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49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49회

제시된 자료는 금속을 사용하기 시작한 (가) 시대의 특별전 안내로, 비파형 동검·거푸집·민무늬 토기를 전시품으로 들고 있어 청동기 시대를 가리킨다. 청동기 시대에는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계급이 분화되어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동굴이나 막집 거주와 주먹도끼·찍개 제작은 구석기 시대,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신석기 시대, 철제 농기구 사용은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위만이 망명하여 호복을 하고 동쪽의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투항하였다. 위만은 서쪽 변경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가) 의 번병(藩屛)*이 되겠다고 준왕을 설득하였다. 준왕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삼고 …… 백 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 『삼국지』 동이전 -
*번병: 변경의 울타리
위만이 준왕에게 투항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게 되었다는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이므로 (가)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범금 8조를 두어 살인·상해·절도를 다스렸다. 정사암 회의는 백제, 마립간 칭호는 신라, 사출도는 부여, 진대법은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다.
[교사와 학생들의 대화]
- [교사] 신지, 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던 나라에 대해 발표해 볼까요?
- [학생 1]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씨뿌리기가 끝난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 제천 행사를 열었습니다.
- [학생 2] (가)
신지·읍차라는 지배자가 있었고 벼농사가 발달하였으며 5월과 10월에 제천 행사를 열었다는 설명은 삼한에 해당한다. 삼한에는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고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어 죄인이 도망하여도 잡아가지 못하였다. 민며느리제는 옥저, 사자·조의·선인은 고구려, 12배 배상은 부여, 단궁·과하마·반어피는 동예의 특징이다.

부소산성, 관북리 유적,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은 모두 충남 부여에 있으며 2015년 백제 역사 유적 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부여는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옮겨 새 수도로 삼은 사비 지역이므로 천도의 배경과 과정을 조사하는 활동이 알맞다. 장용영 외영은 수원, 삼별초의 근거지는 진도와 제주, 한성근의 항전지는 강화도 문수산성, 남북 경제 협력 공단은 개성에 있었다.
[가상 대화]
- 금관국의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하네.
- 나도 들었네. 우리 왕께서 그들을 예로써 대접하여 높은 벼슬을 주고, 그가 다스리던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는군.
금관국의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와 항복한 것은 532년의 일로, 밑줄 그은 '왕'은 신라 법흥왕이다. 법흥왕은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왕권이 확립되었음을 드러냈다.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신문왕, 22담로 설치는 백제 무령왕, 독서삼품과는 원성왕,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은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서원경 부근 네 촌락의 인구와 토지, 소와 말의 수를 기록하고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서 발견된 문서는 신라 촌락 문서이므로 (가)는 통일 신라이다. 통일 신라는 울산항과 당항성이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여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은병 유통은 고려, 부경은 고구려, 상품 작물 재배는 조선 후기, 직전법은 조선 세조 때의 일이다.
(가) 살수에 이르러 [수의] 군대가 반쯤 건너자 을지문덕이 군사를 보내 그 후군을 공격하였다. 우둔위 장군 신세웅을 죽이니, [수의] 군대가 걷잡을 수 없이 모두 무너져 9군의 장수와 병졸이 도망쳐 돌아갔다.
- 『삼국사기』 -
(나) [신라군이] 당군과 함께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英公)에게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
- 『삼국사기』 -
(가)는 을지문덕이 수의 군대를 격파한 살수 대첩(612), (나)는 보장왕이 당에 항복하여 고구려가 멸망한 사건(668)이다. 그 사이인 642년에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세운 뒤 대막리지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다. 미천왕의 서안평 공격, 광개토 대왕의 왜 격퇴, 장수왕의 한성 함락은 모두 (가) 이전이고, 안승의 보덕국왕 책봉은 (나) 이후의 일이다.

