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56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56회

제주 고산리 유적의 이른 민무늬 토기를 통해 기원전 8000년경 시작된 신석기 시대를 다루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조·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어 인류가 식량을 채집하는 단계에서 생산하는 단계로 나아갔고, 갈돌·갈판으로 곡물을 갈아 조리하였다. 고인돌과 청동검은 청동기 시대, 철제 농기구는 철기 시대의 것이다.
(가) 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더니 마주 대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니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 『삼국사기』 -
해부루와 금와 설화는 부여의 건국 전승이다. 부여는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으며, 마가·우가·저가·구가가 사출도를 다스렸다. 서옥제는 고구려, 정사암 회의는 백제, 단궁·과하마·반어피는 동예의 특징이다.
[칠판 판서: 삼국의 성장과 발전]
- 체제 정비
- 고구려 (가)
- 불교 수용
- 전진에 사신 파견
- 백제 고이왕
- 16관등제 시행
- 관리의 복색 제정
- 신라 법흥왕
- 불교 공인
- 상대등, 병부 설치
- 고구려 (가)
불교를 수용하고 전진에 사신을 보낸 (가)는 고구려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진에서 온 순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태학을 세워 인재를 기르고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였다. 평양 천도는 장수왕, 서안평 공격은 미천왕, 신라 구원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이다.


정림사지 오층 석탑

능산리 고분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왕흥사 터와 왕흥사지 사리기, 성왕이 도읍으로 삼은 곳이라는 설명에서 밑줄 그은 '이 지역'은 충남 부여임을 알 수 있다. 부여에는 정림사지 오층 석탑, 능산리 고분군,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등 사비 시기 백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반면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고려 광종 때 논산에 조성된 불상이어서 부여에서는 볼 수 없다.
- (가) 왕은 당과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에게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4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였다.
- (나)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후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4천여 명을 죽였다.
(가)는 계백의 결사대가 패한 황산벌 전투(660), (나)는 신라가 당군을 물리친 기벌포 전투(676)이다. 그 사이인 670년 검모잠은 안승을 왕으로 받들고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김흠돌의 난은 681년, 대야성 함락은 642년, 살수 대첩은 612년, 발해 건국은 698년의 일이다.






덕흥리 고분 별자리 벽화와 첨성대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천문(天文)을 주제로 한 특별전이다. 금동 천문도, 혼천의, 칠정산 내편,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모두 천체 관측과 역법에 관련된 자료여서 전시에 어울린다. 그러나 거중기는 정약용이 수원 화성을 쌓을 때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려고 고안한 건축 기재여서 천문 특별전의 자료로는 적절하지 않다.
[홀로그램으로 만나는 역사 인물]
- 진행자: 오늘은 두 분의 고승을 모시고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들어 보겠습니다.
- (가): 당에 유학하고 돌아와 영주에 부석사를 세우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 (나): 무애가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지요.
당에 유학하고 돌아와 부석사를 세운 (가)는 의상, 무애가를 지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널리 퍼뜨린 (나)는 원효이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하나가 곧 전부'라는 화엄 사상의 요체를 정리하였다. 백련 결사는 요세, 천태종 개창은 의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유불 일치설은 혜심의 것이다.

9주와 중원경·서원경·남원경·북원경·금관경의 5소경을 갖춘 지도이므로 통일 신라이다. 통일 신라는 중앙군 9서당과 지방군 10정을 두어 군사 조직을 정비하였고, 지방 세력의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하는 상수리 제도로 이들을 견제하였다. 욕살·처려근지는 고구려의 지방관이고, 북계에 병마사를 파견한 것은 고려이다.
이것은 당, 일본, 신라 등과 교역한 (가) 의 주요 교통로를 도식화한 자료입니다.
- (가) → 거란도 → 거란
- (가) → 영주도 → 당
- (가) → 조공도 → 당
- (가) → 신라도 → 신라
- (가) → 일본도 → 일본
거란도·영주도·조공도·신라도·일본도의 교통로를 갖춘 (가)는 발해이다. 발해는 정혜 공주 묘와 같은 고구려식 굴식 돌방무덤과 함께, 정효 공주 묘처럼 고구려와 당의 양식이 어우러진 벽돌무덤을 남겼다. 서경 중시는 고려, 후연 격파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 22담로는 백제 무령왕, 청해진은 신라 장보고와 관련된다.

