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제71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71회

제시된 (가) 시대는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고 빗살무늬 토기, 갈돌과 갈판을 사용한 신석기 시대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하여 실을 뽑고 옷감을 짜는 원시적 수공업이 이루어졌다. 철제 농기구 사용은 철기 시대, 고인돌과 거푸집을 이용한 청동기 제작은 청동기 시대의 특징이므로 (가) 시대와 맞지 않는다.

단궁·과하마·반어피는 동예의 특산물이며, 무천은 동예에서 매년 10월에 열린 제천 행사이다. 또한 동예에는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배상하게 하는 책화의 풍습이 있었으므로 정답은 동예이다.

대본 속 왕은 월성 동쪽에 궁을 짓다 황룡이 나타나자 황룡사를 창건하도록 하고, 화랑도를 정비하도록 지시한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북한산 순수비를 세워 이를 기념하였다. 주자감은 발해의 교육기관, 칠지도는 백제 근초고왕이 왜에 보낸 것, 김흠돌의 난 진압은 신라 신문왕의 업적이다.

일기 속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한강 유역 일부 수복은 모두 백제 성왕의 업적이다. 성왕은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으며,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일시적으로 되찾았다. 무령왕은 웅진 시기의 왕으로 사비 천도 이전이고, 근초고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전성기를 이끈 4세기 왕이며,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왕이므로 모두 해당하지 않는다.

제시된 자료의 (가)는 김수로왕의 건국 설화가 전해지고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며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다는 내용으로 금관가야(가야)를 가리킨다. 가야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낙랑군, 왜와 활발히 교류하며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한 나라는 발해, 화백 회의는 신라의 합의 기구, 범금 8조는 고조선의 법이므로 나머지 보기는 해당하지 않는다.

제시된 자료의 광개토 대왕릉비와 안악 3호분은 고구려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수도 국내성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한 국가는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중앙에 태학, 지방에 경당을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독서삼품과는 통일신라, 마립간 칭호는 신라, 정사암 회의는 백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제시된 자료는 원종과 애노의 난(사벌주, 진성여왕 때)과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적고적)의 봉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신라 말 진골 귀족의 왕위 쟁탈전과 지방 통제력 약화로 조세 수취가 무너지면서 농민들이 각지에서 봉기한 상황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자료를 활용한 탐구 주제로는 신라 말의 사회 동요가 가장 적절하다. 불교 수용(1번), 고구려 부흥 운동(3번), 삼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4번)와는 관련이 없다.

제시된 세 가지 특징 모두 설총을 가리킨다. 원효 대사의 아들이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를 체계화했고, 신문왕에게 향락을 경계하라는 내용의 화왕계를 지어 바쳤다. 강수는 외교 문서 작성에 뛰어났던 인물, 의상은 화엄 사상을 정립한 승려, 혜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승려이므로 해당하지 않는다.

정효공주 묘지석에서 문왕을 황상으로, '보력'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점을 통해 (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전성기에 지방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여 통치하였다.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 사출도는 부여, 청해진은 통일신라 장보고와 관련된 내용이다.

(가)는 견훤이 완산주(전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건국한 사건(900년), (다)는 왕건의 고려군이 공산 전투에서 패배한 뒤 고창 전투에서 승리한 사건(930년), (나)는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항복시킨 사건(935년)이다. 따라서 시간 순서는 (가) - (다) - (나)이다.

제시된 인물은 고려 광종이다. 광종은 '광덕'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과거 제도를 처음 실시했으며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는 등 왕권 강화 정책을 폈다. 이와 함께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해방시켜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였다. 녹읍 폐지는 신라 신문왕, 훈요 10조는 태조 왕건, 전민변정도감 설치는 공민왕과 관련된 사실이다.

