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는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고 빗살무�늬 토기·조개팔찌 등이 사용된 신석기 시대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해 실을 뽑고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었다. 청동 방울과 세형 동검은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이고, 주먹도끼는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이며, 쟁기·쇠스랑 등 철제 농기구는 철기 시대의 유물이므로 모두 시대가 맞지 않는다.

고조선의 변천은 연 장수 진개의 침입(기원전 3세기 초, (가)) → 위만이 집권한 후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한 것((다)) → 우거왕이 한 무제의 침공에 맞서 항전한 것((나)) 순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순서는 (가) - (다) - (나)이다.

(가)는 천군이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고 5월·10월 계절제를 지냈다는 내용으로 삼한에 해당하며, 삼한에는 제사장인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지역 소도가 있었다. 민며느리제는 옥저의 풍습이므로 2번은 옳지 않다. (나)는 은력 정월 영고를 지낸다는 내용으로 부여에 해당하며, 위화부·영객부는 신라의 관청, 상가·대로·패자 등은 고구려의 관직명이므로 3번·4번은 옳지 않다.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므로 5번도 옳지 않다.

대화 속 '왕'은 관산성 전투(554년)에서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백제 성왕이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 신라의 배신 이후 달기(달솔 달기)를 보내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점령하는 등 고구려와도 전쟁을 벌였으며, 이후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것은 문주왕, 백가의 난 평정은 무령왕, 미륵사 창건은 무왕, 고흥의 서기 편찬은 근초고왕에 해당한다.

쌍영총은 고구려 고분으로,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를 수용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세워 귀족 자제를 교육하고 지방에는 경당을 두어 평민 자제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쳤다. 22담로는 백제, 무천은 동예, 범금 8조는 고조선, 누각박사를 둔 것은 신라에 해당한다.

화면 속 목간은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나온 좌관대식기로, 발표자는 이 유적이 있는 부여가 '이 국가'의 마지막 수도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비(부여)를 마지막 도읍으로 삼은 나라는 백제입니다.
목간 확대 사진에는 대식기(貸食記), 즉 '곡식을 빌려준 기록'이라는 글자와 함께 '습리가 1석 5두를 빌려 1석은 갚고 1[석]은 미납'이라는 내용이 판독되어 있습니다. 관청이 곡식을 빌려주고 상환 여부를 장부로 관리했음을 보여 주는 백제의 대여 기록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사회·정치 모습을 고르면 됩니다. 백제는 고이왕 때 정비된 6좌평 체제를 두고 그 아래 달솔·은솔·덕솔 등 16관등을 갖추었으므로, 6좌평 아래에 달솔 등의 관등이 있었다는 설명이 백제에 해당합니다.
서옥제와 진대법(을파소 등용)은 고구려, 서시·남시 설치와 골품제에 따른 관직 승진 제한은 신라의 모습이라 이 나라와는 맞지 않습니다.

제시된 자료는 대야성 전투에서 패해 도독 품석의 아내이자 김춘추의 딸이 죽자, 왕이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한 상황입니다. 춘추가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며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한 대목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이는 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된 직후 선덕 여왕 대의 일입니다. 고구려에서 청병이 실패하자 신라는 결국 당과 손을 잡아 나당 동맹을 맺게 됩니다.
그 이후의 사실을 찾으면,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계백이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항전한 660년의 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광개토 대왕의 왜 격퇴(400년), 이사부의 우산국 복속(512년), 살수 대첩(612년), 진흥왕의 대가야 병합(562년)은 모두 김춘추의 청병보다 앞선 시기의 일입니다.

