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에서는 촌주가 촌의 행정을 담당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통일신라는 지방의 말단인 촌을 그 지역 유력자인 촌주를 통해 다스렸으며, 민정 문서(신라 촌락 문서)에서도 촌 단위로 인구·토지·가축을 파악한 모습이 드러난다.
- 발해 —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한 것은 조선의 특징이며, 발해는 말갈족 촌락을 토착 수령을 통해 다스렸다.
- 고려 — 면리제가 확립된 것은 조선 시대이다.
- 조선 — 사심관은 고려 태조가 지방 통제를 위해 둔 제도로, 조선의 제도가 아니다.
(갑)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했다.
(을) 아니다. 우리야말로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만일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그대 나라 동경도 모두 우리 강역에 들어 있는 것인데 어찌 침범이라 하겠는가.
(을)이 담판 이후 벌인 활동은 강동 6주 경략이다.
‘고려’라는 국호와 ‘평양’ 도읍을 근거로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을)은 993년 거란 1차 침입 때 소손녕(갑)과 담판한 서희이며, 담판 결과 압록강 동쪽 땅을 확보해 강동 6주를 설치하였다.
- 9성 설치 — 예종 때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한 뒤 쌓았다.
- 귀주 대첩 — 거란 3차 침입(1019) 때 강감찬이 거둔 승리이다.
- 천리장성 축조 — 거란·여진 침입에 대비해 덕종~정종 때 쌓았다.
(영락) 6년 병신(丙申)에 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백제왕이) 우리 왕에게 항복하면서 “지금 이후로는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중략)… ㉠1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의 결과로 고구려가 신라 내정간섭을 강화한 것이 옳다.
‘영락’ 연호와 백제왕이 ‘노객’을 맹세한 내용에서 왕은 광개토대왕이며, ㉠은 400년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원한 사건이다. 이후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에 머물며 신라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 백제의 평양성 공격 —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일로, ㉠보다 앞선다.
- 관산성 전투 — 6세기 중엽 진흥왕 때 신라가 백제 성왕을 전사시킨 사건으로, ㉠의 결과가 아니다.
- 금관가야 —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오히려 쇠퇴하였고, 이후 후기 가야의 중심은 대가야로 옮겨 갔다.
(가)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나) 나는 통일된 조국을 달성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를 주장한 인물이 탁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가)는 남방만의 임시 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이고, (나)는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이다. 김구는 1945년 말 신탁 통치 소식이 전해지자 탁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꾸려 반탁 운동을 이끌었다.
- 5·10 총선거 불참 — 김구 등 남북 협상파의 행보이며, 이승만은 총선거에 참여해 제헌 국회 의원·의장이 되었다.
- 좌우 합작 7원칙 지지 — 이승만은 좌우 합작 운동에 비판적이었다.
-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의장 — 김규식이 맡았다.
예전에 성종이 ( 가 ) 시행에 따르는 잡기가 정도(正道)에 어긋나는데다가 번거롭고 요란스럽다 하여 이를 모두 폐지하였다. …(중략)… 이것을 폐지한 지가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당문학 최항이 청하여 이를 부활시켰다.
(가)는 팔관회이며, ‘정월 보름에 개최되었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성종’이 폐지했다가 약 30년 뒤 ‘최항’의 청으로 부활한 행사는 팔관회이다(현종 때 부활). 팔관회는 개경에서 11월 15일에 열렸으며, 정월 보름(또는 2월 보름)에 열린 것은 연등회이다.
- 국제 교류의 장 — 송 상인·여진·탐라 등이 축하 사절과 함께 토산물을 바쳤다.
- 토속 신 제사 — 천령·오악·명산대천·용신 등 토속 신을 섬기는 행사였다.
- 훈요 10조 — 태조가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달은 하나이나 냇물의 갈래는 만 개가 된다. …(중략)… 나는 그 냇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 빛을 받아 비추어서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의 상이다. 달이라는 것은 태극이요, 태극은 나이다.
제시문을 쓴 인물은 정조이며, 그가 『해동농서』를 편찬하도록 하였다는 설명이 옳다.
하나의 달이 만 갈래 냇물을 비춘다며 ‘태극은 나’라고 한 것은 정조가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하며 군주 중심의 정치를 표방한 글이다. 정조 때 서호수가 왕명에 따라 『해동농서』를 편찬하였다.
