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제75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75회

연천 전곡리 유적은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 미군 그렉 보웬이 주먹도끼를 발견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며 동굴이나 막집에 거주하였다. 철제 무기 제작과 반달 돌칼을 이용한 벼 수확은 철기 시대, 가락바퀴를 이용한 실 뽑기는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이다.

대화창의 답변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기사를 근거로 들면서, (가)가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아들이며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보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 왕은 장수왕이므로 (가)는 장수왕입니다.
도림은 바둑으로 개로왕의 환심을 산 뒤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이게 해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고, 장수왕은 그 틈을 타 군사를 보내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습니다(475). 이 남진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수왕은 즉위 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427).
나머지 내용은 다른 왕들의 업적입니다. 유학 교육 기관인 태학 설립은 고구려 소수림왕, 우산국 복속은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의 활동이며,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은 신라 선덕 여왕 대의 일입니다.

화면 속 ‘국경일로 보는 역사’ 자료는 10월 3일 개천절을 다루면서, 개천절은 단군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나라인 (가)를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는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범금 8조(8조법)를 두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으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전해져 생명 존중·사유 재산 보호·신분제의 존재를 알려 줍니다.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풍습입니다.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연 나라는 고구려, 읍락의 경계를 침범하면 배상하게 한 책화는 동예, 여러 가(加)들이 사출도를 다스린 나라는 부여의 특징입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지배층 무덤으로, 유네스코는 이를 포함한 7개 고분군을 '가야고분군'으로 세계유산에 등재하였다. 가야는 여러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체를 유지하면서도 문화적 공통성을 공유했던 연맹 왕국으로, 철기 문화가 발달하여 철제 갑옷과 판갑, 덩이쇠(철정) 등 우수한 철기 유물을 남겼다. 따라서 가야의 철기 유물에 해당하는 1번이 옳으며, 나머지 보기는 고구려·백제·신라 등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이다.

답사 안내문의 주제는 “백제의 수도, 웅진의 재발견”이고, 답사 장소로 왕실 권위 회복과 지배 체제 재정비의 거점인 공산성, 고대 동아시아 문화 교류를 보여 주는 벽돌 무덤인 무령왕릉, 왕실의 제사 유적으로 알려진 정지산 유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을 잃은 뒤 문주왕 때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웅진은 오늘날의 충청남도 공주에 해당합니다. 세 유적 모두 공주 시내와 금강 일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도에는 위에서부터 서울, 공주, 부여, 익산이 차례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답사 지역은 공주가 표시된 지점입니다. 서울은 한성 도읍기, 부여는 사비 도읍기, 익산은 미륵사지가 있는 곳으로 웅진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화면의 자료는 흥덕왕 때 제정된 복식 규정으로, 옷감 ‘포(布)’의 촘촘함을 나타내는 단위인 승(升)의 상한을 신분별로 정해 놓았습니다. 남성은 진골대등 26승 이하, 6두품 18승 이하, 5두품 15승 이하, 4두품 13승 이하, 평민 12승 이하이고, 여성은 진골 28승 이하, 6두품 25승 이하, 5두품 20승 이하, 4두품 18승 이하, 평민 15승 이하입니다.
이처럼 골품에 따라 옷감의 품질까지 차등을 둔 나라는 신라입니다. 골품제는 관등 승진뿐 아니라 집의 규모, 수레, 그릇 등 일상생활 전반을 규제하였습니다.
통일 후 신라는 신문왕 때 유학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치해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은 나라는 후백제,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눈 나라는 고려, 귀족들이 정사암에 모여 국가 중대사를 결정한 나라는 백제입니다.

