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47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47회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나온 슴베찌르개와 주먹도끼, 돌날·몸돌은 모두 뗀석기이므로 (가)는 구석기 시대이다. 구석기인은 사냥과 채집을 하며 이동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동굴이나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가락바퀴로 실을 뽑은 것은 신석기 시대이며, 명도전 교역과 철제 농기구, 청동 방울 제작은 청동기·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았고 쑹화강 유역, 사출도, 1책 12법이 강좌 주제로 제시된 (가)는 부여이다. 부여는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소도는 삼한, 민며느리제는 옥저, 책화는 동예의 풍속이며 목지국 등 여러 소국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마한이다.
<한국사 발표 대회>
주제: 삼국의 발전과 경쟁
- (가) 비유왕과 눌지왕이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 (나)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 (다) 광개토 대왕이 5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지원하였습니다.
(가)는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이 맺은 나제 동맹(433), (나)는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과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사(371), (다)는 광개토 대왕이 5만 군대를 보내 신라를 도운 일(400)이다. 시간 순으로 배열하면 (나) → (다) → (가)가 된다.
- 왕이 다시 명령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명칭을 고쳐서 화랑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삼국유사』- - 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령하여 가라국(加羅國)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때 사다함은 나이가 15~16세였는데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 그 나라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병사들의 습격에 놀라 막아내지 못하였다. 대군이 승세를 타서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삼국사기』-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고 이사부를 보내 가라국, 곧 대가야를 정복한 밑줄 그은 '왕'은 신라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명하여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 이차돈의 순교로 인한 불교 공인은 법흥왕, 마립간 칭호 사용은 내물왕,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은 선덕 여왕 때의 일이다.
이 문화유산은 국보 제287호로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백제 왕실의 의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도교와 불교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표현된 걸작입니다.





국보 제287호로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고 도교와 불교의 요소가 함께 표현된 백제 왕실의 의례 용구는 백제 금동 대향로이다. 뚜껑 꼭대기에 봉황이 앉고 그 아래로 신선 세계를 나타낸 산봉우리가 겹겹이 표현되었으며, 몸체 아래에서 용이 받쳐 든 형태로 백제 금속 공예 기술의 절정을 보여 준다.
(가) 의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
속일본기에 "(가) 의 왕 대무예가 고인의(高仁義) 등을 보내어 국서와 선물을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고인의, 덕주, 사나루 등 24명에게 서신을 가지고 가도록 하였고, 아울러 담비 가죽 300장을 정중히 보냅니다. 때때로 소식을 보내 우의를 두텁게 하고자 합니다.
-『해동역사』-
무왕 대무예가 고인의 등을 일본에 보내 국서와 담비 가죽을 전했다는 기록에서 (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거란도, 영주도, 조공도, 일본도, 신라도 등의 교통로를 열어 주변 나라와 교류하였다. 22담로는 백제, 태학과 경당은 고구려, 골품제와 화백 회의는 신라의 제도이다.
- (가)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자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이 남편 김품석을 따라 죽었다. 김춘추는 이에 한을 품고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그 원한을 갚고자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 (나) 김유신 등이 황산 벌판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는 불리하고 병사들은 힘이 다하였다.
(가)는 백제의 대야성 함락과 김춘추의 고구려 청병(642), (나)는 황산벌 전투(660)이다. 고구려에서 군사를 얻지 못한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군사 동맹을 맺었고(648), 이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면서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다. 안승의 보덕국 왕 책봉과 기벌포 전투는 (나) 이후, 살수 대첩은 (가) 이전의 일이다.

한주·삭주·명주 등 9주와 북원경·중원경·서원경·남원경·금관경의 5소경으로 짜인 지방 행정 구역을 마련한 나라는 통일 신라이다. 통일 신라는 관리를 감찰하기 위해 사정부를 두었다. 2군 6위와 안찰사는 고려, 3성 6부와 주자감은 발해의 제도이다.
(가) 은/는 설총을 낳은 이후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갖고 놀던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로 만들어 화엄경의 구절에서 이름을 따와 '무애(無㝵)'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설총을 낳은 뒤 스스로 소성거사라 하고 무애가를 지어 불교를 널리 퍼뜨린 (가)는 원효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를 지어 불교 교리를 정리하고 일심 사상으로 종파 간의 다툼을 조화하려 하였다. 부석사 창건은 의상, 백련결사는 요세,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신편제종교장총록은 의천의 업적이다.