- 갑인예송 — 현종 때의 예송으로, 정조와 무관하다.
- 이순신 시호와 사당 — 이순신의 시호는 ‘충무’이며, 그 사당에 ‘현충사’라는 이름을 내린 것은 숙종 때의 일이다.
- 설점수세제 — 17세기 중엽 효종 때 처음 실시되었다.
지금 국왕께서 풍속을 바꾸려는 데에 뜻이 있으므로 신은 지극하신 뜻을 받들어 완악한 풍속을 고치고자 합니다. …(중략)… 『이륜행실(二倫行實)』로 말하면 신이 전에 승지가 되었을 때에 간행할 것을 청했습니다. 삼강이 중한 것은 아무리 어리석은 부부라도 모두 알고 있으나, 붕우형제의 이륜에 이르러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밑줄 친 국왕은 중종이며, 그 재위 기간에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이륜행실』은 중종 때 김안국 등이 붕우·형제의 윤리를 보급하려고 간행한 책이다. 주세붕은 중종 말년인 1543년 풍기 군수로서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 『금오신화』 — 김시습이 세조 무렵 저술하였다.
- 『국조오례의』와 『동국여지승람』 — 성종 때 완성되었다.
- 집현전 — 세종 때 설치되었다.
제4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총동원상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도록 할 수 있다.
제7조 정부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노동 쟁의의 예방 혹은 해결에 관한 명령, 작업소 폐쇄, 작업 혹은 노무의 중지 …(중략)… 등을 명할 수 있다.
제시된 법률은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이며, 이에 근거하지 않은 정책은 육군특별지원병령 제정이다.
‘국가총동원상 필요’, ‘제국 신민을 징용’ 등의 단서로 국가총동원법임을 알 수 있다. 육군특별지원병령은 1938년 2월에 공포되어 국가총동원법(1938년 4월)보다 앞서므로 이 법에 근거한 정책이 아니다.
- 물자통제령 —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생활 물자 배급제를 확대하였다.
- 금속류회수령 —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금속류를 강제로 공출하였다.
- 국민징용령 — 국가총동원법 제4조에 근거해 1939년 공포되어 노무 동원을 실시하였다.
방금 안핵사 이용태의 보고에 따르면 “죄인들이 대다수 도망치는 바람에 조사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 『승정원일기』 -
↓
( 가 )
↓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앉아 (전라) 우도에 호령하였으며, 김개남은 남원성에 앉아 좌도를 통솔하였다.
- 『갑오약력』 -
(가) 시기에는 백산에서 전봉준이 봉기하여 보국안민을 위해 궐기하라는 통문을 보냈다.
안핵사 ‘이용태’의 보고는 고부 농민 봉기 직후의 수습 과정이고, 전봉준이 ‘금구 원평’, 김개남이 ‘남원성’에 자리 잡고 호령한 것은 전주 화약 이후 집강소 시기이다. 그 사이에 이용태의 탄압에 맞선 1차 봉기(무장 기병, 백산 집결, 황토현·황룡촌 전투, 전주성 점령)가 일어났다.
- 논산 집결 — 일본의 경복궁 점령 이후 2차 봉기 때 남접과 북접이 논산에 집결하였다.
- 우금치 전투 — 2차 봉기 때 동학군이 일본군·관군에 패배한 전투이다.
- 궁궐 앞 교조 신원 집회 — 1893년의 복합 상소로, 고부 봉기 이전이다.
지주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 가 ) 혹은 그것의 출장소 직원에게 신고해야 한다. 만약 제출을 태만히 하거나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을 시에는 당국에서 해당 토지에 대해 소유권의 유무 등을 조사하다가 소유자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 지주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국유지로 편입할 수 있다.
(가)는 임시 토지 조사국이며, 이 기구가 존속한 시기에는 신문에 연재 중인 소설 『무정』을 읽는 학생을 볼 수 있었다.
‘지주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신고’, 신고하지 않으면 ‘국유지로 편입’이라는 내용은 토지 조사 사업(1910~1918)의 신고 규정이다. 이광수의 『무정』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 조선청년연합회 — 1920년에 결성되어 토지 조사 사업 종료 뒤의 일이다.
- 연초 전매 제도 — 1921년 시행되었다.
- 의열단 —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어 토지 조사 사업이 끝난 뒤이다.
