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국가직 한국사] 14년 1회차
9급 국가직 한국사 기출문제

14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A4 약 1장

1 / 1
A4정답 포함
9급 국가직 한국사 기출문제모두CBT · moducbt.com

14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는 삼국시대의 금석문은?

-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 고구려가 신라의 왕을 호칭할 때 ‘동이 매금(東夷 寐錦)’이라고 부르고 있다.
- 고구려가 신라의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1광개토왕비
2집안고구려비
3중원고구려비
4영일냉수리비
정답 및 해설

신라 왕을 ‘동이 매금’이라 부르고 의복을 하사한 기록이 담긴 금석문은 중원고구려비(충주 고구려비)이다.

‘동이 매금’이라는 호칭과 의복 하사 의식은 고구려가 신라를 아래로 보는 천하관을 드러내며,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한 사실도 확인된다. 장수왕 대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주는 비석이다.

  • 광개토왕비: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과 신라 구원 출병을 전하지만 ‘동이 매금’ 호칭과 의복 하사 기록은 없다.
  • 집안고구려비: 수묘인(무덤 관리인) 관련 규정을 담은 고구려 비석이다.
  • 영일냉수리비: 신라의 재산 분쟁 판결을 기록한 신라 비석이다.
문제 2
신라 하대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을 알려주는 다음의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心性)을 도야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상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곧 불성(佛性)임을 알면 그것이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는 견성오도(見性悟道)에 있었다.

1전제왕권을 강화해주는 이념적 도구로 크게 작용하였다.
2지방에서 새로이 대두한 호족들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3왕실은 이 사상을 포섭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4인도에까지 가서 공부해 온 승려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정답 및 해설

‘불립문자’, ‘견성오도’를 내세운 선종은 신라 하대 지방에서 새로 일어난 호족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복잡한 교리 대신 개인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의 주장은 중앙의 권위에서 벗어나려던 호족의 성향과 맞았고, 9산 선문이 호족의 후원 아래 지방에 세워졌다.

  • 전제왕권 강화의 이념: 교리 체계를 갖춘 교종(화엄종)이 신라 중대에 한 역할이다.
  • 왕실이 포섭에 무관심: 신라 왕실도 선종 승려를 초빙하는 등 선종을 포섭하려 하였다.
  • 인도 유학 승려에 의한 전파: 선종은 주로 당에 유학한 승려들이 들여왔다.
문제 3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한 실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중국은 서양과 180도 정도 차이가 난다. 중국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고 서양을 변두리로 삼으며, 서양인은 서양을 중심으로 삼고 중국을 변두리로 삼는다. 그러나 실제는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은 땅에 따라서 모두 그러한 것이니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이다.

1「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어 놓았다.
2「임하경륜」을 통해서 성인 남자들에게 2결의 토지를 나누어 줄 것을 주장하였다.
3「동사」에서 조선의 자연환경과 풍속, 인성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4「동국지도」를 만들어 지도 제작의 과학화에 기여하였다.
정답 및 해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한 이 주장은 홍대용의 것이며, 그는 「임하경륜」에서 성인 남자에게 2결의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하였다.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이라는 논리는 「의산문답」에 담긴 지전설·무한우주론과 함께 화이론 극복의 근거가 되었다.

  • 「동국지리지」: 한백겸의 저술로,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 「동사」: 이종휘의 저술이다.
  • 「동국지도」: 정상기가 백리척을 써서 만든 지도이다.
문제 4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선임하였다.
2영국군의 요청으로 일부 병력을 인도와 버마(미얀마) 전선에 참전시켰다.
3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협력하면서 국내 진공을 준비하였다.
4조선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정답 및 해설

한국광복군이 조선의용군과 연합하여 선전 포고를 한 일은 없다.

대일 선전 포고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자적으로 발표하였고,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일부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거느린 별개의 부대이다.

  •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선임: 창설 당시 지휘부 구성으로 옳다.
  • 인도·버마(미얀마) 전선 참전: 영국군의 요청으로 일부 병력을 파견해 옳다.
  •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협력한 국내 진공 준비: 국내 정진군을 편성해 훈련하였으므로 옳다.
문제 5
8ㆍ15 광복 직후에 결성된 정당의 중심 인물과 주요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와 관련된 정당을 바르게 연결한 것은? (순서대로 ㄱ, ㄴ, ㄷ)

ㄱ.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ㄴ. 송진우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하였다.
ㄷ. 안재홍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신민족주의를 내세워 평등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1조선인민당,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2조선신민당, 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3조선신민당, 한국민주당, 국민당
4조선인민당, 한국민주당, 국민당
정답 및 해설

ㄱ은 조선인민당, ㄴ은 한국민주당, ㄷ은 국민당이다.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이끌며 좌우합작을 추진했고, 송진우·김성수 등의 한국민주당은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임시정부 지지를 내세웠다. 안재홍은 국민당을 결성해 신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 조선신민당: 김두봉 등 연안파가 중심이 된 정당으로 여운형과 무관하다.
  • 한국독립당: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의 정당으로 안재홍의 국민당과 다르다.
  • 민족혁명당: 김원봉 등이 중국 관내에서 결성한 정당으로 송진우와 관계없다.
문제 6
1960년대 전반 남북한에서 각기 조사 발굴되어 한국사에서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유적들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순서대로 남한, 북한)
1제주 빌레못 유적, 상원 검은모루 유적
2공주 석장리 유적, 웅기 굴포리 유적
3단양 상시리 유적, 덕천 승리산 유적
4연천 전곡리 유적, 평양 만달리 유적
정답 및 해설

1960년대 전반 남한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북한의 웅기 굴포리 유적이 발굴되면서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없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이 있었는데, 두 유적의 조사로 이를 극복하게 되었다.

