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은(는) 신문왕에게 화왕계를 통하여 조언하였다.
- ( ㉡ )은(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두 인물은 모두 6두품 출신으로, 6두품은 관등 승진에서 중위제를 적용받았다.
신문왕에게 '화왕계'를 지어 올린 ㉠은 설총,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린 ㉡은 최치원이다. 6두품은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어, 그 안에서 중아찬·사중아찬 같은 중위를 두어 승진을 보완하였다.
- 왕이 될 수 있는 신분은 성골·진골이다.
- 자색 공복은 대아찬 이상 관등의 복색으로 진골만 입을 수 있었다.
- 중앙 관부의 장관(영)은 진골이 독점하였다.
(가) 낙랑군을 차지하여 한반도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나) ( )
(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였다.
ㄱ. 태학을 설립하였다.
ㄴ. 진대법을 도입하였다.
ㄷ.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ㄹ.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하였다.
(나)에 들어갈 내용은 태학 설립과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한 일이다.
(가)는 '낙랑군'을 차지한 미천왕 때, (다)는 '평양'으로 천도하고 '한성'을 함락한 장수왕 때이다. 그 사이 소수림왕이 태학을 세웠고(372),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군사를 보내 왜를 물리쳤다(400).
- 진대법은 미천왕보다 앞선 고국천왕 때 시행되어 (가) 이전의 일이다.
- 천리장성은 장수왕보다 훨씬 뒤인 고구려 말기(영류왕~보장왕)에 축조되었다.
-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과 더불어 모으되, 가족 숫자의 다과(多寡)와 재산의 빈부에 관계없이 다섯 집마다 한 통(統)을 만들고, 통 안에 한 사람을 골라서 통수(統帥)로 삼아 통 안의 일을 맡게 한다.
- 1리(里) 마다 5통 이상에서 10통까지는 소리(小里)를 삼고, …(중략)… 리(里) 안에서 또 이정(里正)을 임명한다.
-『비변사등록』-
ㄱ. 농민들의 도망과 이탈 방지
ㄴ. 부세와 군역의 안정적인 확보
ㄷ.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 자치 활성화
ㄹ. 향권을 둘러싼 구향과 신향 간의 향전 억제
자료의 제도는 오가작통법으로, 목적은 농민의 도망 방지와 부세·군역의 안정적 확보이다.
'다섯 집마다 한 통'을 만들고 '통수'를 두어 서로 감시하게 함으로써 농민의 이탈을 막고 조세와 군역 부과 대상을 확실히 파악하려 하였다.
- 오가작통은 국가가 향촌 주민을 직접 통제하려는 장치이므로,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 자치 활성화와는 방향이 다르다.
- 구향과 신향의 향전 억제는 이 제도를 시행한 목적으로 제시된 내용이 아니다.
베이징 방면의 인사는 분열을 통탄하며 통일을 촉진하는 단체를 출현시키고 상하이 일대의 인사는 이를 고려하여 개혁을 제창하고 있다. …(중략)… 근본적 대해결로써 통일적 재조를 꾀하여 독립운동의 신국면을 타개하려고 함에는 다만 민의뿐이므로 이에 ( ㉠ )의 소집을 제창한다.
㉠은 국민대표회의(1923)이며, 이 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다.
임시정부의 침체 속에 '통일적 재조'로 '독립운동의 신국면'을 열기 위해 민의를 모으자는 발의로 소집되었다. 임시정부를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새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가 맞서다 결렬되었다.
- 한국국민당은 1930년대 중반 김구가 조직한 정당으로 이 회의와 무관하다.
-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1941년 임시정부가 발표하였다.
-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1919년의 일로 국민대표회의보다 앞선다.
| 연산군 즉위 | (가) | 중종 즉위 | (나) | 효종 즉위 | (다) | 영조 즉위 | (라) | 정조 즉위 |
(다) 시기에 두 차례의 예송이 일어났다는 연결이 옳다.
예송은 효종과 효종비의 상을 계기로 현종 때 기해예송(1659)과 갑인예송(1674)으로 일어났으므로 효종 즉위와 영조 즉위 사이에 든다.
- 현량과는 중종 때 조광조의 건의로 실시되어 (가)가 아니라 (나) 시기에 해당한다.
-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연산군 때 일어나 (나)가 아니라 (가) 시기에 해당한다.
- 신해통공(1791)은 정조 때의 일로 정조 즉위 이후이므로 (라) 시기가 아니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 읍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는데, 이를 책화라 한다.
자료의 나라는 동예이며, 후·읍군·삼로 등의 군장이 하호를 다스렸다.
10월의 제천 행사 '무천', 호랑이 숭배, 다른 읍락을 침범하면 배상하는 '책화'가 동예의 단서이다.
- 제사장 천군이 있었던 나라는 삼한이다.
- 가매장 후 뼈를 추려 목곽에 안치한 가족 공동 무덤은 옥저의 풍습이다.