1402년 제작된 이 지도는 조선 학자들에 의해 제작된 세계 지도이다. 권근의 글에 의하면 중국에서 수입한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기초로 하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합해서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며, 백리척을 사용하였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1402년 태종 때 권근 등이 원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한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이다. 백리척을 처음 사용한 지도는 18세기 정상기의 동국지도이다.
- 유럽과 아프리카 묘사 — 아라비아·유럽·아프리카 대륙까지 그려져 있다.
- 중화사상 반영 — 중국을 지도 한가운데 크게 그렸다.
- 이슬람 지도학 영향 — 원나라 지도를 통해 이슬람 지리 지식이 반영되었다.
- 왕 원년 : 소판 김흠돌,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 왕 9년 :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다 실현하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
제시된 왕은 신문왕이며, 그 재위 기간에 국학을 설치하여 유학을 교육하였다.
원년의 ‘김흠돌’ 반역 사건과 9년의 ‘달구벌’ 천도 시도는 신문왕 때의 일이다. 신문왕은 682년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 이념을 보급하였다.
- 우역 설치 — 5세기 후반 소지 마립간 때의 일이다.
- 서시·남시 설치 — 효소왕 때의 일이다.
- 녹읍 부활 — 경덕왕 때 이루어졌으며, 신문왕은 오히려 녹읍을 폐지하였다.
- 중 국 : 소수 민족 지역의 분리 독립 의식을 약화시키려고, 국가라기보다는 당 왕조에 예속된 지방 민족 정권 차원에서 본다.
- 러시아 : 중국 문화보다는 중앙 아시아나 남부 시베리아의 영향을 강조하여 러시아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한다.
한국사 입장에서 반박할 증거로 적절한 것은 상경성 출토 온돌 장치이다.
온돌은 고구려의 대표적 주거 문화로, 발해 유적에서 온돌이 확인된다는 점은 발해가 당의 지방 정권이나 중앙아시아 계통이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보여 준다.
- 신라와의 교통로 — 신라도는 두 나라 사이의 교류를 보여 줄 뿐, 고구려 계승의 증거는 아니다.
- 주자감 — 당의 국자감을 본뜬 교육 기관으로, 오히려 당 문화 수용을 보여 준다.
- 3성 6부 —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독자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고구려 계승의 근거로는 약하다.
과인은 운수가 어지럽고 전쟁을 하여야 하는 때를 만나서 ㉠서족을 정벌하고 ㉡북족을 토벌하여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무리를 토벌하고 ㉣협조하는 무리를 불러들여 멀고 가까운 곳을 모두 안정시켰다.
- 『삼국사기』 -
㉣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지수신의 투항을 받아주었다는 설명이다.
백제 부흥 운동 당시 임존성에서 저항하던 지수신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임존성은 당에 투항한 흑치상지 등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 ㉠ — 문무왕은 태자 시절 김유신과 함께 참전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 ㉡ — 668년 당군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 ㉢ — 복신 등이 이끈 백제 부흥 운동을 공격하여 진압하였다.
- 이 회사의 고금(股金, 주권)은 액면 50원씩이고, 총 1천만 원을 발행하고, 주당 불입금은 5년간 총 10회 5원씩 나눠서 낸다.
- 이 회사는 국내 진황지 개간, 관개 사무와 산림천택(山林川澤), 식양채벌(殖養採伐) 등의 사무 이외에 금·은·동·철·석유 등의 각종 채굴 사무에 종사한다.
이 회사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응하여 설립된 특허 회사이다.
‘국내 진황지 개간’과 각종 채굴 사무를 맡는다는 내용에서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설립된 농광 회사임을 알 수 있다. 정부로부터 개간권을 특허받아 우리 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자 하였다.
- 백목전 상인의 직조 회사 — 직물 생산 회사로, 제시문의 개간·채굴 사업과 다르다.
- 역둔토·국유 미간지 약탈 국책 회사 — 1908년 일본이 세운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해당한다.
- 시전 상인의 척식 회사 — 시전 상인은 외국 상인에 맞서 상권 수호 운동을 벌였으나, 제시문의 회사와는 관련이 없다.
ㄱ.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기를 중시하여 경장(更張)을 주장하였다.
ㄴ. 우주를 무한하고 영원한 기로 보는 ‘태허(太虛)설’을 제기하였다.
