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옳은 것은 강화 부근리의 탁자식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굄돌 위에 덮개돌을 얹은 대표적인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다.
- 연천 전곡리의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유물이다.
- 창원 다호리의 붓은 철기시대(초기 철기) 유물로, 한자 사용을 보여 준다.
- 서울 암사동의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유물이다.
(가) 음력 12월에 지내는 제천행사가 있는데, 이를 영고라고 한다. 이때에는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나) 해마다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이라고 한다.
- 『삼국지』 -
옳은 것은 (나) 나라에서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책화로 변상하게 한 사실이다.
12월 제천행사 '영고'는 부여, 10월 제천행사 '무천'은 동예의 풍속이며, 책화는 동예의 대표적 풍속이다.
- 5부와 계루부의 왕위 차지는 고구려의 사실이다.
- 신지·읍차 같은 정치적 지배자는 삼한에 있었다.
- 죄인이 소도에 들어가면 잡아가지 못한 것은 삼한의 풍속이다.
이자겸, 척준경이 말하기를 “금이 예전에는 작은 나라여서 요와 우리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갑자기 흥성하여 요와 송을 멸망시켰다. …(중략)…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도이니, 마땅히 우선 사절을 보내야 합니다.”라고 하니 ( 가 )이/가 그 의견을 따랐다.
- 『고려사』 -
(가) 왕은 고려 인종이며, 이 시기에 서경에 대화궁을 짓게 하고 칭제건원이 주장되었다.
'이자겸, 척준경'이 금에 대한 사대를 건의하고 왕이 이를 따랐다는 데서 인종 대임을 알 수 있으며, 인종 때 묘청 등 서경파가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을 내세웠다.
- 도평의사사 중심의 정치는 고려 후기 권문세족 집권기의 모습이다.
- 성리학 수용과 「주자가례」 보급은 고려 말 신진 사대부 시기의 일이다.
- 몽골 침략에 맞선 강화도 천도는 고종 때 최씨 무신 정권이 단행하였다.
상쾌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조선은 일본의 총칼 아래 민족정신을 무참하게 유린당했다. …(중략)… 조선민족은 독립항쟁을 줄기차게 계속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 네루, 『세계사 편력』 -
㉠은 1919년 3·1 운동이며, 그 이후의 사실이 아닌 것은 임병찬의 독립의군부 조직이다.
임병찬은 고종의 밀지를 받아 1912년에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으므로 3·1 운동보다 앞선다.
-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 전반(1923)에 일어났다.
- 정우회 선언은 1926년에 발표되어 신간회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는 1920년대 전반(1923)에 창립되었다.
세조가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법의 과목(科目)이 너무 번잡하고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상세히 살펴 다듬어 자손만대의 성법(成法)을 만들고자 한다.”라고 하셨다. 「형전(刑典)」과 「호전(戶典)」은 이미 반포되어 시행하고 있으나 나머지 네 법전은 미처 교정을 마치지 못했다. 이에 성상(聖上)께서 세조의 뜻을 받들어 여섯 권의 법전을 완성하게 하여 중외에 반포하셨다.
'성상'은 성종이며, 성종 대에 국가 의례를 정비한 「국조오례의」가 편찬되었다.
세조 때 「형전」·「호전」만 먼저 시행되고 나머지를 완성해 여섯 법전을 반포했다는 것은 「경국대전」 완성을 가리키므로 성종 대이다.
- 「동국병감」은 문종 대에 편찬된 병서이다.
- 「동몽선습」은 중종 대 박세무가 지은 아동 교재이다.
- 「삼강행실도」는 세종 대에 편찬된 윤리서이다.
비로소 직관(職官)·산관(散官) 각 품(品)의 ( 가 )을/를 제정하였는데, 관품의 높고 낮은 것은 논하지 않고 다만 인품만 가지고 그 등급을 결정하였다.
- 『고려사』 -
(가)는 고려 경종 때의 시정 전시과로, 4색 공복을 기준으로 지급 결수를 정하였다.
'직관·산관'을 모두 대상으로 하고, 관품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인품을 기준으로 등급을 정했다는 점이 시정 전시과의 특징이다.
- 산관을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고 무반 차별을 개선한 것은 문종 때의 경정 전시과이다.
-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 지방에 한해 지급한 것은 고려 말의 과전법이다.
- 건국 과정의 충성도와 공로에 따라 지급한 것은 태조 때의 역분전이다.
| 을미사변 발발 | (가) | 을사조약 강제 체결 | (나) |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 전개 |
옳은 것은 (가) 시기에 황국중앙총상회가 조직된 사실이다.
(가)는 을미사변(1895)부터 을사조약(1905) 사이, (나)는 을사조약부터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1908) 사이이며, 황국중앙총상회는 1898년 시전 상인들이 상권 수호를 위해 조직하였다.
-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된 것은 국권 피탈 이후(1911)이므로 (가) 시기가 아니다.
- 조병식의 방곡령은 1889년으로 을미사변보다 앞서므로 (나) 시기가 아니다.