전주 동고산성에서 '전주성'명 수막새가 출토되었고 견훤이 세웠으며 후당·오월과 교류하였다는 설명에서 (가)는 후백제이다. 후백제는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을 크게 무찔러 왕건이 겨우 몸을 피하고 신숭겸 등이 전사하였다. 광평성 설치와 마진 국호·철원 천도는 후고구려, 인안 연호는 발해, 청해진은 장보고와 관련된다.
| 훈요 10조를 지어 후세에 전하노니, 밤낮으로 펼쳐보아 영구히 귀감으로 삼도록 하라. | → (가) → | 신 최승로, 시무 28조를 작성하여 장계와 함께 따로 봉하여 올립니다. |
앞은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 10조, 뒤는 성종에게 올린 최승로의 시무 28조이므로 (가)는 그 사이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불법으로 노비가 된 이들을 양인으로 되돌리고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정방 설치와 별무반 편성은 고려 중기 이후, 독서삼품과는 통일 신라,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는 공민왕 때의 일이다.
벽란정은 예성항 연안에 있으며, 개경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사신(使臣)의 배가 연안에 닿으면 군사들이 금고(金鼓)를 울리며 조서(詔書)를 맞아 인도하여 벽란정에 들어간다. 벽란정은 두 채로 되어 있는데, 서쪽의 것은 우벽란정이라 부르며 조서를 봉안하고, 동쪽의 것은 좌벽란정이라 부르며 정사·부사를 접대한다. …… 사신이 개경으로 들어가면 그들이 타고 온 배들은 예성항 내에 정박하게 되므로 뱃사람은 순서를 정해 이곳에서 배를 지킨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예성항 벽란정에서 사신을 맞이하는 모습을 전하는 자료로, 개경을 수도로 삼은 고려 시대의 상황이다. 고려에서는 은 1근으로 만들어 활구라 불린 은병이 고액 화폐로 유통되었다. 인삼·담배의 상품 작물 재배, 내상·만상의 무역, 덕대의 광산 경영, 대동법 시행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경제 모습이다.

이규보의 문집으로 전집 41권, 후집 12권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에서 밑줄 그은 '이 책'은 동국이상국집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의 사적을 노래한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이 실려 있다.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발해고, 단군을 우리 역사의 기원으로 기록한 것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이다.
- 서경 임원역의 지세는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에 해당합니다. 이곳에 궁궐을 세우고 옮겨 가시면 천하를 아우르게 되니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 짐이 서경에 행차하여 지세를 살펴 보도록 하겠노라.
| 936 후삼국 통일 |
| (가) |
| 1018 거란의 3차 침입 |
| (나) |
| 1126 이자겸의 난 |
| (다) |
| 1170 무신 정변 |
| (라) |
| 1270 개경 환도 |
| (마) |
| 1359 홍건적의 침입 |
서경 임원역의 지세가 대화세이니 궁궐을 세우고 천도하면 금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는 주장은 인종 때 묘청 등 서경 세력이 편 서경 천도론이다. 이 논의는 이자겸의 난(1126)과 무신 정변(1170) 사이에 이루어졌으므로 연표에서 (다) 시기에 해당한다.
[휴대 전화 대화 화면]
- 고려 초기에 제작된 (가) 에 대해 알려 줄래?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불상으로 '은진 미륵'이라고 불리기도 해.
- 불상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광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어.
-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다고 인정받아 2018년에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어.





충청남도 논산 관촉사에 있고 '은진 미륵'으로 불리며 고려 광종 때 만들어진 (가)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머리에 네모난 갓 모양의 보개를 얹은 18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불로, 고려 초기 지방 세력의 힘과 자유분방한 조형 감각을 보여 준다.

