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52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52회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나온 민무늬 토기와 비파형 동검을 대표 유물로 든 (가)는 청동기 시대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청동 거울(거친무늬 거울)과 청동 방울처럼 지배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의례 도구가 제작되었다. 동굴·막집 생활은 구석기, 평등한 공동체 생활과 가락바퀴의 처음 사용은 신석기 시대의 모습이며, 오수전·화천 등 중국 화폐 교역은 철기 시대의 사실이다.
연(燕)의 (가) 이/가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항복하였다. …… (가) 이/가 망명자들을 꾀어내어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의 군대가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속이고 도리어 준왕을 공격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
연에서 망명해 와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된 (가) 인물은 위만이다. 위만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진번과 임둔을 복속하여 세력을 크게 넓혔고, 중국과 한반도 남부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한 무제가 보낸 군대와 맞서 싸운 인물은 위만의 손자 우거왕이고, 연의 장수 진개에게 서쪽 영토를 빼앗긴 것은 위만 집권 이전 고조선의 일이다.
[삼국사기 데이터베이스 — 신라본기 검색 화면]
목록개수 57
| 시기 | 내용 |
|---|---|
| 6년 |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다 |
| 11년 | 이사부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점령하다 |
| 27년 | 황룡사를 완공하다 |
거칠부의 국사 편찬(6년), 이사부의 도살성·금현성 점령(11년), 황룡사 완공(27년)이 이어지는 검색 결과의 왕은 신라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함경도 방면까지 진출하여 마운령비·황초령비 등의 순수비를 세웠다. 불국사 삼층 석탑은 통일 신라 경덕왕, 첨성대는 선덕여왕, 금관가야 복속은 법흥왕, 동시전 설치는 지증왕 때의 일이다.
(가) 장사를 지낼 때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며 한쪽을 열어 놓아 문을 만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매장을 해서 ……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하였다. 온 집 식구를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나무를 깎아 생전의 모습과 같이 만들었다.
-『삼국지』 동이전 -
(나)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천군이라고 하였다. 또 나라마다 별읍이 있으니 소도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 그 안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다.
-『삼국지』 동이전 -
(가)는 온 가족의 뼈를 하나의 목곽에 모아 두는 골장제(가족 공동 무덤) 풍습이 전하는 옥저이고, (나)는 천군과 소도가 있던 삼한이다. 삼한의 소국은 그 크기에 따라 신지·읍차 등으로 불린 지배자가 다스렸다. 서옥제는 고구려, 목지국은 삼한, 영고와 사출도는 부여의 것이어서 짝이 맞지 않는다.

김해 대성동, 고령 지산동, 함안 말이산 등 7개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다룬 (가)는 가야이다. 변한 지역에서 성장한 가야는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어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고 덩이쇠를 화폐처럼 사용하였다. 22담로는 백제, 집사부 등 14부는 통일 신라, 부경은 고구려, 백강 전투는 백제 부흥 운동과 관련된다.
[박물관 전시실 안내 장면 — 진열장 속 유물은 물음표로 가려져 있음]
국보 제119호인 이 불상은 고구려의 승려들이 만들어 유포한 천불(千佛) 중의 하나로,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연가(延嘉) 7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국보 제119호이며 고구려 승려들이 만들어 유포한 천불 가운데 하나로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고 '연가 7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이 불상은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이다. 배 모양의 큰 광배를 등지고 원통형 대좌 위에 선 작은 금동 여래 입상으로, 광배 뒷면의 명문 덕분에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이다.
(가) 정관 16년에 …… 여러 대신들과 건무가 의논하여 개소문을 죽이고자 하였다. 일이 누설되자 개소문은 부병을 모두 불러 모아 군병을 사열한다고 말하고 …… 왕궁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인 다음 대양의 아들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구당서』 동이전 -
(나) 건봉 원년에 …… 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아우 남건·남산과 화목하지 못하여 각자 붕당을 만들어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은 두 아우에게 쫓겨 국내성으로 달아났다.
-『구당서』 동이전 -
(가)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건무)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642년의 일이고, (나)는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 남생이 동생 남건·남산과 다툰 666년의 일이다. 그 사이인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복신과 도침이 왜에 있던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살수 대첩(612)은 이전이고, 안동도호부 설치·매소성 전투·안승의 보덕국왕 책봉은 모두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의 일이다.