  • 제주 빌레못·상원 검은모루 유적: 두 유적 모두 1960년대 전반보다 뒤에 조사되었다.
  • 단양 상시리·덕천 승리산 유적: 1970년대 이후 조사된 유적이다.
  • 연천 전곡리·평양 만달리 유적: 1970년대 후반 이후 조사된 유적으로, 전곡리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로 유명하다.
문제 7
통일신라시대 귀족경제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는 밑줄 친 '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신문왕 9년(689)에 이것을 폐지하였다. 이를 대신하여 조(租)의 수취만을 허락하는 관료전이 주어졌고, 한편 일정한 양의 곡식이 세조(歲租)로서 또한 주어졌다. 그러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다시 이것이 부활되는 변화과정을 겪었다.

1이것이 폐지되자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라는 사상이 새롭게 나오게 되었다.
2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조(租)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주민을 노역(勞役)에 동원할 수 있었다.
3삼국통일 이후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육두품 신분의 사람들에게 특별히 지급하였다.
4촌락에 거주하는 양인농민인 백정이 공동으로 경작하였다.
정답 및 해설

신문왕 때 폐지되고 경덕왕 때 부활한 ‘이것’은 녹읍으로, 수급자가 조세뿐 아니라 그 지역 주민의 노동력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녹읍 대신 조의 수취만 허락하는 관료전이 지급된 것은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였고,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한 것은 귀족 세력이 다시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 녹읍 폐지 후 ‘왕토’ 사상 등장: 왕토 사상은 녹읍 폐지로 새로 나온 것이 아니다.
  • 육두품에게 특별 지급: 녹읍은 관료 귀족에게 지급된 것으로, 육두품 공신에 대한 특별 지급이 아니다.
  • 백정이 공동 경작: 백정이 일반 농민을 뜻한 것은 고려 시대이며 녹읍의 성격과 무관하다.
문제 8
다음과 같은 풍속이 행해진 국가의 사회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그 풍속에 혼인을 할 때 구두로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집에는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만드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고 한다. 저녁에 사위가 여자의 집에 이르러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꿇어 앉아 절하면서 여자와 동숙하게 해줄 것을 애걸한다. 이렇게 두세 차례 하면 여자의 부모가 듣고는 소옥에 나아가 자게 한다. 그리고 옆에는 전백(錢帛)을 놓아둔다.

-『삼국지』「동이전」-

1고국천왕 사후, 왕비인 우씨와 왕의 동생인 산상왕과의 결합은 취수혼의 실례를 보여준다.
2계루부 고씨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된 이후 연나부 명림씨 출신의 왕비를 맞이하는 관례가 있었다.
3관나부인(貫那夫人)이 왕비를 모함하여 죽이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질투죄로 사형을 받았다.
4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은 국왕이 중국식 혼인 제도를 수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정답 및 해설

서옥제 풍속의 나라는 고구려이며,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은 신라 신문왕의 일이므로 고구려 사회 모습으로 옳지 않다.

‘서옥(婿屋)’에서 사위가 지내다가 자식이 자란 뒤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는 혼인 풍속은 「동이전」 고구려조에 전한다.

  • 고국천왕 사후 왕비 우씨와 산상왕의 결합: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는 고구려 취수혼의 사례이다.
  • 연나부 명림씨 출신 왕비 관례: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잇고 연나부(절노부)에서 왕비를 맞이하던 고구려의 관례이다.
  • 관나부인 사건: 고구려 중천왕 때 관나부인이 왕비를 모함하다 처형된 일이다.
문제 9
고려의 형률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주로 당나라의 것을 끌어다 썼으며, 때에 따라 고려의 실정에 맞는 율문도 만들었다.
2행정과 사법이 명확하게 분리ㆍ독립되어 있었다.
3실형주의(實刑主義)보다는 배상제(賠償制)를 우위에 두고 있었다.
4기본적으로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의 4형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답 및 해설

고려의 형률은 당률을 참작해 쓰면서 필요에 따라 고려의 실정에 맞는 율문을 따로 만들었다.

관습법도 함께 적용되었으며, 형벌은 태·장·도·유·사의 5형 체계였다.

