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제54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54회

대회 안내문은 이 시대 사람들이 불을 처음 사용하였고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고 설명하며, 장소를 연천 전곡리 유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연천 전곡리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출토된 대표적인 구석기 시대 유적입니다.
따라서 참가자들이 그릴 장면으로는 주먹도끼로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이 알맞습니다. 구석기 사람들은 돌을 떼어 만든 뗀석기를 사용하며 사냥과 채집으로 먹을거리를 얻고 무리를 지어 이동 생활을 했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시대의 생활입니다. 가락바퀴로 실을 뽑는 것은 신석기 시대, 반달 돌칼로 벼이삭을 따는 것은 청동기 시대, 거푸집으로 세형 동검을 만드는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모습입니다.

학생들은 이 나라가 한반도 남부에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고, 신지·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으며, 씨뿌리기를 끝낸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 계절제를 지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 나라는 삼한(마한·진한·변한)입니다.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인 군장과 별개로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있었고,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구역인 소도가 있었습니다. 소도에는 죄인이 도망쳐 들어가도 군장이 함부로 잡아가지 못했는데, 이는 제사와 정치가 분리된 제정 분리 사회였음을 보여 줍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특징입니다. 사위가 처가에 머무는 서옥제는 고구려, 범금 8조는 고조선, 단궁·과하마·반어피는 동예의 특산물입니다.

화면의 조사 내용을 보면 이 왕은 고국원왕의 아들로 태어나 제17대 왕으로 371년부터 384년까지 재위했고, 업적으로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평가란에는 국가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왕은 고구려 소수림왕입니다.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평양성에서 전사한 위기 속에서 즉위해, 대외 정복 대신 내부 체제를 다지는 데 힘썼습니다. 372년 전진에서 순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373년에는 율령을 반포해 통치 질서를 세웠습니다.
(가)에 들어갈 업적은 태학 설립입니다. 372년 수도에 국립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학을 가르치며 나라를 이끌 인재를 길렀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다른 왕의 일입니다. 병부 설치와 화랑도 정비는 각각 신라 법흥왕과 진흥왕의 업적이고, 웅진 천도는 백제 문주왕 때의 일입니다.





초대의 글은 신선 사상이 반영된 백제 문화유산을 전시하며 도교적 이상 세계를 만나 보는 자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 제목도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다"이므로, 백제에서 만들어진 도교적 성격의 유물을 골라야 합니다.
이 조건에 맞는 것은 충남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산수무늬 벽돌입니다. 네모난 벽돌 면에 산봉우리와 나무, 구름, 물이 층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선이 사는 이상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백제 사람들의 도교적 자연관을 잘 보여 줍니다.
나머지 유물은 시대와 나라가 맞지 않습니다. 말다래에 하늘을 나는 말을 그린 천마도는 신라 천마총에서 나온 것이고, 학과 구름을 상감 기법으로 새긴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고려의 대표적 청자입니다.
거북과 뱀이 뒤엉킨 모습을 그린 강서대묘 현무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도교적 요소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의 문화유산이므로 이 전시회의 주제와는 어긋납니다.

일기의 날짜가 676년이고,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이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을 또다시 격파했다", "삼국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밑줄 그은 전투는 나당 전쟁의 마지막 국면에서 벌어진 싸움입니다.
신라는 675년 매소성에서 당의 육군을 물리친 데 이어, 676년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의 수군을 크게 깨뜨렸습니다. 이 승리로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살수 대첩(612)은 고구려 을지문덕이 수의 군대를 물리친 싸움이고, 안시성 전투(645)는 고구려가 당 태종의 침입을 막아 낸 싸움입니다. 황산벌 전투(660)는 백제 계백과 신라 김유신이 맞선 전투로, 모두 676년 나당 전쟁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답사 안내문의 제목이 "김수로가 세운 (가)의 역사"이고, 일정에 국립 김해 박물관 견학과 김해 대성동 고분군 답사가 들어 있습니다. 김수로왕과 김해라는 두 단서가 가리키는 나라는 금관가야입니다.
금관가야의 건국 이야기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려 있는데, 구지봉에 모인 사람들이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라는 구지가를 부르자 하늘에서 황금 알 여섯 개가 내려왔고 그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김수로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구지가가 나오는 건국 신화를 분석하는 활동이 알맞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일입니다. 사비 천도는 백제 성왕이, 우산국 복속은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이룬 일이며, 청해진 설치는 통일 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가 완도에 세운 것입니다.





