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제51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51회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과 민무늬 토기를 소개하면서 사유 재산과 계급이 발생한 시대라고 하였으므로 (가)는 청동기 시대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가 본격화되면서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곡식을 거두었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 시대이고, 동굴·강가 막집 생활과 주먹도끼 제작은 구석기, 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옷을 지은 것은 신석기 시대의 모습이다.

화상 수업 화면에 제시된 그림은 무용총 수렵도로, 말을 탄 무사가 활을 쏘며 사슴과 호랑이를 뒤쫓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무용총은 중국 지린성 지안 일대에 있는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이므로, 교사가 묻는 국가는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고국천왕 때 을파소의 건의로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은 백제 무령왕, 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것은 고조선의 일이다. 신지·읍차라는 지배자가 있었던 것은 삼한 사회의 특징이다.

초대장에는 알에서 태어나 (가)를 건국하였다고 전해지는 김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혼인한 이야기를 뮤지컬로 올린다고 적혀 있고, 장소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앞이다. 김수로왕 설화와 김해라는 지명에서 (가)는 금관가야임을 알 수 있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철 산지를 배경으로 성장하여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하였고, 덩이쇠를 화폐처럼 사용하며 중계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모내기법이 전국으로 확산한 것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물가 조절 기구인 상평창과 활구라 불린 은병은 모두 고려 시대의 것으로, 가야의 경제 상황과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문화유산 카드에는 국보 제21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며 도굴로 손상된 탑을 보수하던 중 내부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고 적혀 있다.
현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 이 탑은 경주 불국사 삼층 석탑, 곧 석가탑이다. 그림 중 좁고 단정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불국사 삼층 석탑’이 이에 해당한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 석탑은 네 마리 사자가 기단을 받치고 있어 형태가 다르고, 정림사지 오층 석탑은 백제의 탑으로 층수와 나라가 모두 어긋난다. 감은사지 삼층 석탑은 통일 신라 초기의 거대한 쌍탑이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탑은 아니다.

전시관의 인물은 자신을 신라의 제23대 왕이라 소개하며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고 말한다. 병부 설치와 율령 반포는 법흥왕의 대표적 업적이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여 왕권 강화와 사상 통합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
녹읍 폐지는 신문왕, 독서삼품과 시행은 원성왕의 정책이다. 북한산 순수비를 세운 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진흥왕이다.





‘삼국의 대외 관계’를 주제로 한 발표 대회에서 학생은 (가)를 두고 백제가 왜에 보낸 것으로 알려진 문화유산이며 백제와 왜의 교류를 잘 보여 준다고 설명한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칠지도로, 그림 중 좌우로 가지 모양의 날이 세 쌍씩 뻗어 있는 칼이다.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전하며 칼 몸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백제와 왜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광배에 ‘연가 7년’ 명문이 있는 고구려의 불상이고, 앙부일구는 조선 세종 때 만든 해시계로 삼국의 대외 관계와 무관하다. 호우명 그릇은 신라 무덤에서 나온 그릇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대화에서 한 인물은 신라에서는 (가) 때문에 큰 재주와 공이 있어도 진골이 아니면 승진에 제한이 있다고 불평하고, 다른 인물은 집의 크기까지 제한한다고 맞장구친다.
혈통에 따라 관등 승진의 상한을 정하고 집의 크기, 수레, 옷차림 등 일상생활까지 규제한 신라의 신분 제도는 골품 제도이다. 6두품은 능력이 뛰어나도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어 이러한 불만이 컸다.
화랑도는 청소년 수련 단체이자 인재 양성 기구이고, 화백 회의는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던 회의이다. 상수리 제도는 지방 세력가나 그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하여 견제한 제도로, 승진이나 가옥 규모와는 관계가 없다.

화면 속 시는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알았고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 통했구려. 전쟁에 이기어 공이 이미 높아졌으니 만족함을 알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어떠하오.”라는 내용으로,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구려를 침입한 수의 장수 우중문을 조롱하며 물러가라고 권한 여수장우중문시입니다.
설명에서 밑줄 그은 전투는 “강을 건너 퇴각하는 수의 군대와 벌인 전투”라고 했습니다. 612년 을지문덕은 거짓 후퇴로 수의 별동대 30만을 평양성 부근까지 끌어들인 뒤, 되돌아가던 수군이 살수(청천강)를 절반쯤 건널 때 총공격을 가해 궤멸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전투는 살수 대첩입니다. 살아 돌아간 수의 군사가 수천에 불과했을 정도의 대승이었고, 이 패배는 수가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시기와 상대가 전혀 다릅니다. 명량 대첩과 한산도 대첩은 조선 선조 때 이순신이 일본군을 격파한 해전이고, 황산 대첩은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싸움입니다.

