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 고구려가 신라의 왕을 호칭할 때 ‘동이 매금(東夷 寐錦)’이라고 부르고 있다.
- 고구려가 신라의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왕을 ‘동이 매금’이라 부르고 의복을 하사한 기록이 담긴 금석문은 중원고구려비(충주 고구려비)이다.
‘동이 매금’이라는 호칭과 의복 하사 의식은 고구려가 신라를 아래로 보는 천하관을 드러내며,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한 사실도 확인된다. 장수왕 대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주는 비석이다.
- 광개토왕비: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과 신라 구원 출병을 전하지만 ‘동이 매금’ 호칭과 의복 하사 기록은 없다.
- 집안고구려비: 수묘인(무덤 관리인) 관련 규정을 담은 고구려 비석이다.
- 영일냉수리비: 신라의 재산 분쟁 판결을 기록한 신라 비석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心性)을 도야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상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곧 불성(佛性)임을 알면 그것이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는 견성오도(見性悟道)에 있었다.
‘불립문자’, ‘견성오도’를 내세운 선종은 신라 하대 지방에서 새로 일어난 호족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복잡한 교리 대신 개인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의 주장은 중앙의 권위에서 벗어나려던 호족의 성향과 맞았고, 9산 선문이 호족의 후원 아래 지방에 세워졌다.
- 전제왕권 강화의 이념: 교리 체계를 갖춘 교종(화엄종)이 신라 중대에 한 역할이다.
- 왕실이 포섭에 무관심: 신라 왕실도 선종 승려를 초빙하는 등 선종을 포섭하려 하였다.
- 인도 유학 승려에 의한 전파: 선종은 주로 당에 유학한 승려들이 들여왔다.
중국은 서양과 180도 정도 차이가 난다. 중국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고 서양을 변두리로 삼으며, 서양인은 서양을 중심으로 삼고 중국을 변두리로 삼는다. 그러나 실제는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은 땅에 따라서 모두 그러한 것이니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한 이 주장은 홍대용의 것이며, 그는 「임하경륜」에서 성인 남자에게 2결의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하였다.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이라는 논리는 「의산문답」에 담긴 지전설·무한우주론과 함께 화이론 극복의 근거가 되었다.
- 「동국지리지」: 한백겸의 저술로,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 「동사」: 이종휘의 저술이다.
- 「동국지도」: 정상기가 백리척을 써서 만든 지도이다.
한국광복군이 조선의용군과 연합하여 선전 포고를 한 일은 없다.
대일 선전 포고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자적으로 발표하였고,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일부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거느린 별개의 부대이다.
-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선임: 창설 당시 지휘부 구성으로 옳다.
- 인도·버마(미얀마) 전선 참전: 영국군의 요청으로 일부 병력을 파견해 옳다.
-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협력한 국내 진공 준비: 국내 정진군을 편성해 훈련하였으므로 옳다.
ㄱ.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ㄴ. 송진우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하였다.
ㄷ. 안재홍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신민족주의를 내세워 평등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ㄱ은 조선인민당, ㄴ은 한국민주당, ㄷ은 국민당이다.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이끌며 좌우합작을 추진했고, 송진우·김성수 등의 한국민주당은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임시정부 지지를 내세웠다. 안재홍은 국민당을 결성해 신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 조선신민당: 김두봉 등 연안파가 중심이 된 정당으로 여운형과 무관하다.
- 한국독립당: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의 정당으로 안재홍의 국민당과 다르다.
- 민족혁명당: 김원봉 등이 중국 관내에서 결성한 정당으로 송진우와 관계없다.
1960년대 전반 남한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북한의 웅기 굴포리 유적이 발굴되면서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없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이 있었는데, 두 유적의 조사로 이를 극복하게 되었다.
- 제주 빌레못·상원 검은모루 유적: 두 유적 모두 1960년대 전반보다 뒤에 조사되었다.
- 단양 상시리·덕천 승리산 유적: 1970년대 이후 조사된 유적이다.
- 연천 전곡리·평양 만달리 유적: 1970년대 후반 이후 조사된 유적으로, 전곡리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로 유명하다.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신문왕 9년(689)에 이것을 폐지하였다. 이를 대신하여 조(租)의 수취만을 허락하는 관료전이 주어졌고, 한편 일정한 양의 곡식이 세조(歲租)로서 또한 주어졌다. 그러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다시 이것이 부활되는 변화과정을 겪었다.
신문왕 때 폐지되고 경덕왕 때 부활한 ‘이것’은 녹읍으로, 수급자가 조세뿐 아니라 그 지역 주민의 노동력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녹읍 대신 조의 수취만 허락하는 관료전이 지급된 것은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였고,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한 것은 귀족 세력이 다시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 녹읍 폐지 후 ‘왕토’ 사상 등장: 왕토 사상은 녹읍 폐지로 새로 나온 것이 아니다.