13조창의 조세를 개경의 경창으로 조운한 것은 고려 시대의 모습이다. 고려 시대에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여 송·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통일 신라, 덕대의 광산 경영과 구황 작물 재배는 조선 후기, 계해약조는 조선 세종 때의 일이다.

고인돌, 참성단, 광성보를 함께 볼 수 있는 곳은 강화도이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였고, 그 시기 이곳에는 고종의 홍릉을 비롯한 왕릉이 조성되었다. 김만덕은 제주, 자산어보는 흑산도, 이사부의 복속은 울릉도와 독도, 영국군의 점령은 거문도와 관련된 지역이다.

궁예가 세웠고 도성 터가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에 남아 있는 (가)는 후고구려이다. 궁예는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서를 두어 정치 기구를 정비하였다. 대공의 난은 신라 하대, 후당·오월에 사신을 보낸 것과 고창 전투 패배는 후백제, 5경 15부 62주는 발해의 일이다.
- (가) 양규가 무로대에서 거란군을 습격하여 2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3천여 명을 되찾았다.
- (나) 거란이 장차 침입하려 하므로 군사 30만 명을 선발하여 광군이라 부르고 광군사를 설치하였다.
- (다) 왕이 소손녕의 봉산군 공격 소식을 듣고 서희를 보내 화의를 요청하니 소손녕이 침공을 중지하였다.
- (라) 강감찬 등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맞아 싸웠다. 고려군이 맹렬하게 공격하니 거란군이 북으로 도망쳤다.
모두 거란과 관련된 사실이다. (나) 광군 설치는 정종 때인 947년, (다) 서희의 외교 담판은 거란의 1차 침입 때인 993년, (가) 양규의 활약은 2차 침입 때인 1010~1011년, (라)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3차 침입 때인 1019년이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나) - (다) - (가) - (라)이다.
사건 일지
- 2월 10일 망이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가야사를 습격함.
- 3월 11일 망이 등이 홍경원에 불을 지르고 승려 10여 명을 죽임.
- 6월 23일 망이가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함.
- 7월 20일 망이·망소이 등을 체포하여 청주 감옥에 가둠.
망이·망소이가 주도한 이 사건은 고려 무신 집권기인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봉기이다. 소는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바치던 특수 행정 구역으로, 그 주민들은 일반 군현민보다 무거운 부담을 지고 거주 이전도 제한되는 차별을 받았기에 봉기의 배경이 되었다. 서얼의 통청 운동과 적장자 위주 상속은 조선 후기, 원종과 애노의 봉기는 신라 하대,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다.
우리 태조께서 흑창을 두어 가난한 백성에게 진대(賑貸)하게 하셨다. 지금 백성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저축한 바는 늘어나지 않았으니, 미(米) 1만 석을 더하고 이름을 의창(義倉)으로 고친다. 또한 모든 주와 부에도 각각 의창을 설치하도록 하라.
태조가 설치한 흑창을 확대하여 의창으로 고치고 모든 주와 부에 두게 한 교서이므로 고려 성종이 내린 것이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남경 승격은 문종, 서적포 설치는 숙종, 정방 폐지는 충선왕·공민왕, 귀법사 창건은 광종 때의 일이다.
○○ 박물관 실감 콘텐츠 구성안
| 제목 | 오늘, 탑을 만나다 |
| 기획 의도 | 증강 현실(AR) 기술을 활용하여 우리 문화유산을 실감나게 체험하는 기회 제공 |
| 대상 유물 특징 | · 원의 영향을 받아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 · 원각사지 십층 석탑에 영향을 주었음 |
| 체험 내용 | · 탑을 쌓으며 각 층의 구조 파악하기 · 기단부에 조각된 서유기 이야기를 퀴즈로 풀기 |





원의 영향을 받아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원각사지 십층 석탑에 영향을 주었으며 기단부에 서유기 이야기가 조각된 탑은 개성 경천사지 십층 석탑이다. 고려 충목왕 때 세워진 이 탑은 아(亞)자 모양의 기단 위에 목조 건축을 본뜬 지붕돌을 얹은 독특한 형태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전시되어 있다.
그리운 벗에게
연경에 도착해 이제야 소식을 전하네. 예전에 충선왕이 원의 화가를 불러 그리게 한 나의 초상을 기억하는가? 잃어버렸던 그 그림을 오늘 찾았다네. 그림을 보니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함께 공부하던 나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네. 혼탁한 세상 편치만은 않지만 곧 개경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네.
영원한 벗, 익재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유하였고 호가 익재인 밑줄 그은 '나'는 이제현이다. 이제현은 성리학을 수용한 대표적 유학자로, 고려 역대 왕의 치적을 정리한 역사서 사략을 저술하였다. 불씨잡변은 정도전, 9재 학당은 최충, 봉사 10조는 최충헌, 예안 향약은 이황의 것이다.

