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두만강 가의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진에서 한반도 최초로 ( 가 )시대 유물인 석기와 골각기 등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일본에서는 ( 가 )시대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가)는 구석기 시대로, 이 시기 사람들은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채집으로 식량을 얻었다.
'종성군 동관진'은 1935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구석기 유물(석기·골각기)이 확인된 유적이다. 구석기인은 농경을 몰랐으므로 이동 생활을 하며 자연에서 먹을거리를 구하였다.
- 반달 돌칼로 벼를 수확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 갈돌과 갈판으로 곡물을 간 것은 신석기 시대 이후의 모습이며, 옥수수는 당시 한반도에 없던 작물이다.
- 영혼 숭배와 흙 그릇(독무덤 등)에 시신을 묻는 풍습은 신석기 시대 이후의 일이다.
신종 원년 사노비 만적 등이 북산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공사의 노비들을 모아 모의하기를, “우리가 성 안에서 봉기하여 먼저 ( 가 ) 등을 죽인다. 이어서 각각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태워 삼한에서 천민을 없게 하자. 그러면 공경장상이라도 우리가 모두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는 최충헌으로, 집권 직후 명종에게 봉사십조를 올려 사회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신종 원년', '사노비 만적'이 단서이다. 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로, 개경에서 봉기해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천적을 불태우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 정방을 설치해 인사권을 장악한 인물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이다.
- 치안 유지를 위해 야별초를 조직한 것도 최우이다.
- 이의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인물은 정중부이다.
조선 전기에는 서거정 등이 『동문선』을 편찬해 우리 문학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동문선』은 성종 때 삼국 시대부터 조선 초까지의 시문 가운데 뛰어난 것을 골라 엮은 책으로, 우리 글이 중국 글과 다른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의식을 담았다. 나머지 설명은 모두 조선 후기 문화의 특징이다.
- 『어우야담』 같은 야담·잡기류는 17세기 이후 성행하였다.
- 『지봉유설』 등 유서(類書) 형태의 백과사전은 조선 후기 실학의 발달과 함께 널리 편찬되었다.
- 중인층이 시사를 조직해 문학 활동을 벌인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군신, 부자, 부부, 붕우, 장유의 윤리는 인간의 본성에 부여된 것으로서 천지를 통하는 만고불변의 이치이고,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도(道)가 됩니다. 이에 대해 배, 수레, 군사, 농사, 기계가 국민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이롭게 하는 것은 외형적인 것으로서 기(器)가 됩니다. 신이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것은 기(器)이지 도(道)가 아닙니다.
자료의 사상은 동도서기론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근대 문물 수용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삼강오륜 같은 윤리는 바꿀 수 없는 '도(道)'로 지키고, 배·수레·군사·기계 같은 '기(器)'만 변혁하겠다는 주장이다. 전통 유교 질서를 유지하면서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하자는 온건 개화파의 논리로,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였다.
- 일본과 서양이 같다는 왜양일체론은 개항에 반대한 위정척사 세력의 주장이다.
-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는 서양의 제도와 사상까지 받아들이자는 문명개화론에 가까웠다.
- 우등한 사회가 열등한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본 것은 사회 진화론이다.
5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개경 내의 사람들이 역질에 걸렸으니 마땅히 ( 가 )을/를 설치하여 이들을 치료하고, 또한 시신과 유골은 거두어 묻어서 비바람에 드러나지 않게 할 것이며, 신하를 보내어 동북도와 서남도의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라.”라고 하였다.
- 『고려사』 -
(가)는 구제도감으로, 고려 시대 역병이 돌 때 임시로 설치하여 환자를 치료하고 시신을 거두어 묻게 한 기관이다.
자료의 '역질에 걸렸으니 마땅히 (가)를 설치하여', '시신과 유골은 거두어 묻어서'가 단서이다. 상설 기구가 아니라 재난이 생길 때마다 '도감' 형태로 세운 구휼 기관이다.
- 의창은 흉년에 곡식을 빌려주는 춘대추납의 빈민 구제 기관이다.
- 제위보는 기금을 마련해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한 기관이다.
