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부곡·소의 백성은 일반 군현민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으므로, 향·부곡·소 백성이 일반 군현민과 동일한 부담을 졌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향·부곡·소 주민은 신분상 양인이었지만 일반 군현민보다 많은 세금을 부담했고 거주 이전이 제한되는 등 차별을 받았다.
- 이의민: 천민 출신으로 무신 집권기에 최고 권력자가 되어, 무신 정변 이후 신분 질서가 동요했음을 보여 준다.
- 외거 노비: 주인과 따로 살며 경작하고 신공을 바쳤으므로 재산을 늘려 양인과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었다.
- 향리 자제의 과거 응시: 지방 향리의 자제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가 되어 귀족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촌락 단위의 동약 실시와 문중 중심의 서원·사우 건립은 조선 후기 사족의 동향이므로, 15~16세기 사림의 동향으로 옳지 않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양반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사족은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사우를 세워 족적 결합을 강화하며 지위를 지키려 하였다.
- 「소학」 보급: 사림은 성리학적 윤리를 일상에서 실천하게 하려고 「소학」 보급에 힘썼다.
- 향사례·향음주례: 사림은 향촌 사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향사례·향음주례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 향회: 사림은 향회를 통해 결속을 다지고 향촌 교화를 주도하였다.
공음전은 고려 시대에 5품 이상 관료에게 지급해 세습을 허용한 토지이므로, 과전법과 그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다.
과전법은 고려 말 공양왕 때 경기 지역의 토지를 대상으로 전·현직 관리에게 수조권을 지급한 제도이며, 이후 직전법과 관수관급제를 거치며 수조권 지급이 점차 축소되었다.
- 수신전·휼양전: 과전법에서 죽은 관료의 아내에게 수신전, 어린 자녀에게 휼양전을 지급하였다.
- 세조 대 직전법: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 성종 대 관수관급제: 관청이 조를 거두어 관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여 전주의 직접 수조를 막았다.
| 최제우의 동학창시 | (가) | 삼례집회 (교조신원운동) | (나) | 고부관아 습격 | (다) | 전주성 점령 | (라) | 우금치 전투 |
(라) 시기는 전주성 점령과 우금치 전투 사이로, 이 시기에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 있었다.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한 뒤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었으나,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키자 다시 봉기하였고, 남접과 북접이 논산에 집결한 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 황토현 전투: 고부 관아 습격 이후 전주성 점령 이전의 사건이므로 (다) 시기에 해당한다.
- 청·일 전쟁의 발발: 전주성 점령 이후의 사건이므로 (라) 시기에 해당한다.
- 남·북접군의 논산 집결: 2차 봉기 과정에서 우금치 전투 직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라) 시기에 해당한다.
- 신라 지증왕 3년의 순장 금지 사료(史料)
- 신라 무덤에서 출토한 순장 대용(代用) 흙인형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하고 사람 대신 흙인형을 묻게 된 것은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노동력을 중시하게 된 변화를 보여 준다.
지증왕은 우경을 장려하는 등 농업 생산력 향상에 힘썼으며, 순장 금지는 산 사람을 죽여 묻는 대신 노동력으로 활용하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 전쟁 노비의 소멸: 순장 금지는 순장 대상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왕명으로 노동력을 보존하려 한 조치이다.
- 도교 사상의 반영: 순장 금지와 흙인형 대용을 도교 사상과 연결할 단서는 자료에 없다.
- 귀족층의 사치와 허례허식 억제: 자료가 보여 주는 것은 사람을 함께 묻는 풍습의 금지이지 사치 억제가 아니다.
이 시대의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 유적에서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잡곡류 경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농경의 발달로 수렵과 어로가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식량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편 가락바퀴나 뼈바늘을 이용하여 옷이나 그물을 만드는 등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탄화된 좁쌀과 가락바퀴·뼈바늘로 보아 '이 시대'는 신석기 시대이며, 이 시대에는 흑요석 출토 사례로 보아 원거리 교류가 있었다.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 유적의 '탄화된 좁쌀'은 잡곡 농경의 시작을, '가락바퀴·뼈바늘'은 원시 수공업을 보여 주며, 흑요석이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유적에서도 출토되어 교류·교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유 재산 제도의 등장: 생산력이 늘어 잉여 생산물이 생긴 청동기 시대의 모습이다.
- 환호(도랑): 마을 주변에 방어와 의례를 위해 도랑을 두른 것은 청동기 시대 취락의 특징이다.
- 창고·작업장·집회소 등 다양한 집자리: 청동기 시대 취락에서 확인되는 모습이다.
환국 정치는 17세기 후반 숙종 대에 나타났으므로, 조선 전기(15~16세기) 중앙 정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다.
15~16세기에는 훈구와 사림의 갈등으로 사화가 일어났으며, 환국은 이후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집권 붕당이 급격히 교체된 현상이다.