안내판은 "경주 남산 일대 탐방 지도"로, 탑골·금오봉·용장골 같은 남산의 지명과 함께 용장사곡 삼층 석탑,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학생들도 "이 지역에는 신라의 불교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구나"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가)에는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 불교 유산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것이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입니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 배동에 세 구의 불상이 나란히 서 있는 삼국 시대 신라의 불상으로, 어린아이처럼 둥근 얼굴과 온화한 미소가 특징입니다.
다른 유산은 위치가 남산이 아닙니다. 커다란 갓을 쓴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논산에 있는 고려 시대 불상이고, 목탑 모습을 돌로 옮긴 미륵사지 석탑은 익산에 있는 백제의 탑입니다.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 역시 평창 오대산에 있는 고려 시대 다각 다층 석탑이므로, 경주 남산 탐방 지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소개된 책의 제목이 "저물어 가는 신라"이고, 혜공왕 이후 흔들리는 신라의 역사를 다룬다고 되어 있습니다. 곧 신라 하대(8세기 후반~9세기)의 혼란상이 담길 내용이어야 합니다.
혜공왕이 진골 귀족의 반란 속에 피살된 뒤 신라는 왕위 다툼이 이어졌는데, 헌덕왕 때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일에 불만을 품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822). 이는 신라 하대 지방 세력의 동요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건입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전혀 다릅니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7세기 고구려의 일이고, 위화도 회군은 고려 말 이성계가 일으킨 사건이며, 갑신정변은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근대의 정변입니다.

전시실에 놓인 유물은 지붕 끝을 장식하던 치미와 용머리상이며, 학생이 "대조영이 세운 국가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밑줄 그은 국가는 발해입니다.
발해는 9세기 선왕 때 연해주에서 요동에 이르는 최대 영역을 차지하고 문물이 크게 번성하여, 당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 불렸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일입니다. 수의 침략을 물리친 것은 고구려(살수 대첩)이고, 독서삼품과는 통일 신라 원성왕이 실시한 관리 등용 제도이며, 지방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두던 기인 제도는 고려 태조가 시행한 호족 견제책입니다.

카드 뒷면에는 상주 가은현 출생, 공산 전투에서 고려에 승리,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 이후 고려에 투항이라는 이력이 적혀 있습니다. 이 인물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입니다.
견훤은 신라의 군인 출신으로 서남 해안에서 세력을 키운 뒤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900). 카드의 빈칸에는 출생과 공산 전투 사이에 들어갈 이 건국 사실이 알맞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인물의 행적입니다. 철원 천도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한 일이고, 훈요 10조를 남기고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은 것은 고려 태조 왕건입니다.

발표 내용에 따르면 이 책은 승려 일연이 쓴 역사서로, 왕력·기이·흥법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조건에 모두 맞는 책은 삼국유사입니다.
충렬왕 때 편찬된 삼국유사는 불교사와 설화, 향가 등을 폭넓게 담았고, 특히 단군왕검의 건국 신화를 처음으로 수록하여 우리 역사의 시작을 고조선으로 밝힌 점에서 가치가 큽니다.
나머지는 저자와 성격이 다릅니다. 발해고는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사를 다룬 책이고, 동국통감은 조선 성종 때 서거정 등이 편찬한 통사이며, 동사강목은 조선 후기 안정복이 강목체로 정리한 역사서입니다.

인터뷰에서 승려 차림의 인물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고 금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 주장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해 거사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고려 인종 때 일어난 묘청의 난입니다.
묘청 등 서경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와 금국 정벌, 칭제건원을 주장하였으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세력의 반대에 막히자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1135). 이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시기와 주체가 다릅니다. 김흠돌의 난은 통일 신라 신문왕 때, 원종과 애노의 난은 신라 하대 진성 여왕 때 일어난 농민 봉기이며,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평안도 지역 차별에 반발해 일어난 난입니다.