화면 속 문화유산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고, 설명에는 1층 몸돌에 백제를 멸망시킨 당의 장수 소정방의 공적이 새겨져 있어 한때 백제 정벌 기념탑이라는 뜻의 평제탑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확대된 부분이 바로 그 비문으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 비문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 당이 자신들의 전승을 과시하려고 새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문을 탐구하려면 신라와 당이 손잡고 백제를 공격한 나당 연합군의 활동을 조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이자겸의 난과 전민변정도감 설치는 고려 시대의 사건이고, 궁예의 철원 천도는 후삼국 시대의 일이므로 백제 멸망을 기념한 이 비문과는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공개 강좌의 제목은 “신라인 장보고, 동아시아를 잇다”이며, 2강은 산둥반도의 적산법화원 건립, 3강은 일본 승려 엔닌의 구법 활동 지원으로 짜여 있습니다. 강좌 전체가 장보고의 해상 활동을 다루고 있으므로 (가)에도 그의 대표적 행적이 들어가야 합니다.
장보고는 당에서 돌아온 뒤 흥덕왕의 허락을 받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신라·당·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을 장악하였습니다. 따라서 1강의 내용으로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한 활동이 적절합니다.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인물은 혜초, 원의 수도에서 만권당의 학자들과 교유한 인물은 이제현,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대표적 인물은 최치원으로 모두 장보고와는 다릅니다.

정효 공주 묘지와 문왕의 독자적 연호 '대흥', 상경성 이불병좌상은 모두 발해와 관련된 문화유산이다. 발해는 전성기 때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9주 5소경은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제도이고, 기인 제도는 고려 태조가 지방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이며, 백두산정계비는 조선 숙종 때 청과 국경을 정한 비석이다.

제시문의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린 왕은 고려 성종이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고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국자감을 정비하였다. 노비안검법은 광종,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공산 전투는 왕건(태조)과 관련된 사실이다.

세 장면은 각각 다른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에서 만적은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최충헌을 비롯해 각자의 주인을 없애고 노비 문서를 태워 버리자!”라고 선동하고 있으며, 이는 최충헌 집권기인 1198년의 만적의 난입니다.
(나)에서 승려 묘청은 “이곳 서경에 대위국을 세우고 연호를 천개라 하겠노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서경 천도가 좌절되자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며 일으킨 묘청의 난은 1135년의 일입니다. (다)에서 정중부가 “문신은 보이는 대로 모두 없애라!”라고 외치는 것은 1170년 무신 정변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나)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다) 정중부 등의 무신 정변 → (가) 만적의 난이 됩니다. 무신 정권이 성립한 뒤 하층민의 봉기가 잇따랐다는 흐름을 기억하면 순서를 쉽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획전 포스터는 ‘태평성대의 염원을 담다’라는 부제로 개태사를 소개하면서, 이 절이 (가)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함께 소개된 유물은 석조 여래 삼존 입상과 오층 석탑입니다.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인물은 고려 태조 왕건이므로 (가)는 태조입니다.
태조는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그 지방 출신의 중앙 관리를 사심관으로 삼아 자기 고장을 책임지게 하는 사심관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하는 기인 제도도 함께 운영하였습니다.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도입한 왕은 고려 광종, 『농사직설』을 편찬한 왕은 조선 세종,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운 왕은 신라 진흥왕입니다.

충렬왕 때 원에 매를 조공으로 바치기 위해 매의 사육과 사냥을 담당하는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도방은 무신 집권기 경대승·최충헌이 설치한 사병 조직, 정방은 최우가 인사권 행사를 위해 설치한 기구, 중방은 상장군·대장군들이 모여 군사 문제를 논의하던 무신 정권기의 최고 회의 기구이므로 매 사육·진상과는 관련이 없다.





학생들이 말한 내용은 공민왕 때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친 공, 우왕 때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한 승리, 우왕과 함께 추진한 요동 정벌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고려 말의 인물은 최영입니다.
최영은 1376년 홍산 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고, 명이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하자 우왕과 함께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출정한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최영은 제거되었습니다.
선택지에 제시된 다른 인물들의 초상은 각각 무신 집권기의 문인 이규보, 조선 건국을 설계한 정도전, 화약 무기를 개발해 진포에서 왜구를 격퇴한 최무선으로, 홍건적 격퇴·홍산 대첩·요동 정벌을 함께 아우르는 인물은 아닙니다.





