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58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58회

제시된 자료의 (가)는 부산 동삼동 유적의 빗살무늬 토기와 갈돌·갈판이 대표 유물인 신석기 시대다.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된 이 시대에는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해 실을 뽑고 옷을 지어 입는 원시적 수공업이 이루어졌다. 동굴이나 막집 거주는 구석기, 거푸집으로 세형 동검을 만든 것은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 좌장군은 (가) 의 패수 서쪽에 있는 군사를 쳤으나 이를 격파해서 나가지는 못했다. …… 누선장군도 가서 합세하여 왕검성의 남쪽에 주둔했지만, 우거왕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 마침내 한 무제는 동쪽으로는 (가) 을/를 정벌하고 현도군과 낙랑군을 설치했으며, 서쪽으로는 대완과 36국 등을 병합하여 흉노 좌우의 후원 세력을 꺾었다.
자료는 한 무제가 우거왕이 지키던 왕검성을 공격하고 낙랑군·현도군을 설치한 사실을 전하므로 (가)는 고조선(위만 조선)이다. 고조선은 왕 아래 상·대부·장군 등의 관직을 두어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동맹은 고구려, 신지·읍차는 삼한, 도둑에게 12배를 배상하게 한 법은 부여,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다.
“자네 들었는가? 백제의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셨다더군.”
“들었네. 우리 마립간께서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신다고 하네.”
제시된 대화는 백제 동성왕이 신라 소지 마립간에게 혼인을 청하여 이벌찬 비지의 딸을 맞이한 결혼 동맹(493)의 상황이다. 두 나라가 혼인으로까지 결속을 다진 것은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이 목숨을 잃은 사건(475)이 배경이 되었다. 금관가야 병합, 비담과 염종의 난 진압, 나당 동맹 성사는 모두 6세기 이후의 일이라 배경이 될 수 없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령하여 (가) 을/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사다함은 나이가 15~16세였는데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 (가) 사람들이 뜻하지 않은 병사들의 습격에 놀라 막아내지 못하였고, 대군이 승세를 타서 마침내 멸망시켰다.
자료는 진흥왕이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 멸망시킨 대가야(562)를 가리킨다. 대가야는 오늘날 경북 고령 지역을 근거로 성장하여 5세기 후반부터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으므로 그 과정을 조사하는 활동이 적절하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멸망 이후, 22담로는 백제, 3성 6부는 발해, 이사금은 신라와 관련된 주제다.

대화 속 전투는 당 태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백암성을 함락시킨 645년의 싸움이며, 그 뒤 안시성에서 고구려가 버텨 냈다. 연표에서 645년은 보장왕이 즉위한 642년과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사이에 놓인다.
(가)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으로 진입하여 항복해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 사람들을 보내 이를 쳐서 쫓아냈다. …… 당 황제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나)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려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살랐다.
(가)는 백제 멸망 직후 당이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은 660년의 상황이고, (나)는 나당 연합군이 왜의 수군을 격파한 663년 백강 전투다. 그 사이에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을 근거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며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황산벌 항전과 대야성 함락은 (가) 이전, 기벌포 전투와 안승의 보덕국왕 책봉은 (나) 이후의 일이다.

자료의 매신라물해는 일본 귀족이 신라에서 들어온 물품을 사들이며 작성한 문서로, 9주 5소경이 정비된 통일 신라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 신라는 촌락의 인구와 토지, 가축, 나무 등을 조사해 기록한 문서를 작성하고 이를 조세 수취의 근거로 삼았다. 벽란도 번성은 고려, 철의 낙랑군 수출은 변한, 우경 시작과 도시부 설치는 시기와 나라가 다르다.

정효 공주의 묘지에서 문왕을 ‘황상’이라 부른 것은 (가)가 발해임을 보여 준다. 발해는 문왕 때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두어 인재를 길렀다. 기인 제도와 광덕·준풍 연호는 고려, 정사암 회의는 백제, 집사부는 신라의 제도다.
왕이 구원을 요청하자,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1만 명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을 알고,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王京)에 침입하였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에 가서 연희를 즐기느라 적병이 이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
자료는 927년 견훤이 신라 수도를 습격하여 포석정에 있던 경애왕이 목숨을 잃은 상황이다. 이후 견훤이 세운 경순왕 김부는 935년 고려에 나라를 넘겼고, 왕건은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지방 세력을 관리하게 하였다. 김흠돌의 난, 장문휴의 등주 공격, 궁예의 태봉 개칭, 원종과 애노의 봉기는 모두 이보다 앞선다.