1380년 삼도 도순찰사로서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아지발도를 죽인 (가)는 이성계이다. 이성계는 1388년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이후 조선을 건국하였다. 4군 6진은 세종 때 최윤덕·김종서, 동북 9성은 윤관, 삼별초 조직은 최우와 관련된다.
- 며칠 전 전하께서 과전을 혁파하고 직전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하네.
- 이제 현직 관원들만 수조권을 지급받게 되겠군.
과전법을 혁파하고 현직 관원에게만 수조권을 주는 직전법을 시행한 것은 조선 세조 때인 1466년이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이조 판서를 비롯한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였다. 임꺽정의 활동은 명종, 동몽선습 학습과 담배 재배는 조선 후기, 동의보감 완성은 광해군 때의 모습이다.

정희 왕후 등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고쳐 창경궁을 짓고 경국대전을 완성한 (가)는 조선 성종이다. 성종 대에는 성현 등이 음악 이론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을 편찬하여 궁중 음악을 정비하였다. 탕평비는 영조, 상평통보 주조는 숙종, 훈련도감은 선조, 초계문신제는 정조 때의 일이다.
- 중앙에서는 홍문관·육경·대간, 지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천거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시험을 치르면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한(漢)에서 시행한 현량과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
- 정국공신은 이미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허위가 많았습니다. 공신 기록을 유자광이 홀로 맡아서 이렇게까지 외람되었습니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개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 1494 연산군 즉위 | (가) | 1504 갑자사화 | (나) | 1545 을사사화 | (다) | 1567 선조 즉위 | (라) | 1623 인조반정 | (마) | 1659 기해예송 |
천거로 인재를 뽑는 현량과 실시와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를 주장한 자료이므로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이 펼친 개혁이다. 이 개혁은 1519년 기묘사화로 좌절되었으므로, 1504년 갑자사화와 1545년 을사사화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

중종 때 그려진 미원계회도에서 '미원'은 간쟁과 논박을 담당한 관청의 별칭이므로 (가)는 사간원이다. 사간원은 관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경연을 담당한 홍문관과 함께 3사로 불리며 언론 기능을 맡아 권력의 독점을 막았다. 왕명 출납은 승정원, 수도 치안은 한성부, 실록 관리는 춘추관, 중죄인 처벌은 의금부의 일이다.
조헌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고하노라. 영남에서는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그 기세가 산악을 진동하고 있다. 이 격문을 읽는 자들은 각자의 심력을 다하여라! 지혜를 가진 자는 계책을 내고, 용력을 가진 자는 역량을 발휘하라! 재산을 가진 자는 군량을 바치고, 힘을 가진 자는 대열에 참여하라! 만일 왜적을 치는 데 협력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 전란이 끝나는 날 그 죄를 성토하여 중형에 처하리라.
조헌이 곽재우의 의병 봉기를 알리며 왜적을 칠 것을 호소한 격문이므로 밑줄 그은 '이 전란'은 임진왜란이다. 전란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1607년 유정(사명대사) 등을 회답 겸 쇄환사로 보내 포로를 데려왔다. 진포 대첩은 고려 말, 해동제국기와 삼포왜란은 조선 전기, 비변사 설치는 중종 때의 일로 모두 임진왜란 이전이다.

수원 화성과 연계하여 축만제를 쌓고 둔전을 경영하여 장용영 유지 재원을 마련한 (가)는 정조이다. 정조는 1791년 신해통공을 단행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사상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허용하였다. 건원중보는 고려 성종, 동시전과 울산항·당항성은 신라, 균역법은 영조 때의 일이다.