  • 행정과 사법의 분리·독립: 지방관이 사법권을 함께 행사하는 등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았다.
  • 배상제 우위: 고려는 실제 형벌을 가하는 실형주의가 중심이었다.
  • 태형·장형·도형·유형의 4형 체계: 사형을 포함한 5형 체계였으므로 틀리다.
문제 10
고려시대에는 귀족ㆍ양반과 일반 양민 사이에 '중간계층' 또는 '중류층'이라 불리는 신분층이 존재하였다. 이 신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남반은 궁중의 잡일을 맡는 내료직(內僚職)이다.
2하급 장교들도 이 신분층에 포함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3서리는 중앙의 각 사(司)에서 기록이나 문부(文簿)의 관장 등 실무에 종사하였다.
4향리에게는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지 않았다.
정답 및 해설

고려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으므로, 양반으로 상승할 길이 막혀 있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특히 상층 향리인 호장·부호장 층은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이었고, 그 자제들이 과거로 중앙 관료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중류층에는 남반·서리·향리·하급 장교 등이 속하였다.

  • 남반: 궁중의 잡일을 맡는 내료직으로 옳다.
  • 하급 장교: 군반 씨족 등 하급 장교도 중간 계층으로 분류되어 옳다.
  • 서리: 중앙 관청에서 기록·문부 관리 등 실무를 담당하여 옳다.
문제 11
밑줄 친 '국왕'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국왕은 행차 때면 길에 나온 백성들을 불러 직접 의견을 들었다. 또한 척신 세력을 제거하여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당색을 가리지 않고 어진 이들을 모아 학문을 장려하였다. 침전에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하나의 달빛이 땅 위의 모든 강물에 비치니 강물은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1병권 장악을 위해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2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을 추진하였다.
3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특권을 폐지하였다.
4백성의 여론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제도를 부활하였다.
정답 및 해설

‘탕탕평평실’ 편액과 “태극은 바로 나다”라는 말로 보아 국왕은 정조이며, 그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을 시행하였다.

정조는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하며 초월적 군주를 자처했고, 행차 때 백성의 상언·격쟁을 받아 여론을 들었다.

  • 금위영 설치: 숙종 때 5군영 체제가 완성된 일이다.
  • 북벌 추진: 효종 때의 일이다.
  • 신문고 부활: 영조 때의 일이다.
문제 12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국왕과 관련되는 내용은?

(    )이 원나라의 제도를 따라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고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다. 이연종이 간하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왕이 사람을 시켜 물었다. …(중략)… 답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 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고려사』-

1노비와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을 설치하였다.
2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3「동국병감」과 같은 병서를 간행하여 원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4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정답 및 해설

이연종의 간언을 받아들여 변발과 호복을 버린 왕은 공민왕으로, 그는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공민왕은 몽골풍을 없애고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했으며,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되찾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

  • 장례원 설치: 노비 문제를 맡은 장례원은 조선의 관청이다. 공민왕은 전민변정도감을 두었다.
  • 「동국병감」 간행: 조선 문종 때 편찬된 병서이다.
  • 과전법 시행: 공양왕 때 이성계 등 신진 세력이 주도하였다.
문제 13
다음은 조선과 일본, 중국의 인구 변화 추세를 나타낸 표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삼남지방의 개발과 인구 유입 때문이었다.
2명대 초기 1억 4천만 명 정도였던 중국의 인구는 청대 초기 3억 명을 돌파하였고, 19세기 중반에 4억 2천만 명에 이르렀다.
317세기~18세기 초반 조선을 비롯한 삼국은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농경지가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인구가 많이 증가하였다.
417세기 이후 일본의 인구는 정체현상을 보이는데, 이러한 경향은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정답 및 해설

세 그래프 모두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 사이에 인구가 크게 늘었으므로, 삼국이 농업 기술 발달과 경지 확대로 인구가 증가했다는 설명이 옳다.

조선은 1648년 무렵 200만 명이 안 되던 등록 인구가 1717년 무렵 700만 명에 가까워졌고, 일본은 1600년부터 1700년대 초까지 꾸준히 늘었으며, 중국도 1650년 1.3억에서 1750년 2.15억으로 늘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모내기법 확산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다.

  •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급격한 증가: 1756년 이후 조선의 인구는 완만히 늘다가 1806년 이후 오히려 줄었다.
  • 명대 초기 1억 4천만 명, 청대 초기 3억 돌파: 그래프에서 1400년 무렵은 0.75억, 1650년 무렵은 1.3억이다.
  • 17세기 이후 일본 인구 정체: 일본 인구는 17세기에 크게 늘었고, 정체는 18세기 이후에 나타난다.
문제 14
밑줄 친 '이 농서'가 처음 편찬된 시기의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농상집요』는 중국 화북 지방의 농사 경험을 정리한 것으로서 기후와 토질이 다른 조선에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농사 경험이 풍부한 각 도의 농민들에게 물어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농법을 소개한 이 농서가 편찬되었다.

1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를 표현한 「몽유도원도」가 그려졌다.
2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한 조계종이 성립되었다.
3윤휴는 주자의 사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4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정답 및 해설

‘이 농서’는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이며, 같은 시기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농사직설」은 각 도 농민의 경험을 모아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한 최초의 농서이고,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세종 대의 그림이다.