천산대렵도에 그려진 변발과 호복 차림이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한 때는 원 간섭기이다. 이 시기에는 원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성장한 권문세족이 최고 정무 기구인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윤관의 동북 9성 축조, 정중부 등의 무신 정변, 초조대장경 조판, 만적의 난은 모두 원 간섭기 이전의 일이다.

장영실이 국왕의 명을 받아 자동 시보 장치를 갖춘 물시계 자격루를 만든 때는 조선 세종 재위 기간이다. 세종 대에는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농사직설과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였으며 주자소에서 갑인자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화통도감은 고려 우왕 때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기구이므로 세종 대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조선의 건국 과정
- (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 (나)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건설하였다.
- (다) 조준 등의 건의로 과전법을 제정하여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가)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 (나)는 한양 천도와 경복궁 건설(1394~1395), (다)는 조준 등의 건의로 이루어진 과전법 제정(1391)이다. 시간 순으로 배열하면 (가) → (다) → (나)가 된다.
- 직전(職田)의 폐단으로 이번에 새로운 제도를 마련했다더군.
- 수조권을 가진 관리가 농민에게 전세를 직접 거두면서 과다하게 수취하는 것이 문제였지.
- 그래서 소재지의 관청에서 그 해 생산량을 조사하여 전세를 거둔 후 지급하기로 했다네.
직전법의 폐단을 고쳐 지방 관청이 그 해 생산량을 조사해 전세를 거둔 뒤 관리에게 지급하도록 한 밑줄 그은 '제도'는 관수관급제로, 조선 성종 때 시행되었다. 성종 대에는 세조 때부터 편찬해 온 조선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현량과는 중종, 영창 대군 사사와 인목 대비 유폐는 광해군, 왕자의 난은 태조 말년, 탕평비 건립은 영조 때의 일이다.

조선 시대에 유학 교육을 위해 지방에 세워졌고 대성전 중심의 제사 공간과 명륜당 중심의 강학 공간으로 이루어진 교육 기관은 향교이다. 향교에는 중앙에서 교수와 훈도를 파견하여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좌수와 별감을 둔 것은 유향소, 사림이 세우고 흥선 대원군이 대부분 철폐한 것은 서원, 소과 합격자에게 입학 자격을 준 곳은 성균관이다.
- (가) 유자광이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자 한 권을 내놓으니,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을 지적하여 여러 추관(推官)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알기 쉽게 글귀마다 주석을 달아 왕에게 아뢰었다.
- (나) 조광조가 아뢰기를, "정국공신은 이미 10년이 지난 오래된 일이지만 허위가 많았습니다. …… 사람은 다 부귀를 꾀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익의 근원이 크게 열렸으니, 이때에 그 근원을 분명히 끊지 않으면 누구인들 부귀를 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까? 지금 신속히 고치지 않으면 뒤에는 개정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가)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빌미로 사림이 화를 입은 무오사화(1498), (나)는 중종 대 조광조가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를 주장한 일(1519)이다. 그 사이인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양재역 벽서 사건과 사림의 동인·서인 분당은 (나) 이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시도는 (가) 이전, 이괄의 난은 인조 때의 일이다.