제시된 자료는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가 봉기하자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킨 일과, 원에 사신을 따라가 통역으로 공을 세운 유청신의 출신지 고이부곡을 고흥현으로 올린 일을 담고 있습니다. 향·소·부곡을 현으로 승격시키는 조치와 원과의 교류가 함께 나타나므로 이 나라는 고려입니다.
고려는 전국을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와 북방 국경 지대의 군사 행정 구역인 양계(북계·동계)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양계에는 병마사를 파견하고 군사 요충지에 진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지방 제도입니다. 전국을 8도로 나눈 것은 조선이고, 22담로에 왕족을 보낸 것은 백제 무령왕 때이며, 5소경을 두어 수도의 치우친 위치를 보완한 것은 통일 신라입니다.

제시된 문서는 칸이 살리타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겠다고 위협하면서, 앞서 보낸 사신 저고여가 살해된 책임을 묻겠다고 통보한 외교 문서입니다. 저고여 피살 사건과 살리타의 침입은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 명분이었으므로, 이 문서를 보낸 나라는 몽골입니다.
몽골의 2차 침입 때 승려 출신 김윤후는 처인 부곡민을 이끌고 처인성에서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여 몽골군을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몽골에 대한 고려의 대응으로 옳은 내용입니다.
나머지는 상대국이 다릅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거란의 침입에 맞선 대응이고, 이자겸이 사대 요구를 받아들인 상대는 금(여진)이었습니다.

기획안의 제목이 ‘숙종이 꿈꾸었던 고려’이고, 기획 의도에 왕권을 강화하고 문벌 세력을 견제하였던 고려 제15대 왕 숙종의 정책을 조명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에는 고려 숙종의 정책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1회 ‘서적포를 설치하다’, 제3회 ‘남경에 궁궐을 세우다’, 제4회 ‘별무반을 조직하다’는 모두 숙종 대의 일입니다. 숙종은 이와 함께 의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전도감을 두고 해동통보·삼한통보·활구(은병) 등 화폐를 만들어 유통을 시도하였으므로, 빈칸에는 해동통보를 제작하다가 들어갑니다.
규장각 설치는 조선 정조, 노비안검법은 고려 광종, 쌍성총관부 공격은 고려 공민왕의 일이어서 시기와 인물이 맞지 않습니다.





진행자의 설명은 이 인물이 정혜결사를 조직하였고, 선(禪)과 교(敎)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였으며 보조국사로도 불린다는 것입니다. 화면에는 승려의 진영(초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단서에 모두 해당하는 고려의 승려는 지눌입니다. 지눌은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수선사 결사(정혜결사) 운동을 펴며 불교계의 세속화를 비판하였고,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내세워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아우르고자 하였습니다.
보기로 제시된 다른 승려들은 단서와 맞지 않습니다. 요세는 백련결사를 통해 법화 신앙을 강조하였고, 혜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와 왕오천축국전을 남겼으며, 원효는 일심 사상과 아미타 신앙으로 불교 대중화에 힘쓴 신라의 승려입니다.

교사가 고려의 사회 모습에 대해 말해 보자고 질문하였으므로, 고려 시대에 해당하지 않는 답변을 골라야 합니다.
골품제는 신라의 신분 제도로, 혈통에 따라 관등 승진은 물론 집의 크기와 수레·복색까지 제한하였던 제도입니다. 고려가 아니라 신라의 사회 모습이므로 이 답변이 옳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고려의 모습이 맞습니다. 의창은 흉년에 곡식을 빌려주어 백성을 구제하던 기구였고, 팔관회는 국가적 규모의 불교·토속 신앙 행사로 개최되었으며, 고려에서는 여성이 호주가 될 수 있고 재산을 자녀에게 고루 나누어 주는 등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높았습니다.