-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는 편두는 진한·변한의 풍습이다.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의 자문을 받아 다수의 의견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자료는 관민공동회가 결의한 헌의 6조(1898)이며, 그 이후의 사실은 원수부 설치(1899)이다.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중추원 의장', '탁지부에서 전관' 등이 헌의 6조의 단서이다. 대한제국은 이후 광무개혁 과정에서 황제가 군대를 직접 장악하는 원수부를 두었다.
- 군국기무처 중심의 개혁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이어(아관파천)는 1896년의 일이다.
-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은 1896년으로 헌의 6조보다 앞선다.
조정은 중국의 화약 제조 기술을 터득하여 이 기구를 두고, 대장군포를 비롯한 20여 종의 화기를 생산하였으며,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이 기구'는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화통도감이며, 같은 우왕 대에 흥덕사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되었다.
'중국의 화약 제조 기술'을 익히고 '대장군포' 등 화기를 만든 기구라는 점이 단서이다. 화통도감 설치와 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 인쇄는 모두 1377년의 일이다.
- 복원궁 건립은 예종 때의 일이다.
- 교장도감을 두어 속장경을 간행한 것은 의천이 활동한 고려 중기의 일이다.
- 최승로의 시무 28조 수용은 성종 때의 일이다.
갑신정변 이후의 정세가 아닌 것은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이다.
이 장정은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에 맺어져 갑신정변(1884)보다 앞선다.
- 부들러의 조선 중립화 건의는 갑신정변 이후인 1885년의 일이다.
- 영국의 거문도 불법 점령은 1885년에 시작되어 1887년까지 이어졌다.
- 청·일 양군 철수를 정한 톈진조약은 갑신정변 수습 과정에서 1885년에 체결되었다.
두 자료가 모두 독도 영유의 근거인 짝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삼국접양지도이다.
칙령 제41호(1900)는 울도군의 관할 구역에 석도(독도)를 포함시켰고,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해 조선 땅으로 표시하였다.
- 이범윤의 보고문은 간도 관리와 관련된 자료이므로 짝이 성립하지 않는다.
- 미쓰야 협정은 만주 독립군 탄압 협정이고,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는 일본이 독도를 불법 편입한 문서이다.
- 어윤중의 서북경략사 임명은 간도·서북 지역 문제와 관련되어 독도 근거가 아니다.
초기에는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들었는데 그 가치는 포목 100필에 해당하는 고액이었다. 주로 외국과의 교역에 사용되었으며 후에 은의 조달이 힘들어지고 동을 혼합한 위조가 성행하자, 크기를 축소한 소은병을 만들었다.
자료의 화폐는 고려 숙종 때 만든 은병(활구)이며, 고려에서는 서적·차 등을 파는 관영상점을 두었다.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들었고 뒤에 '소은병'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은병의 단서이다.
- 이앙법의 전국적 보급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 시장 감독 기구 동시전은 신라 지증왕 때 설치되었다.
- 청해진은 통일 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가 설치하였다.
그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한 공으로 개국 1등 공신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재상 중심의 관료정치를 주창하였다. 그리고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였다.
밑줄 친 '그'는 정도전이며, 「조선경국전」을 지어 조선의 통치 규범을 마련하였다.
'재상 중심의 관료정치' 주창과 '『불씨잡변』' 저술이 정도전을 가리키는 단서이다.
- 쓰시마 섬 정벌은 세종 즉위 초 이종무가 수행하였다.
- 「삼강행실도」 편찬은 세종 때의 일이다.
- 6진 개척은 세종 때 김종서 등이 추진하였다.
1903년에 우리나라 공식 이민단이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주 노동자들은 사탕수수 농장, 개간 사업장, 철도 공사장 등에서 일하며 한인 사회를 형성하여 갔다. 노동 이민과 함께 사진 결혼에 의한 부녀자들의 이민도 이루어졌다. 또한 한인합성협회 등과 같은 한인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곳'은 하와이이며, 이곳에서 박용만이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였다.
'1903년' 공식 이민단의 도착과 '사탕수수 농장' 노동, 사진 결혼이 하와이 이민의 단서이다.
- 한흥동은 이상설 등이 북만주 밀산부에 세운 독립운동 기지이다.
- 권업회는 연해주에서 조직되었다.
- 경학사와 부민단은 서간도 삼원보 일대에서 만들어졌다.
천체가 운행하는 것이나 지구가 자전하는 것은 그 세가 동일하니, 분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생각건대 9만 리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이처럼 빠르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는 겨우 반경(半徑)밖에 되지 않는데도 오히려 몇 천만 억의 별들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물며 은하계 밖에도 또 다른 별들이 있지 않겠는가!
지전설과 무한 우주론을 편 실학자는 홍대용이며, 그는 「임하경륜」에서 성인 남자에게 2결의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하였다.
'지구가 자전', '은하계 밖에도 또 다른 별들'이라는 표현이 홍대용의 우주관을 보여 준다.
- 「북학의」에서 소비를 통한 생산 촉진을 주장한 인물은 박제가이다.
