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50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50회

제시된 장면은 공주 석장리에서 남한 최초로 찍개·주먹도끼 같은 뗀석기가 출토되었음을 전하는 뉴스이므로 (가)는 구석기 시대이다.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이동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동굴이나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에 주로 거주하였다. 반달 돌칼과 거푸집을 이용한 청동 무기 제작은 청동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와 가락바퀴·뼈바늘은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이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 이르러서는 ……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좌장군이 두 군대를 합하여 맹렬히 (가) 을/를 공격하였다. 상 노인, 상 한음, 니계상 참, 장군 왕협 등이 서로 [항복을] 모의하였다. …… [우거]왕이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한음, 왕협, 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 『사기』 -
<보 기>
- ㄱ.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 ㄴ.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 ㄷ.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하였다.
- ㄹ. 살인, 절도 등의 죄를 다스리는 범금 8조가 있었다.
자료는 『사기』에 실린 한의 침공 기록으로, 우거왕이 다스리다가 멸망한 (가) 나라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세력을 넓혔고, 살인·상해·절도를 다스리는 범금 8조를 두어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은 백제 무령왕, 진대법 실시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일이다.
(가) 의 사회와 경제
[풍습]
산천을 중시하며, 산과 내마다 읍락의 경계가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읍락을 침범하면 소, 말 등으로 변상하게 하는 책화가 있다.
[특산물]
낙랑의 단궁이 그 땅에서 나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산출된다. 무늬 있는 표범과 과하마 등이 유명하다.
다른 읍락을 침범하면 소·말로 변상하게 하는 책화와 특산물인 단궁·반어피·과하마가 나오는 (가) 나라는 동예이다. 동예에는 왕이 없이 읍군, 삼로라 불리는 군장이 읍락을 다스렸다. 신성 지역 소도는 삼한, 정사암 회의는 백제, 영고와 12배 배상 규정은 부여의 특징이다.
용이 검은 옥대를 바쳤다. …… 왕이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금·옥으로 보답하고,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로 나오자,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 비가 오고 비올 때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파도가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 『삼국유사』 -
감은사와 만파식적 설화가 나오는 자료의 ‘왕’은 신라 신문왕이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 장인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김흠돌을 비롯한 진골 귀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병부와 상대등 설치는 법흥왕, 우산국 복속은 지증왕, 마립간 칭호 사용은 내물왕 때이며, 매소성 전투는 문무왕 때의 일이다.
(가) 고구려 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서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이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나) 여러 장수가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 60일 동안 5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토산을 쌓았다. 토산의 정상은 성에서 몇 길 떨어져 있고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중에 토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 ……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록 이길 수 없었다.
(가)는 고구려 장수왕(거련)이 백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인 475년의 일이고,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다 실패한 645년의 일이다. 두 시기 사이인 612년에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미천왕의 서안평 점령, 고국원왕의 전사, 관구검의 침입, 광개토 대왕의 왜 격퇴는 모두 (가)보다 앞선 사실이다.

김해 대성동·양동리 고분에서 나온 목걸이와 김수로왕 건국 전승이 언급된 (가)는 금관가야이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철 산지를 배경으로 철을 많이 생산하여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다. 골품제와 화백 회의는 신라, 사출도는 부여, 박·석·김 3성의 교대 왕위 계승은 신라 초기의 특징이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 사리감의 명문은 이 절이 관산성에서 전사한 백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되었음을 알려 준다. 성왕은 앞서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았으나, 진흥왕이 이를 차지하자 신라를 치다가 관산성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륵사 창건은 무왕, 동진으로부터의 불교 수용은 침류왕, 대야성 함락은 의자왕, 서기 편찬은 근초고왕 때의 일이다.