- 육두품에게 특별 지급: 녹읍은 관료 귀족에게 지급된 것으로, 육두품 공신에 대한 특별 지급이 아니다.
- 백정이 공동 경작: 백정이 일반 농민을 뜻한 것은 고려 시대이며 녹읍의 성격과 무관하다.
그 풍속에 혼인을 할 때 구두로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집에는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만드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고 한다. 저녁에 사위가 여자의 집에 이르러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꿇어 앉아 절하면서 여자와 동숙하게 해줄 것을 애걸한다. 이렇게 두세 차례 하면 여자의 부모가 듣고는 소옥에 나아가 자게 한다. 그리고 옆에는 전백(錢帛)을 놓아둔다.
-『삼국지』「동이전」-
서옥제 풍속의 나라는 고구려이며,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은 신라 신문왕의 일이므로 고구려 사회 모습으로 옳지 않다.
‘서옥(婿屋)’에서 사위가 지내다가 자식이 자란 뒤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는 혼인 풍속은 「동이전」 고구려조에 전한다.
- 고국천왕 사후 왕비 우씨와 산상왕의 결합: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는 고구려 취수혼의 사례이다.
- 연나부 명림씨 출신 왕비 관례: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잇고 연나부(절노부)에서 왕비를 맞이하던 고구려의 관례이다.
- 관나부인 사건: 고구려 중천왕 때 관나부인이 왕비를 모함하다 처형된 일이다.
고려의 형률은 당률을 참작해 쓰면서 필요에 따라 고려의 실정에 맞는 율문을 따로 만들었다.
관습법도 함께 적용되었으며, 형벌은 태·장·도·유·사의 5형 체계였다.
- 행정과 사법의 분리·독립: 지방관이 사법권을 함께 행사하는 등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았다.
- 배상제 우위: 고려는 실제 형벌을 가하는 실형주의가 중심이었다.
- 태형·장형·도형·유형의 4형 체계: 사형을 포함한 5형 체계였으므로 틀리다.
고려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으므로, 양반으로 상승할 길이 막혀 있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특히 상층 향리인 호장·부호장 층은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이었고, 그 자제들이 과거로 중앙 관료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중류층에는 남반·서리·향리·하급 장교 등이 속하였다.
- 남반: 궁중의 잡일을 맡는 내료직으로 옳다.
- 하급 장교: 군반 씨족 등 하급 장교도 중간 계층으로 분류되어 옳다.
- 서리: 중앙 관청에서 기록·문부 관리 등 실무를 담당하여 옳다.
국왕은 행차 때면 길에 나온 백성들을 불러 직접 의견을 들었다. 또한 척신 세력을 제거하여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당색을 가리지 않고 어진 이들을 모아 학문을 장려하였다. 침전에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하나의 달빛이 땅 위의 모든 강물에 비치니 강물은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탕탕평평실’ 편액과 “태극은 바로 나다”라는 말로 보아 국왕은 정조이며, 그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을 시행하였다.
정조는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하며 초월적 군주를 자처했고, 행차 때 백성의 상언·격쟁을 받아 여론을 들었다.
- 금위영 설치: 숙종 때 5군영 체제가 완성된 일이다.
- 북벌 추진: 효종 때의 일이다.
- 신문고 부활: 영조 때의 일이다.
( )이 원나라의 제도를 따라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고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다. 이연종이 간하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왕이 사람을 시켜 물었다. …(중략)… 답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 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고려사』-
이연종의 간언을 받아들여 변발과 호복을 버린 왕은 공민왕으로, 그는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공민왕은 몽골풍을 없애고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했으며,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되찾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
- 장례원 설치: 노비 문제를 맡은 장례원은 조선의 관청이다. 공민왕은 전민변정도감을 두었다.
- 「동국병감」 간행: 조선 문종 때 편찬된 병서이다.
- 과전법 시행: 공양왕 때 이성계 등 신진 세력이 주도하였다.

세 그래프 모두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 사이에 인구가 크게 늘었으므로, 삼국이 농업 기술 발달과 경지 확대로 인구가 증가했다는 설명이 옳다.
조선은 1648년 무렵 200만 명이 안 되던 등록 인구가 1717년 무렵 700만 명에 가까워졌고, 일본은 1600년부터 1700년대 초까지 꾸준히 늘었으며, 중국도 1650년 1.3억에서 1750년 2.15억으로 늘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모내기법 확산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다.
-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급격한 증가: 1756년 이후 조선의 인구는 완만히 늘다가 1806년 이후 오히려 줄었다.