수월관음도는 금가루(금니)를 이용한 채색과 정교한 문양이 특징인 고려 시대 불화 양식이다. 고려는 국경 지역인 북쪽 변경에 동계와 북계를 설치하여 방어 체제를 갖추었다. 22담로 파견은 백제, 5소경 설치와 9서당 10정 운영은 통일신라의 제도이므로 (가)와는 관련이 없다.

제시된 사실은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 현종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거란의 2차 침입(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이 나주로 피란하였고, 이후 거란의 3차 침입 때 강감찬이 귀주대첩으로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오자 현종이 영파역까지 나가 맞이하였다. 현종 재위 시기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초조대장경 조판이 시작되었다. 교정도감은 최충헌(무신집권기), 농사직설은 세종, 이자겸의 난은 인종 때의 일이다.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로 배흘림기둥과 주심포 양식이 특징인 건물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기둥 중간이 굵고 위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배흘림기법과 공포가 기둥 위에만 짜여지는 주심포 양식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특징을 가진 건축물 사진인 2번이 정답이다.

제시된 자료는 망이·망소이의 난(1176년)으로, 공주 명학소의 소민들이 부역과 신분 차별에 반발하여 봉기한 사건이다. 이는 무신정변(1170) 이후 무신 집권기의 사회 혼란 속에서 일어났으며, 강화도 천도(1232) 이전 시기에 해당하므로 연표의 (나) 시기에 위치한다.

제시된 자료는 숙종 때 여진 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조직하는 상황과, 이후 예종 때 금이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는 문서를 보낸 상황 사이의 시기를 나타낸다. 이 시기(가)에 별무반을 이끈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서희의 강동 6주 확보는 이보다 앞선 성종 때의 일이며, 최무선의 진포 대첩과 김윤후의 충주성 전투는 고려 말 공민왕·우왕 대의 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고려의 국가 행사로 개경 궁궐에서 성대하게 열렸으며, 태조가 훈요 10조에서 후대 왕들에게 중요성을 강조했고, 태조를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 제사하며 가무와 공연을 즐기고 주변 나라 상인과 사신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친 행사는 팔관회이다. 영고는 부여의 제천 행사, 단오제는 강릉 지역의 전통 축제, 종묘 제례는 조선 왕실의 조상 제사로 고려의 이 행사와 무관하다.

활구(은병)는 고려 시대에 은 1근으로 만든 병 모양의 화폐로, 고액 거래에 사용되었다. 감자·고구마는 조선 후기에 전래되어 재배된 작물이고, 시장을 감독하는 동시전은 신라의 관청이며, 만상·내상 등 사상이 무역을 주도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 왕후 소생 동생들(방석, 방번)을 제거하고 사병을 혁파했으며, 이후 즉위하여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긴 인물은 태종 이방원이다. 태종 재위 시기에는 호구 파악과 군역 부과를 위해 호패법이 처음 시행되었다. 현량과는 중종 때 조광조의 건의로 실시되었고,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반포되었으며, 5군영 체제는 조선 후기 숙종 때 완성되었다.





그릇 표면에 백토를 분장하고 다양한 무늬·그림으로 장식한 도자기는 분청사기이며,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주로 제작되었다는 설명과 일치한다. 분청사기는 청자에 백토를 발라 장식하는 기법으로, 백자나 청자와는 표면 질감과 문양 표현 방식에서 구분된다. 보기 중 이러한 백토 분장 기법과 자유로운 문양 표현이 나타난 도자기가 2번이다.

세조 때 과전을 개혁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한 제도는 직전법이다. 기존 과전법은 전직·현직 관리 모두에게 수조권을 주고 세습까지 허용되어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세조는 이를 개혁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균역법과 영정법은 조세 제도(군역·전세) 개편이고, 호포법은 군포를 호 단위로 징수한 제도로 이 사료와 무관하다.

제시문은 각 지역의 토산물을 정기적으로 수취해 국가 수요품을 조달하던 제도로, 해당 고을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부과되는 방납의 폐단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동법이 실시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지역 특산물을 현물로 거두던 공납에 대한 설명이며, 대동법은 공납을 쌀·베·동전 등으로 대신 납부하게 한 제도이다. 군역은 군사 복무, 전세는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 환곡은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게 하던 제도로 모두 해당하지 않는다.