대화의 ‘이 시기’는 가지산문이 개창된 뒤 선종이 널리 퍼지고 범일이 굴산사를 세운 신라 하대다. 진골 귀족의 왕위 다툼으로 정치가 어지럽던 이 시기에 당에서 돌아온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개혁을 건의하였다. 원광과 자장은 신라 상대, 김대문과 김대성은 신라 중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11. 궁궐 안
과거 급제자 명단을 보며 말한다.
왕: 몇 해 전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지방에 각각 경학박사 1명과 의학박사 1명을 보냈는데, 결과가 어떠하오?
신하: 송승연, 전보인 등 박사들이 정성스레 가르쳐 성과가 있는 듯 하옵니다.
왕: 12목을 설치하고, 지방민에게도 학문을 권장하는 과인의 뜻에 부합하였소. 고생한 송승연에게 국자박사를 제수하고, 전보인에게 공복과 쌀을 하사하시오.
신하: 분부를 따르겠나이다.
지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고 12목을 설치한 왕은 고려 성종이다.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과거제 실시는 광종, 양현고는 예종, 국자감의 성균관 개칭은 충렬왕, 정계와 계백료서는 태조 때의 일이다.
- 왕이 명하였다. “도성 안의 백성들이 역질에 걸렸으니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치료하고, 시신과 유골은 거두어 비바람에 드러나지 않게 매장하라.”
- 중서성에서 아뢰었다. “지난해 관내 서도의 주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사창과 공해(公廨)의 곡식을 내어 경작을 원조하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는 의창을 열어 진휼하십시오.”
구제도감과 중서성, 의창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상황이다. 고려는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운영하여 백성의 생활을 돌보았다. 활인서와 향약집성방, 구황촬요는 조선의 시책이고,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 때 시행되었다.
병마사 박서는 김중온에게 성의 동서쪽을, 김경손에게는 성의 남쪽을 지키게 하였다. (가) 의 대군이 남문에 이르자 김경손은 12명의 용맹한 군사와 여러 성의 별초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 우별초가 모두 땅에 엎드리고 응하지 않자 김경손은 그들을 성으로 돌려 보내고 12명의 군사와 함께 나아가 싸웠다.
- 「고려사」 -
박서와 김경손이 귀주성에서 맞서 싸운 (가)는 1231년에 침입한 몽골이다. 고려는 몽골의 거듭된 침입에 맞서 최우의 주도로 이듬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서희의 담판은 거란, 별무반과 동북 9성은 여진, 6진 개척은 조선 세종 때의 일이다.
“몇 해 전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화폐를 유통시켜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편익을 꾀하였으나,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주현에 명령하여 주식점(酒食店)을 열고 백성들에게 화폐를 활용해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게 하여 그 이로움을 알게 하라.”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주식점을 열어 화폐 사용을 권장한 것은 고려 숙종 때의 일로, 의천의 건의가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고려는 해동통보와 함께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든 은병을 유통시켰는데 이를 활구라고 불렀다. 솔빈부의 말은 발해, 송방은 조선 후기, 청해진과 동시전은 신라의 일이다.

검색창에 들어갈 자료는 이규보가 고구려 시조의 생애를 노래한 장편 서사시로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동명왕편이다. 동명왕의 건국 과정을 영웅적으로 그려 낸 작품인 만큼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이 뚜렷하게 담겨 있다. 남북국이라는 용어는 발해고, 사초와 시정기 활용은 조선왕조실록, 단군 건국 이야기 수록은 삼국유사, 현존 최고의 역사서는 삼국사기다.
[기획전 안내문] 흙으로 빚은 푸른 보물
이번 기획전에서는 고려 시대 귀족 문화를 보여주는 비색의 순청자와 음각한 부분에 백토나 흑토를 채워 화려하게 장식한 상감 청자가 전시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관람 바랍니다.- 기간: 2022년 ○○월 ○○일 ~ ○○월 ○○일
- 장소: △△ 박물관