당에 유학해 빈공과에 급제하고 황소의 난 때 '격황소서'를 지었으며 『계원필경』을 남긴 이 인물은 최치원이다. 그는 귀국 후 어지러운 신라를 개혁하고자 진성 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과 군사 동맹을 맺은 인물은 김춘추, 청방인문표를 지은 인물은 강수, 『화랑세기』·『고승전』을 지은 인물은 김대문, 이두를 정리한 인물은 설총으로 전한다.
대무예가 대장 장문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등주를 공격하였다. 당 현종은 급히 대문예에게 유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고, 태복경 김사란을 보내 신라군으로 하여금 (가) 의 남쪽을 치게 하였다. 날씨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 길이나 쌓여서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공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무예(무왕)가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한 사실이 나오는 (가) 국가는 발해이다. 발해는 문왕 때 유학 교육 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평양을 서경으로 삼은 것은 고려, 건원 연호 사용은 신라 법흥왕, 6좌평 관제는 백제, 외사정 파견은 통일 신라의 사실이다.
- (가) 이/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래서 평양 옛 도읍은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 (가) 이/가 미륵불을 자칭하였다. 머리에 금책(金幘)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걸쳤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평양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고 미륵불을 자칭하며 두 아들을 청광보살·신광보살이라 부른 (가) 인물은 궁예이다.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운 뒤 국호를 마진·태봉으로 바꾸고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서를 두어 통치 조직을 갖추었다. 임존성에서 당군을 물리친 인물은 흑치상지, 일리천 전투의 승자는 왕건, 청해진은 장보고, 오월에 사신을 보낸 인물은 견훤이다.
[학생들의 대화]
- 강조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옹립한 왕에 대해 말해보자.
- 거란이 침략했을 때 개경을 떠나 나주까지 피란을 가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어.
- 이 왕 때 초조 대장경 조판을 시작했어.
강조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옹립하였으며 거란의 침입 때 나주까지 피란하고 초조대장경 조판을 시작한 왕은 고려 현종이다. 현종 때인 1019년 강감찬이 거란의 3차 침입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다. 저고여 피살은 고종, 별무반 창설은 숙종, 만부교 사건은 태조, 서희의 외교 담판은 성종 때의 일이다.
[역사 용어 해설] 구제도감
1. 기능
(가) 시대에 재해가 발생했을 때 설치한 임시 기구로서 전염병 퇴치, 병자 치료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백성을 구호하였다.
2. 관련 사료
왕이 명하기를, “도성 내의 백성들이 역질에 걸렸으니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이들을 치료하고, 시신과 유골은 거두어 비바람에 드러나지 않게 매장하라.”라고 하였다.
<보기>
- ㄱ. 기근에 대비하기 위하여 구황촬요를 간행하였다.
- ㄴ. 개경에 국립 의료기관인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였다.
- ㄷ. 호조에서 정한 사창절목에 따라 사창제를 시행하였다.
- ㄹ.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휼하는 제위보를 운영하였다.
재해가 발생했을 때 임시로 설치해 전염병 퇴치와 병자 치료를 맡은 구제도감이 있던 (가)는 고려 시대이다. 고려는 개경에 국립 의료 기관인 동서 대비원을 두었고,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휼하는 제위보를 운영하였다. 『구황촬요』 간행과 호조의 사창절목에 따른 사창제 시행은 조선 시대의 정책이다.
고려의 태자가 배알하니 쿠빌라이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고려의 세자가 스스로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말하기를, “고려는 비록 소국이나 20여 년간 군사를 동원하였어도 아직 신하가 되지 않았습니다. …… 이는 한 명의 병졸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태자가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의 실마리를 연 자료는 몽골과의 오랜 전쟁이 끝나 가던 1259년의 상황으로, 이후 원 간섭기가 시작된다. 원 간섭기에 충선왕이 원의 수도에 세운 만권당에서 이제현이 원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배워 왔다. 쌍기의 건의에 따른 과거제 도입(광종), 김보당의 난(1173),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1135), 최충헌의 봉사 10조(1196)는 모두 이전의 일이다.