  • 조계종 성립: 고려 후기 지눌의 수선사 결사와 관련된 일이다.
  •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림: 17세기 후반 숙종 무렵의 일이다.
  • 진경산수화·풍속화 유행: 18세기 조선 후기의 문화이다.
문제 15
밑줄 친 '이번 문서'를 보낸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덕에 귀의하여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강화로 도읍을 옮긴 지 40년에 가깝지만, 오랑캐의 풍습을 미워하여 진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려첩장(高麗牒狀)』-

1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든 조직에서 비롯되었다.
2최충헌이 신변 보호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조직하였다.
3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4쌍성총관부 탈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직이었다.
정답 및 해설

진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밝힌 문서를 보낸 조직은 삼별초이며, 삼별초는 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든 야별초에서 비롯되었다.

야별초가 좌별초·우별초로 나뉘고 몽골에서 돌아온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가 되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로 옮겨 항쟁하며 일본에 이 문서를 보냈다.

  • 최충헌이 신변 보호를 위해 조직: 사병 집단인 도방에 대한 설명이다.
  • 거란 침입 대비 조직: 고려 정종 때 편성된 광군에 대한 설명이다.
  • 쌍성총관부 탈환 주도: 공민왕 때의 일로 삼별초와 관계없다.
문제 16
다음 글을 남긴 국왕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실로 옳은 것은?

보잘 것 없는 나, 소자가 어린 나이로 어렵고 큰 유업을 계승하여 지금 1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덕이 부족하여 위로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민심에 답하지 못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잊지 못하고 근심하며 두렵게 여기면서 혹시라도 선대왕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유업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지난번 가산(嘉山)의 토적(土賊)이 변란을 일으켜 청천강 이북의 수 많은 생령이 도탄에 빠지고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나의 죄이다.

-『비변사등록』-

1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였다.
2공노비 6만 6천여 명을 양인으로 해방시켰다.
3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격침되었다.
4삼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어린 나이에 즉위해 ‘가산의 토적’의 변란을 겪은 국왕은 순조이며, 순조 때 공노비 6만 6천여 명이 양인으로 해방되었다.

‘가산의 토적’은 평안도 가산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가리킨다. 공노비 해방은 순조 즉위 초인 1801년의 일이다.

  • 최제우의 동학 창도: 철종 때의 일이다.
  • 제너럴 셔먼 호 격침: 고종 때인 1866년의 일이다.
  • 삼정이정청 설치: 임술 농민 봉기 직후 철종 때의 일이다.
문제 17
조선 후기 천주교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기해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은 그 지역의 어류를 조사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2안정복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하는 「천학문답」을 저술하였다.
31791년 윤지충은 어머니 상(喪)에 유교 의식을 거부하여 신주를 없애고 제사를 지내 권상연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4신유사옥 때 황사영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해달라는 서신을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정답 및 해설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된 것은 기해사옥이 아니라 신유사옥(1801) 때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근해 어류를 조사해 「자산어보」를 남겼다. 기해사옥(1839)은 헌종 때의 박해로 시기가 다르다.

  • 안정복의 「천학문답」: 성리학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한 저술로 옳다.
  • 1791년 윤지충·권상연 처형: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거부한 진산 사건(신해박해)으로 옳다.
  •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사옥 때 군대 동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옳다.
문제 18
조선시대의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정도전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였으며, 특히 「춘추」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2이황은 16세기 조선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제도의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318세기에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호론과, 이를 같다고 주장하는 낙론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4유형원과 이익의 사상을 계승한 김정희는 토지제도 개혁론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정답 및 해설

18세기 노론 내부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호론(인물성이론)과 같다는 낙론(인물성동론) 사이에 호락논쟁이 벌어졌다.

호론은 충청 지역 학자들이, 낙론은 서울·경기 지역 학자들이 중심이었다.

  • 정도전: 불교를 비판한 성리학자이며, 「조선경국전」에서 통치 이념의 바탕으로 중시한 것은 「주례」이다.
  • 통치 체제 정비와 수취제도 개혁 주장: 이황이 아니라 이이의 주장이다.
  • 유형원·이익의 사상 계승과 토지제도 개혁론: 김정희가 아니라 정약용에 대한 설명이다.
문제 19
다음은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사건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만세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1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2독립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었다.
3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4파리강화회의에 신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널리 알렸다.
정답 및 해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는 신규식이 아니라 김규식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만세시위’와 ‘화성 제암리’ 학살로 보아 이 사건은 3·1 운동이다. 김규식은 3·1 운동 이전 신한청년당이 파견하였고, 이후 임시정부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 문화통치로의 전환: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 독립운동의 분기점이 된 대규모 만세운동: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 약소 민족 독립운동에 자극: 중국의 5·4 운동 등에 영향을 주었다.
문제 20
4ㆍ19 혁명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5ㆍ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의회가 구성되었다.
2농지개혁이 실시되어 농민들은 자작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3혁명 이후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4과도 정부가 출범하고,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되었다.
정답 및 해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 허정 과도 정부가 출범하고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 헌법에 따라 장면 내각이 성립하였다.

  • 5·10 총선거와 제헌의회 구성: 1948년의 일로 4·19 혁명과 관계없다.
  • 농지개혁 실시: 이승만 정부 초기에 시행되었다.
  • 통일 논의 부재: 혁명 이후 중립화 통일론, 남북 협상론 등 통일 논의가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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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1회차
총 20문항 · 객관식 · 정답·해설 포함
문제 1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는 삼국시대의 금석문은?