기획전은 고려 시대 귀족 문화를 보여 주는 비색의 순청자와 상감 청자를 다루므로 전시될 문화유산은 고려 청자다. 정답 자료는 어깨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잘록해지는 청자 매병으로, 푸른빛 유약 아래 표면 전체에 둥근 무늬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고 굽 위쪽에는 연꽃잎 모양의 띠가 둘러져 있다. 나머지 자료들은 뚜껑 달린 항아리나 회청색 자기 등으로 기획전의 주제와 맞지 않는다.
[첫 번째 장면]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전하, 네 가지 이유로 불가하옵니다.”
→ (가) →
[두 번째 장면]
“새 도읍이 정해졌으니 도감을 설치하고 심덕부 등을 판사로 임명하여 궁궐을 조성하게 하시오.”“명을 받들겠습니다.”
첫 장면은 1388년 요동 정벌 추진에 이성계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한 상황이고, 두 번째 장면은 1394년 한양 천도 직후 궁궐 조성을 명한 상황이다. 그 사이인 1391년 조준 등 신진 사대부의 건의로 과전법이 제정되어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홍문관 설치, 경국대전 완성, 연분9등법, 악학궤범 간행은 모두 조선 건국 이후 한참 뒤의 일이다.

이예는 세종 때 수십 차례 일본에 건너가 외교 문제를 처리하고 세견선의 규모를 정한 계해약조(1443) 체결에 기여한 인물이므로 (가)는 일본이다. 조선은 쓰시마를 토벌하는 한편 부산포·제포·염포의 삼포를 열어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는 교린 정책을 폈다. 하정사와 성절사는 명, 무역소 설치와 북평관은 여진과 관련된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오방의 풍토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데 각기 적당한 방법이 있다고 하셨다. 이에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기를, 주현의 나이든 농부들을 방문하여 농사지은 경험을 아뢰게 하시고 또 신(臣) 정초에게 그 까닭을 덧붙이게 하셨다. 중복된 것을 버리고, 요약한 것만 뽑아 한 편의 책으로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하였다.
정초 등이 각 지역의 농사 경험을 모아 농사직설을 편찬한 것은 세종 때의 일이므로 밑줄 그은 인물은 세종이다. 세종 때에는 효자와 충신, 열녀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실어 유교 윤리를 널리 알린 삼강행실도도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는 성종, 가례집람과 동몽선습, 성학집요는 조선 중기 이후의 저술이다.

추안급국안은 왕명으로 중죄인을 추국한 기록이며, 조옥이라 불리고 강상죄와 반역죄를 처결하며 판사·도사를 둔 (가)는 의금부다. 의금부는 국왕 직속의 특별 사법 기구로서 대역 사건과 강상 범죄를 직접 다루었다. 중종 때 사림의 건의로 폐지된 것은 소격서, 삼사의 하나는 홍문관, 서경권은 사간원·사헌부, 검서관 기용은 규장각의 일이다.

임진왜란 중 류성룡의 건의로 편성되어 직업 군인의 성격을 띤 상비군은 훈련도감이다. 훈련도감은 총을 다루는 포수와 창검을 쓰는 살수, 활을 쏘는 사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2군은 고려의 중앙군, 진도 용장성 항전은 삼별초, 북계·동계 배치는 고려 주진군, 화성 외영은 장용영에 해당한다.
(가) 왕에게 이괄 부자가 역적의 우두머리라고 고해바친 자가 있었다. 하지만 왕은 “반역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괄은 군영에 있던 장수들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
(나) 최명길을 보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도록 하였다. 왕이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기에 도보로 따르는 신하도 있었고 성안 백성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을 지나 왕의 가마가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가)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일으킨 난(1624)이고, (나)는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간 상황이다. 그 사이인 1627년 정묘호란 때 정봉수가 용골산성에서 의병을 모아 후금군에 맞섰다. 명량 대첩과 행주 대첩, 기축옥사, 인조반정은 모두 (가) 이전의 일이다.