동모산에 도읍하고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 국왕이라 칭한 (가)는 발해이다. 발해는 3성 6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9서당 10정, 외사정 파견, 위화부 등 13부는 통일 신라의 제도이고, 마진과 무태는 궁예가 쓴 국호와 연호이다.
(가) 은/는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 [왕의] 총애를 받던 측근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기강이 문란해졌다.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여러 도적들이 봉기하였다. 이에 (가) 이/가 몰래 [왕위를] 넘겨다보는 마음을 갖고 …… 드디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하게 왕을 칭하지는 못하였다. ……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그 백성들이 환영하였다.
- 『삼국사기』 -
<보 기>
- ㄱ. 후당,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ㄴ. 광평성을 비롯한 각종 정치 기구를 마련하였다.
- ㄷ. 신라의 금성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게 하였다.
- ㄹ.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무진주를 습격해 스스로 왕이 되고 완산주에서 환영받은 (가) 인물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다. 견훤은 중국의 후당과 오월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고, 927년 신라의 금성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광평성 등 정치 기구 마련은 궁예, 정계와 계백료서 저술은 고려 태조 왕건의 일이다.
내 몸은 비록 궁궐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백성에게 있노라. 지방 수령들의 눈과 귀를 빌어 백성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한다. 이에 우서(虞書)의 12목 제도를 본받아 시행할 터이니, 주나라가 8백 년간 지속되었듯이 우리의 국운도 길이 이어질 것이다.
우서의 12목 제도를 본받아 지방에 수령을 두겠다는 장면 속 왕은 고려 성종이다.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천수 연호는 태조, 양현고는 예종, 독서삼품과는 통일 신라 원성왕,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때의 일이다.

김방경이 개경 환도 이후 여·몽 연합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일본 원정에 참여하였다는 설명에서 ‘이 시기’는 몽골(원)의 간섭이 본격화된 원 간섭기이다. 이 시기에 고려의 관제가 격하되어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의부로 통합·개편되었다. 훈련도감 창설과 비변사 설치는 조선, 삼군부 부활은 흥선 대원군 집권기, 초계문신제는 정조 때의 일이다.

부산 범어사 소장 판각본이 국보로 승격되었고 일연이 저술하였다는 (가) 역사서는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여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단군으로 서술하였다.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편찬된 것은 조선왕조실록, 고승들의 전기를 기록한 것은 『해동고승전』, 기전체 서술은 『삼국사기』, 서사시 형태의 고구려 계승 의식은 『동명왕편』이다.
얼마 전 왕께서 친히 위봉루에 나가 과거 급제자를 발표하셨다더군.
한림학사 쌍기가 이번에 처음 치러진 과거의 지공거를 맡았다네.
쌍기가 지공거를 맡아 처음으로 과거가 시행되었다는 대화 속 ‘왕’은 고려 광종이다. 광종은 과거제 실시에 앞서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해방시키고 호족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녹과전 지급은 원종, 만권당은 충선왕, 주전도감은 숙종, 직지심체요절 인출은 우왕 때의 일이다.