진행자가 소개하는 자료는 신라 촌락 문서이며, 대화 창에는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서 발견되었어요.”, “서원경에 속한 촌을 비롯한 4개 촌락의 경제 상황이 기록되어 있어요.”라는 설명이 이미 올라와 있습니다. 이 두 문장이 그대로 신라 촌락 문서(민정 문서)의 대표적 특징입니다.
이 문서에는 촌의 넓이, 호(戶)의 등급과 수, 인구를 남녀·연령별로 나눈 수, 소와 말의 수, 뽕나무·잣나무·호두나무의 수, 논밭의 면적 등이 적혀 있고 3년마다 다시 작성되었습니다. 촌주가 조사해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재산을 하나하나 헤아려 적어 둔 목적은 분명합니다. 국가가 노동력을 동원하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기초 자료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머지는 이 문서와 관계가 없습니다. 단군의 건국 이야기가 실린 것은 고려 후기의 삼국유사·제왕운기이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한 것은 외규장각 의궤이며, 신라 촌락 문서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자료가 아닙니다.

기획안의 제목은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이고, 기획 의도는 “대조영이 건국한 ○○의 발전 과정을 주변국과의 관계를 통해 살펴본다.”이며, 첫 장면은 “상경 용천부에 도착한 일본 사신단”입니다. 대조영의 건국, 해동성국이라는 별칭, 수도 상경 용천부는 모두 발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다큐멘터리에는 발해사의 장면이 들어가야 합니다. 발해 무왕은 당이 흑수 말갈과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자, 장수 장문휴에게 수군을 주어 산둥반도의 등주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당의 영토를 직접 타격한 이 사건은 발해의 대외 강경책을 보여 주는 대표적 장면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일입니다. 6진 개척은 조선 세종 때 김종서가 두만강 유역에서 한 일이고, 처인성 전투의 김윤후는 고려의 대몽 항쟁, 정족산성의 양헌수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 때의 인물입니다.

가상 뉴스는 “신라 경순왕 항복”을 속보로 전하며, “경순왕 김부가 항복했고, 태조가 신라의 왕경을 경주로 개편하고 투항한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넘긴 것은 935년의 일입니다.
연표는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 → 901년 후고구려 건국 → 918년 고려 건국 → 930년 고창 전투 → 936년 후백제 멸망 순으로 짜여 있고, 각 사건 사이가 (가)~(라)로 나뉘어 있습니다.
935년은 930년 고창 전투와 936년 후백제 멸망 사이에 해당하므로, 연표의 마지막 구간이 정답입니다. 이 시기에는 후백제에서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밀려나 고려로 귀순하는 일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참고로 사심관 제도는 이때 김부(경순왕)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은 것이 시작으로, 지방 세력을 회유하면서 그 지역의 치안에 책임을 지우려는 태조 왕건의 호족 정책이었습니다.

대화 창의 질문은 “광종의 업적에 대해 알려줄래?”이고, 이미 올라온 답변은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어.”와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어.”입니다. 그러므로 빈칸에도 고려 광종의 업적이 들어가야 합니다.
광종은 왕권을 위협하던 호족의 힘을 꺾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했습니다. 후삼국의 혼란기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해 양인으로 되돌려 준 조치로, 호족의 사병과 경제 기반을 줄이는 동시에 국가의 세금 낼 인구를 늘리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왕의 일입니다. 훈요 10조는 태조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긴 유훈이고, 12목에 지방관 파견은 성종이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시행한 것이며, 교정도감은 무신 집권기에 최충헌이 설치한 최고 권력 기구입니다.

수업 장면에서 선생님은 “거란의 3차 침입 때 (가)이/가 귀주에서 적의 대군을 격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라고 설명하며 전투 그림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거란의 3차 침입과 귀주라는 두 단서가 인물을 확정해 줍니다.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고려군을 지휘한 사람은 강감찬이었습니다. 그는 이듬해 물러가던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귀주 대첩입니다.
이 승리로 거란의 침입은 사실상 끝났고, 이후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고 국경에 천리장성을 축조해 방비를 강화했습니다.
나머지 인물의 활동은 다릅니다. 서희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었고,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해 동북 9성을 쌓았으며, 최무선은 고려 말 화약 무기를 만들어 진포에서 왜구를 격파했습니다.

