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것이 아니므로 옳지 않은 설명이다.

직지심체요절은 개항 이후 프랑스 외교관이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것이며,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약탈한 것은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이다.

  • ㉠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 ㉡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돌무덤이다.
  • ㉢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 때까지의 역사를 연월일 순의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문제 14
다음과 같은 정책이 시행되었던 시대의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해동통보를 비롯한 돈 15,000관을 주조하여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은 한 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딴 은병을 만들어 통용시켰는데, 민간에서는 이를 활구(闊口)라 불렀다.

1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2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제한하였다.
3대도시에 주점, 다점 등의 관영 상점을 두었다.
4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으로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해동통보와 은병(활구)을 만든 시대는 고려이며, 이 시대에는 대도시에 주점·다점 같은 관영 상점을 두었다.

'해동통보', '우리나라 지형을 본뜬 은병(활구)'은 고려 숙종 때의 화폐 정책이다. 고려 정부는 개경 등 대도시에 서적점·약점·주점·다점 같은 관영 상점을 두어 화폐 유통을 꾀하였다.

  •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한 것은 대동법 시행 이후인 조선 후기이다.
  •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제한한 신해통공은 조선 후기 정조 때의 일이다.
  • 시장 감독 관청 동시전은 신라 지증왕 때 설치되었다.
문제 15
다음 민요에서 보이는 경제활동에 대한 조선 전기의 모습을 설명한 것으로 옳지 않은 것은?

짚신에 감발차고 패랭이 쓰고
꽁무니에 짚신 차고 이고 지고
이 장 저 장 뛰어가서
장돌뱅이들 동무들 만나 반기며
이 소식 저 소식 묻고 듣고
목소리 높여 고래고래 지르며
…(중략)…
손잡고 인사하고 돌아서네
다음 날 저 장에서 다시 보세

115세기 후반 이후 장시는 점차 확대되었다.
2보부상은 장시에서 농산물, 수공업제품 등을 판매하였다.
3정부가 조선통보를 유통시킴으로써 동전화폐 유통이 활발해졌다.
4농업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지방에서 장시가 증가하였다.
정답 및 해설

조선 전기에는 조선통보를 주조하였으나 동전 유통이 부진하였으므로, 동전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민요 속 '이 장 저 장 뛰어가서', '장돌뱅이들'은 장시를 돌아다니며 활동한 보부상의 모습이다. 조선 전기에는 쌀과 무명이 주된 교환 수단이었고, 동전이 널리 쓰인 것은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조선 후기의 일이다.

  • 장시는 15세기 후반 전라도 지방에서 등장한 뒤 점차 확대되었다.
  • 보부상은 장시를 돌며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등을 판매하였다.
  •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지방의 장시가 늘어났다.
문제 16
다음 기구에서 추진한 개혁 내용으로 옳은 것은?

총재 1명, 부총재 1명, 그리고 16명에서 20명 사이의 회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밖에 2명 정도의 서기관이 있어서 활동을 도왔고, 또 회의원 중 3명이 기초 위원으로 선정되어 의안의 작성을 책임졌다. 총재는 영의정 김홍집이 겸임하고, 부총재는 내아문독판으로 회의원인 박정양이 겸임하였다.

1은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하였다.
2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3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다.
4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과 행정권을 분리시켰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기구는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한 군국기무처이며, 이 기구는 은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하였다.

'총재는 영의정 김홍집', '회의원', '의안의 작성'은 1894년 설치된 초정부적 회의 기구 군국기무처의 구성이다. 군국기무처는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을 통해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도량형 통일, 과거제 폐지, 신분제 폐지 등을 의결하였다.

  •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은 흥선 대원군의 개혁이다.
  •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한 것은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다.
  • 재판소를 설치해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한 것은 군국기무처 폐지 후 제2차 갑오개혁 때이다.
문제 17
(가)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관리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租)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나) 여러 관리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나누어 주었다.

1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였다.
2화백회의에서 국왕을 폐위시킨 일이 있었다.
3호족이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46두품이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국왕의 조언자로 활동하였다.
정답 및 해설

(가) 녹읍 혁파와 (나) 녹읍 부활 사이는 신라 중대이며, 이 시기에는 6두품이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국왕의 조언자로 활동하였다.