중종 38년(1543) 풍기 군수 주세붕이 처음 세웠고 흥선 대원군이 정리한 뒤 47곳이 남았으며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가)는 서원이다. 서원은 사당에서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강당에서 유학을 가르치는 두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다. 군현마다 하나씩 두고 교수·훈도를 파견한 곳은 향교, 7재는 국자감, 생원·진사의 입학은 성균관에 해당한다.
<온라인 한국사 교양 강좌>
인물로 보는
조선 후기 사회 개혁론
우리 학회에서는 조선 후기 학자들의 다양한 개혁론을 이해하는 교양 강좌를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강좌 안내 ■
- 제1강 이익, (가)
- 제2강 홍대용, (나)
- 제3강 박지원, (다)
- 제4강 박제가, (라)
- 제5강 정약용, (마)
- 기간: 2021년 ○○월 ○○일~○○월 ○○일 매주 화요일 16:00
- 방식: 화상 회의 플랫폼 활용
- 주최: ◇◇ 학회
조선 후기 개혁론을 편 학자들을 다룬 강좌이다. 열하일기에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한 인물은 청에 다녀온 박지원이므로 (다)에 들어갈 내용으로 알맞다. 의산문답은 홍대용, 목민심서는 정약용, 성호사설의 여섯 가지 좀은 이익, 북학의의 소비 권장은 박제가의 것이어서 각각 강의 순서와 어긋난다.
- 모화관에 도착한 (가) 사신을 접대할 수 없다며 김만균이 사직소를 올렸습니다. 병자호란 때 조모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것을 이유로 들었으나 나랏일이 먼저이니 사직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 그리하도록 하라.
병자호란 때 순절한 조모를 이유로 모화관의 사신 접대를 거부한 김만균의 사직소가 문제 된 상황이므로 (가)는 청이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과 사대 관계를 맺고 정기적으로 연행사를 보내 외교와 문물 교류를 이어 갔다.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는 고려 공민왕, 별무반은 여진, 동평관과 통신사는 일본에 대한 정책이다.

1811년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평안도에서 일어나 정주성에서 진압된 (가)는 홍경래의 난이다. 이 봉기는 세도 정치기의 가혹한 수탈과 평안도민에 대한 오랜 차별에 반발하여 몰락 양반 홍경래를 중심으로 영세 농민·광산 노동자·상인이 합세해 일어났다. 청군 진압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척왜양창의는 동학 교도의 보은 집회, 박규수의 안핵사 파견은 임술 농민 봉기와 관련된다.
일본군의 엄호 속에 사복 차림의 일본인들이 건청궁으로 침입하였다. 그들은 왕과 왕후의 처소로 달려가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폭도들이 달려들자 궁내부 대신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앞을 가로막아 섰다. …… 의녀가 나서서 손수건으로 죽은 왕후의 얼굴을 덮어 주었다.
일본인들이 건청궁에 침입하여 왕후를 시해한 이 사건은 1895년 을미사변이다. 이후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을미개혁에서는 태양력을 채택하여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삼았고, 건양 연호 제정과 단발령도 함께 시행되었다. 과거제 폐지와 공사 노비법 혁파는 제1차 갑오개혁, 육영 공원 설립과 통리기무아문 설치는 그 이전의 일이다.
양헌수가 은밀히 정족산 전등사로 가서 주둔하였다. …… 산 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북을 치고 나발을 불며 좌우에서 총을 쏘았다. 적장이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고 서양인 10여 명이 죽었다. 달아나는 서양인들을 쫓아가니 그들은 동료의 시체를 옆에 끼고 급히 본진으로 도망갔다.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사건이므로 1866년 병인양요이다. 이 침입은 같은 해 프랑스인 선교사 9명과 다수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된 병인박해를 구실로 삼아 일어났다. 척화비 건립은 신미양요 이후,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1868년, 위안스카이의 상륙과 조선책략 유포는 훨씬 뒤의 일이다.
김옥균이 일본 공사 다케조에에게 국왕의 호위를 위해 일본군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였다. 그는 호위를 요청하는 국왕의 친서가 있으면 투입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친서는 박영효가 전달하기로 합의하였다. 다케조에는 조선에 주둔한 청군 1천 명이 공격해 들어와도 일본군 1개 중대면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김옥균이 다케조에 일본 공사에게 일본군의 지원을 요청하고 박영효가 친서를 전달하기로 한 상황은 갑신정변의 준비 과정이다. 급진 개화파는 1884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세우고 개혁 정강을 발표하였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였다. 별기군 창설, 김기수의 수신사 파견, 운요호의 영종도 공격, 영남 만인소는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백산 봉기 이후 전주성 점령에 이르는 동학 농민 운동 제1차 봉기의 전개 과정이다. 백산에 모여 4대 강령과 격문을 발표한 농민군은 1894년 4월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하고 이어 황룡촌에서도 승리한 뒤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논산 연합과 우금치 전투는 제2차 봉기, 집강소 설치는 전주 화약 이후, 고부 관아 습격은 백산 봉기 이전의 일이다.
□□신문 제△△호 2020년 ○○월 ○○일
국민의 품에 안긴 조선 후기 명화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이 소장자의 뜻에 따라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그동안 기탁 형태로 관리되었으나 온전히 국가에 귀속된 것이다. 이 작품은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중일 때 사제의 의리를 변함없이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으로, 시서화(詩書畫)의 일치를 추구하였던 조선 시대 문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중 변함없이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준 작품은 세한도이다. 세한도는 마른 붓질로 소나무와 잣나무, 초라한 집 한 채만을 그리고 그 사연을 발문으로 적어 시서화의 일치를 이룬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음력 5월 5일 수릿날이라고도 하며 씨름과 그네뛰기를 즐기고 수리취떡을 해 먹으며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세시 풍속은 단오이다.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로 여겨 왕이 신하에게 부채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식은 동지 후 105일째 날, 백중은 음력 7월 15일, 추석은 8월 15일, 정월 대보름은 1월 15일이다.
[문화유산DB 누리집 - 문화유산 검색 화면. 메뉴: 유네스코 등재유산 / 기록유산 / 문화유산 검색. 검색어: (가) ]
- 종목: 국가등록문화재 제506호
- 소개: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창간한 근대적 민간 신문이다. 창간 당시에는 한글판 3면과 영어판 1면으로 발행되었다. 띄어쓰기를 시행하는 등 한글 발전에 기여하였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창간하고 한글판 3면과 영어판 1면으로 발행된 근대적 민간 신문은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은 순 한글과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한글 발전에 이바지하였고, 국민 계몽과 자주 독립 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 며칠 전 폐하께서 환구단에 나아가 황제로 즉위하셨다는 소식 들었는가?
- 들었네. 어제는 국호를 대한으로 선포하셨다고 하더군.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으로 선포한 것은 1897년 대한 제국 수립 때이다. 대한 제국은 광무개혁을 추진하면서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전환국 설치, 혜상공국 설립, 보빙사 파견,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체결은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하얼빈 기념관에 동상이 서 있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각인 9시 30분에 시계가 멈춰 있는 (가)는 안중근이다.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 의거 뒤 뤼순 감옥에서 한·중·일 삼국의 평화 공존을 논한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였으나 순국으로 미완에 그쳤다. 스티븐스 사살은 장인환·전명운, 자신회는 나철·오기호, 이완용 습격은 이재명, 동양 척식 주식회사 폭탄 투척은 나석주의 일이다.