탐구 보고서에 적힌 (가)의 특징은 고려 전기의 대표적 석탑, 송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짐, 각이 많고 층이 여러 개인 탑, 청동으로 만든 풍경과 금동 머리 장식이 있음입니다. 즉 다각 다층으로 세워진 고려 전기 석탑을 찾아야 합니다.
이 조건에 들어맞는 문화유산은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입니다. 팔각 평면에 아홉 층을 올린 다각 다층 석탑으로, 송의 영향을 보여 주는 고려 전기 석탑의 대표작이며 꼭대기에는 금동으로 만든 머리 장식이 남아 있고 각 층 처마 끝에 청동 풍경이 달려 있습니다.
함께 제시된 다른 유산 가운데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탑이 아니라 승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고, 원주 법천사지 지광 국사 탑 역시 승탑입니다. 개성 경천사지 십층 석탑은 원의 영향을 받은 고려 후기의 대리석 석탑이어서 시기와 계통이 다릅니다.

화면 속 승려는 장경판전에 늘어선 경판 앞에서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우던 시기 불교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판의 서체가 한 사람의 솜씨처럼 일정하고 오탈자가 거의 없다는 언급까지 붙어 있어, 밑줄 그은 시기가 몽골의 침입기(1231년 이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몽골군이 침입해 오자 승려 출신 김윤후는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 부곡민들과 함께 맞서 싸워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는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조판이 이루어지던 대몽 항쟁기의 대표적 사건입니다.
나머지는 시기가 어긋납니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조선 효종 대의 주장이고, 허준의 동의보감은 조선 광해군 대에 완성되었습니다. 망이·망소이의 봉기는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무신 집권기이기는 하지만 몽골 침입보다 앞선 시기입니다.

전시된 그림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북관유적도첩』에 실린 「척경입비도」로, 설명문에 따르면 (가) 인물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개척한 뒤 ‘고려의 경계’라 새긴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축조를 지휘한 인물은 고려의 윤관입니다.
윤관은 기병 중심의 여진에게 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숙종에게 별무반 설치를 건의하였습니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편성되었고, 예종 대에 이 부대를 이끌고 여진을 몰아낸 뒤 동북 지방에 9성을 쌓았습니다.
다른 활동은 각각 다른 인물의 업적입니다. 대마도 정벌은 조선 세종 대 이종무가, 강동 6주 확보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담판을 벌인 서희가, 일리천 전투 승리는 후백제를 무너뜨린 고려 태조 왕건이 이룬 일입니다.

카드 뒷면은 대각국사 의천에 대한 설명이다. 문종의 아들로 송에서 불교를 공부했고, "신편제종교장총록"을 간행했으며, 화폐 유통(주전) 확대를 주장한 인물이 의천이다. 의천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는 목적으로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삼국유사는 일연, 수선사 결사는 지눌, 화통도감 설치 건의는 최무선과 관련된다.

영상 자막은 영월 청령포를 소개하면서,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험준한 암벽이라 나룻배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섬 같은 곳이라 설명합니다. 이어 수양 대군이 (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이후 단종을 이곳으로 유배 보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수양 대군이 권력을 장악한 사건은 1453년의 계유정난입니다. 수양 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뒤 왕위에 올랐으며(세조),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결국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습니다.
나머지 사건은 시기와 성격이 다릅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 대 폐비 윤씨 사건을 빌미로 일어난 사화이고, 경신환국은 숙종 대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한 정국 변동이며, 기해예송은 현종 대 자의 대비의 상복 기간을 두고 벌어진 예법 논쟁입니다.

제시문의 마상재는 조선 후기 통신사가 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곡예 공연을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수신사와 영선사는 개항 이후 근대에 파견된 사절단이고, 연행사는 청에 파견된 사절단이므로 일본과 관련이 없다. 따라서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마상재 공연을 펼친 사절단은 통신사이다.

소현 세자가 청에 볼모로 끌려간 전쟁은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여 청군에 항전하다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와 곽재우의 의병 활약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며, 양헌수의 정족산성 전투는 병인양요 때의 사실이다.





안동 도산 서원은 이황(퇴계)의 제자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황은 『성학십도』를 지어 왕에게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도식으로 정리해 올렸는데, 이는 그의 대표 저술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보기 중 『성학십도』에 해당하는 4번이 옳다.