왼쪽 그림에서는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이곳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몽골에 맞서 끝까지 싸우자!”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제주 항파두리는 삼별초가 마지막까지 항전한 곳으로, 1273년 이곳이 함락되면서 대몽 항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원 간섭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에서는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도록 하시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 자주 정책을 펴며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되찾은 장면입니다.
따라서 (가)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의 원 간섭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원의 풍습이 들어와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과 호복이 유행했고, 반대로 원에는 고려의 의복과 음식이 퍼지는 고려양이 나타났습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별무반 편성은 12세기 초 숙종 때,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은 1145년 인종 때의 일이며, 김헌창의 난은 통일 신라 헌덕왕 때 일어났습니다.





제시된 세 장면은 “도자기 표면에 무늬 새기기 → 무늬에 다른 색의 흙 메우기 → 다른 색 흙을 긁어내어 무늬 나타내기”의 순서로 이어집니다. 그릇 표면을 파낸 뒤 백토나 자토를 채워 무늬를 드러내는 이 기법이 바로 상감법입니다.
상감 기법은 12세기 중엽 이후 고려에서 청자에 본격적으로 적용되어 상감 청자라는 독자적인 도자기를 낳았습니다. 학·구름·모란·국화 등의 무늬를 흰색과 검은색으로 또렷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 특징입니다.
보기의 문화유산 가운데 이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은 청자 상감 모란문 표주박 모양 주전자입니다. 표주박 형태의 몸체에 모란 무늬를 상감으로 새겨 넣은 고려 청자입니다.
나머지는 제작 방식이 다릅니다. 기마 인물형 토기는 삼국 시대의 흙으로 빚은 토기이고, 청자 참외 모양 병은 무늬 없이 형태와 비색으로 승부한 순청자이며, 백자 철화 끈무늬 병은 붓으로 철사 안료를 그려 넣은 조선의 백자입니다.





제시된 글은 “문익점이 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을/를 보고 씨 10개를 따서 가져 왔다. 진주에 와서 절반을 정천익에게 주고 기르게 하였으나 단 한 개만 살아남았다. 가을에 정천익이 그 씨를 따니 100여 개나 되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고려 말 문익점이 원에서 씨를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한 작물은 목화입니다. 씨 10개 중 절반을 나누어 심어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가 이듬해 100여 개의 씨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목화 전래담의 전형입니다.
목화 보급으로 무명옷을 널리 입게 되면서 옷감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무명은 조선 시대에 화폐처럼 쓰일 만큼 중요한 물품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작물은 전래 경로가 다릅니다. 고구마는 조선 후기 조엄이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며 들여왔고, 옥수수는 중국을 통해 전해진 구황 작물이며, 인삼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자라 특산물로 수출되던 약재입니다.

게시판의 질문은 “과전법에 대해 알려 주세요.”이고, 이미 달린 답변은 “공양왕 3년에 시행되었어요.”, “조준, 정도전 등의 건의로 실시되었어요.”입니다. 그러므로 빈칸에도 과전법의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과전법은 1391년 공양왕 때 신진 사대부의 건의로 마련된 토지 제도입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이 대농장을 차지해 국가 재정이 바닥나자,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기존 토지 대장을 불태우고 토지 제도를 새로 짰습니다. 그 결과 경기 지역의 토지를 대상으로 전·현직 관리에게 등급에 따라 수조권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수조권은 토지 자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준 것으로, 과전법은 신진 사대부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고 조선 건국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제도입니다. 공인 등장의 배경이 된 것은 조선 후기의 대동법, 전지와 시지를 품계에 따라 지급한 것은 고려의 전시과, 토지 소유자에게 지계를 발급한 것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 때 일입니다.





수업 마무리 퀴즈 화면에는 만월대, 선죽교, 고려 첨성대 세 문화유산 사진이 제시되어 있고, 교사는 이 유산들이 있는 지역을 묻고 있습니다.
세 유산은 모두 고려의 도읍이었던 곳에 남아 있습니다. 만월대는 고려 왕궁 터이고, 선죽교는 정몽주가 이방원 세력에게 죽임을 당한 곳으로 전하는 돌다리이며, 고려 첨성대는 왕궁 부근에 세워진 천문 관측 시설입니다.
따라서 학생이 들어야 할 지역 이름은 개성입니다. 공주는 백제 웅진 시기의 도읍, 전주는 후백제 견훤의 근거지, 철원은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의 도읍이므로 제시된 유산들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교사는 조선 시대의 교육 기관에 대해 말해 보라고 요구했으므로, 조선이 아닌 시대의 기관을 든 답변을 골라야 합니다.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는 경당이 있었다"는 답변이 옳지 않습니다. 경당은 고구려의 지방에 설치되어 평민 자제에게 글과 무예를 함께 가르치던 사설 교육 기관으로, 조선의 교육 기관이 아닙니다.
나머지 답변은 모두 조선에 해당합니다. 서울의 4부 학당은 중등 교육을 담당한 관학이고, 성균관은 최고 교육 기관이었으며, 서원은 사림이 지방에 세워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 연구를 함께 수행한 사립 교육 기관입니다.