교사는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한 조선 제3대 왕에 대해 말해 보자고 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왕은 태종(이방원)이며, 학생 한 명이 이미 6조 직계제 실시를 답하였으므로 (가)에도 태종의 정책이 들어가야 합니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재정과 군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인구를 파악하려 하였고, 16세 이상 남자에게 신분과 이름을 적은 패를 차게 하는 호패법을 시행하였습니다. 따라서 빈칸에는 호패법 시행이 알맞습니다.
직전법 제정은 세조, 장용영 설치는 정조, 척화비 건립은 흥선 대원군 집권기의 일이므로 태종의 정책이 아닙니다.

전시 안내를 보면 주제가 ‘한글을 빛낸 인물들’이고, 제1실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가), 제2실이 우리말 문법을 연구한 주시경, 제3실이 한글 점자를 창안한 박두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인물이므로 (가)는 세종입니다.
세종은 정초·변효문 등에게 명하여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노인 농부들에게 물어 정리한 농사직설을 간행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종의 업적으로 옳은 내용입니다.
만권당을 세운 인물은 고려 충선왕, 대전회통 편찬은 흥선 대원군 집권기, 초계문신제 시행은 조선 정조의 일이므로 세종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안내자는 이곳이 전주 사고(史庫)이며, 사초와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편찬한 (가)를 보관하던 여러 사고 중 하나이고, 전주 사고의 (가)는 전란 중에도 소실되지 않아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을 모은 시정기를 자료로 삼아 왕이 세상을 떠난 뒤 실록청에서 편찬한 책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임진왜란 때 춘추관·충주·성주 사고본은 모두 불탔으나 전주 사고본만 내장산 등으로 옮겨져 살아남았고, 이를 바탕으로 실록이 다시 인쇄·보관될 수 있었습니다.
보기의 다른 책들은 성격이 다릅니다. 동의보감은 허준이 편찬한 의학서, 경국대전은 조선의 기본 법전, 삼강행실도는 모범이 될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실은 윤리서입니다.

화면 아래 인물이 들고 있는 것은 오천 원권 지폐이며, 설명에 이 화폐에는 (가)의 모습과 그가 태어난 강릉 오죽헌이 그려져 있고, 그는 조선 시대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수미법을 주장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공납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쌀로 거두자는 수미법을 건의한 인물은 이이(율곡)입니다. 이이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학문과 정치의 요체를 정리한 성학집요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으므로, 이것이 그의 활동으로 옳습니다.
앙부일구 제작은 세종 대 장영실 등의 일이고, 시무 28조 건의는 고려 성종 때 최승로, 화통도감 설치 제안은 고려 말 최무선의 활동이므로 해당하지 않습니다.

제시된 글은 『징비록』이 어떤 책인지 설명하면서, 그 전쟁 때 삼도(한성·개성·평양)를 잃고 임금이 수도를 떠나 피란하였으며 명의 군대가 여러 차례 출동해 우리나라를 도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이 기록한 전쟁, 선조의 피란과 명군의 참전이 함께 나타나는 전쟁은 임진왜란입니다.
임진왜란 중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의병을 모아 길주 등지에서 왜군을 격퇴하였고, 그 공적은 뒷날 북관대첩비에 새겨졌습니다. 이것이 이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종무의 쓰시마 섬 토벌은 조선 세종 때, 배중손과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 원종 때, 최영의 홍건적 격퇴는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라 전쟁 시기가 다릅니다.

안내 화면은 이곳이 제주 행원 포구이며,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등지로 유배되었던 (가)가 이후 이곳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와 유배 생활을 이어가다 생을 마감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나 강화도를 거쳐 제주에서 죽은 왕은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은 즉위한 해에 방납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처음 시행하여, 특산물 대신 토지 결수에 따라 쌀 등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집현전 설치와 4군 6진 개척은 세종 때의 일이고, 비변사 폐지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의 조치이므로 광해군 재위 기간과는 맞지 않습니다.

화면 속 그림은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으로, 훈장 앞에서 훌쩍이는 학생과 그를 바라보며 웃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이므로,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조선 후기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서민 문화가 발달하여 한글 소설이 널리 읽혔고, 마당이나 장터에서 판소리 공연이 성행하였습니다. 도자기에서는 흰 바탕에 푸른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청화 백자가 유행하였습니다.
반면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므로 이것이 적절하지 않은 설명입니다.