중대성이 일본의 태정관에 외교 문서를 보냈고 정당성의 좌윤이 사신단에 들어 있으므로 (가)는 3성 6부를 갖춘 발해이다. 발해는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하였다. 광군 창설은 고려, 골품제와 9주 5소경은 신라, 부여씨와 8성의 귀족은 백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삼국사기 데이터베이스 - 신라본기 검색 결과]
| 1년 | 죄수를 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다 |
| 2년 | 삼대목을 편찬하다 |
| 3년 |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다 |
| 10년 | 서남쪽에서 적고적이라고 불리는 도적이 일어나다 |
| 11년 |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
삼대목 편찬, 원종과 애노의 난, 적고적의 출현, 태자 요에게 양위한 기록은 모두 신라 진성여왕 대의 일이다. 진성여왕 때 당에서 돌아온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올려 개혁을 건의하였으나 진골 귀족의 반발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김흠돌의 난은 신문왕, 강조의 정변은 고려 목종, 국사 편찬은 진흥왕, 부여풍 추대는 백제 부흥 운동 때의 일이다.
[학생들의 대화]
- 신라 왕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송악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운 인물에 대해 말해보자.
- 광평성 등 여러 정치 기구를 마련했어.
- 미륵불을 자칭하며 폭정을 일삼기도 했지.
신라 왕족의 후예로 알려졌고 송악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웠으며 광평성 등 정치 기구를 두고 미륵불을 자칭한 인물은 궁예이다. 궁예는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마진으로 고치고 무태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이후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다. 후당과 오월에 사신을 보내고 금산사에 유폐된 뒤 고려에 귀부한 인물은 견훤이다.
[가상 인터뷰]
-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신 의도는 무엇인가요?
- 투항한 김부의 공을 치하하고, 부호장 이하의 관직 등에 대한 일을 맡게 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것입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지방 세력을 견제한 왕은 고려 태조 왕건이다. 태조는 빈민 구제를 위해 흑창을 설치하여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기에 갚게 하였다. 양현고는 예종, 노비안검법은 광종, 12목 설치는 성종, 전시과 제정은 경종 때의 일이다.
[학술 발표회 안내]
우리 연구회에서는 고려 시대 문화유산에 대한 학술 발표회를 마련하였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 주제: (가)
- 일시: 2020년 ○○월 ○○일 14:00~17:00
- 장소: △△ 연구회 회의실
발표회의 주제가 고려 시대 문화유산이므로 (가)에는 고려의 문화유산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은 조선 세조 때 대리석으로 세운 탑이라 주제에 맞지 않는다. 논산 개태사 철확, 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이천동 마애 여래 입상,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은 모두 고려의 문화유산이다.
- 화폐를 주조하는 법을 제정하여, 그것에 따라 주조한 전(錢) 15,000관을 재추와 문무 양반 및 군인에게 나누어 주어 화폐 사용의 시작점으로 삼고 이름을 해동통보라고 하였다.
- 주현에 명령하여 미곡을 내어 술과 음식을 파는 점포를 열고 백성에게 교역을 허락하여 전(錢)의 이로움을 알게 하였다.
해동통보를 주조하고 주현에 점포를 열어 화폐 사용을 장려한 것은 고려 숙종 때의 일이다. 고려에서는 경시서를 두어 수도 개경의 시전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게 하였다. 모내기법의 전국적 확산, 초량 왜관 무역, 도고의 활동, 감자·고구마 재배는 모두 조선 후기의 경제 모습이다.
(가)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동계(東界)에서 군대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전왕(前王)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이 장순석 등에게 거제(巨濟)로 가서 전왕을 받들어 계림에 모시게 하였다.
(나) 만적 등이 노비들을 불러 모아서 말하기를, “장군과 재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만적 등 100여 명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졌다.
(가)는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김보당이 일으킨 난(1173), (나)는 사노비 만적이 신분 해방을 도모하다 발각된 사건(1198)이다. 그 사이인 1196년에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뒤 봉사 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건의하였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 정방 설치는 최우 집권기, 이자겸의 난과 김부식의 서경 반란군 진압은 무신 정변 이전의 일이다.
- 왕은 우리나라에 서적이 대단히 적어서 유생들이 널리 볼 수 없는 것을 염려하여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글자 자형을 떠서 활자를 만드는 대로 인출(印出)하게 하였다.
- 왕이 시경·서경·좌전의 고주본(古註本)을 자본(字本)으로 삼아 이직 등에게 십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계미자이다.
주자소를 설치하고 계미자를 주조하게 한 왕은 조선 태종이다. 태종은 문하부를 혁파하면서 그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켜 대신을 견제하는 언관 기능을 강화하였다. 경국대전 완성은 성종, 백두산정계비는 숙종, 신해통공은 정조, 이시애의 난 진압은 세조 때의 일이다.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구실로 쳐들어왔고 송문주가 귀주성과 죽주산성에서 거듭 물리친 상대이므로 (가)는 몽골이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려는 염원에서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다. 화통도감은 왜구 대비, 진관 체제와 훈련도감은 조선, 별무반과 동북 9성은 여진에 대한 대응이다.
왕이 지정(至正) 연호의 사용을 중지하고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 기철 등이 군주의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뒤흔들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관리를 마음대로 임명하여 정령(政令)이 원칙 없이 바뀌었다. 남이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차지하고, 노비를 가지고 있으면 빼앗았다. …… 이제 다행히도 조종(祖宗)의 영령에 기대어 기철 등을 처단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
원의 지정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처단한 왕은 고려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으로 격하되었던 관제를 되돌려 첨의부를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복구하였다. 일본 원정 참여는 충렬왕, 과전법 제정은 공양왕, 이인임 축출은 우왕 대의 일이며, 쌍기의 건의에 따른 과거제 실시는 광종 때이다.