서양에서 명에 전해진 불랑기포가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에 쓰였다는 설명에서 (가)는 임진왜란임을 알 수 있다. 이 전쟁 중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 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김상용의 강화도 순절은 병자호란, 정봉수의 용골산성 항쟁은 정묘호란, 최영의 홍산 전투는 고려 말,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은 세종 때의 일이다.
- 양역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한 호포와 결포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군포를 1필로 줄이는 법을 시행하는 것으로 하라. 경들은 1필로 줄였을 때 생기는 세입 감소분을 채울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라.
-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양역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도록 한 자료로, 영조 대 균역법 시행 상황이다. 정부는 이로 인한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왕실 재원이던 어장세·염세·선박세를 국가 재정으로 돌리고 결작과 선무군관포를 거두었다. 수신전·휼양전 폐지는 직전법, 토지 1결당 미곡 12두 부과는 대동법, 지계 발급은 대한 제국의 양전 사업, 연분 9등법은 세종 대의 조치이다.
한국사 퀴즈
조선 시대 국왕을 알아맞히는 문제입니다. 이제 5단계 힌트입니다.
| 5단계 힌트 | (가) |
| 4단계 힌트 | 규장각 설치 |
| 3단계 힌트 | 신해통공 실시 |
| 2단계 힌트 | 초계문신제 시행 |
| 1단계 힌트 | 조선의 제22대 국왕 |
규장각 설치, 신해통공 실시, 초계문신제 시행을 힌트로 제시하고 조선 제22대 국왕이라 밝혔으므로 답을 요구하는 인물은 정조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화성을 건설하여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훈련도감 설치는 선조, 나선 정벌은 효종, 간도 관리사 파견은 대한 제국, 이인좌의 난 진압은 영조 때의 일이다.
경상도 영덕의 오래되고 유력한 가문은 모두 남인이고, 이른바 신향(新鄕)은 서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입니다. 요즘 서인이 향교를 장악하면서 구향(舊鄕)과 마찰을 빚고 있던 중, 주자의 초상화가 비에 젖자 신향은 자신들이 비난을 받을까 봐 책임을 전가시킬 계획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주자의 초상화와 함께 송시열의 초상화도 숨기고 남인이 훔쳐 갔다는 말을 퍼뜨렸습니다.
<보 기>
- ㄱ. 염포의 왜관에서 교역하는 상인
- ㄴ. 시사(詩社)에서 문예 활동을 하는 역관
- ㄷ. 시전의 상행위를 감독하는 경시서의 관리
- ㄹ. 장시에서 상평통보로 물건값을 치르는 농민
신향과 구향이 향교와 향촌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향전이 벌어진 자료로, 조선 후기의 상황이다. 이 시기에는 역관·서얼 등 중인층이 시사를 조직해 문예 활동을 벌였고, 장시에서 상평통보가 널리 통용되었다. 염포 등 3포의 왜관 교역과 경시서의 시전 감독은 조선 전기의 모습이어서 이 시기와 맞지 않는다.

평소 연구한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을 모은 백과전서류 저술 성호사설을 남기고, 노비제·과거제·문벌 등을 나라를 해치는 좀으로 지목한 (가)는 이익이다. 이익은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해 매매를 금지하는 한전론을 제시하였다. 강화학파 형성은 정제두, 북한산비 고증은 김정희, 북학의 저술은 박제가와 관련된다.






한양 근교의 경치를 담은 경교명승첩을 남기고 우리 산천을 사실적으로 그린 진경산수화의 대가 (가)는 겸재 정선이다. 정선의 대표작으로는 금강전도와 함께, 비 갠 뒤 인왕산의 바위를 짙은 먹으로 힘 있게 그려 낸 인왕제색도가 꼽힌다.

안동 김씨 등 왕실의 외척을 비롯한 소수 가문이 비변사를 중심으로 권력을 독점한 밑줄 그은 '시기'는 19세기 세도 정치기이다. 이 시기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으며,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이양선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다. 반면 을사사화는 16세기 명종 즉위 무렵에 일어난 일이어서 이 시기의 사실이 아니다.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의궤를 약탈해 갔다는 내용에서 (가)는 1866년의 병인양요임을 알 수 있다. 병인양요는 그해 초 흥선 대원군이 프랑스인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하면서 일어났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그 뒤 신미양요의 배경이 되었고, 방곡령 선포와 위안스카이의 상륙, 국외 중립 선언은 모두 이후의 일이다.
- (가) 왕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때 나이가 12살이었기 때문에 [신정]익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친아버지인 흥선군을 높여 대원군으로 삼아 모든 정사에 참여하게 하고 신하의 예와는 달리 대우하였다.
-『대한계년사』- - (나)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잘못을 탄핵하기를, "만약 그 자리가 아닌데도 국정에 관여하는 자는 단지 그 지위와 자리의 녹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특별히 그를 호조 참판에 발탁하고 총애하였다. …… 대원군이 분노하여 양주 직곡으로 물러나자 권력은 모두 민씨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대한계년사』-
(가)는 12세의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이 정사에 참여하게 된 일(1863), (나)는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일(1873)이다. 그 사이에 흥선 대원군은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민간이 자율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속대전 편찬은 영조, 장용영 설치는 정조, 계해약조는 세종, 백두산정계비 건립은 숙종 때의 일이다.
- 김홍집: 현재 조선에 가장 시급한 외교 사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황준헌: 러시아를 막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을 가까이 하고, 일본과 관계를 공고히 하며, 미국과 연계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합니다.
<보 기>
- ㄱ.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다.
- ㄴ. 전국에 척화비가 건립되었다.
- ㄷ. 이만손 등이 영남 만인소를 올렸다.
- ㄹ.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황준헌이 김홍집에게 러시아를 막기 위해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을 권하는 장면으로, 조선책략이 국내에 들어온 1880년 무렵의 상황이다. 이후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려 개화 정책에 반발하였고(1881),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1882). 운요호 사건(1875)과 척화비 건립(1871)은 이 대화 이전의 일이다.