-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 고구려가 신라의 왕을 호칭할 때 ‘동이 매금(東夷 寐錦)’이라고 부르고 있다.
- 고구려가 신라의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1광개토왕비
2집안고구려비
3중원고구려비
4영일냉수리비
정답 및 해설

신라 왕을 ‘동이 매금’이라 부르고 의복을 하사한 기록이 담긴 금석문은 중원고구려비(충주 고구려비)이다.

‘동이 매금’이라는 호칭과 의복 하사 의식은 고구려가 신라를 아래로 보는 천하관을 드러내며,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한 사실도 확인된다. 장수왕 대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주는 비석이다.

  • 광개토왕비: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과 신라 구원 출병을 전하지만 ‘동이 매금’ 호칭과 의복 하사 기록은 없다.
  • 집안고구려비: 수묘인(무덤 관리인) 관련 규정을 담은 고구려 비석이다.
  • 영일냉수리비: 신라의 재산 분쟁 판결을 기록한 신라 비석이다.
문제 2
신라 하대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을 알려주는 다음의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心性)을 도야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상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곧 불성(佛性)임을 알면 그것이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는 견성오도(見性悟道)에 있었다.

1전제왕권을 강화해주는 이념적 도구로 크게 작용하였다.
2지방에서 새로이 대두한 호족들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3왕실은 이 사상을 포섭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4인도에까지 가서 공부해 온 승려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정답 및 해설

‘불립문자’, ‘견성오도’를 내세운 선종은 신라 하대 지방에서 새로 일어난 호족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복잡한 교리 대신 개인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의 주장은 중앙의 권위에서 벗어나려던 호족의 성향과 맞았고, 9산 선문이 호족의 후원 아래 지방에 세워졌다.

  • 전제왕권 강화의 이념: 교리 체계를 갖춘 교종(화엄종)이 신라 중대에 한 역할이다.
  • 왕실이 포섭에 무관심: 신라 왕실도 선종 승려를 초빙하는 등 선종을 포섭하려 하였다.
  • 인도 유학 승려에 의한 전파: 선종은 주로 당에 유학한 승려들이 들여왔다.
문제 3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한 실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중국은 서양과 180도 정도 차이가 난다. 중국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고 서양을 변두리로 삼으며, 서양인은 서양을 중심으로 삼고 중국을 변두리로 삼는다. 그러나 실제는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은 땅에 따라서 모두 그러한 것이니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이다.

1「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어 놓았다.
2「임하경륜」을 통해서 성인 남자들에게 2결의 토지를 나누어 줄 것을 주장하였다.
3「동사」에서 조선의 자연환경과 풍속, 인성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4「동국지도」를 만들어 지도 제작의 과학화에 기여하였다.
정답 및 해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한 이 주장은 홍대용의 것이며, 그는 「임하경륜」에서 성인 남자에게 2결의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하였다.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이라는 논리는 「의산문답」에 담긴 지전설·무한우주론과 함께 화이론 극복의 근거가 되었다.

  • 「동국지리지」: 한백겸의 저술로,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 「동사」: 이종휘의 저술이다.
  • 「동국지도」: 정상기가 백리척을 써서 만든 지도이다.
문제 4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1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선임하였다.
2영국군의 요청으로 일부 병력을 인도와 버마(미얀마) 전선에 참전시켰다.
3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협력하면서 국내 진공을 준비하였다.
4조선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정답 및 해설

한국광복군이 조선의용군과 연합하여 선전 포고를 한 일은 없다.

대일 선전 포고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자적으로 발표하였고,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일부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거느린 별개의 부대이다.

  •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선임: 창설 당시 지휘부 구성으로 옳다.
  • 인도·버마(미얀마) 전선 참전: 영국군의 요청으로 일부 병력을 파견해 옳다.
  •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협력한 국내 진공 준비: 국내 정진군을 편성해 훈련하였으므로 옳다.
문제 5
8ㆍ15 광복 직후에 결성된 정당의 중심 인물과 주요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와 관련된 정당을 바르게 연결한 것은? (순서대로 ㄱ, ㄴ, ㄷ)

ㄱ.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ㄴ. 송진우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하였다.
ㄷ. 안재홍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신민족주의를 내세워 평등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1조선인민당,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2조선신민당, 민족혁명당, 한국독립당
3조선신민당, 한국민주당, 국민당
4조선인민당, 한국민주당, 국민당
정답 및 해설

ㄱ은 조선인민당, ㄴ은 한국민주당, ㄷ은 국민당이다.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이끌며 좌우합작을 추진했고, 송진우·김성수 등의 한국민주당은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임시정부 지지를 내세웠다. 안재홍은 국민당을 결성해 신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 조선신민당: 김두봉 등 연안파가 중심이 된 정당으로 여운형과 무관하다.
  • 한국독립당: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의 정당으로 안재홍의 국민당과 다르다.
  • 민족혁명당: 김원봉 등이 중국 관내에서 결성한 정당으로 송진우와 관계없다.
문제 6
1960년대 전반 남북한에서 각기 조사 발굴되어 한국사에서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유적들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순서대로 남한, 북한)
1제주 빌레못 유적, 상원 검은모루 유적
2공주 석장리 유적, 웅기 굴포리 유적
3단양 상시리 유적, 덕천 승리산 유적
4연천 전곡리 유적, 평양 만달리 유적
정답 및 해설

1960년대 전반 남한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북한의 웅기 굴포리 유적이 발굴되면서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없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이 있었는데, 두 유적의 조사로 이를 극복하게 되었다.