대형 철불이 유행하고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처럼 거대한 불상이 조성된 ○○ 시대는 고려이다. 사진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석굴 안 벽면에 연꽃무늬 광배를 두고 앉은 경주 석굴암 본존불로, 이는 통일 신라 불교 조각의 정수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나머지는 철조 불상, 관을 쓴 거대 석불, 소조 불상, 바위에 새긴 마애불 등 고려 불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고려사절요』 검색 화면, 검색어 입력란은 비어 있음]
| 시기 | 내용 |
|---|---|
| 명종 26년 4월 | 이의민을 제거하다 |
| 명종 26년 5월 | 봉사 10조를 지어 바치다 |
| 신종 3년 12월 | 도방을 설치하다 |
| 희종 2년 3월 | 진강후로 책봉되다 |
이의민 제거, 봉사 10조, 도방 설치, 진강후 책봉이 검색된 인물은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최고 권력 기구인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인 교정별감이 되어 인사와 재정 등 국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로 한 인물은 묘청, 화통도감 설치 건의는 최무선, 삼별초의 진도 항쟁은 배중손, 전민변정도감 책임자는 신돈이다.
(가) 양규가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석령까지 추격하여 2,5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혔던 남녀 1,000여 명을 되찾아 왔다.
(나) 윤관 등이 여러 군사들에게 내성(內城)의 목재와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쌓게 하고, 변경 남쪽의 백성을 옮겨 와 살게 하였다.
(다) 적군이 30일 동안 귀주성을 포위하고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여 굳게 지켰다. 이에 적군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가)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양규가 포로를 되찾아 온 일, (나)는 예종 때 윤관이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쌓은 일, (다)는 몽골의 1차 침입 때 박서가 귀주성을 지켜 낸 일이다. 따라서 거란과의 전쟁 → 여진 정벌과 9성 축조 → 몽골의 침입 순으로 일어났다.
-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구분하여 문무백관에서 부병(府兵), 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科)에 해당하는 토지를 주고, 또 과에 따라 땔나무를 구할 땅을 주었다.
- 도평의사사에서 방을 붙여 알리기를, “지금부터 은병 1개를 쌀로 환산하여 개경에서는 15~16석, 지방에서는 18~19석의 비율로 하되, 경시서에서 그 해의 풍흉을 살펴 그 값을 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무백관에서 부병·한인에 이르기까지 과에 따라 토지를 지급한 전시과와 은병의 값을 정한 도평의사사의 조치는 모두 고려의 정책이다. 고려 때에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송·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드는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모내기법의 전국 확산, 덕대의 광산 경영, 면화·담배 등 상품 작물 재배는 조선 후기, 토지 비옥도에 따른 6등급 전세 부과는 조선 세종 때의 일이다.

답사 계획서는 경복궁과 종묘, 남한산성과 수원 화성, 영릉과 신륵사를 도는 조선 왕 관련 일정이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므로, 국왕이 신농과 후직에게 풍년을 기원하던 의례를 검색하는 활동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의례는 선농단에서 지낸 선농제와 관련된다.

「의순관영조도」는 만력제(신종)의 등극을 알리는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 의순관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므로 ‘이 나라’는 명이다. 조선은 건국 초 명과 표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으면서 정도전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광군 조직은 고려의 거란 대비책이고, 동평관 설치와 기유약조, 회답 겸 쇄환사 파견은 모두 일본에 대한 정책이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린 (가) 인물은 추사 김정희이다. 김정희는 금석문 연구에 힘써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처음으로 고증하였다. 100리 척의 동국지도는 정상기, 의산문답은 홍대용, 천리경·자명종·홍이포 반입은 정두원, 침구경험방은 허임의 업적이다.