러시아 견제를 구실로 영국군이 무단 점령하여 알바트로스호 수병의 묘가 남아 있고, 독립 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이 유배되어 순국한 곳은 거문도이다. 영국은 1885년부터 약 2년간 이 섬을 불법 점령하였다. 지도에서 남해의 먼바다에 표시된 (다)가 거문도이다.
- 얼마 전에 정부가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는군.
- 은본위제 채택을 포함한 여러 안건을 처리했다고 들었네.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은본위제 채택 등을 처리한 밑줄 그은 '개혁'은 제1차 갑오개혁이다. 이때 과거제 폐지, 연좌제 금지, 공사 노비법 혁파, 과부의 재가 허용 등 신분과 사회 관습을 바꾸는 조치가 단행되었다. 그러나 건양 연호 채택은 을미사변 뒤에 추진된 을미개혁의 내용이므로 이 개혁에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사 동영상 제작 계획안
제목: 떨어진 녹두꽃
○학년 ○반 ○모둠
제작 의도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을 시간 순으로 살펴보면서 그들이 추구한 사회의 모습을 알아본다.
장면별 구성 내용
- #1. 고부 농민들, 폭정에 항거하여 봉기하다
- #2.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다
- #3. 동학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다
- #4. (가)
- #5.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되다
전주 화약 체결과 전봉준 체포 사이에 들어갈 장면을 찾는 문제이다. 전주 화약 이후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키자 동학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였고, 남·북접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고부 봉기와 백산 집결, 황룡촌 전투는 전주 화약 이전이며 교조 신원을 위한 복합 상소는 봉기 이전의 일이다.
- (가) 왕이 경복궁을 나오니 이범진, 이윤용 등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김홍집 등이 군중에게 잡혀 살해되자 유길준, 장박 등은 도주하였다.
- (나) 오늘 대군주 폐하께서 내리신 조칙에서 "짐이 신민(臣民)에 앞서 머리카락을 자르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만국과 나란히 서는 대업(大業)을 이루라."라고 하셨다.
- (다) 광화문을 통해 들어온 일본 병사들은 건청궁으로 침입하였다. …… 일본 장교는 흉악한 일본 자객들이 왕후를 수색하는 것을 도왔다. 자객들은 여러 방을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왕후를 찾아내어 시해하였다.
(가)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1896), (나)는 단발령을 알린 조칙(1895), (다)는 일본 자객이 경복궁에 침입해 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이다. 시간 순으로 배열하면 (다) → (나) → (가)가 된다.
여러 신하와 온 백성이 수십 차례나 글을 올려 한 목소리로 반드시 황제의 칭호로 높이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여러 번 사양했지만 끝내 거절할 수 없어 …… 백악산 남쪽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이라고 정하고 올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는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로 정한다는 내용의 조서로, 1897년 대한 제국 수립 선포이다. 대한 제국은 광무개혁을 추진하면서 황제가 군 통수권을 직접 장악하도록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별기군 창설, 영선사 파견, 육영 공원 설립, 통리기무아문 신설은 모두 그 이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영국인 베델이 양기탁과 함께 창간한 (가)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이다. 발행인이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비교적 덜 받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를 싣는 등 조약의 부당성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박문국 발간과 최초의 상업 광고는 한성순보·한성주보, 최초의 민간 신문은 독립신문, 일장기 말소 사건은 동아일보와 관련된다.