- 보안회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운동은 1904년으로 (가) 시기에 해당하므로 (나) 시기가 아니다.
( 가 )은/는 흑수말갈이 당과 통하려고 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또한 일본에 사신 고제덕 등을 보내 “여러 나라를 관장하고 여러 번(蕃)을 거느리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옛 습속을 지니고 있다.”라고 하여 강국임을 자부하였다.
(가)는 발해 무왕이며, 이 왕 때 장문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흑수말갈' 정벌과 일본에 보낸 국서의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 표현은 무왕 대의 사실로, 흑수말갈 문제로 당과 대립하자 무왕은 장문휴를 보내 산둥의 등주를 쳤다.
-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로 바꾼 것은 무왕 이전 고왕(대조영) 때의 일이다.
- 신라가 급찬 숭정을 발해에 보낸 것은 9세기 초 신라 헌덕왕 때로 무왕 대가 아니다.
- '대흥' 연호는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이 사용하였다.
아군은 사도하자에 주둔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새벽에 적군은 황가둔에서 이도하 방면을 거쳐 사도하로 진격하여 왔다. 그런데 적군은 아군이 세운 작전대로 함정에 들어왔고, 이에 일제히 포문을 열어 급습함으로써 적군은 응전할 사이도 없이 격파되었다.
사도하자 전투를 이끈 부대는 한국독립군으로, 한국독립당 산하 부대로서 동경성 전투도 수행하였다.
지청천이 이끈 한국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사도하자·동경성·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 양세봉이 총사령관이었던 부대는 조선혁명군이다.
- 미쓰야 협정(1925)은 1930년대 초에 활약한 한국독립군보다 앞선 시기의 일이다.
-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창설한 부대는 조선의용대이다.
- ㉠서울 안팎과 번화한 큰 도시에 파·마늘·배추·오이 밭 따위는 10묘의 땅에서 얻은 수확이 돈 수만을 헤아리게 된다. 서도 지방의 ㉡담배 밭, 북도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 밭, 황주의 지황 밭에서의 수확은 모두 상상등전(上上等田)의 논에서 나는 수확보다 그 이익이 10배에 이른다.
- 작은 보습으로 이랑에다 고랑을 내는데, 너비 1척, 깊이 1척이다. 이렇게 한 이랑, 즉 1묘 마다 고랑 3개와 두둑 3개를 만들면, 두둑의 높이와 너비는 고랑의 깊이와 너비와 같아진다. 그 뒤 ㉣고랑에 거름 재를 두껍게 펴고, 구멍 뚫린 박에 조를 담고서 파종한다.
옳지 않은 것은 ㉠과 관련해 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했다는 설명이다.
정조 때의 신해통공(1791)은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조치로, 육의전의 특권은 유지되었다.
- ㉡ 담배는 조선 후기 인삼과 함께 대표적인 상업 작물로 재배되었다.
- ㉢ 고구마의 재배법은 강필리의 「감저보」, 김장순의 「감저신보」 등에 기술되었다.
- ㉣ 고랑에 씨를 뿌리는 견종법은 밭농사의 생산력을 높인 농법이었다.
옳지 않은 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단군의 건국 과정을 다루었다는 설명이다.
「동명왕편」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주몽)의 건국 영웅 서사를 읊은 장편 서사시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낸 작품이다.
-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우리 역사를 단군 조선부터 서술하였다.
-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단군 정통론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을 단군 기원으로 환산한 '조선건국 4252년'으로 표기하였다.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는 하늘의 명령과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서 반드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런 뒤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서 제왕의 지위를 얻고 대업을 이루었다. …(중략)… 삼국의 시조들이 모두 신이(神異)한 일로 탄생했음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이것이 책 첫머리에 「기이(紀異)」편이 실린 까닭이며, 그 의도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시문은 일연의 『삼국유사』로, 불교 중심의 고대 민간 설화를 수록한 사서이다.
삼국 시조의 '신이'한 탄생을 긍정하며 첫머리에 「기이」편을 둔 까닭을 밝힌 부분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서문이다.
- 승려의 전기를 수록한 고승전은 각훈의 『해동고승전』이다.
- 『삼국유사』는 고조선부터 삼국·후삼국 무렵까지를 다루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사서가 아니다.
- 유교적 사관에 기초한 기전체 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제시하며 정부와 ( 가 )을/를 맺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해산하였다.
(가)는 전주 화약이며, 그 이후의 사실은 남접군과 북접군이 논산에서 합류한 것이다.
전주 화약 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은 2차 봉기를 일으켰고, 이때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논산에서 연합하였다.
- 황토현 전투에서 감영군을 격파한 것은 전주 화약 이전 1차 봉기 때이다.
- 조병갑이 만석보 수세를 강제로 거둔 것은 고부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전주 화약 이전이다.
- 안핵사 이용태가 농민을 동학도로 몰아 처벌한 것은 1차 봉기의 계기로 전주 화약 이전이다.
| 국호 '신라' 확정 | 9주 5소경 설치 | ( 가 ) | 대공의 난 발발 | 독서삼품과 실시 |
(가)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은 것은 백성에게 정전을 처음 지급한 것이다.