강항(1567~1618)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전라도 영광에서 의병을 모집했고,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가)는 임진왜란이며, 이 전쟁 중에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김종서의 6진 개척은 세종 때, 어재연의 광성보 항전은 신미양요(1871),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은 세종 때의 일로 모두 임진왜란과 무관하다.

지문의 국왕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현륭원)을 참배하고 지지대 고개를 넘어 수원으로 향했다는 내용에서 정조임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신진 인재를 재교육하기 위해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으며, 규장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건설한 업적이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김부식(1번), 훈민정음은 조선 세종(2번), 통리기무아문은 고종 대 개화 정책 기구(4번)로 정조와는 관련이 없다.





제시된 초대장은 김홍도의 풍속화 특별전을 알리는 내용으로,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을 전시함을 안내하고 있다. 김홍도는 씨름, 서당, 대장간, 빨래터 등 서민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소탈하고 해학적인 필치로 그린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화풍이 반영된 작품이 보기 3번이다. 나머지 보기들은 김홍도의 풍속화 화풍과 거리가 먼 다른 화가의 작품이거나 산수화·인물화 등 다른 화목에 해당한다.

대화 속 윤지충 사건은 1791년 신해박해(진산 사건)로, 조선 후기 정조 대의 상황이다. 이 시기에는 정감록 등 예언 사상이 유행하고, 판소리가 서민 문화로 성행했으며, 상평통보가 화폐로 널리 유통되었다. 반면 삼별초는 고려 무신 정권기~원 간섭기(13세기)에 존재했던 군사 조직이므로 조선 후기와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

구식 군인이 밀린 급료 중 일부를 겨와 모래가 섞인 쌀로 지급받은 데 분노하여 선혜청과 일본 공사관 등을 습격한 사건은 임오군란(1882)이다. 제시된 지도의 선혜청 터, 청수관 터(일본 공사관), 구식 군인이 집결한 옛 동별영, 별기군 훈련장이었던 하도감 터 등의 경로는 모두 임오군란과 관련된 장소이다. 갑신정변은 급진 개화파의 정변, 병인양요는 프랑스의 강화도 침입, 을미사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구식 군인의 분노와 쌀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서얼은 조선 시대 첩의 자손으로, 문과 응시와 관직 진출에서 차별을 받았다. 이에 서얼들은 통청 운동을 전개하여 청요직 진출 등의 차별 철폐를 요구하였다. 신공을 바친 것은 공노비,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은 노비, 골품에 따른 관등 승진 제한은 신라의 골품제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시문의 (가)는 흥선대원군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해 섭정하며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거두고 당백전을 주조한 인물이 흥선대원군이며, 그는 병인양요·신미양요 이후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알리기 위해 전국에 척화비를 건립하였다. 동의보감은 광해군 때 허준이 완성했고, 신해통공은 정조 때 채제공의 건의로 시행되었으며, 나선 정벌은 효종 때 단행된 것으로 (가)와는 관련이 없다.

김홍집은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국내에 들여왔으며, 이후 제물포 조약 체결 등에 관여하였고 갑오개혁 때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개혁을 주도하였다. 김옥균은 급진 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창설한 인물, 유인석은 위정척사파 의병장으로 성격이 다르다.

병자년(1876년)에 일본과 체결하여 부산·원산·인천 3개 항구를 개항하기로 한 조약은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이다. 기유약조는 조선과 일본 간의 통상 조약(1609년, 대일 무역 재개), 한성 조약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과 체결한 조약,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은 1907년 통감의 권한을 강화한 조약으로 개항과 무관하다.