- 명대 초기 1억 4천만 명, 청대 초기 3억 돌파: 그래프에서 1400년 무렵은 0.75억, 1650년 무렵은 1.3억이다.
- 17세기 이후 일본 인구 정체: 일본 인구는 17세기에 크게 늘었고, 정체는 18세기 이후에 나타난다.
『농상집요』는 중국 화북 지방의 농사 경험을 정리한 것으로서 기후와 토질이 다른 조선에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농사 경험이 풍부한 각 도의 농민들에게 물어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농법을 소개한 이 농서가 편찬되었다.
‘이 농서’는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이며, 같은 시기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농사직설」은 각 도 농민의 경험을 모아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한 최초의 농서이고,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세종 대의 그림이다.
- 조계종 성립: 고려 후기 지눌의 수선사 결사와 관련된 일이다.
-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림: 17세기 후반 숙종 무렵의 일이다.
- 진경산수화·풍속화 유행: 18세기 조선 후기의 문화이다.
-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덕에 귀의하여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강화로 도읍을 옮긴 지 40년에 가깝지만, 오랑캐의 풍습을 미워하여 진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려첩장(高麗牒狀)』-
진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밝힌 문서를 보낸 조직은 삼별초이며, 삼별초는 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든 야별초에서 비롯되었다.
야별초가 좌별초·우별초로 나뉘고 몽골에서 돌아온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가 되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로 옮겨 항쟁하며 일본에 이 문서를 보냈다.
- 최충헌이 신변 보호를 위해 조직: 사병 집단인 도방에 대한 설명이다.
- 거란 침입 대비 조직: 고려 정종 때 편성된 광군에 대한 설명이다.
- 쌍성총관부 탈환 주도: 공민왕 때의 일로 삼별초와 관계없다.
보잘 것 없는 나, 소자가 어린 나이로 어렵고 큰 유업을 계승하여 지금 1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덕이 부족하여 위로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민심에 답하지 못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잊지 못하고 근심하며 두렵게 여기면서 혹시라도 선대왕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유업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지난번 가산(嘉山)의 토적(土賊)이 변란을 일으켜 청천강 이북의 수 많은 생령이 도탄에 빠지고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나의 죄이다.
-『비변사등록』-
어린 나이에 즉위해 ‘가산의 토적’의 변란을 겪은 국왕은 순조이며, 순조 때 공노비 6만 6천여 명이 양인으로 해방되었다.
‘가산의 토적’은 평안도 가산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가리킨다. 공노비 해방은 순조 즉위 초인 1801년의 일이다.
- 최제우의 동학 창도: 철종 때의 일이다.
- 제너럴 셔먼 호 격침: 고종 때인 1866년의 일이다.
- 삼정이정청 설치: 임술 농민 봉기 직후 철종 때의 일이다.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된 것은 기해사옥이 아니라 신유사옥(1801) 때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근해 어류를 조사해 「자산어보」를 남겼다. 기해사옥(1839)은 헌종 때의 박해로 시기가 다르다.
- 안정복의 「천학문답」: 성리학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한 저술로 옳다.
- 1791년 윤지충·권상연 처형: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거부한 진산 사건(신해박해)으로 옳다.
-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사옥 때 군대 동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옳다.
18세기 노론 내부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호론(인물성이론)과 같다는 낙론(인물성동론) 사이에 호락논쟁이 벌어졌다.
호론은 충청 지역 학자들이, 낙론은 서울·경기 지역 학자들이 중심이었다.
- 정도전: 불교를 비판한 성리학자이며, 「조선경국전」에서 통치 이념의 바탕으로 중시한 것은 「주례」이다.
- 통치 체제 정비와 수취제도 개혁 주장: 이황이 아니라 이이의 주장이다.
- 유형원·이익의 사상 계승과 토지제도 개혁론: 김정희가 아니라 정약용에 대한 설명이다.
만세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는 신규식이 아니라 김규식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만세시위’와 ‘화성 제암리’ 학살로 보아 이 사건은 3·1 운동이다. 김규식은 3·1 운동 이전 신한청년당이 파견하였고, 이후 임시정부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 문화통치로의 전환: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 독립운동의 분기점이 된 대규모 만세운동: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 약소 민족 독립운동에 자극: 중국의 5·4 운동 등에 영향을 주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 허정 과도 정부가 출범하고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 헌법에 따라 장면 내각이 성립하였다.
- 5·10 총선거와 제헌의회 구성: 1948년의 일로 4·19 혁명과 관계없다.
- 농지개혁 실시: 이승만 정부 초기에 시행되었다.
- 통일 논의 부재: 혁명 이후 중립화 통일론, 남북 협상론 등 통일 논의가 활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