평양에 새로 부임한 인물을 환영하는 「부벽루연회도」이고 감사 또는 방백으로도 불렸다는 설명에서 (가)는 관찰사이다. 관찰사는 각 도에 파견되어 관내 군현의 수령을 감독하고 그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권한을 가졌다. 간쟁과 봉박은 고려의 낭사, 6조 직계제로 권한이 약화된 기구는 의정부, 호장·기관 등으로 분류된 것은 향리이며, 경재소를 관장하며 유향소 품관을 감독한 것은 그 지역 출신의 중앙 관리이다.
(가) 한영규가 아뢰기를, “서양의 간특한 설이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히니 어찌 진산의 권상연, 윤지충 같은 자가 또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태웠으며, 조문을 거절하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가 매우 큽니다.”라고 하였다.
(나)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죄가 무거우니 이를 어찌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사학(邪學)이란 것은 반드시 나라에 흉악한 화를 가져오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 의금부에서, “죄인 남종삼은 명백한 근거도 없이, 러시아에 변란이 있을 것이고 프랑스와 조약을 맺을 계책이 있다면서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감히 나라를 팔아먹고자 몰래 외적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을 죽여도 모자랍니다. 죄인이 자백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가)는 진산의 권상연·윤지충이 문제가 된 신해박해, (나)는 이가환·이승훈·정약용이 화를 입은 신유박해, (다)는 남종삼이 처형된 병인박해에 관한 기록이다. 따라서 정조 때 → 순조 즉위 직후 → 고종 때 흥선 대원군 집권기 순으로 일어났다.
역사 신문 제△△호 ○○○○년 ○○월 ○○일
호패법 재실시 발표
금일, 왕이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문란해진 군적을 정비하고 이괄의 난 이후 심상치 않은 백성들의 동태를 점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호패법은 반정(反正) 직후부터 논의되어 왔으나, 새로 군역에 편입될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지금까지 시행이 미루어져 왔다.
반정 직후부터 논의되던 호패법을 이괄의 난 이후 다시 시행하게 한 ‘왕’은 인조이다. 인조는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을 제정하였다. 역분전 지급은 고려 태조, 삼정이정청은 철종, 신해통공은 정조, 균역법은 영조 때의 정책이다.
한국사 과제 안내문
다음에 제시된 조선의 농업 서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보고서를 제출하시오.
| 책 이름 | 소개 |
|---|---|
| 구황촬요 | (가) |
| 금양잡록 | (나) |
| 농사직설 | (다) |
| 산림경제 | (라) |
| 임원경제지 | (마) |
- 조사 방법: 문헌 조사, 인터넷 검색 등
- 제출 기간: 2020년 ○○월 ○○일~○○월 ○○일
- 분량: A4 용지 3장 이상
제시된 다섯 권은 조선의 대표적인 농서이다. 『농사직설』은 세종 때 정초와 변효문 등이 각 지방 농민의 경험을 모아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종합하여 편찬한 책이다. 중국 화북 지방의 농법을 소개한 것은 『농상집요』, 서유구가 지은 농촌 생활 백과사전은 『임원경제지』, 강희맹이 손수 농사지은 경험을 담은 것은 『금양잡록』이며, 『구황촬요』는 흉년에 대비한 구황법을 다룬 책이다.
색경을 편찬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당시 학계에서 배척당했어.
(가)
농서 『색경』을 편찬하고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인물은 박세당이다. 박세당은 『사변록』을 지어 유학 경전을 주자와 달리 해석하였고, 이 때문에 당시 학계에서 배척당하였다. 시헌력 도입 건의는 김육, 거중기 설계는 정약용, 조의제문 작성은 김종직, 혼천의 제작은 장영실 등과 관련된다.