화면에 제시된 자료는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설계도입니다. 이 거중기는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 기술서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제작되었고, 수원 화성 축조에 이용되어 공사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였습니다.
거중기를 만든 인물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입니다. 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화성 축조에 참여하였고,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된 뒤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정약용은 토지 개혁론으로 마을 단위에서 토지를 공동 소유·경작하고 노동량에 따라 수확물을 분배하자는 여전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참고로 추사체를 창안한 인물은 김정희, 북학의를 저술한 인물은 박제가, 몽유도원도를 그린 인물은 안견입니다.

화면의 설명에는 김정호가 제작한 총 22첩의 목판본 지도이며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 지도는 대동여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전국 지도로, 각 첩을 접었다 펼 수 있게 만들어 휴대가 편리하였고 목판으로 인쇄하여 여러 부를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산줄기와 하천, 도로망을 기호로 정리해 실용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한편 동국지도는 정상기가 최초로 100리 척을 사용해 만든 지도이고,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 지도가 조선에 전해진 것이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현존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입니다.

그림 왼쪽에는 자의 대비가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과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이 맞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현종 때 벌어진 예송으로, 효종과 효종비의 상을 둘러싸고 붕당 간에 벌어진 논쟁입니다.
그림 오른쪽에는 영조가 조정 신하들의 당쟁을 지적하며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라고 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는 현종 때의 예송과 영조 즉위 초 사이의 시기, 곧 숙종 대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경신환국입니다. 숙종은 집권 붕당을 급격히 교체하는 환국을 여러 차례 단행하였는데, 그 첫 번째인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때, 병자호란은 인조 때 일어나 모두 예송 이전의 일이고, 임술 농민 봉기는 철종 때의 일로 영조 이후에 해당하므로 (가) 시기와 맞지 않습니다.

필기 내용은 갑오·을미개혁을 정리한 것으로, 제1차 갑오개혁이 (가)를 중심으로 추진되어 과거제·노비제·연좌제 폐지가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개혁을 주도한 기구는 군국기무처입니다.
군국기무처는 1894년 설치된 초정부적 회의 기구로, 김홍집을 총재로 하여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개혁 법안을 의결하였습니다. 제2차 갑오개혁 때는 폐지되고 홍범 14조 반포, 지방 행정 조직의 23부 개편, 교육 입국 조서 반포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정방은 고려 무신 집권기 최우가 인사 행정을 담당하게 한 기구, 교정도감은 최충헌이 설치한 최고 권력 기구이며,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 개화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입니다.

화면 속 사진은 문수산성이고, 이 사건 당시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입니다.
병인양요는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된 것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입니다. 물러가면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 등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해 갔습니다.
이 시기 국정을 주도하던 인물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으로, 두 차례의 양요를 겪은 뒤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담아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신미양요의 배경이 된 일이고, 삼정이정청은 임술 농민 봉기의 수습책으로 설치되었으며, 운요호가 강화도에 접근한 것은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이어진 운요호 사건입니다.

제시된 유물은 전시된 책과 전보 조선사건이라는 명패로, 화면의 설명은 이 책이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당시 일본 공사가 쓴 보고서를 정리한 것이며 일본 측 피해가 기록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1882년의 임오군란입니다.
임오군란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로 쌓인 불만이 폭발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흥선 대원군을 다시 권좌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들어온 청군이 개입하여 군란은 진압되었고, 흥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졌으며, 일본과는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조선책략의 유입은 제2차 수신사 파견의 결과이고, 우금치 전투는 동학 농민 운동,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의 정변은 갑신정변에 해당합니다.