도산이라는 호를 쓰고 신민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미국에서 흥사단을 창설한 인물은 안창호이다.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에 힘썼다. 국문 연구소 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은 주시경·지석영 등이며, 도쿄 의거는 이봉창,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술은 박은식,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이인영·허위와 관련된다.

에네켄 농장의 열악한 노동 조건, 독립군 양성을 위한 숭무 학교 설립, 성금 모금을 통한 독립운동 지원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의 삶을 보여 준다. 1905년 이주한 한인들은 에네켄 농장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숭무 학교를 세워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지도에서 북아메리카 대륙 남쪽에 표시된 곳이 멕시코이다.

김원봉, 윤세주 등이 만주 지린성에서 창설하였고 박재혁이 가입한 뒤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는 설명에서 (가)는 의열단이다. 의열단은 신채호가 지은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식민 통치 기관 파괴와 요인 처단에 나섰다. 국채 보상 운동 후원은 대한매일신보, 청산리 대첩은 북로 군정서 등, 구미 위원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만민 공동회는 독립 협회의 활동이다.
문: 오늘 종로 1가 사거리 큰 길에서 모인 동기를 진술하라.
답: 나는 어제 오후 5시 무렵 경성부 남대문로에 있었는데, 자동차에서 뿌린 독립 선언서를 습득하였다. 나는 그 선언서를 읽고 우리 조선국이 독립되었다고 생각하고 기쁨을 참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늘 오후 1시 무렵 종로 1가 사거리 큰 길 중앙에서 독립 만세를 큰 소리로 계속 외쳤더니 5백 명 가량의 군중이 내 주위에 모여 들었고, 함께 모자를 흔들면서 만세를 계속 부르며 행진하였다.
문: 그 선언서의 내용을 진술하라.
답: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인 것을 선언함 등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조선 민족 대표자 33인의 성명을 기재하고 있었다.
- ○○○ 신문조서 -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실린 독립 선언서가 뿌려지고 종로 일대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는 신문조서로, 1919년 3·1 운동에 관한 자료이다. 3·1 운동은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 지도부의 필요성을 일깨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는 6·10 만세 운동, 한국인·일본인 학생의 충돌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05인 사건은 신민회, 브나로드 구호는 농촌 계몽 운동과 관련된다.
어린 동무들에게
-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 길가에서 떼를 지어 놀거나 유리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 선전문 -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 선전문으로, 방정환 등이 이끈 소년 운동에 관한 자료이다. 소년 운동은 천도교 소년회를 중심으로 천도교 세력이 앞장서 추진하였으며 어린이날 제정과 잡지 어린이 발간으로 이어졌다. 통감부의 탄압, 김광제·서상돈의 주도, 평양에서 시작된 확산은 국채 보상 운동에 해당한다.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이 애국반 회보를 내고 결전 생활을 선전하던 밑줄 그은 '시기'는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하던 민족 말살 통치기이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가를 재판 없이 가둘 수 있게 하였다. 미쓰야 협정과 경성 제국 대학 설립은 1920년대, 토지 조사 사업과 헌병 경찰 제도는 1910년대의 정책이다.

양세봉이 총사령을 맡아 남만주 일대에서 중국 의용군과 함께 항일 투쟁을 벌인 (가)는 조선 혁명군이다.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중광단을 모체로 한 부대는 북로 군정서, 자유시 참변으로 약화된 것은 대한 독립 군단, 조선 혁명 간부 학교는 의열단, 인도·미얀마 전선 투입은 한국광복군과 관련된다.
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은 각각 자기 당을 해소(解消)하고 새로 한국 독립당을 창립하였음을 중외(中外) 각계에 정중히 선언한다.
동지 동포들! 우리 3당이 1당을 조직하게 된 최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원래 3당의 당의(黨義), 당강(黨綱), 당책(黨策)으로든지 독립운동의 의식으로든지 역사적 혁명 노선으로든지 3당 서로가 1당을 세울 만한 통일적 가능성을 충족하게 내포하였던 것이다. 둘째, 수 3년 내로 3당 통일의 예비 행동이 점차로 성숙되었던 것이다. …… 마침내 우리 민족 해방 운동의 역사적 임무를 달성하려면 각계각층의 협력 합작을 통하여 비로소 총동원될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명확한 결론이므로, 가까운 장래에 각방(各方)의 정성 단결이 확립되어야 우리의 광복 대업이 속히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의 3당이 각자 당을 해소하고 새 한국 독립당을 창립한다고 밝힌 1940년의 창당 선언문이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여 광복 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김규식의 파리 강화 회의 파견, 3부 성립, 윤봉길 의거, 국민 대표 회의 개최는 모두 이 선언 이전의 일이다.

