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후반 가야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한 이 나라는 낙동강 유역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철을 활용하여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다.
밑줄 친 '이 나라'는 대가야이며, 대가야는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어 멸망하였다.
'5세기 후반 가야의 주도 세력',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라는 단서는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킨다. 금관가야가 쇠퇴한 뒤 대가야가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으나 562년 신라에 정복되었다.
- 사비 천도와 남부여로의 국호 변경은 백제 성왕의 업적이다.
-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구역은 발해의 제도이다.
-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은 고구려 장수왕 때의 일이다.
고려에서는 성종 때 건원중보가 발행되었으나 자급자족적 경제 구조 탓에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고려는 이후 숙종 때에도 해동통보·삼한통보 같은 동전과 은병(활구)을 만들었지만, 일반 거래에서는 여전히 곡식과 삼베가 주로 쓰였다.
-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 때 을파소의 건의로 시행된 구휼 제도이다.
- 덕대제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광산 경영 방식이다.
- 「농사직설」은 조선 세종 때 편찬된 농서이다.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는 실로 아시아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어 그 형세가 반드시 다툼을 불러올 것이다.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동(中東)의 형세도 위급해진다. 따라서 러시아가 강토를 공략하려 한다면 반드시 조선이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다. …(중략)…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조선의 책략은 무엇인가? 오직 중국과 친하며,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합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하는 길뿐이다.
제시된 자료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으로, 이 책의 유포는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의 반발(영남 만인소)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조선의 책략', '중국과 친하며,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합함'이라는 단서는 러시아 견제를 위해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을 주장한 「조선책략」의 핵심 내용이다.
- 「조선책략」은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들여온 책이므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전에 퍼질 수 없었다.
- 척화비는 신미양요 직후인 1871년에 세워져 「조선책략」 유입보다 앞선다.
- 「조선책략」을 들여와 소개한 인물은 영선사 김윤식이 아니라 수신사 김홍집이다.
정부의 개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구식 군인과 도시 하층민이 반발하였다.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한 구식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고 도시 하층민이 여기에 합세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였다. 또 (가)을 체결하여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문화하고 청 상인의 내륙 진출을 인정받았다.
(가)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과 청이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다.
'구식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고', '청군에 의해 진압'은 1882년 임오군란을 가리키며, 같은 해 체결된 이 장정은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문화하고 청 상인의 내륙 진출을 허용하였다.
- 한성 조약은 갑신정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은 조약이다.
- 톈진 조약은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양국 군대의 철수 등을 약속한 조약이다.
- 제물포 조약은 임오군란 뒤 일본과 맺은 조약으로, 배상금 지급과 일본 공사관 경비병 주둔을 규정했을 뿐 청의 속방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황산 대첩은 1380년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싸움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보다 앞선 일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는 전제 개혁과 반대파 제거를 거쳐 조선을 건국하였다.
- 과전법은 회군 이후인 1391년에 실시되었다.
- 정몽주는 1392년 이방원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 한양 천도는 조선 건국 후인 1394년에 이루어졌다.
이 날을 목 놓아 우노라[是日也放聲大哭]. …(중략)… 천하만사가 예측하기 어려운 것도 많지만, 천만 뜻밖에 5개조가 어떻게 제출되었는가. 이 조건은 비단 우리 한국뿐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할 조짐을 점차 만들어 낼 것이니 이토[伊藤] 후작의 본의는 어디에 있는가?
논설은 「시일야방성대곡」이며, 이를 쓴 장지연은 「황성신문」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이 날을 목 놓아 우노라[是日也放聲大哭]', '5개조', '이토[伊藤] 후작'이라는 단서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규탄하며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을 가리킨다.
- 「한성순보」는 정부 기관인 박문국에서 발행한 신문으로 장지연이 창간한 것이 아니다.
-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저술한 역사서이다.
- 「독사신론」은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글이다.
- 왕은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중단되었던 경연을 다시 열었다.
- 왕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등용하였다.
밑줄 친 '왕'은 조선 성종이며, 그의 재위 기간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 설치', '중단되었던 경연을 다시 열었다',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 등용'은 모두 성종의 정책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때 노사신 등이 편찬한 인문 지리서이다.
- 「대전통편」은 정조 때 편찬된 법전이다.
- 「동사강목」은 영·정조 시기 안정복이 저술한 역사서이다.
- 「훈민정음운해」는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음운 연구서이다.
웅천주 도독 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아래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 ㄱ. 천민이 중심이 된 신분 해방 운동 성격을 가졌다.