(가)는 신문왕 때 9주 5소경이 정비된 뒤부터 혜공왕 때 대공의 난(768) 이전까지이며, 정전 지급은 성덕왕 때(722)의 일이다.
- 시장 감독 관청인 동시전 설치는 지증왕 때로 (가)보다 앞선다.
-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 때 제정되었다.
- 청주 거로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삼은 것은 소성왕 때로 대공의 난 이후이다.
옳지 않은 것은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 무왕 왕후의 사리기가 발견되었다는 설명이다.
백제 무왕의 왕후가 사리를 봉안했다는 사리봉영기가 나온 곳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다.
-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원의 석탑 양식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시대 주심포식 목조 건물이다.
- 김제 금산사 미륵전은 겉보기에 다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통하는 구조이다.
주세붕이 비로소 ( 가 )을/를 창건할 적에 세상에서 자못 의심했으나, 그의 뜻은 더욱 독실해져 무리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비방을 극복하여 전례 없던 장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중략)… 최충, 우탁,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같은 이가 살던 곳에 ( 가 )을/를 건립하게 될 것입니다.
- 『퇴계집』 -
(가)는 서원으로, 학문 연구와 선현 제사를 위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주세붕'이 처음 창건했다는 것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가리키며, 이황은 선현의 연고지에 서원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 지방 군현에 설치된 관학은 향교이다.
- 「천자문」 등으로 초보 교육을 한 것은 서당이다.
- 성적 우수자에게 과거 초시를 면제해 준 혜택은 관학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설 기관인 서원의 특징이 아니다.
(가) 강화도 조약에 이어 몇 달 뒤 체결되었다.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가능하게 한 규정과 일본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들어 있었다.
(나)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 오면서 그 내용의 영향으로 체결되었으며, 청의 적극적인 알선이 있었다. 거중조정 조항과 최혜국 대우의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는 조·일무역규칙, (나)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이다.
(가)는 강화도 조약 직후 체결되어 양곡의 무제한 유출과 일본 정부 소속 선박의 항세 면제를 규정하였고, (나)는 『조선책략』의 영향과 청의 알선으로 체결되어 거중조정과 최혜국 대우 조항을 담았다.
- 조·일수호조규부록은 개항장 일본인 거류지 설정과 일본 화폐 유통 등을 규정한 것으로 (가)의 내용과 다르다.
- 조·러수호통상조약은 청의 알선 없이 직접 체결되었으며 『조선책략』의 영향으로 맺은 조약이 아니다.
| 1566년(31세) | ㉠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다. |
| 1568년(33세) | ㉡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외할머니 이씨의 병환 소식을 듣고 사퇴하다. |
| 1569년(34세) | 동호독서당에 머물면서 『동호문답』을 찬진하다. |
| 1574년(39세) | ㉢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어 「만언봉사」를 올리다. |
| 1575년(40세) | ㉣ 홍문관 부제학에서 사퇴하고 『성학집요』를 편찬하다. |
옳은 것은 ㉡ 이조좌랑이 삼사의 관리를 추천하는 권한을 가졌다는 설명이다.
이조 전랑(정랑·좌랑)은 삼사 관원 후보를 천거하는 통청권과 후임자 추천권을 가져 붕당 간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 ㉠ 사간원은 간쟁을 맡은 기관으로, 왕명 출납과 비서 업무는 승정원이 담당하였다.
- ㉢ 승정원은 왕명 출납 기관이며, 간쟁과 관원 감찰은 사간원·사헌부의 업무이다.
- ㉣ 홍문관은 경연과 자문을 맡았고, 서적 출판·간행은 교서관의 업무였다.
무릇 동양의 수천 년 교화계(敎化界)에서 바르고 순수하며 광대 정밀하여 많은 성현들이 전해주고 밝혀 준 유교가 끝내 인도의 불교와 서양의 기독교와 같이 세계에 큰 발전을 하지 못함은 어째서이며 …(중략)… 유교계에 3대 문제가 있는지라. 그 3대 문제에 대하여 개량하고 구신(求新)을 하지 않으면 우리 유교는 흥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제시문의 저자는 박은식이며, 그는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라고 주장하였다.
유교계의 3대 문제를 개량하고 '구신(求新)'할 것을 촉구한 글은 박은식의 「유교구신론」이며, 그는 『한국통사』에서 국혼을 강조하였다.
- '조선얼'을 강조하며 조선학 운동을 펼친 인물은 정인보이다.
- 주석·부주석 체제의 임시정부에서 주석을 지낸 인물은 김구이다.
- 「독사신론」을 써서 민족을 역사 서술의 주체로 설정한 인물은 신채호이다.
(가)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다.
(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라)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제의하였다.
시기순 배열은 (나) → (다) → (가) → (라)이다.
각 사건의 시기는 다음과 같다.
- (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결성: 1945년 8월 광복 직후
- (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년 12월
- (가) 좌우합작 7원칙 발표: 1946년 10월
- (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 1948년 초, 유엔 소총회의 남한 단독 선거 결정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