(가)는 신문왕이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조(租)를 지급한 조치(689)이고, (나)는 경덕왕이 월봉을 없애고 녹읍을 부활한 조치(757)이다. 전제 왕권이 강화된 중대에 6두품은 왕권과 결합해 정치적 조언자로 활약하였다.

  •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한 것은 법흥왕 때로 (가) 이전이다.
  • 화백회의에서 국왕을 폐위시킨 일은 진지왕 폐위로 (가) 이전의 일이다.
  • 호족이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한 것은 신라 말기로 (나) 이후이다.
문제 18
다음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입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먼저 규약문을 보여주고, 몇 달 동안 실행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헤아려 본 뒤에 가입하기를 청하게 한다. 가입을 청하는 자는 반드시 단자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적어 모임이 있을 때에 진술하고, 사람을 시켜 약정(約正)에게 바치면 약정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좋다고 한 다음에야 글로 답하고, 다음 모임에 참여하게 한다.
-『율곡전서』중에서 -

1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향촌의 자치 기능을 맡았다.
2전통적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였다.
3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고, 상두꾼도 이 조직에서 유래하였다.
4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정답 및 해설

제시된 조직은 향약이며, 상두꾼이 유래한 조직은 향약이 아니라 향도이므로 옳지 않다.

'규약문', '약정(約正)', 『율곡전서』를 통해 이이가 마련한 향약의 가입 절차임을 알 수 있다. 상여를 메는 상두꾼은 상장례를 함께 치르던 농민 공동체 조직인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 향약은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자치 기능을 맡았다.
  • 향약은 전통적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 중심의 유교 윤리를 가미하였다.
  • 향약은 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수탈하는 배경이 되는 부작용도 있었다.
문제 19
밑줄 친 '평량'과 '평량의 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골라 바르게 짝지은 것은?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의 사노비로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 부유하게 되었다. 평량의 처는 소감 왕원지의 사노비인데, 왕원지는 집안이 가난하여 가족을 데리고 와서 의탁하고 있었다. 평량이 후하게 위로하여 서울로 돌아가기를 권하고는 길에서 몰래 처남과 함께 왕원지 부부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그 주인이 없어졌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고려사』중에서 -

ㄱ. 평량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ㄴ. 평량은 주인집에 살면서 잡일을 돌보았다.
ㄷ. 평량의 처는 국가에 일정량의 신공을 바쳤다.
ㄹ. 평량의 처는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1ㄱ, ㄴ
2ㄱ, ㄹ
3ㄴ, ㄷ
4ㄷ, ㄹ
정답 및 해설

평량은 주인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 평량의 처는 사노비이므로 옳은 것은 ㄱ, ㄹ이다.

평량은 김영관의 사노비이면서 양주에 따로 살며 농사로 부유해졌으므로 외거노비로서 자기 토지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ㄱ). 평량의 처는 왕원지의 사노비로,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 되었다(ㄹ).

  • ㄴ: 주인집에 살며 잡일을 돌본 것은 솔거노비의 모습이어서 따로 살던 평량에게 맞지 않는다.
  • ㄷ: 국가에 신공을 바친 것은 공노비이며, 평량의 처는 왕원지의 사노비이다.
문제 20
다음의 경제 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제1조 : 구 백동화 교환에 관한 사무는 금고로 처리케 하여 탁지부 대신이 이를 감독함
제3조 : 구 백동화의 품위(品位)·양목(量目)·인상(印象)·형체(形體)가 정화(正貨)에 준할 수 있는 것은 매 1개에 대하여 금 2전 5푼의 가격으로 새 화폐로 교환함이 가함

1한국 상인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2일본제일은행이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3액면가대로 바꾸어 주는 화폐교환 방식을 따랐다.
4구 백동화 남발에 따른 물가 상승이 이 조치에 영향을 끼쳤다.
정답 및 해설

화폐 정리 사업은 구 백동화를 품질에 따라 차등 교환하였으므로, 액면가대로 바꾸어 주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구 백동화 교환', '탁지부 대신', '정화에 준할 수 있는 것'은 1905년 재정 고문 메가타가 주도한 화폐 정리 사업이다. 백동화를 품위에 따라 갑·을·병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교환하고 질이 나쁜 것은 교환해 주지 않았다.

  • 교환 기준이 까다로워 백동화를 많이 가진 한국 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 교환 사무를 맡은 일본 제일은행이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하게 되었다.
  • 구 백동화 남발로 인한 물가 상승이 화폐 정리의 명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