안창호와 양기탁 등이 조직하고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운 (가)는 신민회이다. 신민회는 평양과 대구에 태극 서관을 두어 서적을 보급하며 민족 교육과 계몽에 힘썼으나, 1911년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조직이 드러나 해체되었다. 이륭양행 교통국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입헌 군주제 수립은 신민회 이전 단체들의 목표였고 신민회는 공화정 수립을 지향하였다.

고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시작되었고 태화관 터, 탑골 공원, 보성사 터를 답사 경로로 삼은 (가)는 3·1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며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통감부의 탄압으로 중단된 것은 국채 보상 운동, 절영도 조차 저지는 독립 협회,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은 국채 보상 운동, 학생 간 충돌에서 비롯된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
<1920년대 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
- (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3부가 성립되었습니다.
- (나) 대한 독립군 등이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크게 무찔렀습니다.
- (다) 북로 군정서 등이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모두 1920년대 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이다. (나)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가)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 성립은 1923년부터 1925년 사이의 일이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나) - (다) - (가)이다.

조선 총독부를 마주하지 않으려 심우장을 북향으로 짓고 님의 침묵을 남긴 (가)는 한용운이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불교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여 불교 대중화와 청년 계몽에 힘썼다. 우리말 큰사전 편찬은 조선어 학회, 유교 구신론은 박은식, 진단 학회는 이병도·손진태, 독사신론은 신채호의 것이다.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하며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간 시기이므로 1930년대 후반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기이다. 이 시기 일제는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배와 함께 학생과 주민을 신사 참배에 강제로 동원하였다. 태형과 헌병 경찰, 회사령은 1910년대 무단 통치기, 원산 총파업과 암태도 소작 쟁의는 1920년대의 일이다.