관리를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임무를 맡아 상대(霜臺)라 불렸고 대사헌을 수장으로 한 (가) 기구는 사헌부이다. 사헌부는 사간원과 함께 양사를 이루어 5품 이하 관리의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은대는 승정원, 집현전의 학문 연구 기능을 계승한 곳은 홍문관, 검서관을 둔 곳은 규장각, 임진왜란을 거치며 국정 최고 기구가 된 곳은 비변사이다.

소격서 폐지와 현량과 실시를 추진하다 능주로 유배된 정암 조광조를 기리는 적려유허비이므로 밑줄 그은 '이 사건'은 기묘사화(1519)이다. 조광조가 중종반정 공신의 거짓 공훈을 삭제하자고 주장하자 훈구 세력이 크게 반발하여 사림이 대거 제거되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된 것은 무오사화, 윤임 일파가 제거된 것은 을사사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시도는 세조 때의 일이다.
[휴대전화 메신저 대화]
- 동국여지승람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알려 줄래?
- 노사신, 양성지 등이 팔도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이 왕 때 완성한 지리지야.
- 각 지역의 지도와 지리, 풍속 등을 총 50권에 수록하였고, 이후 증보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편찬되었어.
노사신·양성지 등이 팔도지리지를 참고하여 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한 것은 조선 성종 때이므로 밑줄 그은 '이 왕'은 성종이다. 성종 때에는 성현 등이 음악 이론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을 간행하였다. 동의보감은 광해군,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때 편찬되었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칠정산 내편은 세종 때 만들어졌다.
[주제: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
- (가) 옥포에서 26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어.
- (나) 견내량에 머물던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술을 펼쳐 물리쳤어.
- (다) 10여 척의 배로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었어.
(가)는 임진왜란 초기의 옥포 해전(1592년 5월), (나)는 견내량의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 학익진으로 격파한 한산도 대첩(1592년 7월), (다)는 정유재란 때 열세의 배로 승리한 명량 대첩(1597년 9월)이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옥포 해전,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의 순이다.
사행(使行)이 책문을 출입할 때에는 만상과 송상 등이 은과 인삼을 몰래 가지고 인부나 말 속에 섞여들어 물건을 팔아 이익을 꾀하였다. 되돌아올 때는 수레를 일부러 천천히 가게 하고 사신을 먼저 책문으로 나가게 하여 거리낄 것이 없게 한 뒤에 저희 마음대로 매매하고 돌아오는데 이것을 책문 후시라 한다.
사행길에 만상과 송상이 은과 인삼을 몰래 들여가 거래하던 책문 후시는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벽란도에서 송의 상인과 교역하는 장면은 고려 시대의 일이므로 이 시기에는 볼 수 없다. 장시의 전기수, 시사를 열던 중인, 관청에 물품을 납품하던 공인, 물주의 자금으로 광산을 경영하던 덕대는 모두 조선 후기에 나타났다.
[가상 대화]
- 이 법은 공납의 폐단을 해결할 목적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이 법을 확대 시행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충청도에 먼저 시행하시오.
공납의 폐단을 해결하려고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시행되다가 충청도로 확대된 밑줄 그은 '이 법'은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하던 특산물 공납을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삼아 쌀, 베, 동전 등으로 내게 한 제도이다. 양반에게 군포를 물리자는 주장은 호포론, 1결당 4~6두 고정은 영정법, 토지의 6등급 구분은 전분 6등법, 선무군관포 징수는 균역법과 관련된다.
이항 등이 “지금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은 간사한 마음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다른 말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송시열은 방자하게도 상소를 올려 민심을 어지럽혔으니, 멀리 유배 보내소서.”라고 상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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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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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기사년 송시열의 상소는 한때의 실수였을 뿐 그가 어찌 다른 뜻을 가졌겠는가. 이제 그동안 잘못된 일이 다 해결되었으니 특별히 그의 관직을 회복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라고 하교하였다.
앞의 자료는 원자 정호에 반대한 송시열의 유배를 요구한 상소로 기사환국(1689)의 발단이고, 뒤의 자료는 갑술환국(1694) 이후 송시열의 관직을 회복시킨 하교이다. 따라서 (가) 시기에는 기사환국의 결과로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된 일이 들어간다. 예송은 현종, 이괄의 난은 인조, 기축옥사는 선조, 탕평비 건립은 영조 때의 일이다.