10억 달러 수출을 이룬 지 7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여 광화문 사거리에 기념 조형물을 세운 밑줄 그은 '정부'는 박정희 정부이다. 이 정부 말기에는 YH 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경찰이 강경 진압하였고, 이 사건은 김영삼 총재 제명과 부마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 OECD 가입과 금융 실명제 실시는 김영삼 정부, 노사정 위원회 구성은 김대중 정부, 한미 자유 무역 협정 체결은 노무현 정부 때의 일이다.
- (가)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결정한 조선에 관한 제3조 제2항에 의거하여 구성된 ㉠ 이/가 3천만의 큰 희망 속에 20일 드디어 덕수궁 석조전에서 출범하였다. 조선의 진로를 좌우하는 중대한 관건을 쥐고 있는 만큼 그 추이는 자못 3천만 민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 (나) 조선인이 다 아는 것과 같이 ㉠ 이/가 난관에 봉착함으로 인하여 미국 측은 조선의 독립과 통일 문제를 유엔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대다수의 세계 각국은 41대 6으로 이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시키기로 가결하였다. …… 조선인에게 권고하고 싶은 것은 이 중요한 시간에 유엔 총회가 조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모든 국가가 모인 유엔 총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여야 할 것이다.
- (가)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결정한 조선에 관한 제3조 제2항에 의거하여 구성된 ㉠ 이/가 3천만의 큰 희망 속에 20일 드디어 덕수궁 석조전에서 출범하였다. 조선의 진로를 좌우하는 중대한 관건을 쥐고 있는 만큼 그 추이는 자못 3천만 민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 (나) 조선인이 다 아는 것과 같이 ㉠ 이/가 난관에 봉착함으로 인하여 미국 측은 조선의 독립과 통일 문제를 유엔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대다수의 세계 각국은 41대 6으로 이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시키기로 가결하였다. …… 조선인에게 권고하고 싶은 것은 이 중요한 시간에 유엔 총회가 조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모든 국가가 모인 유엔 총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여야 할 것이다.
㉠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설치된 미소 공동 위원회이다. (가)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린 1946년의 상황이고, (나)는 미소 공동 위원회가 끝내 성과를 내지 못하자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 총회로 넘긴 1947년의 상황이다. 그 사이인 1946년에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 합작 위원회가 꾸려져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남북 협상, 5·10 총선거,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구성, 농지 개혁법 제정은 모두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간 뒤에 일어난 일이다.

김대중·김영삼이 이끈 신한 민주당이 창당 한 달 만에 제1야당으로 떠오른 밑줄 그은 '총선'은 1985년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이다. 이 선거로 확인된 민주화 열망을 바탕으로 야당과 재야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청원하는 1천만 명 서명 운동을 벌였다. 의원 내각제 개헌과 3·15 부정 선거는 1960년, 신군부의 비상 계엄 전국 확대는 1980년, 3·1 민주 구국 선언은 1976년의 일이다.
○○○ 정부의 정책
- 국토 균형 발전
-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추진
- 국민 보건 증진
- 질병 관리 본부 설치
- 과거사 정리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구성
- 평화 통일 노력
- (가)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추진, 질병 관리 본부 설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구성으로 보아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정리한 자료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7년 평양에서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열고 10·4 남북 정상 선언을 발표하였다. 남북 기본 합의서 서명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노태우 정부, 남북 조절 위원회 구성은 박정희 정부, 이산가족 고향 방문 최초 성사는 전두환 정부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