- 혜민국은 백성에게 약을 지어 주던 의료 기관으로, 시신 매장 같은 재난 수습과는 거리가 있다.
장수왕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왕도인 이 지역을 함락시켜, 개로왕을 살해하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이 지역'은 백제의 도읍 한성(지금의 서울)으로, 고려 문종 때 이곳에 남경이 설치되었다.
'장수왕', '개로왕을 살해'가 단서이다.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하자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는 뒤에 이 지역을 양주에서 남경으로 승격시켜 3경의 하나로 삼았다.
- 망이·망소이가 봉기한 곳은 공주 명학소이다.
- 지눌이 수선사 결사를 이끈 곳은 순천 송광산이다.
- 고려 태조가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은 곳은 서경(평양)이다.
그들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응전하면서 성벽에 올라 미군에게 돌을 던졌다. 창칼로 상대하는데 창칼이 없는 병사들은 맨손으로 흙을 쥐어 적군 눈에 뿌렸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드는 적군에게 죽기로 싸우다 마침내 총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자료의 사건은 고종 때의 신미양요이며, 같은 시기 흥선 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해 양반의 군포 면제 특권이 폐지되었다.
'성벽에 올라 미군에게' 맞선 조선군의 항전은 1871년 미군이 강화도 광성보를 공격한 신미양요를 묘사한 것이다. 대원군은 같은 무렵 군포를 집집마다 걷는 호포제로 바꾸어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렸다.
- 금난전권을 제한한 통공 정책은 정조 때 시행되었다.
- 지주에게 결작을 부과한 것은 영조 때 균역법의 보완책이다.
- 전세를 토지 1결당 4~6두로 고정한 영정법은 인조 때 제정되었다.
| 낙랑군 축출 | (가) |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 (나) | 살수 대첩 승리 | (다) | 안시성 전투 승리 | (라) | 고구려 멸망 |
(라) 시기의 사실로 제시된 매소성 전투는 고구려 멸망 이후의 일이므로 옳지 않다.
기준 사건은 낙랑군 축출(313), 광개토대왕릉비 건립(414), 살수 대첩(612), 안시성 전투(645), 고구려 멸망(668) 순이다. 신라가 매소성에서 당군을 격파한 것은 나당 전쟁 중인 675년으로, (라) 구간을 벗어난다.
- 백제 침류왕의 불교 수용(384)은 낙랑군 축출과 능비 건립 사이로 (가)에 해당한다.
- 고구려 영양왕의 요서 선제공격(598)은 능비 건립과 살수 대첩 사이로 (나)에 해당한다.
- 백제의 대야성 함락(642)은 살수 대첩과 안시성 전투 사이로 (다)에 해당한다.
신(臣)이 이 책을 편수하여 바치는 것은 …(중략)… 중국은 반고부터 금국에 이르기까지, 동국은 단군으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처음 일어나게 된 근원을 간책에서 다 찾아보아 같고 다른 것을 비교하여 요점을 취하고 읊조림에 따라 장을 이루었습니다.
'이 책'은 이승휴의 『제왕운기』로, 원 간섭기에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중국은 반고부터 금국에', '동국은 단군으로부터 본조에', '읊조림에 따라 장을 이루었다'가 단서이다. 중국사와 우리 역사를 나누어 시로 읊은 역사서로,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단군에서 찾았다.
- 성리학적 유교 사관으로 대의명분을 강조한 것은 이제현의 『사략』 등 고려 말 성리학자의 사서이다.
- 국왕·훈신·사림의 합의로 통사 체계를 세운 책은 조선 성종 때의 『동국통감』이다.
- 왕명으로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를 노래로 정리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동국세년가』이며, 『제왕운기』는 개인이 지어 바친 책이다.

미곡 수집제 폐지와 토지 개혁을 요구한 대규모 시위는 1946년 가을의 대구 10월 사건으로, 그래프에 표시된 기간 이후의 일이다.
그래프는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부터 1946년 1월까지 식료품·연료·곡물의 물가 지수가 계속 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시기에는 귀환 인구 증가, 남북 분단에 따른 생산 위축, 통화 남발이 겹쳐 극심한 물가 상승이 나타났다.