  • 제주 빌레못·상원 검은모루 유적: 두 유적 모두 1960년대 전반보다 뒤에 조사되었다.
  • 단양 상시리·덕천 승리산 유적: 1970년대 이후 조사된 유적이다.
  • 연천 전곡리·평양 만달리 유적: 1970년대 후반 이후 조사된 유적으로, 전곡리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로 유명하다.
문제 7
통일신라시대 귀족경제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는 밑줄 친 '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신문왕 9년(689)에 이것을 폐지하였다. 이를 대신하여 조(租)의 수취만을 허락하는 관료전이 주어졌고, 한편 일정한 양의 곡식이 세조(歲租)로서 또한 주어졌다. 그러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다시 이것이 부활되는 변화과정을 겪었다.

1이것이 폐지되자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라는 사상이 새롭게 나오게 되었다.
2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조(租)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주민을 노역(勞役)에 동원할 수 있었다.
3삼국통일 이후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육두품 신분의 사람들에게 특별히 지급하였다.
4촌락에 거주하는 양인농민인 백정이 공동으로 경작하였다.
정답 및 해설

신문왕 때 폐지되고 경덕왕 때 부활한 ‘이것’은 녹읍으로, 수급자가 조세뿐 아니라 그 지역 주민의 노동력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녹읍 대신 조의 수취만 허락하는 관료전이 지급된 것은 귀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였고,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한 것은 귀족 세력이 다시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 녹읍 폐지 후 ‘왕토’ 사상 등장: 왕토 사상은 녹읍 폐지로 새로 나온 것이 아니다.
  • 육두품에게 특별 지급: 녹읍은 관료 귀족에게 지급된 것으로, 육두품 공신에 대한 특별 지급이 아니다.
  • 백정이 공동 경작: 백정이 일반 농민을 뜻한 것은 고려 시대이며 녹읍의 성격과 무관하다.
문제 8
다음과 같은 풍속이 행해진 국가의 사회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그 풍속에 혼인을 할 때 구두로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집에는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만드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고 한다. 저녁에 사위가 여자의 집에 이르러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꿇어 앉아 절하면서 여자와 동숙하게 해줄 것을 애걸한다. 이렇게 두세 차례 하면 여자의 부모가 듣고는 소옥에 나아가 자게 한다. 그리고 옆에는 전백(錢帛)을 놓아둔다.

-『삼국지』「동이전」-

1고국천왕 사후, 왕비인 우씨와 왕의 동생인 산상왕과의 결합은 취수혼의 실례를 보여준다.
2계루부 고씨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된 이후 연나부 명림씨 출신의 왕비를 맞이하는 관례가 있었다.
3관나부인(貫那夫人)이 왕비를 모함하여 죽이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질투죄로 사형을 받았다.
4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은 국왕이 중국식 혼인 제도를 수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정답 및 해설

서옥제 풍속의 나라는 고구려이며,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은 신라 신문왕의 일이므로 고구려 사회 모습으로 옳지 않다.

‘서옥(婿屋)’에서 사위가 지내다가 자식이 자란 뒤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는 혼인 풍속은 「동이전」 고구려조에 전한다.

  • 고국천왕 사후 왕비 우씨와 산상왕의 결합: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는 고구려 취수혼의 사례이다.
  • 연나부 명림씨 출신 왕비 관례: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잇고 연나부(절노부)에서 왕비를 맞이하던 고구려의 관례이다.
  • 관나부인 사건: 고구려 중천왕 때 관나부인이 왕비를 모함하다 처형된 일이다.
문제 9
고려의 형률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주로 당나라의 것을 끌어다 썼으며, 때에 따라 고려의 실정에 맞는 율문도 만들었다.
2행정과 사법이 명확하게 분리ㆍ독립되어 있었다.
3실형주의(實刑主義)보다는 배상제(賠償制)를 우위에 두고 있었다.
4기본적으로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의 4형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답 및 해설

고려의 형률은 당률을 참작해 쓰면서 필요에 따라 고려의 실정에 맞는 율문을 따로 만들었다.

관습법도 함께 적용되었으며, 형벌은 태·장·도·유·사의 5형 체계였다.

  • 행정과 사법의 분리·독립: 지방관이 사법권을 함께 행사하는 등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았다.
  • 배상제 우위: 고려는 실제 형벌을 가하는 실형주의가 중심이었다.
  • 태형·장형·도형·유형의 4형 체계: 사형을 포함한 5형 체계였으므로 틀리다.
문제 10
고려시대에는 귀족ㆍ양반과 일반 양민 사이에 '중간계층' 또는 '중류층'이라 불리는 신분층이 존재하였다. 이 신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남반은 궁중의 잡일을 맡는 내료직(內僚職)이다.
2하급 장교들도 이 신분층에 포함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3서리는 중앙의 각 사(司)에서 기록이나 문부(文簿)의 관장 등 실무에 종사하였다.
4향리에게는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지 않았다.
정답 및 해설

고려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으므로, 양반으로 상승할 길이 막혀 있었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특히 상층 향리인 호장·부호장 층은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이었고, 그 자제들이 과거로 중앙 관료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중류층에는 남반·서리·향리·하급 장교 등이 속하였다.