- 붕당: 16세기 선조 대에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형성되었고, 정치 이념과 학문 경향에 따라 결집하였다.
- 삼사: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은 언론 기능을 통해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막았다.
- 관료제적 성격 강화: 과거 중심의 관리 선발과 상피제 등 인사 제도가 정비되어 고려보다 관료제적 성격이 강해졌다.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때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령을 나누어 파견하여, (현지에) 가서 백성의 이해(利害)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도 통일한 뒤에 외관(外官)을 두고자 하셨으나, 대개 (건국) 초창기였기 때문에 일이 번잡하여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살펴보건대, 지방 토호들이 늘 공무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침해하며 포악하게 굴어, 백성들이 명령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외관을 두시기 바랍니다.
외관 파견을 건의한 자료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이며, 이를 받아들인 성종은 12목에 지방관을 보내고 지방 교육을 위해 경학박사를 파견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도 통일한 뒤에 외관을 두고자 하셨으나'와 '외관을 두시기 바랍니다'라는 구절이 성종에게 지방관 파견을 요청한 최승로의 건의임을 보여 준다.
- 서경 천도 추진: 정종 대의 천도 계획이나 인종 대 묘청 세력의 주장과 관련되며 성종의 정책이 아니다.
- 5도 양계 확립: 현종 대에 지방 제도가 5도 양계 체제로 정비되었다.
- 연등회·팔관회 장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유교 정치를 추구하며 연등회·팔관회를 축소하였다.
( ㉠ )은(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일심(一心) 사상을 바탕으로 여러 종파들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며,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 ㉡ )은(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고,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은 일심 사상으로 종파 간 대립을 조화시키려 한 원효로, 원효는 미륵 신앙이 아니라 아미타 신앙을 전파하여 불교 대중화에 힘썼으므로 미륵 신앙을 전파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은 화엄 사상을 정립하고 교단을 형성해 많은 제자를 기른 의상이다.
- 무애가: 원효는 무애가를 부르며 일반 백성을 교화하였다.
- 관음·아미타 신앙: 의상은 관음 신앙과 아미타 신앙을 화엄 교단의 주요 신앙으로 삼았다.
- 도성 정비 만류: 의상은 문무왕이 큰 공사를 일으켜 도성을 정비하려 하자 백성을 위해 이를 만류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독립 운동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비밀 결사의 형태로 독립 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 ㉠독립의군부와 ㉡대한광복회는 모두 이러한 비밀 결사 단체였다.
㉠ 독립의군부와 ㉡ 대한광복회는 모두 1910년대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이다.
독립의군부는 고종의 밀지를 받은 임병찬이 조직하여 국권 반환과 왕정 복구를 내세운 복벽주의 단체였고,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이 중심이 되어 공화정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 공화국 건설 목표: 독립의군부가 아니라 대한광복회의 목표였다.
- 고종의 비밀 지령: 대한광복회가 아니라 독립의군부가 고종의 밀지를 받아 조직되었다.
- 박상진·임병찬 중심: 중심인물이 뒤바뀌었으며, 독립의군부는 임병찬,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이 이끌었다.
통일신라의 5소경은 사신(仕臣)이 관할하였으므로, 도독이 5소경의 행정을 관할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도독은 9주의 장관이었고, 5소경은 수도 금성이 동남쪽에 치우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방의 요충지에 설치되었다.
- 9주 5소경: 신문왕 대에 지방 행정 조직이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되었다.
- 외사정: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주·군에 외사정을 파견하였다.
- 향·부곡: 촌주가 관할하는 일반 촌 외에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이 있었다.
광학보는 고려 정종 때 승려의 면학을 돕기 위해 설치한 불교 장학 재단이므로, 농민을 위한 정책으로 옳지 않다.
고려는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개간 장려, 재해 시 조세 감면, 농번기 잡역 금지 등의 정책을 폈다.
- 개간지 면세: 황무지를 개간하면 일정 기간 조세를 면제하여 개간을 장려하고 농민 부담을 덜어 주었다.
- 재해 시 감면: 재해를 입으면 피해 정도에 따라 조세를 감면하였다.
- 농번기 잡역 금지: 농사철에는 잡역 동원을 금지하여 농사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배에 물건을 싣고 오가면서 장사하는 장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에서 이득을 얻는다. 전라도 나주의 영산포, 영광의 법성포, 흥덕의 사진포, 전주의 사탄은 비록 작은 강이나 모두 바닷물이 통하므로 장삿배가 모인다. …(중략)… 그리하여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포구에 줄을 서고 있다.
-『비변사등록』-
삼한통보는 고려 숙종 때 주조된 화폐이므로, 자료에 보이는 조선 후기의 경제 동향으로 옳지 않다.
자료는 영산포·법성포 등 포구에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보여 주며, 이는 조선 후기 포구 상업이 발달한 상황이다.