진행자는 경주 흥덕왕릉 앞에서, 흥덕왕이 혜공왕 피살 이후 왕위 쟁탈전이 거듭되던 시기에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다시 진골 귀족들의 왕위 다툼이 반복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밑줄 그은 '시기'는 혜공왕이 피살된 780년 이후의 신라 하대입니다.
신라 하대에는 진골 귀족의 분열로 왕위 다툼이 이어졌고, 그 대표적 사건이 822년 헌덕왕 때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데 불만을 품은 김헌창이 웅천주에서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며 일으킨 반란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대 이전의 일입니다.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때, 원광이 걸사표를 지은 것은 진평왕 때, 비담과 염종의 난은 선덕 여왕 말년, 김흠돌의 난은 신문왕 즉위 직후의 사건입니다.






룽터우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효의황후·순목황후 묘지, 보력·건흥 등 독자적 연호 사용은 발해가 황제국 체제를 운용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근거이다. 문왕(대흥·보력)과 선왕(건흥) 시기의 이러한 금석문 자료는 발해의 독자적 천하관과 국력을 반영하며, 이에 해당하는 (가)는 발해이다. 따라서 발해의 대표 문화유산인 이불병좌상 또는 영광탑 등이 정답 보기로 제시되며, 3번이 발해의 문화유산에 해당한다.

신숭겸이 왕건을 구하고 전사한 전투는 공산 전투(927)로, 후백제 견훤에게 왕건이 크게 패한 전투이다. 이후 왕건은 고창 전투(930)에서 김선평·권행·장정필 등 안동 지역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각간 대공의 반란(768)과 안승의 보덕국왕 임명(674), 대조영의 천문령 전투(698)는 통일신라·발해 초기의 일이며, 궁예의 국호 태봉 개칭(911)은 공산 전투보다 앞선 사건이다.

제시문의 (가)는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시행한 고려 광종이다.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해방시킴으로써 호족 세력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광군사 창설은 정종, 12목 설치와 지방관 파견은 성종, 양현고 설치는 예종, 정계·계백료서는 태조 왕건에 해당한다.

사원 수공업, 해동통보 주조, 다점·주점 등 관영 상점 운영은 모두 고려 시대의 경제 활동에 해당한다. 고려는 벽란도를 국제 무역항으로 삼아 송, 아라비아 상인 등과 활발히 교역하였으므로 (가)에는 '벽란도를 통한 국제 무역의 양상'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덕대 경영과 상품 작물 재배는 조선 후기, 덩이쇠 수출은 삼한(변한)과 낙랑·왜의 교역, 청해진 해상 무역은 통일 신라 시대의 사실이므로 고려 시대 주제와 맞지 않는다.

제시문은 여진이 정주 선덕관성을 침입하자 임간과 윤관이 패배하고, 이에 숙종이 재정비를여 재반격을 도모한 상황이다. 이후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축조하고 경계비를 세운 것이 고려의 대응이다. 강화도 천도(1번)와 송문주의 죽주성 전투(4번)는 몽골 침입 때의 일이고, 양규의 곽주성 탈환(3번)은 거란의 침입 때, 박위의 대마도 토벌(2번)은 왜구 격퇴와 관련된 사실이다.






제시된 자료는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현존 최고 금속 활자 인쐐본)로, (가)는 고려 시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보기 중 고려 시대의 문화유산을 골라야 하며, 정답은 고려 시대에 제작된 문화유산을 나타낸 3번이다. 나머지 보기들은 삼국 시대, 조선 시대 등 고려와 시기가 다른 문화유산에 해당하여 제외된다.

학생들의 발표 내용은 5도와 양계를 둔 지방 통치,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과 파견되지 않은 속현의 존재, 그리고 향·부곡·소라는 특수 행정 구역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나라는 고려입니다.
고려에서는 흉년이나 질병에 대비해 빈민을 구제하는 기구를 두었는데, 광종 때 설치된 제위보는 일정한 기금을 마련해 그 이자로 빈민에게 곡식 등을 지급하였습니다. 따라서 제위보에서 곡식을 지급받는 농민의 모습이 고려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주자감은 발해의 교육 기관, 동시전은 신라 지증왕 때 설치된 시장 감독 관청이며, 구황촬요 간행과 세책가에서 소설을 빌려 보는 모습은 조선 시대의 일입니다.