  • 남반: 궁중의 잡일을 맡는 내료직으로 옳다.
  • 하급 장교: 군반 씨족 등 하급 장교도 중간 계층으로 분류되어 옳다.
  • 서리: 중앙 관청에서 기록·문부 관리 등 실무를 담당하여 옳다.
문제 11
밑줄 친 '국왕'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국왕은 행차 때면 길에 나온 백성들을 불러 직접 의견을 들었다. 또한 척신 세력을 제거하여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당색을 가리지 않고 어진 이들을 모아 학문을 장려하였다. 침전에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하나의 달빛이 땅 위의 모든 강물에 비치니 강물은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1병권 장악을 위해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2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을 추진하였다.
3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특권을 폐지하였다.
4백성의 여론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제도를 부활하였다.
정답 및 해설

‘탕탕평평실’ 편액과 “태극은 바로 나다”라는 말로 보아 국왕은 정조이며, 그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을 시행하였다.

정조는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하며 초월적 군주를 자처했고, 행차 때 백성의 상언·격쟁을 받아 여론을 들었다.

  • 금위영 설치: 숙종 때 5군영 체제가 완성된 일이다.
  • 북벌 추진: 효종 때의 일이다.
  • 신문고 부활: 영조 때의 일이다.
문제 12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국왕과 관련되는 내용은?

(    )이 원나라의 제도를 따라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고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다. 이연종이 간하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왕이 사람을 시켜 물었다. …(중략)… 답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 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고려사』-

1노비와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을 설치하였다.
2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3「동국병감」과 같은 병서를 간행하여 원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4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과전법을 시행하였다.
정답 및 해설

이연종의 간언을 받아들여 변발과 호복을 버린 왕은 공민왕으로, 그는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공민왕은 몽골풍을 없애고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했으며,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되찾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

  • 장례원 설치: 노비 문제를 맡은 장례원은 조선의 관청이다. 공민왕은 전민변정도감을 두었다.
  • 「동국병감」 간행: 조선 문종 때 편찬된 병서이다.
  • 과전법 시행: 공양왕 때 이성계 등 신진 세력이 주도하였다.
문제 13
다음은 조선과 일본, 중국의 인구 변화 추세를 나타낸 표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삼남지방의 개발과 인구 유입 때문이었다.
2명대 초기 1억 4천만 명 정도였던 중국의 인구는 청대 초기 3억 명을 돌파하였고, 19세기 중반에 4억 2천만 명에 이르렀다.
317세기~18세기 초반 조선을 비롯한 삼국은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농경지가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인구가 많이 증가하였다.
417세기 이후 일본의 인구는 정체현상을 보이는데, 이러한 경향은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정답 및 해설

세 그래프 모두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 사이에 인구가 크게 늘었으므로, 삼국이 농업 기술 발달과 경지 확대로 인구가 증가했다는 설명이 옳다.

조선은 1648년 무렵 200만 명이 안 되던 등록 인구가 1717년 무렵 700만 명에 가까워졌고, 일본은 1600년부터 1700년대 초까지 꾸준히 늘었으며, 중국도 1650년 1.3억에서 1750년 2.15억으로 늘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모내기법 확산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다.

  •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급격한 증가: 1756년 이후 조선의 인구는 완만히 늘다가 1806년 이후 오히려 줄었다.
  • 명대 초기 1억 4천만 명, 청대 초기 3억 돌파: 그래프에서 1400년 무렵은 0.75억, 1650년 무렵은 1.3억이다.
  • 17세기 이후 일본 인구 정체: 일본 인구는 17세기에 크게 늘었고, 정체는 18세기 이후에 나타난다.
문제 14
밑줄 친 '이 농서'가 처음 편찬된 시기의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농상집요』는 중국 화북 지방의 농사 경험을 정리한 것으로서 기후와 토질이 다른 조선에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농사 경험이 풍부한 각 도의 농민들에게 물어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농법을 소개한 이 농서가 편찬되었다.

1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를 표현한 「몽유도원도」가 그려졌다.
2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한 조계종이 성립되었다.
3윤휴는 주자의 사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4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정답 및 해설

‘이 농서’는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이며, 같은 시기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농사직설」은 각 도 농민의 경험을 모아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한 최초의 농서이고,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세종 대의 그림이다.