학생이 떠올린 단서는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중 하나, 왕명의 출납을 담당, 6명의 승지가 있었다는 세 가지입니다.
왕의 비서 기관으로서 왕명을 출납하고 도승지 이하 여섯 승지를 두어 이·호·예·병·형·공 육조의 업무를 나누어 맡은 기구는 승정원입니다. 왕과 신하 사이의 문서가 모두 이곳을 거쳤으므로 그 기록을 모은 것이 승정원일기입니다.
사간원은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을, 사헌부는 관리 감찰과 풍속 교정을, 홍문관은 경연과 왕의 자문을 맡았으므로 왕명 출납과 승지라는 단서에는 맞지 않습니다.





제시문은 조선 제9대 국왕인 성종의 재위 기간에 통치 규범을 확립하기 위해 여러 서적이 편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가)를 국가 운영 전반에 대한 법률을 담아 반포한 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국가 의례를 정비한 국조오례의와 궁중 음악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이 완성되었다는 서술도 함께 나옵니다.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 완성·반포된 조선의 기본 법전은 경국대전입니다.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6전 체제로 구성되어 조선 통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택리지는 조선 후기 이중환이 지은 인문 지리서, 농사직설은 세종 때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한 농서, 동의보감은 광해군 때 허준이 완성한 의학서이므로 법전이라는 조건에 맞지 않습니다.

연보에 따르면 이 인물은 1482년 한성 출생, 1515년 문과 급제, 1518년 현량과 실시를 건의하고 대사헌에 임명, 1519년 위훈 삭제를 건의했다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 이력은 중종 때 등용되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한 조광조의 것입니다. 그는 추천으로 인재를 뽑는 현량과 실시, 중종반정 공신의 거짓 공훈을 삭제하는 위훈 삭제 등을 주장하다가 공신 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 때 제거되었습니다.
조광조는 성리학적 질서를 앞세워 도교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소격서의 폐지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거중기 설계는 정약용, 조선경국전 저술은 정도전,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한 일은 고려 후기 이제현의 활동입니다.

도식에는 (가)를 중심으로 창시자 최제우, 경전 동경대전, 주요 사상 시천주·인내천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1860년 경주에서 최제우가 서학에 맞선다는 뜻으로 창시한 종교는 동학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을 모신다는 시천주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을 내세워 신분 차별을 부정했고, 이후 최시형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해 교단을 넓혔습니다.
대종교는 나철이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세운 종교, 원불교는 박중빈이 창시해 새생활 운동을 편 종교, 천주교는 서학으로 전래되어 신자들이 스스로 받아들인 외래 종교이므로 최제우·동경대전이라는 단서와 맞지 않습니다.

칠판의 판서는 조선 후기 수취 체제의 정비를 주제로 (가) 제도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시행 시기는 영조 26년(1750)이고, 내용은 군포 납부액을 2필에서 1필로 줄인 것과 줄어든 재정 수입을 결작 등으로 보충한 것입니다.
이 조건에 해당하는 제도는 균역법입니다. 군포 부담을 절반으로 낮추어 농민의 군역 부담을 덜어 주는 대신, 부족해진 재정은 토지 1결당 쌀 2두를 걷는 결작, 어장세·염세·선박세, 선무군관포 등으로 메웠습니다.
대동법은 공납을 토지 결수 기준의 쌀·베·동전으로 바꾼 제도, 영정법은 전세를 풍흉과 관계없이 1결당 4~6두로 고정한 제도, 직전법은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준 토지 제도이므로 군포 1필이라는 단서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사진 속 장소는 전라북도 부안군 우반동의 반계 서당으로, 설명에 따르면 유형원이 이곳에 머물며 개혁안을 담은 반계수록을 저술했습니다.
유형원은 조선 후기 중농학파 실학의 문을 연 인물로, 토지 제도의 문란을 모든 폐단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반계수록에서 제시한 핵심 방안은 신분과 직역에 따라 토지를 차등 분배하자는 균전제였습니다.
정혜결사 제창은 고려 무신 집권기 지눌의 불교 개혁 운동이고, 훈련도감 창설은 임진왜란 중 조선 정부의 군제 개편이며, 전민변정도감 설치는 고려 공민왕이 권문세족의 토지와 노비를 바로잡기 위해 시행한 정책입니다.