화면의 자료는 대표 민영익이 미국 대통령에게 전한 국서의 한글 번역문으로, 두 나라가 조약을 맺어 우호 관계가 돈독해졌으므로 사절단을 보낸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절단은 보빙사입니다.
보빙사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후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으로,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서광범·유길준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산업 시설과 제도를 시찰하였고, 유길준은 현지에 남아 유학한 뒤 서유견문을 남겼습니다.
한편 수신사는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에 보낸 사절단, 영선사는 청에 파견되어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운 사절단, 조사 시찰단은 일본의 근대 시설을 몰래 살펴보기 위해 보낸 사절단입니다.





검색 결과에는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창간하였고, 민중 계몽을 위해 순 한글로 발행하였으며 외국인을 위해 영문판도 함께 제작하였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 조건에 해당하는 신문은 독립신문입니다.
독립신문은 18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한글판과 영문판을 함께 펴내 국내 민중을 계몽하는 동시에 조선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후 서재필 등은 독립 협회를 창립하고 독립문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
함께 제시된 다른 신문들 가운데 제국신문은 순 한글로 발행되어 서민층과 부녀자가 주로 읽었고, 해조신문은 연해주 지역에서 발행된 동포 신문이며,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함께 창간하여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발표 장면의 학생들이 말하는 단서는 고려 후기에 만들어졌다는 점, 대한 제국 시기에 일본인에게 약탈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다시 돌아왔다는 점, 그 과정에서 베델과 헐버트가 노력하였다는 점, 지금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모두에 들어맞는 문화유산은 개성 경천사지 십층 석탑입니다.
경천사지 십층 석탑은 고려 충목왕 때 대리석으로 만든 탑으로, 원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조각과 독특한 평면 구조가 특징입니다. 조선 세조 때 세워진 원각사지 십층 석탑이 이 탑의 양식을 이어받았습니다.
함께 제시된 다른 탑들은 시대가 맞지 않습니다. 불국사 다보탑과 분황사 모전 석탑은 신라의 탑이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은 백제의 탑입니다.

(가) 봉오동 전투는 1920년, (나) 영릉가 전투(양세봉의 조선혁명군)는 1932년, (다) 한국광복군의 인도·미얀마 전선 활동(지청천 총사령)은 1943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기순으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제시된 신문 기사는 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상황을 보도한 것으로, 피해 상황에 일본군 전사자 157명·중상자 200여 명·경상자 100여 명, 독립군 전사자 장교 1명·병사 3명·중상자 2명이 적혀 있습니다. 이 싸움이 바로 봉오동 전투로,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의 무장 투쟁이 본격화된 1920년 6월에 벌어졌습니다.
연표는 1910년 국권 피탈, 1925년 미쓰야 협정,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45년 8·15 광복으로 구간이 나뉘어 있습니다. 1920년은 국권 피탈과 미쓰야 협정 사이이므로 가장 앞선 첫 번째 구간에 해당합니다.
참고로 봉오동 전투 직후인 같은 해 10월에는 김좌진·홍범도 등이 청산리 대첩에서 다시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미쓰야 협정(1925)은 일제가 만주 군벌과 맺어 독립군을 탄압한 조약이므로, 봉오동 전투는 그보다 앞선 시기임을 기억해 두면 됩니다.

보고서의 목차를 보면 대조선 국민 군단의 활동(박용만의 결성 주도, 독립군 양성, 군단의 해체)과 한인 비행 학교의 운영(노백린의 설립 노력, 김종림의 재정 지원, 학교의 폐쇄)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조직한 대조선 국민 군단과 노백린이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세운 한인 비행 학교는 모두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입니다.
따라서 (가) 지역은 미주로, 이곳에서는 안창호·이승만 등이 중심이 되어 1910년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되어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주도하였습니다.
나머지는 지역이 다릅니다. 서전서숙과 신흥 강습소는 각각 북간도 용정과 서간도 삼원보에 세워진 만주의 민족 교육 기관이며, 권업회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조직된 단체입니다.

뉴스는 이상재 선생의 장례가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는 내용으로, 그가 '일체의 기회주의를 부인함' 등을 강령으로 내세운 민족 유일당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강령과 '민족 유일당'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단체는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합쳐 만든 신간회입니다.
신간회는 전국에 지회를 두고 강연회를 열어 민중을 계몽하였으며,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계획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나머지 단체는 성격이 다릅니다.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한 단체, 진단 학회는 이병도 등이 한국사를 연구하며 진단학보를 펴낸 학술 단체, 조선 형평사는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내건 단체입니다.