그림 속 최익현이 을사조약(을사오적 규탄)을 언급하며 의병을 일으키는 장면으로, 이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전개된 항일 의병 운동을 나타낸다. 비변사 설치는 조선 중종~임진왜란 시기, 기묘사화는 1519년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임술 농민 봉기는 1862년 삼정의 문란에 따른 농민 항쟁으로 모두 이 그림의 시대적 배경 및 내용과 무관하다.

제시된 자료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을 격파한 전투로, 이는 동학 농민 운동(1894) 당시의 사실이다. 황룡촌 전투 승리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였고, 이에 정부와 농민군 사이에 전주 화약이 체결되었다. 독립 협회 창립(1896)은 동학 농민 운동 이후의 일이고,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은 훨씬 이전의 사실이며, 박규수의 안핵사 파견은 임술 농민 봉기(1862) 때의 일이다.

기사는 한성 전기 회사가 서대문~청량리 전차 개통(1899년) 이후 동대문 발전소 전등 개설식을 거행한 대한제국 시기(1900년대 초)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이미 경인선(1899년 개통) 기차가 운행되고 있었으므로 경인선 기차를 타는 승객을 볼 수 있다. 텔레비전 방송과 경성 방송국의 라디오 방송(1927년)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모습이며, 박문국의 한성순보 인쇄(1883~1884년)는 이보다 훨씬 이전 시기의 모습이다.

제시된 (가)는 토지 조사 사업(1912~1918)이다. 조선 총독부는 지세 수취 등 식민 통치에 필요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임시 토지 조사국을 두고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이는 1910년대 무단 통치기에 해당한다. 같은 시기 총독부는 회사 설립을 허가제로 규제하는 회사령(1910)을 시행하여 민족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였다. 관민 공동회(1898)는 대한 제국 시기, 원산 총파업(1929)과 국가 총동원법(1938)은 1920~30년대 이후의 사실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제시문의 홍범도·최진동 등이 지휘한 독립군 연합 부대가 만주에서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이던 중 훈춘 사건을 구실로 출동한 일본군을 1920년 6월 승리로 이끈 전투는 봉오동 전투이다. 청산리 전투는 같은 해 10월 김좌진·홍범도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로 시기와 내용이 맞지 않으며, 쌍성보 전투는 1930년대 한국독립군의 활동, 우금치 전투는 동학 농민 운동과 관련되어 제시문과 무관하다.

방정환은 천도교 소년회를 중심으로 소년 운동을 전개하며 어린이날 제정에 기여하고, 잡지 『어린이』를 발간하는 등 어린이 인권 신장과 소년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의열단 창설은 김원봉, 베를린 올림픽 참가는 손기정, 헤이그 특사 파견은 이준·이상설·이위종과 관련된 사실이므로 (가)에는 어린이날 제정에 기여함이 들어가야 한다.

황국 신민 서사는 중일 전쟁(1937) 이후 침략 전쟁을 확대하던 민족 말살 통치기에 만들어져 한국인에게 암송이 강요되었다. 이 시기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창씨개명 등을 시행했다. 신간회 창립(1927)과 교육 입국 조서 발표(1895), 동양 척식 주식회사 설립(1908)은 모두 그 이전 시기의 사실이다.

(가)는 3·1 운동이다.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에 맞춰 탑골 공원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시위를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민족 운동으로, 이를 계기로 조직적 독립운동을 이끌 지도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청군 개입으로 진압된 사건은 갑신정변,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은 운동은 국채 보상 운동, 황국 중앙 총상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상권 수호 운동이다.

1920년대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 아래 모금 활동을 벌여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추진한 것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 가뭄·수해 등 자연재해로 모금이 부진해지자 일제는 회유책으로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며 이 운동을 좌절시켰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농촌 근대화 운동, 국채 보상 운동은 국채 상환을 위한 모금 운동, 물산 장려 운동은 국산품 애용 운동으로 제시된 내용과 다르다.