제시된 글은 기철이 노책·권겸과 함께 반역을 꾀했고, 이들이 황후의 인척으로서 상국(원)의 위세를 빌려 임금을 위협하였으므로 체포해 처단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원의 기황후를 배경으로 권세를 부린 친원 세력을 숙청한 이 사건은 1356년 공민왕이 단행한 반원 자주 정책의 시작입니다.
공민왕은 기철 일파를 제거하는 동시에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유인우·이자춘 등을 보내 원이 철령 이북에 설치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그 지역을 되찾았습니다.
만적의 난은 무신 집권기 최충헌 때, 배중손의 진도 용장성 항전과 김방경의 일본 원정 참여는 원 간섭 초기 원종·충렬왕 대의 일이며, 최영의 홍산 대첩은 공민왕 사후 우왕 때의 사건입니다.

화면 속 대화에서 인공 지능은 그림 속 인물을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출가한 고려 승려이며 시호가 대각국사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천입니다.
이어진 답변에는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고, 송·거란 등에서 모은 불교 서적을 정리해 교장(敎藏)을 간행했다는 활동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의천은 이러한 통합 불교의 실천 방법으로, 경전 공부인 교(敎)와 좌선 수행인 관(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교관겸수를 내세웠습니다.
삼국유사는 일연, 백련 결사는 요세, 선문염송집 편찬과 유불 일치설은 혜심, 보현십원가는 균여의 활동이므로 이 인물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보고서의 주제는 '인물로 본 문벌 사회의 동요'입니다. (가)는 인종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키운 외척으로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왕의 거처를 남궁으로 옮긴 인물이므로 이자겸이고, (나)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천도를 주장한 승려로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호를 천개로 하는 대위국을 선포한 인물이므로 묘청입니다.
묘청은 서경 천도를 주장하면서 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쓰자는 칭제 건원과, 사대 관계를 요구한 금을 정벌하자는 금국 정벌을 함께 내세웠습니다. 따라서 (나)에 대한 설명으로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 주장이 옳습니다.
시무 28조는 성종 때 최승로, 화통도감 설치 건의는 우왕 때 최무선, 목종을 폐위한 정변은 강조가 일으킨 일이며, 교정별감으로 국정을 장악한 것은 최충헌 이후 최씨 무신 집권자들이므로 두 인물 모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해설자가 소개하는 곳은 영주시 순흥면의 금성대군 신단입니다. 금성대군이 사육신과 함께 (가)의 복위를 추진하다 순흥에 유배되었고 이듬해 지역 유생과 다시 복위를 모의하다 죽임을 당했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입니다.
단종의 재위 기간은 1452~1455년입니다. 이 시기인 1453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이 제거되고 함길도 도절제사에서 갑자기 교체된 이징옥이 함길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대금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조광조 일파가 제거된 기묘사화는 중종, 기축옥사는 선조, 이괄의 난은 인조, 남인이 축출된 경신환국은 숙종 대의 일이므로 이 왕의 재위 시기와 맞지 않습니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가)는 조옥(詔獄) 또는 금오(金吾)라고도 불렸고, 그 소속 관리들의 모임인 금오계를 기록한 첩이 금오계첩이며, 신입 도사들이 이를 제작해 면신례를 치른 뒤 선배 도사들과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금오·조옥이라는 별칭과 도사라는 관직으로 보아 (가)는 의금부입니다.
의금부는 국왕 직속의 사법 기구로, 왕명을 받아 반역죄와 강상죄 등 중대 범죄를 심문하고 처결하였습니다.
수도의 행정과 치안은 한성부, 천문·지리·기후 관련 사무는 관상감, 제학·직제학 아래 검서관을 둔 곳은 규장각, 경연을 주관한 곳은 홍문관이 맡았으므로 이 기구와는 다릅니다.