답사 코스에는 태사묘(고창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려 공신 삼태사의 위패를 모신 사당), 도산 서원(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 임청각(일제 강점기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세 곳은 모두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지도에는 네 지점이 표시되어 있고 각각 인천, 논산, 부산, 안동이라는 지명이 함께 적혀 있으므로, 안동으로 표기된 경상북도 내륙의 지점이 답사가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나머지 지점은 서해안의 인천, 충청남도의 논산, 남해안의 부산으로 답사지와 맞지 않습니다. 태사묘의 고창 전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격파한 싸움으로, 이 지역의 옛 이름이 곧 고창입니다.

제시된 네 가지 설명은 김원봉 등을 중심으로 창설, 중국 측의 지원,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거나 한국 광복군에 합류입니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부대는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창설된 조선 의용대입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주로 정보 수집·포로 심문·선전 활동을 맡았습니다. 이후 더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원한 다수 대원이 화북 지방으로 이동해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뒤의 조선 의용군)를 이루었고, 김원봉이 이끄는 나머지 병력은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습니다.
나머지는 성격이 다릅니다. 별기군은 개항기에 만든 신식 군대, 북로 군정서는 김좌진이 이끌며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북간도의 독립군 부대, 동북 항일 연군은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한 항일 무장 조직입니다.

제시된 법안 심사 보고서는 1983년에 작성된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인 1919년' (가)가 항일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독립 공채를 발행하였고, 그 공채에 '조국이 광복되고 독립을 승인받은 후 이자를 가산하여 상환할 것을 대한민국의 명예와 신용으로 보증한다'고 기재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3·1 운동 이후 발행된 이 공채를 국가가 상환하도록 근거법을 마련한다고 하였습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수립되어 해외 교민과 미국인 등을 대상으로 독립 공채를 발행한 주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입니다. 임시 정부는 국내와의 비밀 연락망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두어 정보를 전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습니다.
나머지는 주체가 다릅니다. 집강소는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각 고을에 설치한 자치 기구, 만민 공동회는 독립 협회가 연 민중 집회이며, 개벽·신여성 등의 잡지는 천도교에서 발간하였습니다.

검색 결과의 주요 활동에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및 상하이 사변 승전 축하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장성과 고위 관리를 처단함'이라고 나와 있고, 관련 사진으로 의거 현장과 현장에서 발견된 도시락 폭탄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의거의 주인공은 한인 애국단 소속의 윤봉길입니다.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의 이 의거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한국 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인물은 활동이 다릅니다. 안창호는 신민회와 흥사단을 이끈 인물, 이육사는 절정 등을 남긴 저항 시인,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쓰고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한 승려입니다.

제시된 소설은 현기영의 순이 삼촌으로, '떼죽음 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 뿐이겠는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아래 설명은 이 사건이 미 군정기에 시작되어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까지 지속되었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 충돌 및 토벌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조건에 해당하는 것은 제주 4·3 사건입니다.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때문에 제주도 두 개 선거구에서는 5·10 총선거가 치러지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시기와 성격이 다릅니다. 간도 참변은 청산리 대첩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가 저지른 학살, 6·3 시위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1964년의 시위, 제암리 학살 사건은 3·1 운동을 탄압하며 일제가 저지른 만행입니다.

제시된 서훈 내용은 '인민 혁명당 재건 위원회 사건이 유신 헌법을 제정한 (가) 정부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는 등 한국의 민주화에 공헌'한 제임스 시노트 신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신 헌법을 만들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한 정부는 박정희 정부입니다.
박정희 정부 시기, 특히 유신 체제 아래에서는 긴급 조치가 잇달아 선포되고 사회 통제가 강화되어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경찰이 거리에서 단속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1945년 광복 직후 여운형이 조직한 단체이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는 이승만 정부 초기에 활동하였으며, 서울 올림픽은 1988년 노태우 정부 때 열렸습니다.