국보 제18호이며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양식으로 지은 고려 시대 목조 건물로 내부에 국보 제45호 소조 여래 좌상을 봉안한 (가)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부석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에 포함된 사찰이며,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꼽힌다.
- 주전도감에서 아뢰기를, “백성들이 비로소 동전 사용의 이로움을 알아 편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 해에 은병을 화폐로 삼았다. 은 1근으로 만들되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들었으며 속칭 활구라 하였다.
- 저포, 은병으로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작은 일용품은 쌀로 가격을 계산하여 거래한다. 백성들은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편하게 여긴다.
주전도감을 두어 동전을 만들고 우리나라 지형을 본뜬 은병(활구)을 화폐로 삼은 자료는 고려 숙종 때의 상황이다. 고려는 경시서를 두어 수도 개경의 시전을 감독하게 하였다. 책문 후시, 송상의 송방 설치, 감자·고구마의 구황 작물 재배, 덕대의 광산 경영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경제 모습이다.
[가상 인터뷰]
- 최근 저술한 조선경국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 주례의 6전 체제를 참조하였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조선경국전』을 저술하고 『주례』의 6전 체제를 참조하며 재상 중심의 정치를 강조한 인물은 정도전이다. 그는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 교리를 비판하였다.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 주장은 묘청, 9재 학당은 최충, 백운동 서원은 주세붕, 충청도 대동법 건의는 김육과 관련된다.
□□신문 제△△호 ○○○○년 ○○월 ○○일
(가) , 보물로 지정
문화재청은 (가) 을/를 고려 시대를 다룬 역사서로는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하였다.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사료로서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다는 점 등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 책은 앞 왕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을 목적으로 조선 초부터 편찬하기 시작해 문종 대에 완성되었다. 정인지 등이 쓴 서문에서는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의 범례를 본받아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고려 시대를 다룬 역사서로는 처음 보물로 지정되었고 조선 초부터 편찬하여 문종 대에 완성되었으며 정인지 등이 서문을 쓴 (가)는 『고려사』이다. 『고려사』는 사마천의 『사기』 범례를 본받아 세가·열전·지·연표 등으로 짜인 기전체 사서이다.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책은 『발해고』, 고구려 시조를 서사시로 노래한 것은 『동명왕편』, 불교사와 민간 설화를 담은 것은 『삼국유사』, 단군 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는 『동국통감』이다.
- 일전에 좌정승 하륜이 나에게 국정의 처리를 육조에서 직계하자고 건의하였다. 지금까지는 겨를이 없어 논의하지 못했으나, 이제 경들이 의논하도록 하라.
- 전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좌정승 하륜의 건의로 육조 직계제를 논의하는 대화 속 왕은 조선 태종이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문하부를 폐지하면서 그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켜 대신을 견제하게 하였다. 갑인자 제작은 세종, 훈련도감 창설은 선조, 초계문신제는 정조, 『경국대전』 완성은 성종 때의 일이다.
(가) 대사헌 등이 아뢰기를, “정국공신은 책봉된 지 오래 되었지만 폐주(廢主)의 총신(寵臣)도 많이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그 중에는 반정 때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가 바로 서지 않을 것이니 삭훈해야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나) 김효원과 심의겸의 두 당이 원수처럼 서로 공격하였다. 당초 심의겸이 김효원을 비방하자 김효원도 심의겸을 비난하여 각기 붕당이 나뉘어 대립하였다.
(가)는 중종 때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를 요구한 상황(1519)이고, (나)는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으로 붕당이 갈린 선조 때의 상황(1575)이다. 그 사이인 명종 즉위 직후, 외척 간의 다툼 속에서 윤임 일파가 제거된 을사사화(1545)가 일어났다.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는 (가) 이전이고, 탕평비 건립(영조)과 원자 책봉을 둘러싼 기사환국(숙종)은 (나) 이후의 일이다.