봉림 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고 척화론을 펴던 김상헌이 함께 끌려간 것은 병자호란의 결과이므로 (가)는 병자호란(1636~1637)이다. 볼모살이에서 돌아와 즉위한 효종 때 조선은 청의 요청으로 조총 부대를 보내 나선 정벌에 참여하였다. 4군 6진 개척은 세종, 사르후 전투 참전은 광해군, 용골산성 항전은 정묘호란, 기유약조 체결은 광해군 때의 일이다.

수원 화성 공사를 위해 기기도설의 도르래 원리를 활용한 거중기를 설계한 인물은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마과회통을 지어 홍역 치료법 등 의학 지식을 정리하였다. 북학의는 박제가, 의산문답은 홍대용, 우서는 유수원, 금석과안록은 김정희의 저술이다.
[문화유산 소개하기]
국보 제258호인 이 자기는 회회청 또는 토청 등의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자기는 조선 전기부터 생산되었고, 후기에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가)





국보 제258호이며 회회청이나 토청 같은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무늬를 넣은 자기는 청화 백자이다. 정답으로 제시된 문화유산은 목이 긴 흰 병에 대나무 무늬를 푸른색으로 그려 넣은 청화 백자로, 이러한 자기는 조선 전기부터 만들어져 후기에 널리 보급되었다.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일어났고 관군이 정주성을 포위한 뒤 땅굴을 파고 성벽을 폭파하여 진압한 (가) 사건은 홍경래의 난(1811)이다. 이 봉기는 몰락 양반 홍경래와 우군칙 등이 주도하여 가산에서 일어나 한때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장악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재집권을 부른 것은 임오군란, 청군 출병 요청과 집강소 설치 요구는 동학 농민 운동, 박규수의 안핵사 파견은 임술 농민 봉기와 관련된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서양 오랑캐가 광성진을 침범하였을 때 진무 중군 어재연의 생사는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방 수령이 대신할 진무 중군을 임명해 달라고 이미 청한 것을 보면 절개를 지켜 싸우다 전사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 『고종실록』 -
| 1863 | 1866 | 1868 | 1873 | 1876 | 1882 | |||||
| (가) | (나) | (다) | (라) | (마) | ||||||
| 고종 즉위 | 병인박해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고종 친정 | 강화도 조약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
서양 오랑캐가 광성진을 침범하고 진무 중군 어재연이 절개를 지켜 싸우다 전사하였다는 내용은 신미양요(1871)의 상황이다. 신미양요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과 고종 친정(1873) 사이에 일어났으므로 연표에서 그 구간에 해당한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고 1884년 좌의정을 거쳐 1894년 총리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김홍집이다. 그는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청의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와 국내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초대 주미 공사는 박정양, 독립 의군부 조직은 임병찬, 대한매일신보 창간은 양기탁, 서유견문 집필은 유길준이다.
[스크린 화면]
- 1.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에 돌아오게 하고 청에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