앞 장면은 ‘홍의장군 곽재우’ 깃발을 앞세운 의병이 일본군과 싸우는 모습으로 임진왜란(1592)을 나타내고, 뒤 장면은 ‘북벌’ 깃발 아래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으로 효종의 북벌 추진(17세기 중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에는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 조건에 맞는 장면은 광해군이 유배를 가는 모습입니다.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강화도로 유배 보냈으며, 인조 대의 정묘·병자호란을 겪은 뒤 효종이 북벌을 내세우게 됩니다.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장면은 고려 인종 때 묘청의 주장, 요동 정벌은 불가하니 개경으로 회군하라는 장면은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러 왔다는 장면은 1419년 세종 때의 일로 모두 임진왜란보다 앞섭니다.

격문은 평서대원수의 이름으로 관서 지역 사람들에게 호소하면서, 조정이 관서를 썩은 흙과 같이 버렸고 권세가의 노비조차 관서 사람을 보면 ‘평안도 놈’이라 부른다며 차별의 억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1811년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의 난 당시의 격문입니다. 평안도 지역에 대한 오랜 차별과 세도 정치기의 수탈이 겹치면서 몰락 양반 홍경래를 중심으로 영세 농민, 광산 노동자, 상인 등이 봉기해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다가 정주성에서 진압되었습니다.
이 시기 상황으로 옳은 것은 수령과 향리의 수탈로 삼정이 문란했다는 설명입니다. 세도 정치 아래 전정·군정·환곡의 운영이 무너져 농민 부담이 커졌고, 그 결과 1862년 임술 농민 봉기로도 이어졌습니다.
무신들의 정권 장악은 고려 무신 정변 이후, 별기군 창설은 1881년 개항 이후의 개화 정책, 최치원의 시무 10여 조 건의는 신라 하대의 일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그림 속 두 양반은 “이제 우리 양반에게도 군포를 걷겠다는군”, “조정이 왕의 아버지인 (가)의 위세에 눌려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되고 있다”고 대화하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해 국정을 장악한 왕의 아버지, 곧 흥선 대원군을 가리킵니다.
흥선 대원군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해 상민에게만 지워지던 부담을 덜고 국가 재정을 확충했으며, 서원 철폐·경복궁 중건 등 왕권 강화 정책을 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고수하여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 화친하지 않겠다는 뜻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것이 그의 집권기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 창설은 조선 정조, 청해진 설치는 통일 신라의 장보고, 역법서 칠정산 편찬은 조선 세종 때의 일로 시기가 전혀 다릅니다.

그림의 전시회 초대장에는 ‘조선의 법궁이자 북궐이라고도 불렸던 (가)의 아름다움’을 어린이 그림으로 감상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조선의 법궁(정궁)이면서 도성 북쪽에 있어 북궐로 불린 궁궐은 경복궁입니다.
수상작 그림의 제목도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근정전은 국왕이 조회와 즉위식을 거행하던 정전이고, 경회루는 연못 위에 세운 연회용 누각, 향원정은 후원 향원지의 정자로 모두 이 궁궐 안에 있는 건물입니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 후 처음 세운 궁궐로,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습니다.

그림의 시나리오는 한성의 궁궐 안을 배경으로, 일본에 조사 시찰단으로 파견되었다가 약 4개월 만에 돌아온 홍영식이 고종에게 일본의 부강한 실상을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조사 시찰단이 일본에 다녀온 것은 1881년의 일입니다.
정부는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며 일본에 조사 시찰단을, 청에 영선사를 보내 근대 문물을 배우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 이후에 일어난 일을 골라야 합니다.
개화 정책 추진 과정에서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차별을 받고 급료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던 구식 군인들이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조사 시찰단 파견 이후에 전개된 사실입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과 어재연 부대가 광성보에서 미군에 맞선 신미양요(1871), 임술 농민 봉기의 수습책으로 설치된 삼정이정청(1862)은 모두 이 장면보다 앞선 시기의 일입니다.

그림의 가상 편지에서 아버지는 농민군의 일원이라 밝히며, “전주에서 정부와 화해하고 우리가 (가)를 설치하여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의 활동을 할 때”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주에서 정부와 화해’는 전주 화약을 뜻합니다.
동학 농민군은 전주 화약을 맺은 뒤 전라도 일대 각 고을에 집강소를 두고 탐관오리 처벌, 부패한 관리와 악질 지주 징계, 노비 문서 소각 등 개혁을 실천했습니다.
편지 뒷부분에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점령하고 조정을 압박하자 농민군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다시 나섰다고 한 것은 제2차 봉기에 해당하며, 이 역시 동학 농민 운동임을 뒷받침합니다.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 고려 후기의 최고 회의 기구인 도평의사사, 개화 정책을 총괄한 통리기무아문은 농민군이 설치한 기구가 아닙니다.