그림은 조광조가 중종에게 천거된 인재를 대궐로 모아 시험하는 현량과 실시를 건의하는 장면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현량과 실시, 위훈 삭제 등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 훈구 세력의 반발을 사 기묘사화로 축출되었다. 칠정산 편찬과 경국대전 반포는 조선 초기(세종~성종), 위화도 회군은 고려 말의 사건으로 이 장면 이후의 일이 아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로 설치된 군사 조직으로, 포수·살수·사수의 삼수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급료(삼수미)를 받는 직업 군인 성격을 띠었다. 9서당은 통일신라의 중앙군,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기의 특수부대, 장용영은 조선 정조 때 설치된 국왕 친위 부대로 모두 삼수병 편제와 무관하다.

제시된 현판 문구(균부균역, 재정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함)와 균역법 실시는 영조의 정책이다. 영조는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고 탕평 정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건립하였다. 집현전 설치는 세종, 대전회통 편찬은 흥선대원군(고종 대), 초계문신제 시행은 정조의 업적이다.

대화의 주인공은 연암 박지원으로, 「양반전」을 지어 양반의 허례허식과 부당한 특권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청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 수용과 상공업 발전을 주장하였다. 동학 창시는 최제우, 추사체 창안은 김정희, 거중기 설계는 정약용이다.

밑줄 그은 '이 조약'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다. 보빙사는 이 조약 체결 이후 미국에 파견된 최초의 구미 사절단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최혜국 대우가 처음으로 규정되었다. 러일 전쟁(1904)은 조약 체결 이후의 사건이므로 관련이 없고, 병인양요(1866)는 프랑스와의 충돌로 이 조약보다 앞선 사건이며, 운요호 사건(1875)은 강화도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과는 무관하다.

조선 후기에는 대동법 시행으로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하여 상품 화폐 경제 발달을 이끌었다. 솔빈부의 말 수출은 발해, 활구(은병)는 고려, 동시전 설치는 신라(지증왕)의 사실이므로 조선 후기 경제 상황과 맞지 않는다.

제시문은 『한성순보』를 발행한 기관에 대한 설명으로, 외국 신문을 번역·소개하고 국내외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설립된 근대 개화기 인쇄·출판 기구는 박문국이다. 교정청은 갑오개혁 당시 개혁 추진 기구, 기기창은 무기 제조 기관, 전환국은 화폐 주조 기관으로 신문 발행과는 무관하다.

제시된 국새는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제작된 것으로, (가)는 대한제국이다.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양지아문·지계아문을 설치하고 지계(地契)를 발급하였다. 신미양요(1871), 신해통공(1791),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은 모두 대한제국 수립 이전인 조선 시기의 사실이다.

제시문의 배경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서울 종로 백목전 시전 상인 등이 모여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를 다루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단체는 1904년 조직된 보안회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단체, 송죽회는 국내 여성 비밀 결사, 신민회는 안창호·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로 이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제시된 관보는 1895년 태양력 시행과 단발령을 알리는 내용이다. 태양력 사용과 개국 연호 채택, 왕의 단발 시행 및 백성에게 단발을 권유하는 내용은 을미개혁(1895)의 대표적 조치이므로, 이를 활용한 탐구 활동으로는 을미개혁의 내용을 조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독립문 건립은 1896~1897년 독립협회와 관련된 사건, 삼정이정청은 1862년 임술농민봉기 이후 설치된 기구, 삼전도비는 1636년 병자호란과 관련된 것으로 모두 시기와 내용이 맞지 않는다.

제시된 자료의 (가)는 13도 창의군이다. 정미의병(1907) 때 해산 군인이 합류하며 전력이 강화된 전국 의병 부대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결성했고, 총대장에는 이인영이 추대되었다. 13도 창의군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며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백산 4대 강령은 동학 농민군, 자유시 참변은 대한 독립군단 등 1920년대 독립군 부대,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에 따른 해산은 을미의병에 해당하므로 옳지 않다.