ㄷ. 정지운의 『천명도』 해석을 둘러싸고 사단칠정 논쟁이 시작되었다.
ㄹ. 향약 보급 운동과 함께 일상에서의 실천 윤리가 담긴 『소학』을 중시하였다.
시기순 배열은 ㄹ → ㄴ → ㄷ → ㄱ이다.
ㄹ은 16세기 초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이 『소학』과 향약 보급을 강조한 것, ㄴ은 서경덕의 태허설, ㄷ은 1559년 무렵 시작된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ㄱ은 16세기 후반 기를 중시하며 경장을 주장한 이이의 사상이다.
- ㄴ을 맨 앞에 둔 배열 — 『소학』·향약을 앞세운 중종 대 사림의 활동이 서경덕의 학설보다 먼저이다.
- ㄷ을 ㄴ보다 앞에 둔 배열 — 서경덕은 사단칠정 논쟁 이전 세대의 학자이다.
상류층이 한식 주택을 2층으로 개량한 영단 주택에 모여 살았다는 설명이 옳지 않다.
영단 주택은 1940년대 초 조선주택영단이 노동자·서민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량 공급한 일본식 소형 주택으로, 상류층의 개량 한옥과는 거리가 멀다.
- 토막촌 — 일제강점기 도시 외곽에는 토지를 잃고 몰려든 빈민이 움막(토막)을 짓고 살았다.
- 모던걸·모던보이 — 1920~1930년대 도시 번화가에 서양식 유행을 좇는 신세대가 등장하였다.
- 몸뻬·근로보국대 — 전시 동원 체제에서 여성에게 몸뻬 착용이 강요되었고, 근로보국대를 통한 노동 동원이 이루어졌다.
(가) 일본 측은 한국 측에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해외경제협력기금) 2억 달러, 그리고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나) 미국 정부가 한국과 약속했던 1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차관 공여와 더불어 …(중략)… 한국의 경제 발전을 돕기 위한 추가 AID차관을 제공한다.
두 각서 사이에 있었던 사실은 울산 정유 공장 가동이다.
(가)는 무상 3억·유상 2억 달러 제공을 약속한 1962년의 김종필·오히라 메모, (나)는 베트남 파병에 따른 미국의 지원을 약속한 1966년의 브라운 각서이다. 울산 정유 공장은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64년에 가동되었다.
- 경부 고속 국도 개통 — 1970년의 일로, (나) 이후이다.
- 마산 수출 자유 지역 — 1970년대 초에 조성되어 (나) 이후이다.
- 충주 비료 공장 — 1950년대 원조 경제 시기에 건설이 추진되어 (가) 이전이다.
서쪽 송나라는 이미 기울고 북쪽 오랑캐는 아직 잠자고 있네.
앉아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려라, 하늘의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네.
진화와 교류하며 자부심을 공유한 인물은 이규보이며, 그의 작품은 『동명왕편』이다.
송과 북방 민족을 낮추고 ‘하늘의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네’라며 고려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 진화는 이규보와 교류한 무신 집권기 문인이다. 이규보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업적을 노래한 『동명왕편』으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다.
- 『삼국사기』 — 고려 중기 김부식이 편찬한 기전체 사서이다.
- 『제왕운기』 — 원 간섭기 이승휴가 지었다.
- 『삼국유사』 — 원 간섭기 승려 일연이 지었다.
| ㄱ. 『표해록』 | ㄴ. 『열하일기』 |
| ㄷ. 『서유견문』 | ㄹ. 『해동제국기』 |
시기순 배열은 ㄹ → ㄱ → ㄴ → ㄷ이다.
ㄹ 『해동제국기』는 성종 초 신숙주가 일본 견문을 바탕으로 쓴 책(1471), ㄱ 『표해록』은 성종 때 최부가 표류하여 명을 거쳐 돌아온 기록, ㄴ 『열하일기』는 정조 때 박지원의 청 견문록(1780), ㄷ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미국·유럽 견문을 정리해 1895년 간행한 책이다.
- ㄱ을 맨 앞에 둔 배열 — 신숙주의 『해동제국기』가 최부의 『표해록』보다 먼저이다.
- ㄷ을 ㄱ보다 앞에 둔 배열 — 『서유견문』은 개항 이후의 기록으로 가장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