제시문은 신숙주에 대한 설명이다. 신숙주는 예조를 오래 관장하며 사대교린 외교를 담당했고, 일본에 다녀와 그 산천·관제·풍속을 정리한 『해동제국기』를 편찬했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 때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 백운동 서원 건립은 주세붕, 기축봉사는 송시열, 해주 향약 시행과 『격몽요결』 등은 이황·이이 계열, 『가례집람』은 김장생과 관련된 내용으로 신숙주와는 무관하다.

제시된 장계는 10월 5일에 적 1만 명이 셋으로 나뉘어 진주를 침범하였고, 김시민이 이마에 철환을 맞았으며 이광악이 장수들을 독려해 화살과 돌, 끓는 물, 진천뢰로 적을 물리쳤다는 내용입니다. 1592년 10월의 진주 대첩으로, 이 전쟁은 임진왜란입니다.
임진왜란 중인 이듬해 1593년 2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관군과 백성이 힘을 합쳐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 내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진주 대첩·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힙니다.
정봉수의 용골산성 항쟁은 정묘호란, 김준룡의 광교산 전투 승리는 병자호란 때의 일이고, 김종서의 6진 개척과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조선 전기 세종 대의 일이라 이 전쟁과는 무관합니다.

제시된 사료는 청의 차사 한거원이 예부의 외교 문서를 바치며 "조선에서 조총을 잘 쏘는 사람 1백 명을 선발해 회령부를 경유해 청 대장군의 통솔을 받아 나선(羅禪)을 정벌하되 3월 10일에 영고탑에 도착하라"고 요구한 상황이다. 나선은 러시아를 가리키며, 이는 효종 때 두 차례(1654년·1658년) 이루어진 나선 정벌이다.
연표는 인조반정 → 경신환국 → 이인좌의 난 → 장용영 창설 → 홍경래의 난 → 병인양요의 여섯 사건으로 다섯 구간이 나뉘어 있다. 인조반정은 1623년, 경신환국은 1680년, 이인좌의 난은 1728년, 장용영 창설은 1793년, 홍경래의 난은 1811년, 병인양요는 1866년이다.
효종이 재위한 시기는 1649~1659년이므로 나선 정벌은 인조반정 이후 경신환국 이전에 놓인다. 따라서 인조반정과 경신환국 사이인 (가) 시기가 답이 된다.

제시된 시는 이헌경의 「부교행(浮橋行)」으로, 배 일흔일곱 척을 이어 만든 배다리(주교)의 완성을 기념해 왕에게 올린 작품이다. 해설에는 이 배다리가 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할 때 영여가 한강을 안정적으로 건너도록 만들어졌다고 적혀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묘소를 수원으로 이장해 현륭원을 조성하고, 한강에 배다리를 놓아 능행을 한 왕은 정조이다.
정조는 젊고 유능한 문신을 규장각에서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여 친위 관료를 양성하였다. 한편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은 경종 때, 백두산정계비 건립은 숙종 때, 훈련도감 창설은 선조 때, 탕평 교서 반포와 탕평비 건립은 영조 때의 일이다.

그림 속 신하는 "근래 전황(錢荒)이 매우 심하니 십전통보를 만들어 상평통보와 함께 유통시키면 관청과 민간 모두 편리할 것"이라 건의하고 왕이 이를 윤허하고 있다. 상평통보가 이미 유통되면서 동전이 부족해지는 전황이 나타난 상황이므로 이 대화는 조선 후기의 일이다.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 실시로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했고, 송상·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보부상이 장시를 돌며 상품을 판매하였다. 또 설점수세제가 시행되어 민간의 광산 개발이 허용되었다.
반면 활구라 불린 은병은 고려 숙종 때 주조된 고액 화폐로, 조선 후기의 경제 상황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은병 주조를 든 설명이 이 시기와 어긋난다.