『성학십도』를 지어 왕에게 바치고 군주가 스스로 인격과 학문을 닦아야 함을 강조한 (가) 인물은 이황이다. 이황은 고향인 안동 예안 지방에서 예안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에 힘썼다. 강화학파를 형성한 인물은 정제두, 『해동제국기』는 신숙주, 『사변록』은 박세당, 『가례집람』은 김장생의 저술이다.
(가) 왕은 군사를 일으켜 왕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킨 뒤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나) 용골대 등이 왕을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왕에게 자리로 나아가기를 청하였다.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다) 왕은 김상용에게 도성의 일을 맡기고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강화로 피난해 들어갔다. 이에 김류, 이귀, 최명길, 김자점 등의 신하들이 모두 따라갔다.
(가)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즉위한 인조반정(1623)이고, (다)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사직의 신주를 강화로 옮기고 신하들이 피난한 상황(1636년 12월), (나)는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한 항복(1637년 1월)이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가) - (다) - (나)이다.
- 진산의 윤지충은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어머니의 장례에도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태연하였으니, 정말 흉악한 자입니다.
- 근심과 한탄을 금할 수가 없다. 사학(邪學)을 따르는 죄인을 처벌하여 경계로 삼으라.
| 1746 속대전 간행 | (가) | 1776 정조 즉위 | (나) | 1801 공노비 해방 | (다) | 1834 헌종 즉위 | (라) | 1865 대전회통 편찬 | (마) | 1876 강화도 조약 |
진산의 윤지충이 신주를 불사른 일을 두고 사학을 따르는 죄인을 처벌하라고 한 상황은 정조 때 일어난 신해박해(진산 사건, 1791)이다. 정조 즉위는 1776년, 공노비 해방은 1801년이므로 이 상황은 두 사건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

청에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와 왕이 된 뒤 성곽과 무기를 정비하며 북벌을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왕은 효종이다. 효종 때 청의 요청으로 조총 부대를 두 차례 파견하여 흑룡강 방면에서 러시아 세력과 싸운 나선 정벌이 이루어졌다. 장용영은 정조, 백두산정계비는 숙종,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수신전·휼양전 폐지는 세조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은화는 연경과의 무역에 모두 써버린다. 하늘이 낸 이 보화를 가지고 비단·식물·그릇·사치품 따위를 멀리서 사들여 와 하루도 못가서 소비해 버린다. 나라에서 생산하는 은이 부족한 까닭에, 일본 은을 들여다가 간신히 채우려고 하지만 나라의 은이 모두 바닥이 난다. 병화(兵禍)가 생긴다면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성호사설』-
은이 연경과의 무역에 모두 소비된다고 우려한 『성호사설』의 주장은 18세기 조선 후기의 상황을 보여 준다. 조선 후기에는 고추·담배·인삼처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상품 작물 재배가 널리 퍼졌다. 염포의 왜관 교역과 계해약조는 조선 전기, 과전법에 따른 토지 지급과 화통도감은 고려 말의 모습이다.
왕은 늘 양역의 폐단을 염려하여 군포 한 필을 감하고 균역청을 설치하여 각 도의 어염·은결의 세를 걷어 보충하니, 그 은택을 입은 백성들은 서로 기뻐하였다. 이런 시책으로 화기(和氣)를 끌어 올려 대명(大命)을 이을 만하였다.
양역의 폐단을 줄이고자 군포를 한 필로 줄이고 균역청을 두어 어염세·은결세 등으로 부족분을 채운 균역법을 시행한 왕은 영조이다. 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고 관리하기 위해 준천사를 신설하여 홍수에 대비하였다. 『동문휘고』 간행은 정조, 전제상정소와 전분 6등법은 세종, 총융청·수어청 창설은 인조, 삼정이정청 설치는 철종 때의 일이다.
한국사 과제 안내문
다음 지도 및 지리서 중 하나를 선택하여 보고서를 제출하시오.
| 지도 및 지리서 | 설명 |
|---|---|
| 택리지 | (가) |
| 동국지도 | (나) |
| 대동여지도 | (다) |
| 동국여지승람 | (라) |
| 조선방역지도 | (마) |
- 조사 방법: 문헌 조사, 인터넷 검색 등
- 제출 기간: 2021년 ○○월 ○○일~○○월 ○○일
- 분량: A4 용지 1장 이상
제시된 표는 조선의 지도와 지리서를 정리한 것으로, 동국지도는 영조 때 정상기가 100리 척을 사용해 만든 지도이므로 (나)의 설명으로 옳다. 『팔도지리지』를 참고해 성종 때 완성된 책은 『동국여지승람』, 복거총론에서 이상적인 거주지 조건을 제시한 책은 『택리지』, 목판으로 인쇄하고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한 것은 대동여지도이며, 500여 종의 자료를 참고해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는 표에 실린 책이 아니다.