1927년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결성되었고 박차정이 중앙 집행 위원으로 활동한 (가)는 근우회이다. 근우회는 조선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강령으로 내걸고 전국에 지회를 두어 강연회와 야학을 열며 여성 계몽 운동을 폈다. 대동 단결 선언은 신규식 등, 황무지 개간권 반대는 보안회, 배화 학당은 개신교 선교사, 어린이 잡지 발간은 천도교 소년회의 활동이다.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열린 곳이라는 설명에서 이 지역이 연해주임을 알 수 있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을 발행하며 동포의 경제력을 키우고 독립 운동을 준비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서간도, 숭무 학교는 멕시코, 한인 비행 학교는 미국, 조선 독립 동맹은 중국 화북 지역과 관련된다.
접견 기록
- 날짜 및 장소
- 1943년 7월 26일, 중국 군사 위원회 접견실
- 참석 인물
- (가) :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등
- 중국: 위원장 장제스 등
- 주요 내용
- 장제스: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실현하는 과정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혁명 동지들이 진심으로 단결하고 협조하여 함께 노력한다면 광복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 김구·조소앙: 우리의 독립 주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귀국이 지지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1943년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이 장제스를 만난 기록이므로 (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임시 정부는 1941년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내세운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여 광복 후 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좌우 합작 7원칙은 좌우 합작 위원회, 개벽·신여성 간행은 천도교, 조선 혁명 선언은 의열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조선어 학회의 것이다.

1·21 사태를 계기로 향토 예비군이 창설된 것은 1968년으로 박정희 정부 시기이다. 같은 해 12월 정부는 교육이 지향할 이념과 국민의 자세를 밝힌 국민 교육 헌장을 선포하고 학생들에게 암송하게 하였다. 호주제 폐지와 다문화 가족 지원법은 2000년대, 공직자 재산 등록 의무화는 김영삼 정부, 언론 통폐합과 언론 기본법은 전두환 정부 때의 일이다.

제헌 헌법으로 출범한 제1공화국을 주제로 하고 농지 개혁법 제정과 정전 협정 체결을 다루는 특강이므로 (가)에도 이 시기의 사실이 들어가야 한다. 제헌 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삼청 교육대는 전두환 정부, 새마을 운동과 한일 기본 조약은 박정희 정부, 지방 자치제 전면 실시는 김영삼 정부 때의 일이다.
- (가) 제39조 ①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무기명 투표로 선거한다.
제40조 ① 대통령 선거인단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 선거인으로 구성한다.
제45조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 - (나) 제67조 ①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② 제1항의 선거에 있어서 최고 득표자가 2인 이상인 때에는 국회의 재적 의원 과반수가 출석한 공개 회의에서 다수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
제70조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
(가)는 대통령을 선거인단이 뽑고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정한 1980년 제8차 개헌, (나)는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을 규정한 1987년 제9차 개헌이다. 그 사이인 1987년 6월 10일 시민들은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6·10 국민 대회를 열었고, 이 6월 민주 항쟁의 결과 6·29 민주화 선언과 개헌이 이루어졌다. 국가 재건 최고 회의는 1961년, 진보당 창당은 1956년,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는 1960년,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의 일이다.
헌법 제76조 제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반포합니다. …… 금융 실명제 없이는 건강한 민주주의도, 활력이 넘치는 자본주의도 꽃피울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선진화를 이룩할 수가 없습니다. 금융 실명제는 '신한국'의 건설을 위해서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제도 개혁입니다.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금융 실명제를 실시하고 '신한국' 건설을 내세운 담화문이므로 1993년 김영삼 정부 시기이다. 김영삼 정부는 시장 개방과 국제화를 추진하여 1996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경부 고속도로 준공과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정부,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 체결은 노무현 정부, 신한 공사 설립은 미군정기의 일이다.
나는 3년 전 이 자리에서 서울 올림픽의 감명을 전했습니다. …… 며칠 전 남북한이 다른 의석으로 유엔에 가입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통일을 위해 거쳐야 할 중간 단계입니다. 남북한의 두 의석이 하나로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서울 올림픽 3년 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직후의 유엔 연설이므로 1991년 노태우 정부 시기이다. 노태우 정부는 그해 12월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한 데 이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에 합의하여 핵무기의 시험·생산·보유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남북 정상 회담과 개성 공단 합의는 김대중 정부, 남북 조절 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은 전두환 정부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