- 13. 대신과 참찬은 합문 안 의정소에서 회의하고 왕에게 보고한 후 정령을 반포해서 시행할 것.
이것은 개화당이 (가) 당시 발표한 개혁 정강의 일부입니다. 개화당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이 정강을 내세웠습니다.
개화당이 새 정부를 구성하고 청에 대한 조공 폐지, 문벌 폐지, 의정소 회의 등을 담은 개혁 정강을 발표한 (가) 사건은 갑신정변(1884)이다. 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난 뒤 일본은 공사관 소실과 자국민 피해를 구실로 배상을 요구하여 조선과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다. 별기군 창설, 부산 외 두 항구 개항, 영선사 파견, 통리기무아문 설치는 모두 갑신정변 이전의 일이다.

답사 경로는 구 러시아 공사관, 손탁 호텔 터, 중명전, 석조전, 환구단 터를 잇는 정동 일대의 근현대 역사 현장이다. 환구단은 고종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곳으로 대한 제국 선포의 무대였다. 임오군란 때 습격을 받은 곳은 일본 공사관,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린 곳은 덕수궁 석조전, 은세계와 치악산이 공연된 곳은 원각사, 명성 왕후가 시해된 곳은 경복궁이다.
[선고서]
고부 군수 조병갑이 부임하여 학정을 행하니 (가) 은/는 그 무리를 이끌고 고부 관아의 창고를 털어 곡식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 무장에서 일어나 장성에 이르러 관군을 격파하고, 밤낮없이 행군하여 전주성에 들어가니 전라 감사는 이미 도망하였다. …… 위에 기록한 사실은 피고와 공모자 손화중 등이 자백한 공초, 압수한 증거에 근거한 것이니 이에 피고 (가) 을/를 사형에 처한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봉기하고 무장에서 일어나 전주성에 들어갔으며 손화중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가) 인물은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다시 봉기하여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싸우다 패하였다. 단발령에 반발한 의병은 을미의병, 동학의 2대 교주는 최시형, 이완용을 습격한 인물은 이재명, 13도 창의군 지휘는 이인영과 관련된다.
[가상 대화]
- 며칠 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압력으로 일본이 청에 랴오둥반도를 반환했다는 소식 들었는가?
- 들었네. 우리도 이 기회에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네.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준 것은 1895년의 일이다. 이후 을미개혁이 추진되면서 조선은 건양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체결, 6조의 8아문 개편, 군국기무처 설치,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모두 이보다 앞선 일이다.
[담벼락에 붙은 벽보]
해산 명령을 철회하고 탄압을 중지하라!
정부가 우리 협회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보부상까지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 종로에 모여 해산 명령 철회와 탄압 중지를 요구합시다.
만민 공동회를 열었고 정부가 보부상까지 동원해 탄압하며 해산 명령을 내린 밑줄 그은 '협회'는 독립 협회이다. 독립 협회는 관민 공동회에서 헌의 6조를 결의하고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려 하였다.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설립은 신민회,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은 대한 자강회,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는 보안회, 국채 보상 운동은 국채 보상 기성회의 활동이다.