검색창 화면의 연관 검색어는 조일 통상 장정, 함경도, 배상금, 조병식이고, 백과사전 설명은 “조선의 지방관이 직권으로 그 지방에서 생산된 곡식을 타지방이나 타국으로 유출하는 것을 금하는 조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방곡령에 대한 설명입니다.
개항 이후 일본으로 곡물이 대량 유출되어 국내 곡물 가격이 치솟자,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 등이 방곡령을 선포했습니다. 화면에도 개항 후 함경도와 황해도에서 시행되기도 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개정 조일 통상 장정의 ‘1개월 전 통고’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며 항의했고, 조선은 결국 방곡령을 철회하고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습니다.
단발령은 을미개혁의 상투 절단 조치, 삼림령과 회사령은 일제가 국권 피탈 이후 시행한 법령으로 곡물 유출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림의 카드뉴스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성공하다’라는 제목 아래, 이토 히로부미의 이동 경로를 표시한 지도에 차이자거우역에서는 우덕순·조도선의 거사가 불발되고 하얼빈역에서 (가)의 거사가 성공했다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가 하얼빈역에서 대기하다가 열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거사에 성공했다고 한 인물은 안중근입니다.
안중근은 거사 직후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동아시아 세 나라가 대등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 순국하였습니다.
영남 만인소는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한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이 올린 것이고, 조선 의용대는 김원봉이 창설했으며, 헤이그 특사는 이상설·이준·이위종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림의 진술문에는 “광무 9년 11월에 우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준 새 조약”이 일본의 강제에 따른 것으로 황제가 윤허하지 않았고 참정대신도 동의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광무 9년은 1905년이므로 이 조약은 을사늑약입니다.
본문에 이지용·이근택·박제순 등 5적이 제멋대로 가(可)하다고 썼다는 대목도 을사오적을 가리키는 결정적 단서입니다.
이 조약으로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겼고, 외교 사무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내정까지 간섭받게 되었습니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되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던 것은 강화도 조약이고, 최혜국 대우를 처음 규정한 것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입니다.

그림에서 설명하는 지역은 강화도 조약에 따라 개항되었고, 라이징 선 석유 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1929년 대규모 총파업이 일어난 곳입니다. 이는 원산 총파업을 가리키므로 해당 지역은 원산입니다.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에 이어 원산과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는데, 원산은 동해안 북부에 자리한 항구입니다. 지도에서 동해안 북쪽에 표시된 원산이 이 지역입니다.
지도의 나머지 지점은 황해에 면한 인천, 서남해안의 목포, 동남해안의 울산으로, 1929년 총파업이 일어난 곳과는 거리가 멉니다.





화면의 안내문은 정월 대보름 맞이 세시 풍속 이모티콘 출시를 알리며, ‘정월’은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달, ‘대보름’은 가장 큰 보름이라는 뜻으로 음력 1월 15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제시된 이모티콘은 달집 태우기입니다.
정월 대보름에는 한 해의 부스럼을 예방한다며 딱딱한 견과를 깨무는 부럼 깨기, 논밭 두렁에 불을 놓아 해충을 없애는 쥐불놀이, 다섯 가지 곡식을 섞어 지은 오곡밥 먹기 등의 풍속이 있습니다. 모두 이 명절에 어울리는 그림입니다.
반면 창포물에 머리 감기는 음력 5월 5일 단오의 대표적인 풍속으로,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자 한 것입니다. 정월 대보름 이모티콘으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림의 신문 기사는 ‘헌병, 군사 경찰로 명칭 변경’이라는 제목 아래, 헌병이 일본식 표현이며 국권 피탈 이후 일제가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밑줄 그은 시기는 곧 1910년대 무단 통치기입니다.
이 시기 일제는 헌병 경찰에게 재판 없이 처벌하는 즉결 처분권을 주고, 조선 태형령을 시행했으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관리는 물론 교원에게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했습니다. 이것이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브나로드 운동은 1930년대 초 동아일보가 벌인 농촌 계몽 운동이고, 치안 유지법은 1925년에 제정되었으므로 문화 통치기 이후에 해당합니다.
조선책략 유포에 유생들이 반발한 것은 1880년대 개항기의 일로, 국권 피탈 이전이라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화면 속 자료는 친일파 이완용의 경고문으로, "탑골 공원 등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된 학생과 시민들의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그 열기를 꺾을 목적으로 작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고문 본문에는 "조선 독립을 외치는 것이 허언, 망동이라고 유지인사들이 계속 말해도 깨닫지를 못하니 …… 망동을 따르다면 죽거나 다치게 될 것"이라는 협박성 문구가 실려 있습니다.
탑골 공원에서의 독립 선언서 낭독과 전국적 만세 시위라는 두 단서가 가리키는 것은 1919년의 3·1 운동입니다. 3·1 운동은 국내에 그치지 않고 만주의 서간도·북간도, 연해주, 미주 지역의 한인 사회로까지 퍼져 나가 한민족 전체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을 계기로 일어난 만세 시위는 1926년의 6·10 만세 운동이므로 시기가 다릅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킨 것은 1904년 보안회의 활동이고,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규탄한 것은 독립 협회가 개최한 만민 공동회의 활동입니다.