- 「반계수록」에서 신분별 차등 토지 분배를 주장한 인물은 유형원이다.
- 「우서」에서 상공업 진흥과 농업의 상업적 경영을 주장한 인물은 유수원이다.
≪관보≫ 호외
짐이 생각건대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에 응용함이 급무라. 현재 군대는 용병으로서 상하의 일치와 국가 안전을 지키는 방위에 부족한지라. 훗날 징병법을 발표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할 때까지 황실시위에 필요한 자를 빼고 모두 일시에 해산하노라.
ㄱ. 신돌석과 같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ㄴ. 단발령의 실시로 위정척사 사상에 바탕을 둔 의병 운동이 시작되었다.
ㄷ. 연합 의병 부대인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ㄹ.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 부대의 근거지가 초토화되었다.
자료는 1907년의 군대 해산 조칙이며, 그 이후의 상황은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과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이다.
군대 해산으로 해산 군인이 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이 확대되었고,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진공을 꾀하였다. 일본은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호남 의병을 초토화하였다.
-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등장은 을사늑약 직후 을사의병 때의 일이다.
- 단발령을 계기로 한 의병은 1895년 을미의병이다.
ㄱ.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ㄴ. 일본인 메가타를 재정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외교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ㄷ.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빼앗고 감옥 사무를 장악하였다.
ㄹ.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대한제국의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올바른 순서는 고문 임명 → 고종 강제 퇴위 → 일본인 차관 임명 → 사법권 박탈이다.
- 메가타·스티븐스를 고문으로 임명하게 한 것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다.
-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것은 1907년 7월이다.
-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게 한 것은 고종 퇴위 직후 맺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다.
-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빼앗은 것은 1909년 기유각서이다.
따라서 제1차 한일협약, 고종 퇴위, 한일신협약, 기유각서 순으로 국권 침탈이 진행되었다.
황해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수안군에는 본래 금광이 다섯 곳이 있었다. 올해 여름에 새로 39개소의 금혈을 뚫었는데, 550여 명의 광꾼들이 모여들었다. 도내의 무뢰배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다투어 모여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 이익을 좇는 무리들도 소문을 듣고 몰려온다. …(중략)… 금점을 설치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된 곳에는 촌락이 즐비하고 상인들이 물품을 유통시켜 큰 도회지를 이루고 있다.
조선 후기 경제 상황으로 옳지 않은 것은 사패전을 부농층에 분급하였다는 내용이다.
'금점'을 설치하고 광꾼이 몰려드는 모습은 민간 광산 개발이 활발했던 조선 후기의 상황이다. 사패전은 고려 후기 개간 장려 등을 명목으로 주로 권세가에게 지급된 토지로, 조선 후기 부농층에 분급한 제도가 아니다.
- 밭고랑에 씨를 뿌리는 견종법이 조선 후기에 보급되었다.
- 면화·담배 같은 상품 작물 재배가 확대되었다.
- 일정 액수를 내는 도조법이 일부 지방에서 시행되었다.
신(臣)들이 서경의 임원역 지세를 관찰하니, 이곳이 곧 음양가들이 말하는 매우 좋은 터입니다. 만약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고,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와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
자료의 사상은 풍수지리설이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초제의 근거는 풍수지리설이 아니라 도교이다.
'서경'의 지세가 '음양가들이 말하는 매우 좋은 터'라며 궁궐을 짓자는 주장은 묘청 등이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것이다.
- 풍수지리설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 문종 때 한양에 남경을 설치한 배경에도 풍수지리설이 있었다.
- 공민왕과 우왕 때의 한양 천도 주장도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였다.
계급투쟁은 민족의 내부 분열을 초래할 것이며, 민족의 내쟁은 필연적으로 민족의 약화에 따르는 다른 민족으로부터의 수모를 초래할 것이다. 계급투쟁의 길은 우리가 반드시 취해야 할 필요는 없고, 민족 균등이 실현되는 날 그것은 자연 해소되는 문제다. …(중략)… 이 세계적 기운과 민족적 요청에서 민족사관은 출발하는 것이며, 민족사는 그 향로와 방법을 명백하게 과학적으로 지시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민족사 개론』-
자료의 인물은 『조선민족사 개론』을 쓴 손진태이며, 그는 진단학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계급투쟁을 배격하고 '민족 균등'을 내세우는 신민족주의 사관이 손진태의 단서이다.
-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는 신채호의 저술이다.
- 유교 구신론은 박은식이 주장하였다.
- 「5천년간 조선의 얼」을 동아일보에 연재한 인물은 정인보이다.
고려시대 의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청천강변에 위치한다는 내용이다.
의주는 청천강이 아니라 압록강 하류 연안에 위치한 국경 지대였다.
- 서희가 확보한 강동 6주 가운데 흥화진이 의주 일대에 있었다.
- 고려는 요와의 교역을 위해 이곳에 각장을 두었다.
- 요가 차지했던 보주(의주) 지역을 요·금 분쟁을 틈타 회복하려 하였고, 예종 때 이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