-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가 급증하면서 식량이 부족해졌다.
- 38도선 분할 점령으로 남북 경제가 단절되어 생산이 크게 위축되었다.
- 미군정이 재정 적자를 메우려고 화폐를 과도하게 발행해 물가를 끌어올렸다.
나라 안의 여러 군현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으니 창고가 비어 버리고 나라의 쓰임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독촉하자, 이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밑줄 친 '왕'은 신라 진성여왕이며, 이 시기에 최치원이 시무책 10여 조를 건의하였다.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이 단서이다. 진성여왕 때 조세 독촉으로 농민 봉기가 잇따랐고, 6두품 최치원은 개혁안인 시무책을 올렸으나 진골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것은 10세기 전반(926)으로 신라 경애왕 때이다.
- 국학을 설치한 왕은 신문왕이다.
- 장보고의 건의로 청해진을 설치한 왕은 흥덕왕이다.
ㄱ. 일본의 은주시청합기(1667년)
ㄴ. 일본의 삼국접양지도(1785년)
ㄷ. 일본의 태정관 지령문(1877년)
ㄹ.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1905년)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보여 주는 자료는 은주시청합기, 삼국접양지도, 태정관 지령문이다.
세 자료는 모두 일본 측이 남긴 것으로 독도를 일본 영역 밖으로 보았다. 은주시청합기는 일본의 서북 경계를 오키섬(은주)으로 기록했고, 삼국접양지도는 울릉도·독도를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했으며, 태정관 지령은 '울릉도 외 1도'가 일본과 관계없다고 밝혔다.
- 시마네현 고시는 러일 전쟁 중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자국 영토에 편입한 문서로, 오히려 불법 편입의 근거로 비판받는 자료이다.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한글 신문의 발행이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 가 )이/가 창간되었다. ( 가 )은/는 자치운동을 모색하던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실어 비판받기도 하였으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제로부터 정간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가)는 동아일보로, 1930년대 초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실은 일과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정간당한 일이 단서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 조선일보와 함께 창간된 민간 한글 신문으로, 학생들을 농촌에 보내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을 벌였다.
- 「한글원본」을 만들어 문자 보급 운동을 벌인 것은 조선일보이다.
- 「개벽」·「신여성」·「어린이」는 천도교 계열의 개벽사가 펴낸 잡지이다.
- 신간회 결성 뒤 그 본부 같은 역할을 한 신문은 조선일보이다.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요청해 얻고 돌아와서 ( 가 )을/를 보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뜻에 달렸는데, 살아 돌아와 다시 공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 가 )이/가 대답하기를, “저는 나라의 위엄과 신령함에 의지하여 두 차례 백제와 크게 싸워 20 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품석 부부의 유골이 고향으로 되돌아왔으니 천행입니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
(가)는 김유신으로, 660년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군을 물리쳤다.
김춘추가 당에서 돌아와 반긴 인물이며, 백제와 싸워 '품석 부부의 유골'을 되찾아 왔다는 말이 단서이다. 대야성 전투에서 죽은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백제 장수와 교환해 돌려받은 인물이 김유신이다.
- 화랑이 지킬 세속오계를 제시한 인물은 승려 원광이다.
-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물은 김춘추(태종 무열왕)이다.
- 당에서 숙위하다가 부대총관이 되어 돌아온 인물은 김인문이다.
오래도록 막혀 있으면 반드시 터놓아야 하고, 원한은 쌓이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 가 )와/과 ( 나 )에게 벼슬길이 막히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편벽된 일로 이제 몇백 년이 되었다. ( 가 )은/는 다행히 조정의 큰 성덕을 입어 문관은 승문원, 무관은 선전관에 임명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 ( 나 )은/는 홀로 이 은혜를 함께 입지 못하니 어찌 탄식조차 없겠는가?
유득공·박제가·이덕무는 서얼 출신이므로, 이들을 (나)에 해당하는 인물로 든 설명이 옳지 않다.
먼저 승문원·선전관 임명이 허용되었다는 (가)는 서얼이고, 이를 부러워하며 은혜를 입지 못했다고 탄식하는 '우리들' (나)는 중인이다. 조선 후기 서얼의 허통 운동이 성과를 거두자 중인도 철종 때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였다.