검색 결과 화면에는 (가) 정책의 정의가 "일제가 조선을 자국의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기 위해 1920년부터 추진한 농업 정책"이라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시행 배경으로는 "급격한 공업화와 농촌의 황폐화로 자국의 식량 사정이 악화하자, 조선을 이용하여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본은 1918년 쌀 폭동을 겪으며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이를 조선에서 해결하고자 1920년부터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수리 시설 확충과 품종 개량으로 쌀 생산을 늘리려 했으나, 늘어난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을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조선 농민의 식량 사정은 오히려 나빠졌습니다.
미곡 공출제는 중일 전쟁 이후 전시 수탈기에 시행된 제도이고,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농촌 근대화 운동입니다. 토지 조사 사업은 1910년대에 시행된 토지 소유권 정리 사업으로, 1920년부터 시작된 식량 증산 정책과는 성격과 시기가 모두 다릅니다.

제시된 자료는 "물산 장려에 대한 운동의 새로운 풍조가 시작된 이래로 …… 반드시 토산으로 원료를 삼아 학생모, 중절모 등을 제조하는 것이 좋겠다"라며, 인도에서 유행하는 간디캡이 순 인도산 재료로 인도인이 만든 모자라는 점을 본보기로 들고 있습니다. 국산품 애용을 통해 민족 산업을 지키자는 물산 장려 운동에 관한 글입니다.
물산 장려 운동은 회사령 철폐와 관세 철폐 움직임으로 민족 자본이 위협받자 1920년 평양에서 조만식 등을 중심으로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같은 구호를 내걸고 토산품 애용과 근검저축을 호소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은 것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입니다. 황국 중앙 총상회는 개항기 서울 시전 상인들이 외국 상인의 침투에 맞서 조직한 단체이고, 독립문 건립 모금은 독립 협회가 추진한 활동입니다.

안내문은 '근대 여성 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특강으로, 1부 주제가 "찬양회, 여학교 설립을 추진하다"이고 2부 주제가 "(가),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서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도모하다"라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 창립되어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내세운 단체는 근우회입니다.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 운동가들이 힘을 합쳐 조직하였으며, 기관지 「근우」를 발간하고 전국에 지회를 두어 강연회와 야학 등을 통해 여성 계몽에 힘썼습니다.
권업회는 연해주에서 조직된 한인 자치 단체이고,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한 단체입니다. 송죽회 역시 여성 단체이지만 1913년 평양 숭의 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든 비밀 결사로, 신간회가 창립되기 훨씬 이전의 조직입니다.

카드에는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에 힘쓴 박영희(1896~1930)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흥 무관 학교 교관과 북로 군정서 사관 연성소 학도단장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10월에는 북로 군정서군과 대한 독립군 등으로 구성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과 10여 차례 교전을 벌여 승리하였던 (가)에 참여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이 연합하여 백운평·어랑촌 등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긴 전투가 바로 청산리 전투입니다. 이는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로 꼽힙니다.
쌍성보 전투와 대전자령 전투는 1930년대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거둔 승리이고, 영릉가 전투는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함께 싸운 전투입니다. 모두 1920년 10월이라는 시점과 맞지 않습니다.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마차 행렬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켰는데, 그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의 단원이었다. 한인 애국단은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한 단체, 독립 의군부는 임병찬이 조직한 복벽주의 의병 계열 단체, 조선어 학회는 한글 연구 단체로 모두 이봉창의 의거와 무관하다.