천문학에 조예가 깊어 기존의 혼천의를 개량하였고 학문이 『담헌서』로 정리된 (가) 인물은 홍대용이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지전설과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거중기 설계는 정약용, 자격루 제작은 장영실, 『동의수세보원』은 이제마, 『지구전요』는 최한기와 관련된다.
- 적도의 우두머리는 성은 홍이고 이름은 알 수 없으며, 우군칙·오용진 등이 그의 부하라고 하옵니다. 또한 선천 부사 김익순은 그들에게 항복했다고 하옵니다.
- 적도들을 즉시 토벌하라.
홍씨 성의 우두머리와 우군칙 등의 부하, 선천 부사 김익순의 항복이 언급된 대화 속 사건은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다. 이 봉기는 세도 정치의 수탈과 함께 서북 지방민에 대한 오랜 차별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박규수의 안핵사 파견은 임술 농민 봉기, 조병갑의 탐학과 남접·북접 연합은 동학 농민 운동, 선혜청과 일본 공사관 공격은 임오군란과 관련된다.
(가) 대왕대비께서 전교하기를, “이번에 이렇게 만동묘를 철폐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시는 것에 대해서 선현의 혼령이 알게 되더라도 올바른 예법이라고 여기고 유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잘못을 탄핵하기를, “만약 그 지위가 아닌데도 국정에 관여하는 자는 단지 그 지위와 녹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특별히 그를 호조 참판에 발탁하고 총애하였다.
(가)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만동묘를 철폐한 일(1865)이고, (나)는 최익현이 대원군의 국정 관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이 물러나게 된 일(1873)이다. 그 사이인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뒤 흥선 대원군은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밝혔다. 별기군 창설(1881), 갑신정변(1884),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 독립신문 발행(1896)은 모두 (나) 이후의 일이다.

김윤식이 청에 파견되어 쓴 일기 『음청사』와 관련된 (가) 사절단은 1881년 청에 보낸 영선사이다. 영선사 일행이 톈진에서 배운 근대 무기 제조 기술은 귀국 후 기기창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답 겸 쇄환사는 조선 전기 일본에 보낸 사절, 『조선책략』을 들여온 것은 제2차 수신사 김홍집, 민영익·홍영식·서광범이 참여한 것은 보빙사, 개화 반대 여론 때문에 비밀리에 떠난 것은 조사 시찰단이다.
진무사 정기원의 장계에, “초지와 덕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도 저의 불찰인데, 광성보에서는 군사가 다치고 장수가 죽었으니 저의 죄가 더욱 큽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병가의 승패는 늘 있는 일이다. 저 흉측한 무리들이 지금 다소 물러가기는 했으나 목전의 방비를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이 함락되고 광성보에서 장수가 전사한 상황은 1871년 미군이 강화도를 침입한 신미양요이다. 그 뒤인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를 공격하였고, 이는 이듬해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병인양요 때 로즈 함대의 침입,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시도(1868), 프랑스인 선교사 처형(병인박해)은 모두 신미양요 이전의 일이다.
이반 셰스타코프 각하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저희가 접수한 정보에 따르면 …… 일련의 과정에서 수 명의 조선 고관들이 살해되었습니다. 또한 일본군 호위대가 개입하면서 서울 주재 청국 수비대와의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며, 패배한 일본인들은 제물포로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H. 기르스
조선 고관들이 살해되고 일본군 호위대가 청군과 충돌한 끝에 일본인들이 제물포로 물러났다는 러시아 측 보고는 1884년 갑신정변에 대한 것이다. 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한 뒤 일본은 공사관 피해 배상 등을 요구하여 조선과 한성 조약을 맺었다. 최익현·민종식이 주도한 것은 을사의병, 구본신참은 광무개혁의 원칙, 김기수의 수신사 파견은 강화도 조약, 외규장각 의궤 약탈은 병인양요와 관련된다.