효명 세자가 입학하여 대성전의 공자 신위에 술을 올린 뒤 명륜당에서 교육받았다는 (가)는 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이다. 성균관에는 원칙적으로 소과인 생원시나 진사시 합격자에게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 전문 강좌 7재는 고려 국자감, 부·목·군·현에 하나씩 세워지고 교수·훈도가 파견된 곳은 향교, 외국어 교육은 사역원이 맡았다.
(가)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는 하나 실은 양적(洋賊)입니다. 화친이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의 서책과 천주의 초상이 교역하는 속에 섞여 들어오게 되고, 조금 지나면 전도사와 신도가 전수하여 사학이 온 나라에 두루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 지부복궐척화의소 -
(나) 지금 조정에서는 어찌 백해무익한 일을 하여 러시아가 없는 마음을 먹게 하고, 미국이 의도하지 않았던 일을 만들어 오랑캐를 끌어들이려 하십니까?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스스로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일본을 위해 말하고 예수를 좋은 신이라 하며, 난적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짐승과 같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 영남 만인소 -
(가)는 최익현이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올린 지부복궐척화의소(1876)이고, (나)는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해 올린 영남 만인소(1881)이다. 그 사이인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김기수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제너럴 셔먼호 사건, 거중 조정 조항을 담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정족산성 전투는 이 사이 시기의 일이 아니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도성 백성들의 생계는 점포를 벌여 놓고 사고파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기강이 엄하지 않아서 어물과 약재 등 온갖 물건의 이익을 중간에서 독점하는 도고(都庫)의 폐단이 한둘이 아닙니다. 대조(大朝)께서 여러 차례 엄하게 다스렸으나, 점차 해이해져 많은 물건의 가격이 폭등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시서(平市署) 등에서 적발하여 강하게 다스렸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어물과 약재의 이익을 중간에서 독점하는 도고의 폐단을 논한 자료는 사상의 성장과 도고 상업이 문제되던 조선 후기의 상황을 보여 준다. 염포의 왜관에서 교역하는 상인은 3포를 개항하였던 조선 전기의 모습이므로 이 시기에 볼 수 없다. 서얼의 청요직 통청 요구, 한글 소설의 유행, 동국문헌비고 편찬, 장시의 판소리 공연은 모두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신(臣) 병창이 (가) 앞에 나아가 품의했더니, 이르기를 ‘성묘(聖廟) 동서무(東西廡)에 배향된 제현 및 충절과 대의가 매우 빛나 영원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곳의 서원 외에는 모두 향사(享祀)를 중단하고 사액을 철폐하라’고 하였습니다. 지시를 받들어 이미 사액된 서원 중 앞으로 계속 보존할 곳 47개를 별단에 써서 들였습니다. 계하(啓下)*하시면 각 도에 알리겠습니다.
- 『승정원일기』 -
*계하(啓下): 국왕의 재가
47곳을 제외한 서원의 향사를 중단하고 사액을 철폐하라고 지시한 (가) 인물은 흥선 대원군이다. 흥선 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렸다. 나선 정벌은 효종, 공노비 해방은 순조, 총융청 설치는 인조, 경국대전 편찬은 성종 때의 일이다.