자료의 위쪽은 「황국 신민 서사」로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아래쪽은 학업 성적표에 남은 창씨개명의 흔적으로, 학생의 이름이 '박○양 → 게이조 히데오'처럼 일본식으로 고쳐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자료는 모두 일제가 1930년대 후반 중일 전쟁 이후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민족의식 자체를 지우려 한 민족 말살 정책의 산물입니다.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강요, 창씨개명, 신사 참배 강요, 우리말 사용 금지 등이 여기에 해당하므로, 민족 말살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조사하는 탐구가 가장 알맞습니다.
조선 형평사는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내세운 단체이고, 교육 입국 조서는 갑오개혁기 고종이 근대 교육 제도를 마련하며 반포한 것입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토지 약탈과 일본인 이주를 담당한 기구로, 황국 신민 서사·창씨개명과는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대화에서 (가) 인물은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등을 저술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이며,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아 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 인물은 신채호입니다. 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규정하며 낭가 사상을 강조하였고, 만년에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신채호는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의열단의 활동 지침이 된 「조선 혁명 선언」을 집필하여,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고 민중의 직접 혁명을 통한 독립 쟁취를 주장하였습니다.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인물은 김규식,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 군단을 창설한 인물은 박용만,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주도한 것은 조선어 학회의 이극로 등입니다.

연설하는 인물은 이승만이며,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통일 정부가 수립되길 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하고,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이 물러가도록 세계에 호소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 직후인 1946년 6월의 정읍 발언으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처음 공개적으로 주장한 내용입니다. 이후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확정되자,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1948년 4월 평양을 방문해 남북 협상을 추진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은 1940년,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개최는 1945년 12월,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결성은 1945년 8월의 일로 모두 이 발언보다 앞선 사실입니다.

대화 속 인물은 액자에 걸린 문서를 두고 "정부가 (가)을/를 실시하면서 발급한 지가 증권"이라고 설명하면서, "당시 재정이 부족했던 정부는 지주에게 현금 대신 이것을 지급하고 농지를 매입하였고, 이 농지를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주에게서 유상 매수하고 농민에게 유상 분배한 이 정책은 1949년 제정되어 1950년부터 시행된 농지 개혁입니다. 한 가구당 소유 상한을 3정보로 정하고 이를 넘는 농지를 정부가 사들여 소작농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지주제가 사실상 해체되고 소작농이 자기 땅을 갖게 되면서 자작농이 크게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한 것은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고, 서재필·이상재 등이 주도한 것은 독립 협회입니다. 농광 회사는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설립된 회사로 시기가 전혀 다릅니다.

선생님이 보여 주는 자료는 "1951년에 발행된 중학교 입학시험 문제집"으로, 표지에 '3500문제 수험생의 전시 입학 시험 공부'라는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수험서가 출판될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음을 보여 준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1951년에 진행 중이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6·25 전쟁(1950~1953)입니다. 따라서 이 전쟁의 전개 과정을 다루는 탐구가 적절합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맥아더가 지휘한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뒤집고 서울을 되찾은 뒤 압록강 부근까지 북진하였으므로, 그 과정을 조사하는 활동이 이 전쟁과 직접 연결됩니다.
제물포 조약은 1882년 임오군란의 결과 체결된 조약이고, 경의선 철도 부설은 러일 전쟁 시기 일제의 군수 수송과 관련됩니다. 신흥 무관 학교는 1910년대 서간도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워진 학교입니다.

제시된 일기는 1960년에 쓰인 것으로, 옆에 있던 여자 대학생이 그동안 외쳤던 구호들을 적어 준 내용을 옮겨 놓았습니다. 구호는 “학원 자유 보장하여 구국 애족 선봉 되자!”, “3·15 부정 선거 다시 해라!”, “발포 경찰을 처단하라!”, “학생들에게 총을 쏘지 마라!” 네 가지입니다.
1960년이라는 시점과 3·15 부정 선거의 무효·재선거를 요구하는 구호, 시위 진압 과정의 발포를 규탄하는 구호는 이승만 정부의 부정 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4·19 혁명을 가리킵니다. 이 운동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허정 과도 정부를 거쳐 장면 내각이 수립되었습니다.
나머지 민주화 운동은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 유신 체제에 반대해 부산과 마산에서,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신군부의 집권에 맞서 광주에서,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일어났습니다.

화면 속 뉴스는 “우리 정부가 일본의 사과와 반성 없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학생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굴욕적 대일 외교에 반대하는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으며, 아래 자막에도 ‘한일 회담 반대 시위 확산’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1964년의 6·3 시위에 대한 보도로, 밑줄 그은 ‘정부’는 박정희 정부입니다.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965년 한일 협정이 체결되었고, 같은 무렵부터 베트남에 국군이 파병되었으며(이후 브라운 각서로 추가 파병에 따른 지원 조건이 정해졌습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고, 대통령의 3회 연임을 허용하는 3선 개헌안이 1969년 통과되었습니다.
반면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는 2002년에 열린 행사로 김대중 정부 시기의 일이므로, 이 정부 시기의 사실로 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