제시된 자료는 치안 유지법(1925년 제정)을 근거로 소년 축구 대회까지 탄압하는 일제 강점기 상황을 보여준다. 치안 유지법이 적용되던 시기는 1920년대~1930년대 일제 식민 통치 시기이므로, 이 시기에 일제가 식량을 수탈하기 위해 실시한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는 총독부 직원의 모습이 가장 적절하다. 장용영은 조선 후기(정조), 군국기무처는 갑오개혁(1894),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1945년 광복 직후의 기구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마차 행렬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켰는데, 그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의 단원이었다. 한인 애국단은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한 단체, 독립 의군부는 임병찬이 조직한 복벽주의 의병 계열 단체, 조선어 학회는 한글 연구 단체로 모두 이봉창의 의거와 무관하다.

제시된 시는 이육사의 「광야」로,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이육사는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을 때 부여받은 수인 번호 264를 자신의 호(이육사)로 사용하였다. 김원봉은 의열단·조선의용대를 이끈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역사학자이자 「조선상고사」의 저자,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쓴 승려 시인으로, 모두 「광야」의 작가가 아니다.

유엔 총회 결의안 112호(1947)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설치와 남북한 총선거 감독을 규정한 결의로, 이에 따라 1948년 5·10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는 8·15 광복(1945)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사이에 해당하므로 (가) 시기에 발표된 것이다.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는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48년에 구성되었으며,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이고 방해하는 태도를 취해 결국 반민특위는 성과 없이 해체되었다. 같은 시기인 1949년 농지 개혁법이 제정되어 유상 매수·유상 분배 방식의 농지 개혁이 추진되었다. 100억 달러 수출 달성(1977, 박정희 정부), OECD 가입(1996, 김영삼 정부), IMF 구제 금융 조기 상환(2001, 김대중 정부)은 모두 이후 시기의 사실이다.

제시된 자료는 계엄군과 광주 시민이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대치하다가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1980년 광주에서 신군부의 계엄 확대와 무력 진압에 맞서 일어난 5·18 민주화 운동의 전개 과정이다. 4·19 혁명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운동,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전두환 정권의 호헌 조치에 반발해 일어난 운동,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 유신 체제에 반대해 부산·마산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금남로·계엄군 발포와는 관련이 없다.

경부 고속 도로는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8~1970년(2년 5개월)에 건설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77명의 노동자가 순직하여 금강 나들목 부근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에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을 추진하며 경부 고속 도로 건설,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펼쳤다. 금융 실명제는 김영삼 정부, 칠레와의 FTA 체결은 노무현 정부, 3저 호황은 전두환 정부 시기의 경제 상황이다.

뉴스에서 "광복 50주년(1995년)을 맞아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한다고 했으므로, 이는 1996년부터 시행된 김영삼 정부 시기의 정책이다. 김영삼 정부는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옛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므로 ①이 옳다. G20 정상회의(2010, 이명박 정부), 자이툰 부대 파병(2004, 노무현 정부), 한일 월드컵(2002, 김대중 정부)은 모두 이후 정부의 사실이다.

제시된 내용은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분단 이후 두 번째로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해 군사 분계선을 걸어서 도보로 통과하고, 개성 공단을 방문한 사실과 관련된다. 이때 6·15 남북 공동 선언의 계승과 남북 관계 발전, 평화 번영을 위해 발표한 문서는 10·4 남북 정상 선언(2007)이다. 남북 기본 합의서(1991)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1991)은 노태우 정부 시기, 7·4 남북 공동 성명(1972)은 박정희 정부 시기에 발표된 것으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가) 대한국 국제 반포(1899)는 대한제국이 전제 군주정을 선포한 사건이고, (다) 대동단결 선언(1917)은 순종의 주권 포기(1910년 8월 29일)로 황제권이 소멸하고 민권이 발생했다는 논리를 내세운 선언이며, (나) 제헌 헌법 공포(1948)는 국민 주권을 명문화한 대한민국 헌법 제정이다. 따라서 시간 순서는 (가)-(다)-(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