전시 설명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소개하며, 자신만의 서예 필법으로 글씨 쓰듯 난을 그렸고 그림 속 글과 도장으로 예술 세계와 소장자 변동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혹독한 제주도 유배 시절을 견디며 추사체라는 독창적 서체를 남겼다는 서술이 결정적 단서다.
추사체를 완성하고 불이선란도를 남긴 인물은 김정희이다. 김정희는 제주 유배 중 제자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에 감동하여 그 뜻을 기린 작품을 그려 주었다.
보기 그림 가운데 김정희의 작품은 「세한도」로, 소박한 집 한 채와 소나무·잣나무 몇 그루를 마른 붓으로 간결하게 그리고 왼쪽에 긴 발문을 붙인 가로로 긴 두루마리 형식이다. 나머지는 달밤에 만난 남녀를 그린 신윤복의 풍속화, 눈 덮인 산에 매화가 만발한 초옥 그림, 강가 절벽과 나룻배를 그린 산수화, 고양이가 병아리를 채가는 순간을 포착한 김득신의 풍속화 등으로 김정희와 무관하다.

제시된 자료는 "향전은 통렬히 금해야 할 일"이라며 향임의 권한을 빙자해 날뛰는 일을 경계하고, 구향과 신향을 막론하고 이 문제로 상언하면 국법을 어지럽히는 백성으로 처벌하겠다는 하교이다.
향전은 기존 사족인 구향과 새로 성장한 부농층인 신향이 향촌의 주도권을 놓고 다툰 현상으로, 신분 질서가 흔들리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회상이다.
같은 시기에는 신분 상승 욕구가 커지면서 서얼들이 청요직 진출을 요구하는 통청 운동을 집단 상소로 전개하였다. 반면 최충의 9재 학당 설립, 변발과 호복의 유행, 망이·망소이의 난, 향약구급방 편찬은 모두 고려 시대의 일이다.

자료는 부산 감리서 서기로 일한 민건호의 일기 『해은일록』을 소개하면서, 감리서가 개항장의 행정과 대외 관계 사무를 맡은 기구로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가)가 체결된 이후 부산 등 개항장에 설치되었다고 설명한다.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1876년에 체결된 조약은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이며, 이 조약으로 부산·원산·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해안 측량권과 영사 재판권(치외 법권)을 인정한 대표적 불평등 조약이다. 천주교 포교 허용은 조·프 수호 통상 조약, 최혜국 대우 규정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일본 공사관 경비병 주둔 명시는 제물포 조약, 외국 상인의 내지 통상권 최초 규정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과 관련된다.

제시된 답사 안내문의 우정총국, 일본 공사관 터, 경우궁 터, 창덕궁 관물헌은 갑신정변(1884)의 주요 현장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는 등의 피해를 입어 조선과 일본 사이에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다.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 외규장각 도서 약탈은 병인양요와 관련된 내용이므로 옳지 않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신미양요의 배경이므로 옳지 않다.
- 흥선 대원군의 청 납치는 임오군란의 결과이므로 옳지 않다.
- 홍범 14조는 갑오개혁과 관련된 내용이므로 옳지 않다.

원산 학사는 함경도 덕원부 주민들이 관민이 합심하여 설립한 최초의 근대式 학교이다. 동문학은 정부가 세운 통역관 양성 기관, 이화 학당은 선교사가 세운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 한성 사범 학교는 교육 입국 조서 반포를 계기로 설립되었으며, 오산 학교는 이승훈이 세운 학교로 신민회와 관련된다. 따라서 제시된 보기 내용이 서로 뒤바뀌어 있으므로, 옳게 짝지어진 것은 (나)-관민이 합심하여 세우다이다.

제시된 자료는 광무 9년(1905년) 탁지부에서 시행한 구 백동화 교환 사무 관련 고시로,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가 주도한 화폐 정리 사업의 내용이다.
백동화를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교환하게 한 이 조치는 을사조약을 전후해 시행된 화폐 정리 사업의 일환이므로, 메가타가 주도한 정책을 조사하는 탐구 활동이 가장 적절하다.
나머지 보기들은 삼국 간섭(1895), 삼정이정청(1862), 황국 중앙 총상회(1898),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등 시기·주제가 맞지 않는다.