한성 전기 회사가 공급하는 전기로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를 오간 전차는 1899년에 개통되었다. 그 이후인 1905년에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가 완공되었다. 박문국 설치와 한성주보 발행, 기기창 설치, 육영 공원 설립은 모두 1880년대의 일로 전차 개통 이전에 해당한다.
[학생들의 대화]
-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추진된 개혁에 대해 말해보자.
- 상공업 진흥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상공 학교를 세웠어.
-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했어.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삼아 상공 학교를 세우고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한 밑줄 그은 '개혁'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이다. 고종은 황제 직속의 원수부를 설치하여 군 통수권을 직접 장악하였다. 과거제 폐지와 공사 노비법 혁파는 제1차 갑오개혁, 홍범 14조 반포와 전국 8도의 23부 개편은 제2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고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이끈 (가) 인물은 이상설이다. 이상설은 1914년 연해주에서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워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하얼빈 의거는 안중근, 의열단 조직은 김원봉, 한국통사 저술은 박은식이며 숭무 학교는 멕시코에 세워진 독립군 양성 기관이다.
[퀴즈]
덕원부의 관민이 힘을 합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로, 외국어 교육 등을 실시한 이 교육 기관은 무엇일까요?





덕원부의 관민이 힘을 합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학교는 원산 학사(1883)이다. 원산 학사는 외국어 등 근대 학문과 무예를 함께 가르쳐 인재를 길렀다.
이것은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가) 당시 장례 행렬에 모인 사람들에게 뿌려진 격문의 일부입니다.
- 대한 독립운동가여 단결하라!
- 일체 납세를 거부하자!
- 일본 물자를 배척하자!
-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 보통 교육은 의무 교육으로!
-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
순종의 인산일에 장례 행렬에 모인 사람들에게 뿌려진 격문이므로 (가)는 6·10 만세 운동(1926)이다. 이 운동은 사회주의 진영과 천도교를 비롯한 민족주의 진영, 학생 단체가 함께 준비하였고 이때의 연대 경험이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대구에서 시작된 것은 국채 보상 운동,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고 문화 통치의 배경이 된 것은 3·1 운동,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보낸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
[□□신문 제△△호 ○○○○년 ○○월 ○○일]
허은 지사, 독립 유공자로 서훈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孫婦) 허은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허 지사는 (가) 의 삼원보에서 결성된 서로 군정서의 숨은 공로자였다. 그녀는 기본적인 생계 활동과 공식적인 행사 준비 외에도 서로 군정서 대원들의 군복을 제작·배급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허은 지사의 회고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상룡의 손부 허은 지사가 활동한 서로 군정서가 삼원보에서 결성되었으므로 (가)는 서간도 지역이다. 이곳에서 신민회 인사들은 경학사를 세우고 신흥 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이는 뒷날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해조신문 발간은 연해주, 대한인 국민회는 미주, 대조선 국민 군단은 하와이, 2·8 독립 선언은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암태도 농민들이 고율의 소작료를 걷던 지주 문재철에 맞서 1년여 동안 벌인 밑줄 그은 '투쟁'은 암태도 소작 쟁의(1923~1924)이다. 그 이후인 1927년에 조선 노농 총동맹이 분리되면서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되어 농민 운동을 이끌었다. 회사령 제정과 토지 조사 사업은 1910년대, 농광 회사 설립과 함경도 방곡령 선포는 대한 제국 시기 이전의 일이다.

일제가 국가 총동원법을 적용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던 밑줄 그은 '시기'는 1938년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기이다. 태형을 집행하는 헌병 경찰은 조선 태형령이 시행되던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모습이라 이 시기에는 볼 수 없다. 신사 참배 강요, 황국 신민 서사 암송, 학도병 권유, 놋그릇 공출은 모두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 선언문은 상하이에서 신규식, 신채호, 조소앙 등 14인의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 선언으로 주권 재민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융희 황제가 삼보(三寶)*를 포기한 경술년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이를 계승한 날이니 ……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즉 신한국 최초의 날이니…….”
*삼보: 토지, 인민, 정치
| 1910 | 1919 | 1923 | 1931 | 1941 | 1945 | |||||
| (가) | (나) | (다) | (라) | (마) | ||||||
| 국권 피탈 | 3·1 운동 | 국민 대표 회의 개최 | 한인 애국단 조직 | 대한민국 건국 강령 발표 | 8·15 광복 |
융희 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날을 국민이 주권을 이어받은 날로 규정한 이 선언문은 1917년 상하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 선언이다. 이는 국권 피탈(1910)과 3·1 운동(1919) 사이에 해당하므로 연표에서 그 구간을 골라야 한다.