기획안은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삶을 주제로 하며, 1부 하와이 사진 신부, 3부 대조선 국민 군단(박용만이 하와이에서 조직) 사이에 들어갈 2부 내용도 미주 한인 사회와 관련된 단체여야 한다. 대한인 국민회는 1910년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 단체들이 통합하여 결성한 재미 한인 최대 자치·독립운동 단체로, 미주 한인들의 결집과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상징한다. 중광단(만주), 신한 청년당(상하이), 신흥 강습소(만주)는 모두 국외지만 미주가 아닌 만주·중국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이므로 이 다큐멘터리의 주제인 미주 한인 이주사와 맞지 않는다.

제시된 자료는 국채 보상 운동(1907)에 관한 것으로, 나랏빚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의연금을 모으고 담배를 끊거나 비녀·가락지를 내놓아 성금을 마련한 것이 이 운동의 대표적 모습이다.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당시 언론의 적극적인 홍보와 지원을 받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근우회는 1920년대 여성 운동 단체이고, 황국 중앙 총상회는 1898년 시전 상인 중심의 상권 수호 운동 단체로 국채 보상 운동보다 앞서 조직되었으며, 조만식은 1920년대 물산 장려 운동을 평양에서 주도한 인물이므로 모두 적절하지 않다.

제시된 자료의 (가)는 의열단이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은 김지섭 등 단원들이 조선 총독부·도쿄 궁성 등을 대상으로 의거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과 파괴 활동을 정당화하였다. 105인 사건으로 와해된 단체는 신민회이며, 연통제와 교통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행정 조직이고,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김규식)를 파견한 것도 신한청년당·임시정부 계열의 활동이므로 의열단과는 관련이 없다.

제시된 (가)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이다. 광주에서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을 계기로 일어난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진상 보고를 위한 대규모 민중 대회를 계획하는 등 지원 활동을 벌였다. 대한매일신보의 지원을 받은 것은 국채 보상 운동이며, 통감부의 탄압으로 실패한 것은 애국 계몽 운동 관련 단체들이고,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난 것은 6·10 만세 운동(1926)이므로 나머지 보기는 옳지 않다.

제시된 자료의 '이 시기'는 서울이 경성으로 불리던 일제 강점기이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1935), 나운규의 <아리랑>(1926),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1936)은 모두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사실이다. 반면 헐버트가 육영 공원의 교사로 활동한 것은 1880년대 개항기의 일로, 경성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전 시기이므로 옳지 않다.





1915년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활동하며 친일 부호 처단과 독립 자금 확보 활동을 전개한 인물은 박상진이다. 대한 광복회는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로, 박상진은 총사령을 맡아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밑줄 그은 '이 지역'은 1937년 소련의 한인 강제 이주 이전 한인들이 거주하던 연해주(러시아 연해주)이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 集居지인 신한촌이 건설되어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만주(간도), 한국 광복군 창설은 충칭, 2·8 독립 선언서 발표는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사실이므로 연해주와는 관련이 없다.

백범 김구는 한인 애국단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역임 외에, 광복 이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남북 협상을 추진하여 평양을 방문한 활동이 대표적이다. 흥사단은 안창호, 조선 의용대는 김원봉, 조선 건국 동맹은 여운형이 조직한 단체이므로 김구의 활동과는 관련이 없다.

인터뷰에서 기자는 상대를 “간송 선생”이라 부르며 막대한 자금을 들여 훈민정음 해례본 등의 문화유산을 수집한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답변에서는 “나라도 없는 주제에 금싸라기 땅을 팔아 골동품을 모은다”는 주변의 비난 속에서도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려 했고, 수집품을 보존하기 위해 보화각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간송’이라는 호를 쓰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문화유산을 사재를 털어 수집하고,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현재의 간송미술관)을 세운 인물은 전형필입니다. 인터뷰 배경에 보화각 앞 석수(石獸)가 서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다른 인물들은 활동 분야가 다릅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역사학자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고, 석주명은 나비를 연구한 생물학자이며, 주시경은 국문 연구와 한글 보급에 힘쓴 국어학자입니다.