자료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1894년 6월) 이후 청일전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좌우도 도집강이 섣불리 맞서 싸우기보다 시세를 살펴 대응하자고 한 무주 집강소의 통문으로, 전주 화약 이후 2차 봉기를 앞둔 시점의 기록이다.
이후 일본의 침략에 맞서 농민군이 재봉기하면서 남접과 북접의 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여 연합 전선을 이루었다.
다음은 모두 이 통문 작성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다.
-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에 승리한 황토현 전투
-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교정청 설치
- 교조 신원을 요구한 삼례 집회
- 조병갑의 폭정에 항거한 고부 관아 습격

제시문은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정미의병)이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한 상황이다. 이 정미의병은 1907년 대한 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 항쟁이 전국적 조직적 규모로 확대된 것이 배경이다. 미쓰야 협정(1925), 데라우치 총독 부임(1910), 기유각서(1909)는 이보다 이후의 일이고, 거문도 사건(1885)은 훨씬 이전의 사건이므로 배경이 될 수 없다.

베델과 양기탁이 함께 창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이다.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침략상을 상세히 보도할 수 있었으며 국채 보상 운동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가 주도했고, 천도교 기관지는 만세보이며, 상업 광고를 처음 실은 신문과 순한글판 최초 신문은 한성순보·독립신문 등에 해당하므로 옳지 않다.

제시문의 (가)는 안창호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 협회, 흥사단 설립을 주도하고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안창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무총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조직 정비와 통합 운동에 힘썼다. 대한 광복회 조직은 박상진, 한국통사 저술은 박은식, 조선 혁명 선언 작성은 신채호, 헤이그 특사 파견은 이준·이상설·이위종의 활동이다.

뉴스 화면은 일제가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하던 시기에 작성된 지적원도·토지 조사부를 온라인으로 공개한다는 내용이다. 토지 조사부에는 당시의 지번, 지목, 소유자 주소와 성명 등이 기재되어 있다고 소개된다.
임시 토지 조사국은 1910년에 설치되었고 토지 조사 사업은 1918년까지 진행되었으므로, 밑줄 그은 시기는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이다.
이 시기에는 헌병이 일반 경찰 업무까지 담당하는 헌병 경찰제가 실시되었고, 조선 태형령과 관리·교원의 제복·대검 착용 등 강압적 통치가 이루어졌다. 치안 유지법 제정(1925)과 조선 여성 동우회 창립(1924)은 1920년대,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1941)은 1940년대의 일이며, 친위대와 진위대 설치는 대한 제국 성립 이전 을미개혁기의 일이다.

제시된 판결문은 암태도 소작 쟁의(1923~1924)를 배경으로 한다. 이 사건 이후 소작인들의 투쟁이 확산되면서 1927년 조선 농민 총동맹이 전국 단위 조직으로 결성되어 농민 운동을 통합적으로 이끌었다. ① 지계아문 설치(1901), ② 회사령 제정(1910), ④ 농광 회사 설립(1904), ⑤ 조선 물산 공진회(1915)는 모두 암태도 소작 쟁의보다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다.

이왕(순종) 전하의 국장일에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며 일으킨 사건은 6·10 만세 운동이다. 이 운동은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연대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 결성에 영향을 끼쳤다. 1번은 국채 보상 운동, 2번은 동학 농민 운동, 3번은 3·1 운동, 5번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대한 설명이다.