견훤의 후백제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된 동고산성과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이 있는 답사 지역은 전주이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한 뒤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곳은 웅천주(공주), 성왕이 새 도읍으로 삼은 곳은 사비(부여), 강우규의 의거 장소는 서울역, 신립의 격전지는 충주 탄금대이다.
<청일 전쟁 이후 열강이 침탈한 이권>
| 국가 | 사례 |
|---|---|
| 독일 | (가) |
| 일본 | (나) |
| 미국 | (다) |
| 러시아 | (라) |
| 프랑스 | (마) |
제시된 표는 청일 전쟁 이후 열강이 가져간 이권을 나라별로 정리한 것이다. 경인선 철도 부설권은 미국인 모스가 얻었다가 일본에 넘어간 것이어서 프랑스와 짝지을 수 없으며, 프랑스가 차지한 것은 경의선 철도 부설권이다. 독일의 당현 금광 채굴권, 일본의 경부선 철도 부설권, 미국의 운산 금광 채굴권, 러시아의 울릉도 삼림 채벌권은 모두 옳게 짝지어져 있다.
- 그동안 국정 논의를 주도한 군국기무처가 폐지되었다는군.
- 그렇다네. 이제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주도하는 내각에서 여러 개혁을 추진한다는군.
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이 추진한 밑줄 그은 개혁은 제2차 갑오개혁이다. 이때 홍범 14조를 반포하고 지방 행정 구역을 8도에서 23부로 개편하였으며 재판소를 설치해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하였다. 통리기무아문과 12사 설치는 개항 직후의 일이고, 개국기년 사용, 공사 노비법 혁파와 과부의 재가 허용, 6조의 8아문 개편과 과거제 폐지는 모두 제1차 갑오개혁의 내용이다.

이위종이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되었다는 밑줄 그은 특사는 1907년의 헤이그 특사이다. 고종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그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헤이그에 보냈다. 고종의 강제 퇴위는 특사 파견의 결과이며, 데라우치의 총독 부임(1910), 기유각서(1909),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제창(1918)은 모두 그 이후의 일이다.
□□신보 제△△호 ○○○○년 ○○월 ○○일
한국 창의병대가 일본 원정대를 몰살하다
지금 서울 근처 각 지방에 의병이 많이 모여 서울을 치고자 하는 모양인데, 수효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한 곳에는 8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해산된 한국 군인들이 선봉이 되어 기동하는데 곳곳의 철로와 전선을 끊고 일본 순검이나 철로와 전보국의 사무원을 만나는 대로 죽인다 하며 …… 녹도 땅에 의병을 치러 갔던 일본 원정대는 처참하게 몰살되었다고 한다.
| 1885 거문도 사건 | (가) | 1894 청일 전쟁 | (나) | 1896 아관 파천 | (다) | 1899 대한국 국제 반포 | (라) | 1904 한일 의정서 | (마) | 1910 국권 피탈 |
해산된 한국 군인들이 선봉이 되어 서울을 치려 한다는 기사는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일어난 정미의병과 이듬해의 서울 진공 작전에 관한 것이다. 이는 1904년 한일 의정서 체결과 1910년 국권 피탈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

국제 연맹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기 위해 『한일 관계 사료집』을 편찬한 (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임시 정부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려고 독립 공채를 발행하였고 연통제와 교통국, 이륭양행·백산 상회 등을 통해 자금을 모았다. 조선 혁명 간부 학교는 의열단,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은 조선어 학회, 태극 서관은 신민회,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진상 조사단 파견은 신간회의 활동이다.

동삼동 패총 전시관, 정발의 충절을 기린 정공단, 임시 수도 기념관, 백산 기념관을 돌아보는 답사 지역은 부산이다.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은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켰다. 2·28 민주 운동은 대구,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서울,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 농성은 평양, 지주 문재철에 맞선 소작 쟁의는 암태도에서 일어났다.

출판사 개벽사를 세워 『개벽』과 『별건곤』 등의 잡지를 발간한 (가) 종교 단체는 천도교이다. 천도교는 방정환을 중심으로 소년 운동을 이끌며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펴냈다. 박중빈의 새생활 운동은 원불교, 중광단은 대종교, 배재 학당은 개신교, 경향신문은 천주교와 관련된다.
행동 강령
- 1.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 2.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 3. 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 4.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 5.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 6.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임금 지불
- 7.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 노동 및 야업 폐지
여성에 대한 일체의 차별 철폐, 조혼 폐지,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 철폐 등을 내건 이 행동 강령을 발표한 단체는 1927년에 창립된 근우회이다.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 운동가들이 힘을 합쳐 결성하였고 기관지 『근우』를 발간하였다. 3·1 운동 참여, 대동 단결 선언(1917), 이화 학당 설립(1886), 여권통문 공표(1898)는 모두 근우회 결성 이전의 일이다.