퀴즈의 단계별 힌트는 1단계: 장수왕이 새로운 도읍으로 삼은 곳, 2단계: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된 곳, 3단계: 남북 정상 회담이 최초로 개최된 곳입니다. 세 힌트를 모두 만족하는 지역은 평양입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고, 1920년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어 '내 살림 내 것으로'를 내건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열고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나머지 지역은 세 조건을 함께 충족하지 못합니다.

전시 사진의 주제어가 삼청 교육대 운영, 국풍 81 개최, 교복 자율화 시행이므로 (가)는 전두환 정부입니다. 신군부는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삼청 교육대를 설치했고, 1981년에는 여의도에서 대규모 관제 문화 행사인 국풍 81을 열었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강압적 통치와 함께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유화 정책을 병행했습니다. 중·고등학생의 교복과 두발 자율화, 야간 통행 금지 해제, 프로 야구 출범 등이 대표적이며, 야간 통행 금지는 1982년 1월에 전면 해제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1953)은 이승만 정부,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시(1962)와 베트남 전쟁 국군 파병(1964~1973)은 박정희 정부 때의 일입니다.

문화유산 카드는 (가)를 국가 무형 문화재로 소개하면서,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지내던 의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종묘이므로, 그곳에서 거행하는 제사 의례인 종묘제례가 (가)에 해당합니다.
카드에 적힌 일제 강점기에 축소되었고 해방 이후 한때 시행되지 않다가 1969년부터 다시 거행되었다는 내력도 종묘제례의 역사와 일치합니다. 현재는 종묘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성격이 다릅니다. 연등회는 고려 시대에 성행한 불교 행사이고, 승전무는 통영에서 전승된 군사 의식 무용이며, 석전대제는 종묘가 아니라 문묘(성균관)에서 공자와 성현에게 올리는 제례입니다.

기사에는 (가)가 음력으로 쇠는 새해의 첫날이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구정(舊正)으로 불렸고,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 고유 명칭으로 바뀌고 3일 연휴가 확정되었다고 나옵니다. 이는 설날의 내력 그대로입니다.
설날에는 차례를 지낸 뒤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나누며, 떡국을 먹고 윷놀이·연날리기 등을 즐깁니다. 따라서 이 명절의 세시풍속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세배하기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명절의 풍속입니다. 화전놀이는 삼짇날, 창포물에 머리 감기는 단오, 보름달을 보며 소원 빌기는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에 행해집니다.

제시된 자료는 계엄군과 광주 시민이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대치하다가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1980년 광주에서 신군부의 계엄 확대와 무력 진압에 맞서 일어난 5·18 민주화 운동의 전개 과정이다. 4·19 혁명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운동,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전두환 정권의 호헌 조치에 반발해 일어난 운동,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 유신 체제에 반대해 부산·마산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금남로·계엄군 발포와는 관련이 없다.

(가)는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농지 개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는 내용으로, 1949년의 상황입니다. (나)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이른바 3저 호황을 다루고 있고 제2차 석유 파동 이후 7년여 만이라고 했으므로 1980년대 중반입니다.
따라서 두 시기 사이인 1950년대~1980년대 초에 있었던 일을 찾아야 합니다. 박정희 정부 시기 중화학 공업 육성과 수출 주도 성장에 힘입어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처음 달성하였으므로 이것이 사이 시기의 사실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3저 호황 이후의 일입니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은 1996년,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FTA) 체결은 2007년, G20 정상 회의 서울 개최는 201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화면 아래에 2000년 3월, 베를린 자유대학이라고 적혀 있고, 연설 내용은 북한의 무력 도발은 용납하지 않되 흡수 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남북이 화해·협력하자는 것으로 햇볕 정책의 핵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이른바 베를린 선언입니다.
이 선언 직후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어 2000년 6월 평양에서 제1차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리고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후속 조치로 경의선 복원과 함께 개성 공단 조성에 합의하여 남북 경제 협력의 상징적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시기가 다릅니다.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1991년 노태우 정부,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는 1972년 박정희 정부 때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