제시된 자료 『척후대』의 글은 백정 계급이 양반뿐 아니라 중인 계급에게도 능욕과 천대를 받으며, 사회 제도의 결함에서 비롯된 모든 우월 계급에게 압박과 착취를 당한다고 지적하고, 백정 스스로 무지와 전통을 버리고 이상을 관철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고 촉구한다.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목표로 1923년 진주에서 창립된 단체가 조선 형평사이며, 이들은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라는 취지 아래 형평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 자료로는 조선 형평사의 창립 목적을 파악하는 탐구가 가장 적절하다.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군국기무처는 제1차 갑오개혁, 전주 화약은 동학 농민 운동, 대한 자강회 해산은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과 관련되어 백정 차별 문제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제시된 광고는 국민 표준복과 청년단복의 구매를 권하며, 이를 조선 총독부 교화 단체 연합회 및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이 지정한 화신(和信)에서 사라고 선전하고 있다. 설명글은 일제가 국가 총동원법 제정 이후 침략 전쟁을 확대하던 시기에 전시 생활 체제를 강조하며 복장을 통제하려 했다고 밝힌다.
국가 총동원법은 1938년에 제정되었으므로 밑줄 그은 시기는 1930년대 후반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기이다.
이 시기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학생과 주민에게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하고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을 밀어붙였다. 원산 총파업(1929), 105인 사건(1911), 근우회 창립(1927), 태화관 독립 선언식(1919)은 모두 그 이전 시기의 일이다.

화면 속 기록 카드는 이극로가 1928년 5월 15일 소르본 대학에서 "조선의 문자와 말소리"를 녹음하며 작성한 자료로, 성명란과 녹음 날짜, 녹음 내용이 표시되어 있다. 설명에 따르면 이극로는 이듬해 귀국하여 조선어 학회의 전신인 (가)에 가입하고 한글 수호 운동을 이어 갔다.
조선어 학회의 전신은 1921년 임경재·장지영 등이 조직한 조선어 연구회이며, 이 단체는 1931년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어 연구회는 1926년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여 가갸날을 제정하고 기념식을 열었으며, 잡지 『한글』을 간행하였다. 진단 학보 발행은 진단 학회, 태극 서관 설립은 신민회, 주시경·지석영 중심의 활동은 국문 연구소, 독립문 건립은 독립 협회의 일이다.

(가)는 조선의용대이다. 김원봉의 주도로 1938년 중국 우한에서 결성되었으며, 이후 일부 대원이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나머지는 화북으로 이동해 조선의용군으로 발전하였다.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연합부대(2번), 동북항일연군은 만주 지역 항일유격대(3번),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독립군(4번), 조선혁명당 군사조직은 조선혁명군(5번)에 해당하므로 모두 (가)와 무관하다.

제시된 광고는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 신관 낙성을 알리며 "내일 아침 9시 개점"을 예고한 것으로,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매장을 두고 그 위에 옥상 정원·갤러리·전망대를 갖춘 일제 강점기 근대적 소비·문화 시설이었다. 따라서 이 대화는 1930년대 전후 식민지 도시의 사회·문화 변화를 묻고 있다.
이 시기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의식주가 크게 달라져 문화 주택이라는 새로운 주택 양식이 등장하였고, 서양식 복장과 생활 양식을 받아들인 모던 걸·모던 보이가 늘어났다. 화학조미료(아지노모토)를 쓴 요리법이 광고를 타고 퍼진 것도, 단성사에서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1932)가 상영된 것도 모두 이 무렵의 일이다.
반면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것은 광복 이후인 1956년(HLKZ-TV)의 일로, 백화점 신관이 문을 열던 일제 강점기의 사회·문화 현상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자료의 「총선거의 노래」 해설에는 이 선거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실시되었고, 만 21세 이상 국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였으며 투표율이 95.5%에 달했다고 적혀 있다. 이는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진 5·10 총선거를 가리킨다.
5·10 총선거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김구·김규식 등 남북 협상파가 참여를 거부한 채 실시되었다. 이 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발췌 개헌(1952)에 따른 선거는 제2대 대통령 선거이고,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의 간접 선거는 유신 체제(1972년 이후)의 대통령 선출 방식이다. 6·3 시위(1964) 이후나 신한 민주당이 제1 야당이 된 선거(1985년 제12대 총선)는 모두 시기가 한참 뒤이다.