- ㄴ. 반란 세력은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였다.
- ㄷ. 주동자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났다.
- ㄹ. 무열왕 직계가 단절되고 내물왕계가 다시 왕위를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밑줄 친 '반란'은 신라 헌덕왕 때의 김헌창의 난이며, 옳은 설명은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한 것과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불만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웅천주 도독 헌창'이 반란의 단서이다.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웅천주(공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 천민이 중심이 된 신분 해방 운동은 고려 무신 집권기 만적의 난 같은 사례에 해당하며 김헌창의 난과 관계가 없다.
- 무열왕 직계가 단절되고 내물왕계가 왕위를 차지한 것은 혜공왕이 피살된 뒤 선덕왕이 즉위한 때의 일로, 김헌창의 난의 결과가 아니다.
홍서봉 등이 한(汗)의 글을 받아 되돌아왔는데, 그 글에, “대청국의 황제는 조선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알린다. 짐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다.”라고 하였다.
자료는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보낸 글이며, 이 사건 이후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한(汗)', '대청국의 황제', '정벌하러 온 것'이라는 단서는 1636년 청의 침입을 가리킨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삼전도에서 항복하였고, 청은 그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우게 하였다.
- 이괄의 난은 1624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나 병자호란보다 앞선다.
-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한 것은 1627년 정묘호란 때의 일이다.
- 정봉수가 용골산성에서 항전한 것도 정묘호란 때의 일이다.
- (가)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다.
- (나) 지방군은 10정으로 조직하였다.
- (다)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 (라) 중앙군은 2군 6위제로 운영하였다.
시기순 배열은 (나)→(라)→(다)→(가)이다.
(나) 지방군 10정은 통일 신라, (라) 중앙군 2군 6위는 고려, (다) 친위 부대 장용영은 조선 정조 때, (가) 13도 창의군은 1907년 정미의병 때 결성되었다.
- (나)→(라)→(가)→(다) 배열은 대한 제국기의 13도 창의군을 정조 때의 장용영보다 앞에 두었다.
- (라)→(나)→(가)→(다) 배열은 고려의 2군 6위를 통일 신라의 10정보다 앞에 두고, 13도 창의군과 장용영의 순서도 뒤바꾸었다.
- (라)→(나)→(다)→(가) 배열은 고려의 2군 6위를 통일 신라의 10정보다 앞에 두었다.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 장관이 모인 이 회의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적 임시 정부 수립과 이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 최대 5년간의 신탁 통치 방안 등이 결정되었다.
'이 회의'는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이며,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그보다 앞선 1945년 8월 광복 직후에 결성되었다.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 장관', '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 '최대 5년간의 신탁 통치'라는 단서로 회의를 확정할 수 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여운형 등이 광복 직후 조직하였다.
- 5·10 총선거는 1948년에 실시되어 회의 이후의 일이다.
- 좌우 합작 7원칙은 1946년 10월에 발표되어 회의 이후의 일이다.
-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는 1948년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 후 구성되어 회의 이후의 일이다.
우리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 이번 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나니, 영원토록 공양하고 다함이 없이 이 선(善)의 근원을 배양하여, 대왕 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며,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밑줄 친 '가람'은 백제 무왕 때 세운 익산 미륵사이며, 이곳에는 목탑 양식을 간직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있다.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인 '왕후',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라는 단서는 미륵사지 석탑 해체 수리 중 발견된 사리봉영기의 내용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의 구조를 돌로 재현한 석탑이다.
- 대리석으로 만든 10층 석탑은 고려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조선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 화상의 탑비는 보령 성주사 터에 있다.
-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 석탑은 신라의 분황사 모전 석탑이 대표적이다.
- ㄱ. 사병을 혁파하였다.
- ㄴ.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 ㄷ.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 ㄹ. 6조 직계제를 시행하였다.
세조 대의 사실은 집현전 폐지와 6조 직계제 시행이다.
세조는 단종 복위 운동을 계기로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중단하였으며, 의정부 서사제 대신 6조 직계제를 다시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 사병 혁파는 이방원(태종)이 주도하여 즉위 무렵에 단행한 일이다.
-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이 시작되었으나 성종 때 완성되었다.
- (가) 한인애국단 창설
- (나) 한국광복군 창설
- (다) 국민대표회의 개최
- (라) 주석·부주석제로 개헌
시기순 배열은 (다)→(가)→(나)→(라)이다.