  • 조계종 성립: 고려 후기 지눌의 수선사 결사와 관련된 일이다.
  •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림: 17세기 후반 숙종 무렵의 일이다.
  • 진경산수화·풍속화 유행: 18세기 조선 후기의 문화이다.
문제 15
밑줄 친 '이번 문서'를 보낸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 이전 문서에서는 몽고의 덕에 귀의하여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는데, 이번 문서에서는 강화로 도읍을 옮긴 지 40년에 가깝지만, 오랑캐의 풍습을 미워하여 진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려첩장(高麗牒狀)』-

1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든 조직에서 비롯되었다.
2최충헌이 신변 보호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조직하였다.
3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4쌍성총관부 탈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직이었다.
정답 및 해설

진도로 도읍을 옮겼다고 밝힌 문서를 보낸 조직은 삼별초이며, 삼별초는 최우가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든 야별초에서 비롯되었다.

야별초가 좌별초·우별초로 나뉘고 몽골에서 돌아온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가 되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로 옮겨 항쟁하며 일본에 이 문서를 보냈다.

  • 최충헌이 신변 보호를 위해 조직: 사병 집단인 도방에 대한 설명이다.
  • 거란 침입 대비 조직: 고려 정종 때 편성된 광군에 대한 설명이다.
  • 쌍성총관부 탈환 주도: 공민왕 때의 일로 삼별초와 관계없다.
문제 16
다음 글을 남긴 국왕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실로 옳은 것은?

보잘 것 없는 나, 소자가 어린 나이로 어렵고 큰 유업을 계승하여 지금 1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덕이 부족하여 위로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민심에 답하지 못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잊지 못하고 근심하며 두렵게 여기면서 혹시라도 선대왕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유업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지난번 가산(嘉山)의 토적(土賊)이 변란을 일으켜 청천강 이북의 수 많은 생령이 도탄에 빠지고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나의 죄이다.

-『비변사등록』-

1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였다.
2공노비 6만 6천여 명을 양인으로 해방시켰다.
3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격침되었다.
4삼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정답 및 해설

어린 나이에 즉위해 ‘가산의 토적’의 변란을 겪은 국왕은 순조이며, 순조 때 공노비 6만 6천여 명이 양인으로 해방되었다.

‘가산의 토적’은 평안도 가산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가리킨다. 공노비 해방은 순조 즉위 초인 1801년의 일이다.

  • 최제우의 동학 창도: 철종 때의 일이다.
  • 제너럴 셔먼 호 격침: 고종 때인 1866년의 일이다.
  • 삼정이정청 설치: 임술 농민 봉기 직후 철종 때의 일이다.
문제 17
조선 후기 천주교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기해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은 그 지역의 어류를 조사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2안정복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하는 「천학문답」을 저술하였다.
31791년 윤지충은 어머니 상(喪)에 유교 의식을 거부하여 신주를 없애고 제사를 지내 권상연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4신유사옥 때 황사영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해달라는 서신을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정답 및 해설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된 것은 기해사옥이 아니라 신유사옥(1801) 때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근해 어류를 조사해 「자산어보」를 남겼다. 기해사옥(1839)은 헌종 때의 박해로 시기가 다르다.

  • 안정복의 「천학문답」: 성리학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한 저술로 옳다.
  • 1791년 윤지충·권상연 처형: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거부한 진산 사건(신해박해)으로 옳다.
  •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사옥 때 군대 동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옳다.
문제 18
조선시대의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정도전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였으며, 특히 「춘추」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2이황은 16세기 조선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제도의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318세기에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호론과, 이를 같다고 주장하는 낙론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4유형원과 이익의 사상을 계승한 김정희는 토지제도 개혁론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정답 및 해설

18세기 노론 내부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호론(인물성이론)과 같다는 낙론(인물성동론) 사이에 호락논쟁이 벌어졌다.

호론은 충청 지역 학자들이, 낙론은 서울·경기 지역 학자들이 중심이었다.

  • 정도전: 불교를 비판한 성리학자이며, 「조선경국전」에서 통치 이념의 바탕으로 중시한 것은 「주례」이다.
  • 통치 체제 정비와 수취제도 개혁 주장: 이황이 아니라 이이의 주장이다.
  • 유형원·이익의 사상 계승과 토지제도 개혁론: 김정희가 아니라 정약용에 대한 설명이다.
문제 19
다음은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사건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만세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1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2독립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었다.
3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4파리강화회의에 신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널리 알렸다.
정답 및 해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는 신규식이 아니라 김규식이므로 이 설명이 옳지 않다.

‘만세시위’와 ‘화성 제암리’ 학살로 보아 이 사건은 3·1 운동이다. 김규식은 3·1 운동 이전 신한청년당이 파견하였고, 이후 임시정부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 문화통치로의 전환: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 독립운동의 분기점이 된 대규모 만세운동: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 약소 민족 독립운동에 자극: 중국의 5·4 운동 등에 영향을 주었다.
문제 20
4ㆍ19 혁명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5ㆍ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의회가 구성되었다.
2농지개혁이 실시되어 농민들은 자작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3혁명 이후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4과도 정부가 출범하고,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되었다.
정답 및 해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 허정 과도 정부가 출범하고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 헌법에 따라 장면 내각이 성립하였다.

  • 5·10 총선거와 제헌의회 구성: 1948년의 일로 4·19 혁명과 관계없다.
  • 농지개혁 실시: 이승만 정부 초기에 시행되었다.
  • 통일 논의 부재: 혁명 이후 중립화 통일론, 남북 협상론 등 통일 논의가 활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