- 강경·원산: 조선 후기 포구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 선상: 선박을 이용해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하여 포구에서 처분하였다.
- 객주·여각: 포구에서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숙박·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다.
대한국 국제는 황제가 각 조약 체결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고 규정하였다.
대한국 국제(1899)는 광무개혁 과정에서 반포되어 대한제국이 전제 군주국이며 황제가 무한한 군권을 가진다는 점을 밝혔다.
- 내시부 폐지와 인재 등용: 갑신정변 때 발표된 14개조 정강의 내용이다.
- 탁지아문의 재정 관할: 제2차 갑오개혁 때 반포된 홍범 14조의 내용이다.
- 칙임관 임명 시 정부 자문: 독립협회가 관민 공동회에서 결의한 헌의 6조의 내용이다.
| 6·25 전쟁 발발 (1950.6.25.) | (가) | 서울수복 (1950.09.28.) | (나) | 휴전협정 체결 (1953.7.27.) |
(가) 시기는 6·25 전쟁 발발부터 서울 수복까지로, 이 사이에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어 서울을 수복하였다.
- 중국군 참전과 서울 후퇴: 서울 수복 이후 중국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주었으므로 (나) 시기의 일이다.
-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에 발표되어 전쟁 발발 이전의 일이다.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유엔군 파병 결정: 전쟁 발발 직후의 일이므로 (가) 시기에 해당한다.
-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 일제에 의한 군대 해산
ㄱ.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ㄴ. 민영환이 일제에 대한 저항을 강력하게 표현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ㄷ. 장지연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ㄹ.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연합 의병 부대(창의군)가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하였다.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1907) 이후의 사실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ㄱ)과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ㄹ)이다.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 전쟁이 확대되었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한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하였으며,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 ㄴ 민영환의 자결: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한 것이므로 두 사건 이전이다.
- ㄷ 시일야방성대곡: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황성신문에 발표되었으므로 두 사건 이전이다.
「농사직설」은 세종 때 정초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농서로,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정리하였다.
나머지 설명은 농서와 저자·내용이 뒤바뀌어 있다.
- 「농가집성」: 효종 때 신속이 편찬하였으며, 고려 말 이암이 원에서 들여온 농서는 「농상집요」이다.
- 「산림경제」: 박세당이 아니라 홍만선이 저술하였으며, 박세당은 「색경」을 지었다.
- 「과농소초」: 홍만선이 아니라 박지원이 저술하였다.
(왕이) 양역을 절반으로 줄이라고 명하셨다. 왕이 말하였다. “호포나 결포는 모두 문제점이 있다. 이제는 1필로 줄이는 것으로 온전히 돌아갈 것이니 경들은 대책을 강구하라.”
양역을 1필로 줄인 균역법을 시행한 왕은 영조이며, 영조는 붕당을 없애자는 탕평론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탕평 정국을 운영하였다.
'호포나 결포는 모두 문제점이 있다'며 양역을 '1필로 줄이는 것'으로 정리한 것은 영조 대 균역법의 시행 과정이다.
- 일당 전제화: 숙종 대 환국 과정에서 나타난 추세이다.
- 두 차례의 예송: 현종 대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관련된 복상 문제로 일어났다.
- 소수 가문 중심의 정치 기반 축소: 19세기 세도 정치 시기의 모습이다.
아! 우리는 본시 모두 사대부였는데 혹은 의(醫)에 들어가고 혹은 역(譯)에 들어가 7, 8대 또는 10여 대를 대대로 전하니 …(중략)… 문장과 덕(德)은 비록 사대부에 비길 수 없으나, 명공(名公) 거실(巨室) 외에 우리보다 나은 자는 없다.
'의(醫)'와 '역(譯)'에 들어가 대대로 전한 '우리'는 중인이며, 중인은 집단으로 상소하여 청요직 허통을 요구하였다.
조선 후기 중인은 축적한 부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여 철종 대에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였다.
- 형평사·형평 운동: 일제 강점기에 백정들이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전개하였다.
- 관권 결탁과 향회 장악: 조선 후기 부를 축적한 부농층이 수령과 결탁하여 향촌에서 영향력을 키운 모습이다.
- 유향소 복립: 조선 전기 사림이 향리를 감찰하고 향촌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추진하였다.
(가)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발족되었다.
(다) ( )
(라) 제헌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에 조직되어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발족보다 앞서므로 (다)에 들어갈 수 없다.
(다)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발족(1945년 10월) 이후, 제헌 헌법 공포(1948년 7월) 이전의 사건이 들어가야 한다.
- 좌우합작 7원칙: 1946년 10월에 발표되어 (다) 시기에 해당한다.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년 2월 김구가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발표하여 (다) 시기에 해당한다.
- 유엔 총회의 남북한 총선거 결의: 1947년 11월의 일로 (다) 시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