정의부 총사령관과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한국 광복군 창설의 주역은 지청천이다. 그는 1930년대 초 한국 독립군을 이끌고 중국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와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인물은 나석주, 대한 광복회 조직은 박상진, 봉오동 전투 승리는 홍범도, 조선 혁명 선언 집필은 신채호이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 자천자임(自薦自任)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라든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 회합이라든가 조선 인민 공화국이라든지 조선 인민 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혀 없는 것이다.
- 미군정 장관 육군 소장 아놀드 -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정이라는 하나의 정부만 있으며 조선 인민 공화국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 성명은 1945년 10월 아놀드 군정장관이 발표한 것이다. 조선 건국 동맹은 여운형이 1944년에 국내에서 비밀리에 결성한 단체이므로 이 성명보다 앞선 일이다.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신한 공사 설립,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설치,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출범은 모두 그 이후에 있었다.
(가) 국군 장교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권을 장악하고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는 최고 통치 기구인 국가 재건 최고 회의가 출범하였다.
(나) 국민의 직접 선거로 대의원이 선출되었으며, 통일 정책을 최종 결정하고 대통령 선거권 등을 행사하는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발족하였다.
<보 기>
- ㄱ.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 ㄴ. 제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 불황이 심화되었다.
- ㄷ. 베트남 파병에 관한 브라운 각서가 체결되었다.
- ㄹ. 대통령 긴급 명령으로 금융 실명제가 실시되었다.
(가)는 5·16 군사 정변 직후 출범한 국가 재건 최고 회의(1961), (나)는 유신 헌법에 따라 발족한 통일 주체 국민 회의(1972)이다. 그 사이인 1966년에 베트남 추가 파병의 대가를 담은 브라운 각서가 체결되었고,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제2차 석유 파동과 금융 실명제 실시는 모두 (나) 이후의 일이다.
제39조 ①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무기명 투표로 선거한다.
②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는 자는 정당의 추천 또는 법률이 정하는 수의 대통령 선거인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③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재적 대통령 선거인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를 대통령 당선자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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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조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
대통령을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 선거로 뽑고 임기를 7년 단임으로 규정한 이 헌법은 1980년에 개정된 제8차 개헌으로 전두환 정부 시기에 시행되었다. 이 시기인 1982년에 프로 야구가 6개 구단으로 출범하였다. 긴급 조치 9호 발동과 국민 교육 헌장 공포는 박정희 정부, 지방 자치제 전면 시행은 김영삼 정부, 한미 자유 무역 협정 체결은 노무현 정부 때의 일이다.
[□□신문 제△△호 ○○○○년 ○○월 ○○일]
민주 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 대회 열려
경찰이 사상 최대 규모인 5만 8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전국 집회장을 원천 봉쇄한다는 방침을 밝힌 가운데 서울을 비롯한 전국 20여 개 도시에서 국민 대회가 열렸다.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국민 합의를 배신한 4·13 호헌 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한다.”라고 발표하면서 민주 헌법 쟁취를 통한 민주 정부 수립 의지를 밝혔다.
4·13 호헌 조치의 무효를 선언하며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가 전국 20여 개 도시에서 국민 대회를 연 것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다. 그 결과 여당 대표의 6·29 민주화 선언이 나왔고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 설치와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1980년, 허정 과도 정부 수립은 4·19 혁명, 진보당 창당은 1950년대의 일이다.

금 모으기 운동과 기업 구조 조정, 노사정 위원회 설치로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국제 통화 기금의 구제 금융을 예정보다 앞당겨 상환한 밑줄 그은 '정부'는 김대중 정부이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펴 1998년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하였고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을 열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노태우 정부,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은 박정희 정부, 첫 이산가족 상봉은 전두환 정부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