(다) 국민대표회의 개최는 1923년, (가) 한인애국단 창설은 1931년, (나) 한국광복군 창설은 1940년, (라) 주석·부주석제 개헌은 1944년의 일이다.
- (가)→(다)→(나)→(라) 배열은 1931년의 한인애국단 창설을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보다 앞에 두었다.
- (가)→(라)→(다)→(나) 배열은 1944년의 개헌을 국민대표회의와 한국광복군 창설보다 앞에 두었다.
- (다)→(나)→(가)→(라) 배열은 1940년의 한국광복군 창설을 1931년의 한인애국단 창설보다 앞에 두었다.
제1차 조선교육령 발표 → (가) → 제2차 조선교육령 발표
(가) 시기는 제1차 조선교육령(1911)과 제2차 조선교육령(1922) 발표 사이이며, 이 시기인 1919년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제1차 조선교육령은 이른바 무단 통치기에, 제2차 조선교육령은 3·1 운동 이후 문화 통치기에 발표되었다.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은 3·1 운동 직전에 있었다.
- 경성제국대학은 제2차 조선교육령 이후인 1924년에 설립되어 (가) 시기보다 뒤이다.
- 육영공원은 1886년에 설립된 근대 교육 기관으로 (가) 시기보다 앞선다.
- 보안회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운동은 1904년의 일로 (가) 시기보다 앞선다.
강조의 군사들이 궁문으로 마구 들어오자, 목종이 모면할 수 없음을 깨닫고 태후와 함께 목 놓아 울며 법왕사로 옮겼다. 잠시 후 황보유의 등이 (가)을/를 받들어 왕위에 올렸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여 양국공으로 삼고, 군사를 보내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인을 죽였다.
(가)는 고려 현종이며, 그의 재위 기간에 초조대장경 조판이 시작되었다.
'강조의 군사', '목종을 폐위하여 양국공으로 삼고', '김치양 부자'라는 단서는 강조의 정변을 가리키며, 이때 황보유의 등이 대량원군을 맞아 왕으로 세웠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대장경 조판을 시작하였다.
- 윤관이 별무반 편성을 건의한 것은 숙종 때의 일이다.
- 국왕이 복주(안동)로 피난한 것은 공민왕 때 홍건적 침입 당시의 일이다.
-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한 것은 성종 때 거란의 1차 침입 당시의 일이다.
- (가)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철폐하라!’,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지 말자!’ 등의 격문을 내건 운동이 일어났다.
- (나) 광주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일어난 충돌을 계기로 학생들이 총궐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가)는 1926년 6·10 만세 운동, (나)는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며, 그 사이인 1927년에 신간회가 창설되었다.
'순종의 인산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철폐하라!'는 6·10 만세 운동의 단서이고, '광주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일어난 충돌'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단서이다. 신간회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 진단학회는 1934년에 설립되어 (나) 이후의 일이다.
- 조선 형평사는 1923년 진주에서 창립되어 (가) 이전의 일이다.
-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되어 (가) 이전의 일이다.
1930년대의 사실은 1938년 중국 관내 한커우에서 김원봉 주도로 창설된 조선 의용대이다.
조선 의용대는 중일 전쟁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된 부대로,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로 꼽힌다.
- 조선 건국 동맹은 1944년 여운형이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 대한 광복군 정부는 1914년 연해주에서 수립되었다.
-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 독립 군단은 1920년 밀산에서 조직되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저술에서 이 나라 자기의 빛깔과 모양에 대해,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사람들은 비색이라고 부른다. 근래에 와서 만드는 솜씨가 교묘하고 빛깔도 더욱 예뻐졌다. 술그릇의 모양은 오이와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고 연꽃이나 엎드린 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또, 주발, 접시, 사발, 꽃병 등도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나라'는 고려이며,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 후기 숙종 때 중건된 건물이므로 고려의 문화유산이 아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 '비색'이라는 단서는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고려청자의 빛깔을 비색이라 기록한 사실을 가리킨다.
-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 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꼽힌다.
-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 ‘가갸날’을 제정하였다.
- 기관지인 『한글』을 창간하였다.
설명하는 단체는 조선어 연구회이다.
조선어 연구회는 1926년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가갸날'을 제정하고 기관지 「한글」을 창간하였으며, 이후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었다.
- 국문 연구소는 1907년 학부 안에 설치된 국문 연구 기관이다.
- 조선 광문회는 1910년 최남선 등이 고전 간행을 위해 설립한 단체이다.
- 대한 자강회는 1906년 조직된 애국 계몽 단체로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벌이다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