우정총국 개국을 계기로 김옥균 등이 일으켰고 그로 인해 우정총국이 폐쇄된 (가) 사건은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청과 일본 양국 군대의 철수 등을 규정한 톈진 조약이 청·일 간에 체결되었다. 건양 연호 제정과 단발령은 을미개혁, 교정청 설치는 동학 농민 운동기, 구본신참은 광무개혁과 관련된다.
백동화를 제일 은행권으로 바꾸려고 교환소에 갔더니,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해 바꿔 주더군.
백동화는 곧 사용할 수 없을 테니 손해를 보더라도 교환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백동화를 제일 은행권으로 낮게 평가해 교환해 준다는 대화는 1905년에 시행된 화폐 정리 사업의 상황이다. 이 사업은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금속류 회수령, 국채 보상 운동, 산미 증식 계획, 조선 물산 장려회 조직은 이 상황의 배경이 아니다.

경복궁 건청궁에 조선 최초의 전등이 가설된 것은 1887년의 일이다. 그 이후에 해당하는 사실은 1899년 노량진에서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 개통된 것이다. 광혜원 설립, 박문국의 한성순보 발행, 기기창 설립, 동문학 설치는 모두 1880년대 전반의 일로 건청궁 전등 가설보다 앞선다.

공주 우금치에서 남접과 북접 연합군이 관군·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가)는 동학 농민 운동이다. 농민군은 앞서 1차 봉기 때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소응·유인석이 주도한 것은 을미의병, 한성 조약 체결은 갑신정변, 관민 공동회와 헌의 6조는 독립 협회, 박규수의 안핵사 파견은 임술 농민 봉기와 관련된다.
사건 일지
- 11월 10일 이토, 고종에게 일왕의 친서 전달
- 11월 15일 이토, 고종을 접견하고 협상 초안 제출
- 11월 16일 이토, 대한 제국 대신들에게 조약 체결 강요
- 11월 17일 일본군을 동원한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조약 체결 진행
- 11월 18일 이토, 외부인(外部印)을 탈취하여 고종의 윤허 없이 조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신들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외부인을 탈취해 조인한 이 사건은 1905년의 을사늑약 체결이다. 그 결과 대한 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대한국 국제 반포,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임명, 아관 파천, 제물포 앞바다의 러·일 함대 교전은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1909년 대동공보 사장에 취임하고 1911년 권업회를 조직하였으며 1920년 4월 참변으로 우수리스크에서 순국한 (가) 인물은 최재형이다.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숭무 학교는 멕시코 지역 한인, 조선 혁명 선언은 신채호, 대조선 국민군단은 박용만, 신한 청년당 결성과 파리 강화 회의 참석은 김규식과 관련된다.
[역사 다큐멘터리 기획안]
(가) , 좌우가 힘을 합쳐 창립하다
■ 기획 의도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사회 단체인 (가) 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 장면별 구성 내용
- 정우회 선언을 작성하는 장면
-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는 장면
- 전국 주요 도시에 지회가 설립되는 장면
- 순회 강연단을 조직하고 농민 운동을 지원하는 장면
정우회 선언을 계기로 좌우가 힘을 합쳐 창립하고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된 (가) 단체는 신간회이다. 신간회는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이를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하였다. 평양 자기 회사는 신민회, 2·8 독립 선언서는 조선 청년 독립단, 제국신문 발행은 이종일, 어린이날 제정과 잡지 어린이 간행은 천도교 소년회의 활동이다.
- 신(臣) 등이 들은 말에 의하면 일전에 외부(外部)에서 산림과 원야(原野)와 진황지(陳荒地)를 50년 기한으로 일본인에게 빌려주는 일을 정부에 청의(請議)하여 도하(都下)의 인심이 매우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 『해학유서』 - - 종로에서 송수만, 심상진 씨 등이 각 부(府)·부(部)·원(院)·청(廳)과 각 대관가(大官家)에 알리노라. 지금 산림과 하천 및 못, 원야, 황무지를 일본인이 청구하니, 국가의 존망과 인민의 생사가 경각에 달려 있노라.
- 황성신문 -
두 자료는 일본이 산림과 원야, 진황지를 50년 기한으로 빌려 달라고 요구하자 반대 여론이 일어난 1904년 황무지 개간권 요구 사건의 상황을 보여 준다. 송수만·심상진 등이 조직한 보안회는 이 요구를 규탄하는 운동을 벌여 결국 일본의 요구를 철회시켰다. 105인 사건, 독립문 건립, 조선 형평사, 황국 중앙 총상회는 이 자료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1920년 10월 백운평·어랑촌·고동하 등지에서 벌어진 (가)는 청산리 전투이다. 청산리 전투에는 강근호가 속한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를 비롯해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대한 국민군 등 여러 부대가 연합하여 참여하였다. 중국 호로군과의 협력은 한국 독립군, 미국 전략 정보국의 지원은 한국 광복군,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준 것은 3·1 운동, 조국 광복회의 지원을 받은 유격전은 동북 항일 연군과 관련된다.

안창호·양기탁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국권 피탈 이후 서간도 삼원보에서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 설립을 주도한 (가) 인물은 이동녕이다. 이동녕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질 때 임시 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았다. 독립 의군부는 임병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박은식, 조선 건국 동맹은 여운형,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특사는 이상설·이준·이위종이다.

을밀대 지붕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인 강주룡의 사진은 1931년 평양 평원 고무 공장 쟁의를 보여 준다. 이 사건 이후에 해당하는 것은 전시 징용 정책에 반대한 동방 광산 광부들의 투쟁으로, 이는 중일 전쟁 이후 전시 동원 체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조선 노동 총동맹·조선 농민 총동맹 창립, 조선 노동 공제회 조직, 회사령 제정, 원산 총파업은 모두 이 사건보다 앞선다.

임종국 선생 흉상, 망향의 동산, 유관순 열사 사적지, 독립 기념관을 잇는 투어이므로 이 지역은 충남 천안이다.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는 1919년 유관순 등이 주도한 대규모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4·3 사건은 제주,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시도는 예산 덕산, 강우규의 폭탄 투척은 서울, 지주 문재철에 맞선 소작 쟁의는 신안 암태도의 일이다.