-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이 성과를 내면서 중인의 통청 운동에 자극을 주었다.
- 서얼은 여러 차례 집단 상소를 올려 관직 진출 제한을 없애 달라고 요구하였다.
- 중인은 역관·의관 등 기술직에 종사하며 쌓은 재산과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그러므로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마음대로 귀천을 나눔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 도인은 차별을 없애고 선사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기를 바라노라.
자료의 사상은 동학이며, 동학의 경전으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편찬되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신분 차별을 없애자는 평등 주장이 단서이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이 교조의 가르침을 경전(『동경대전』)과 가사집(『용담유사』)으로 정리하였다.
- 순조 즉위 직후 대탄압(신유박해)을 받은 것은 천주교이다.
- 몰락 양반 홍경래가 평안도에서 일으킨 난은 동학 창시 이전의 일로, 서북민 차별에 대한 반발이 배경이다.
- 단성에서 시작해 진주로 번진 임술 농민 봉기는 삼정의 문란이 원인이었으며, 동학을 근거로 한 봉기가 아니다.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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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침체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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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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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협력 개발 기구에 가입하다.
(가)에 들어갈 내용은 19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이다.
수출 100억 달러 돌파는 1977년, 제2차 석유 파동은 1979~1980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은 1996년이다. 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3저 호황은 1986~1988년으로 그 사이에 들어간다.
-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1970년대 전반에 실시되어 수출 100억 달러 돌파보다 앞선다.
- 베트남 파병과 브라운 각서 체결은 1960년대 중반의 일이다.
- 한일 기본 조약 체결도 1965년으로 첫 단계보다 앞선다.
제1조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그 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함
제2조 전조의 제1항의 목적으로 그 목적한 사항의 실행에 관하여 협의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함
자료의 법령은 치안 유지법(1925)이며, 그 시행 기간 중인 1943년에 학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었다.
'국체를 변혁', '사유재산제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를 처벌한다는 조항이 단서이다. 치안 유지법은 사회주의와 민족 운동을 탄압하려고 1925년 제정되어 광복 때까지 시행되었고, 학도 지원병제는 중일 전쟁 이후 전시 동원 체제에서 나왔다.
- 조선 태형령은 1910년대 무단 통치기(1912)에 공포되었다.
- 경성 제국 대학은 1924년 예과를 열며 설립되어 법령 시행보다 앞선다.
- 물산 장려 운동은 1920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 사람 이극천이 향전(鄕戰) 때문에 투서하여 그와 알력이 있는 사람들을 무고하였는데, 내용이 감히 말할 수 없는 문제에 저촉되었다.
경재소와 유향소를 연결해 지방을 통제한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므로, 조선 후기 향촌 사회의 설명으로 옳지 않다.
'향전(鄕戰)'은 조선 후기 기존 사족(구향)과 새로 성장한 부농층(신향)이 향촌 주도권을 두고 벌인 다툼이다. 이 시기에는 사족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커졌으며, 경재소는 이미 17세기 초에 폐지된 상태였다.
- 향전 과정에서 수령이 신향을 이용하면서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 신향층은 수령 및 향리층과 결탁해 향회를 장악하려 하였다.
- 재지 사족은 동계·동약을 통해 촌락 단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우리는 3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영·미·소·캐나다 기타 제국의 대일 선전이 일본을 격패케 하고 동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여 이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 단위로서 추축국에 선전한다.
2. 1910년의 합방 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며 아울러 반(反) 침략 국가인 한국에 있어서의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중략)…
5. 루스벨트·처어칠 선언의 각조를 견결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키 위하여 이것을 적용하여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축원한다.
김구를 주석으로 한 단일 지도 체제 수립과 대한민국 건국 강령 제정은 자료 발표 이전의 일이므로 해당하지 않는다.
자료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발표한 대일 선전 성명서이다. 임시 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주석 중심 체제를 갖추었고, 1941년 11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 조선의용대 병력의 한국광복군 합류는 1942년의 일이다.
-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광복군이 파견된 것은 1943년이다.
- 조선독립동맹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바탕으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한 것은 194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