화면 속 진행자는 장사 상륙 작전 전승 기념관 앞에서, 이 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이 동해안 장사리에 상륙 작전을 펼쳐 북한군을 교란하고 전력을 분산시키려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장사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벌인 양동 작전이므로, 밑줄 그은 이 전쟁은 6·25 전쟁이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국군과 유엔군은 함경남도 흥남에서 병력과 피난민을 배로 실어 나르는 대규모 철수 작전을 전개하였다.
애치슨 라인 발표(1950. 1)와 여수·순천 10·19 사건(1948),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 12)는 모두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며,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은 정전 협정 체결 이후인 1953년 10월에 맺어졌다.

화면의 민주 묘지 누리집에는 "독재와 3·15 부정 선거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민주 영령"을 추모하는 공간이라는 안내와 함께 김주열 열사에게 보내는 하늘편지가 실려 있다.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죽음이 도화선이 된 이 민주화 운동은 4·19 혁명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으며, 허정 과도 정부가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헌법을 고친 뒤 총선거를 거쳐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다.
긴급 조치 철폐 요구는 유신 반대 운동, 신군부의 계엄 확대에 맞선 것은 5·18 민주화 운동, 야당 총재(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에 반발한 것은 부·마 민주 항쟁,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것은 6월 민주 항쟁이다.

제시된 신문 광고는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개통"을 알리며 "뻗어가는 국력을 상징하며 조국의 중심부를 힘차게 달린다!"라는 문구를 담고 있다. 경부 고속 도로 전 구간이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 7일이므로, (가)는 박정희 정부이다.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제1·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71)이 추진되었고, 마산이 수출 자유 지역으로 지정(1970)되었으며, 포항 제철소 1기 설비가 착공(1970)되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 파병에 따른 건설·용역 특수가 외화 획득에 큰 몫을 하였다.
반면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은 외환 위기 이후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기 위해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제정된 법으로, 경부 고속 도로가 개통되던 시기의 경제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대화에서 두 사람은 대통령이 개헌은 불가능하다며 현행 헌법에 따라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발표한 소식을 놓고, 평화적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시민들의 기대를 외면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는 1987년 전두환 정부의 4·13 호헌 조치이므로, 밑줄 그은 현행 헌법은 1980년에 개정된 제8차 개헌 헌법이다.
이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고,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를 규정하였다.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호헌 조치는 곧이어 6월 민주 항쟁을 불러왔고, 결국 9차 개헌으로 5년 단임 직선제가 도입되었다.
사사오입의 논리로 통과된 것은 1954년 제2차 개헌,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한 것은 1969년 3선 개헌이다.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국회가 실제로 구성된 것은 4·19 혁명 직후 내각 책임제를 채택한 제3차 개헌 헌법 아래에서였다. 3·1 민주 구국 선언(1976)은 유신 헌법에 저항한 사건이다.

연설문의 햇볕 정책,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월드컵 개최(2002년) 언급은 김대중 정부 시기를 가리킨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여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이끌어냈다.
- 7·4 남북 공동 성명(1972)은 박정희 정부 때이다.
- 남북한 UN 동시 가입(1991)은 노태우 정부 때이다.
- 이산가족 고향 방문 최초 성사도 1985년 전두환 정부 시기이다.
-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 단일팀은 2018년 문재인 정부의 일이다.

강좌의 주제들은 모두 한 지역과 연결된다. 범어사와 불교문화, 임진왜란 때의 동래성 전투, 조선 후기 일본과의 무역 창구였던 초량 왜관, 그리고 독립운동 자금을 댄 안희제의 백산 상회가 모두 자리했던 곳은 부산이다.
의열단원 박재혁은 1920년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 부산 경찰서장을 찾아가 폭탄을 터뜨리는 의거를 일으켰다. 이는 의열단의 초기 대표적 의거로 꼽힌다.
신립이 배수의 진을 친 곳은 충주 탄금대, 2·28 민주 운동이 일어난 곳은 대구, 김사미가 봉기한 곳은 운문(청도) 일대, YH 무역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인 곳은 서울의 신민당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