양세봉은 조선혁명군의 총사령으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맞섰으며, 대표적으로 영릉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고종의 밀지로 결성된 것은 독립의군부이고, 영국군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된 것은 한국광복군이며,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은 조선의용대이다.

발표 화면의 제목은 ‘군함도와 강제 동원의 역사’이고, 발표자는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을 확대하던 이 시기, 군함도로 강제 동원된 많은 한국인이 해저 탄광의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밑줄 그은 시기는 중일 전쟁(1937)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기입니다.
이 시기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인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폈습니다. 1937년 황국 신민 서사를 만들어 학생과 일반인에게 암송하게 하였고,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습니다.
나머지는 앞선 시기의 모습입니다. 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과 토지 조사령 공포는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일이고, 6·10 만세 운동은 1926년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만세 시위로 이른바 문화 통치기에 해당합니다.

사진 속 붉은 동백꽃 조형물의 설명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 그리고 진압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된 사건을 상징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희생자의 영혼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 갔다는 의미를 담아 평화 공원에 세워졌다는 서술까지 더하면, (가)는 제주 4·3 사건입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를 내걸고 무장대가 봉기하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진실이 묻혀 있다가 2000년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 조사와 희생자 명예 회복이 추진되었고, 제주 4·3 평화 공원도 이 흐름 속에서 조성되었습니다.
다른 설명은 각기 다른 사건에 해당합니다.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것은 1964년의 6·3 시위이고, 좌우 합작 7원칙은 1946년 좌우 합작 위원회가 발표한 것이며,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무력 진압에 저항한 것은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입니다.

화면 속 대한 뉴스 자막은 ‘3·15 부정 선거 원흉 공판’이고, 해설은 3·15 부정 선거가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켜 (가)의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부정 선거 관련자에 대한 재판이 열려 시민들이 스피커 앞에 모여 중계를 듣는 장면이므로, (가)는 부정 선거로 촉발된 민주화 운동입니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대규모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시작되었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대규모로 거리에 나선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고, 이후 부정 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습니다.
나머지 운동은 계기가 다릅니다. 6·3 시위는 1964년 한일 회담의 굴욕적 협상에 반대한 것이고, 6월 민주 항쟁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와 4·13 호헌 조치에 맞선 것이며,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에 저항한 운동입니다.

제시된 증언은 인천 상륙 작전이 언급된 6·25 전쟁에 대한 내용이다. 전쟁 중 서울이 함락되자 정부는 부산으로 임시 수도를 옮겨 전쟁을 수행하였다. 4·13 호헌 조치(1987)는 전두환 정부 시기, 미소 공동 위원회(1946~1947)는 광복 직후,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1948)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의 사실로 모두 6·25 전쟁과 시기가 맞지 않는다.





‘파노라마 대한민국 1970년대 편’이라는 제목 아래 유신 헌법 공포, 장발 단속, 청년 문화 유행의 장면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에는 1970년대에 있었던 일을 담은 사진이 들어가야 합니다.
정부는 1960년대부터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을 추진하였고, 중화학 공업 육성에 힘입어 1977년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수출의 날 행사 장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경제 장면입니다.
나머지 사진은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금융 실명제 실시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조치이고, 개성 공단 조성은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이후 추진되어 2000년대에 가동되었으며, 아시아·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정상 회의 개최는 2005년 부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제시된 우표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을 기념한 것으로, (가)는 김대중 정부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노태우 정부 시기(1991년)의 일이며,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전두환 정부 시기(1985년)에 이루어졌다.

을지문덕은 살수 대첩에서 수의 대군을 물리쳤으므로 (가)는 귀주 대첩이 아니라 살수 대첩이며, 귀주 대첩은 강감찬과 관련된 것으로 (나)에 들어갈 내용이다. 강감찬은 거란의 3차 침입 때 귀주 대첩으로 승리를 이끌었으므로 (나)는 귀주 대첩이 맞다. 이순신의 시호 '충무'는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다)는 병자호란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다. 민영환은 을사늑약 체결에 항의하며 자결하였으므로 (라)에는 을사늑약이 들어가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