중일 전쟁 이후 국가 총동원법을 근거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고 일상생활까지 통제하던 밑줄 그은 시기는 1930년대 후반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기이다. 이 시기인 1942년 일제는 조선어 학회 사건을 일으켜 한글 학자들을 붙잡아 탄압하였다. 원산 총파업(1929), 조선 태형령 실시(1912), 민립 대학 기성회 창립(1923), 경성 제국 대학 설립(1924)은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대한 제국 무관 출신으로 신민회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었고 만주·연해주를 무대로 민족 운동을 펴며 한인 사회당을 창당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은 이동휘이다. 그는 1914년 연해주에서 이상설 등과 함께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 결성은 김두봉, 서전서숙 설립은 이상설, 독립 의군부 조직은 임병찬, 조선 혁명 선언 작성은 신채호와 관련된다.
(가) 북간도에 주둔한 아군 7백 명은 북로 사령부 소재지인 봉오동을 향해 행군하다가 적군 3백 명을 발견하였다. 아군을 지휘하는 홍범도, 최진동 두 장군은 즉시 적을 공격하여 120여 명을 살상하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독립신문』-
(나) 조선 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참모장 김학규 등은 병력을 이끌고 중국 의용군과 합세하였다. …… 아군은 승세를 몰아 적들을 30여 리 정도 추격한 끝에 영릉가성을 점령하였다.
-『광복』-
(가)는 홍범도·최진동이 이끈 봉오동 전투(1920. 6.)이고, (나)는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성을 점령한 영릉가 전투(1932)이다.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 한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것은 1937년의 일이라 두 시기 사이에 들어가지 않는다. 청산리 대첩과 간도 참변(1920), 자유시 참변 이후 3부 조직, 미쓰야 협정 체결(1925)은 모두 그 사이의 사실이다.

조성환이 194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에 창설을 주도하고 군무 부장으로 활동한 (가) 군대는 한국광복군이다. 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함께 훈련한 국내 정진군을 조직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숭무 학교는 멕시코 지역 한인, 쌍성보 전투는 한국 독립군, 호가장 전투는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는 조선 의용대이다.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된 김주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밑줄 그은 이 사건은 4·19 혁명이 전국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가 확산되자 이승만이 하야하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세워져 내각 책임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진보당 창당(1956),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설치(1948), 신한 공사 설립(1946), 자유당의 직선제 개헌(1952)은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가발 생산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폐업에 맞서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다 경찰에 강제 진압된 이 사건은 1979년 8월의 YH 무역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자 그해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3·1 민주 구국 선언(1976), 양원제 국회 출범(1960), 6·3 시위(1964), 전태일 분신(1970)은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프로 야구 6개 구단 창단, 언론 통제를 위한 보도 지침, 호헌 철폐 국민 대회로 상징되는 (가)는 전두환 정부이다.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5년 남북한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교환 방문을 성사시켰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박정희 정부,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노태우 정부 때의 일이며, 금강산 관광과 개성 공단 착공은 김대중 정부 이후에 이루어졌다.
미셸 캉드쉬 총재 귀하
1. 첨부된 경제 계획 각서에는 향후 3년 이상 한국이 실행할 정책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정책은 현재의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한 근본 원인을 해결하여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며, 한국 경제를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제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향후 3년간 특별 인출권(SDR) 155억 달러 규모의 국제 통화 기금(IMF) 대기성 차관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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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캉드쉬 국제 통화 기금(IMF) 총재에게 대기성 차관을 요청한 이 문서는 1997년 외환 위기 때 작성된 것이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1998년 대통령 직속 자문 기구로 노사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동계·경영계·정부의 협의를 이끌었다. 전국 민주 노동조합 총연맹 창립(1995), 3저 호황(1980년대 중반), 제2차 석유 파동(1979), 금융 실명제 실시(1993)는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주제: 세계로 뻗어 가는 대한민국>
- (가) 국제 평화와 안전 보장을 목적으로 결성된 유엔에 가입하였습니다.
- (나) 세계 경제 발전과 무역 촉진을 도모하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의 29번째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 (다) 세계 주요 20개국을 회원으로 하는 국제 경제 협의 기구인 G20 정상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가)의 유엔 가입은 1991년, (나)의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은 1996년, (다)의 서울 G20 정상 회의 개최는 2010년의 일이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가) - (나) - (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