브나로드 운동을 소재로 소설 『상록수』를 쓴 사진 속 인물은 심훈이다. 심훈은 광복에 대한 염원을 담은 저항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토월회 조직은 박승희 등, 영화 아리랑은 나운규, 조선상고사는 신채호, 소설 「고향」은 이기영의 것이다.

1929년부터 13년 동안 조선말 사전 편찬을 위해 작성한 원고를 남긴 (가) 단체는 조선어 학회이다. 조선어 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여 우리말 표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대한문전은 유길준 등이 지은 문법서, 언문지는 유희의 저술이며, 학부 아래 설립되어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문을 정리하고 철자법을 연구한 기구는 국문 연구소이다.

(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내 비밀 행정망인 연통제 관련자들에 대한 공판 기사이고, (나)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이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을 보도한 기사이다. 그 사이인 1923년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 대표 회의가 열렸다. 대동 단결 선언은 1917년, 대일 선전 성명서와 한국 광복군 창설, 한국 국민당 창당은 모두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국 강령 초안을 마련한 (가) 인물은 조소앙이다. 조소앙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강조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였고, 이것이 건국 강령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대성 학교와 흥사단은 안창호, 대한 광복회는 박상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는 김원봉, 『조선사회경제사』는 백남운과 관련된다.
- (가) 제31조 입법권은 국회가 행한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써 구성한다.
제53조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투표에 의하여 각각 선거한다. ……
제55조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 - (나) 제7조의2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항은 국회의 가결을 거친 후에 국민 투표에 부하여 민의원 의원 선거권자 3분지 2 이상의 투표와 유효 투표 3분지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제55조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
부칙 ……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 (가) 제31조 입법권은 국회가 행한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써 구성한다.
제53조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투표에 의하여 각각 선거한다. ……
제55조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 - (나) 제7조의2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항은 국회의 가결을 거친 후에 국민 투표에 부하여 민의원 의원 선거권자 3분지 2 이상의 투표와 유효 투표 3분지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제55조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
부칙 ……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가)는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국회를 규정한 1952년의 발췌 개헌, (나)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부칙을 둔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이다. 두 개헌 사이인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6·25 전쟁의 정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베트남 파병은 1960년대, 중화 인민 공화국과의 국교 수립과 경제 협력 개발 기구 가입은 1990년대의 일이며, 한·미 상호 방위 원조 협정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 초에 체결되어 (가) 이전에 해당한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월드컵과 부산 아시안 게임 개최로 국운 융성의 한 해를 만들자고 강조하며, 공명한 대통령 선거와 지방 자치 선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정부도 경제적 정의 실현과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여 중산층과 서민 생활 안정에 노력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뉴스 자막] 대통령, 공명 선거와 사회 정책 방향 제시
2002년 월드컵과 부산 아시안 게임 개최를 앞두고 그해 대통령 선거와 지방 자치 선거를 언급한 신년사이므로 밑줄 그은 ‘정부’는 김대중 정부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저소득층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이 제정되어 시행되었다. 호주제 폐지와 노인 장기 요양 보험법 제정은 노무현 정부, 대학 졸업 정원제는 전두환 정부,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는 박정희 정부 때의 일이다.

대구의 2·28 민주 운동, 대전의 3·8 민주 의거, 마산의 3·15 의거로 이어져 전국으로 확산된 (가)는 4·19 혁명이다. 4·19 혁명 과정에서 대학 교수단이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 행진을 벌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는 6·3 시위, 호헌 철폐·독재 타도 구호와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6월 민주 항쟁, 3·1 민주 구국 선언은 유신 체제에 맞선 저항이다.

경기도 광주 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벌인 대규모 시위는 1971년에 일어난 광주 대단지 사건으로, 당시는 박정희 정부 시기이다. 박정희 정부는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 뒤 이를 실천하기 위한 기구로 남북 조절 위원회를 설치하여 통일 방안을 논의하였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노태우 정부, 10·4 남북 공동 선언은 노무현 정부의 일이며, 개성 공업 지구 건설은 6·15 남북 공동 선언 이후에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