의주에서 연경에 이르는 사행 경로와 만상의 활동이 나오므로 (가)는 청이다. 조선은 숙종 때 청과의 국경 분쟁을 정리하기 위해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삼았다. 박위의 정벌과 동평관, 회답 겸 쇄환사 파견은 일본, 쌍성총관부 공격은 원과 관련된다.
[전시 패널]
남편은 세상을 떴으나뱃속에 아기가 있었지요
⋮
포대기로 싼 갓난아기
장정으로 군적에 올려
문이 닳도록 찾아와
군포를 바치라고 독촉하네
⋮
“이것은 정민교의 서사시 ‘군정탄(軍丁歎)’입니다. 이 작품에 표현된 황구첨정 등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이 왕은 균역청을 설치하고 양역 제도를 개선하였습니다.”
죽은 사람과 갓난아기에게까지 군포를 물리는 폐단을 고치고자 균역청을 두고 균역법을 시행한 왕은 영조다. 영조는 경국대전 이후의 법령을 정리한 속대전을 편찬하여 통치 제도를 다시 세웠다. 금위영 창설은 숙종, 삼군부 부활은 흥선대원군, 초계문신제는 정조, 영정법은 인조 때의 일이다.
“조선 시대 직역(職役)을 맞히는 문제, 이제 마지막 힌트가 공개됩니다.”
[한국사 퀴즈]
| 1단계 힌트 | 단안(壇案)이라는 명부에 등록되었다. |
| 2단계 힌트 | 연조귀감에 연혁이 수록되었다. |
| 3단계 힌트 |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
| 4단계 힌트 | (가) |
단안이라는 명부에 오르고 연조귀감에 연혁이 실렸으며 지방 행정 실무를 맡은 직역은 향리다. 조선의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면서 이방·호방 등 6방에 나뉘어 실무를 처리하였다. 상피제 적용과 감사·방백 호칭은 파견된 지방관, 잡과 선발은 기술관, 공음전은 고려 귀족의 경제 기반이다.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수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기사 내용으로 보아 (가)는 천주교다. 천주교는 17세기 청을 다녀온 사신들이 한문 서학서를 들여오면서 학문인 서학으로 먼저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부터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미륵 신앙은 다른 계통,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동학, 박중빈은 원불교, 단군 숭배는 대종교와 관련된다.

답사 보고서의 (가)는 흠흠신서와 마과회통을 남기고 남양주 여유당에 살았던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절 경세유표를 지어 관제와 토지 제도 등 국가 제도 전반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였다. 성호사설은 이익, 양반전은 박지원, 의산문답은 홍대용, 북학의는 박제가의 저술이다.

만동묘를 철거한 뒤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던 시기는 흥선대원군 집권기다. 이 시기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삼아 강화도를 침략하여 신미양요(1871)를 일으켰다. 나선 정벌은 효종, 삼정이정청은 임술 농민 봉기 직후, 홍경래의 봉기와 신해통공은 그보다 앞선 일이다.

영상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를 시간 순서대로 다룬다. 전주성 점령과 우금치 패배 사이에는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맞서 다시 일어난 전봉준의 남접과 최시형의 북접이 논산에 집결한 일이 들어간다. 황토현 전투와 백산 봉기는 전주성 점령 이전이고, 삼례 집회와 최시형의 교주 승계는 봉기 이전의 일이다.
“전화 설비 가설 및 운영권을 가진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되더니 새로운 직업이 생기는군.”
“새로운 문물이 계속 들어오니 앞으로 더 많은 변화가 나타나겠군.”
〈모집 공고〉
전화를 연결해주는 교환수를 모집합니다.- 모집 인원: □□명
- 지원 자격: 목소리가 분명하고 신체가 튼튼한 자
모집 공고에 적힌 광무 6년은 1902년으로, 한성 전기 회사가 세워지고 전화 교환수라는 새 직업이 생겨난 대한 제국 시기다. 그 뒤 1905년에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이 개통되어 일본의 침략 통로로 이용되었다. 광혜원과 한성순보, 기기창, 우정총국은 모두 1902년보다 앞서 등장하였다.
박승환은 병대(兵隊)에 대한 해산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국가가 망하였는데도 일본인 하나를 죽이지 못하였으니 죽어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차마 제군들이 병대를 떠나도록 놓아둘 수 없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겠다.”라고 하면서 결국 자결하였다.
자료는 1907년 군대 해산 소식을 듣고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한 상황이다. 이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체결된 한일 신협약, 곧 정미 7조약의 부수 각서에 따라 군대 해산이 강행되면서 벌어졌다. 105인 사건과 초대 총독 부임은 국권 피탈 이후, 기유각서는 1909년, 일진회 성명은 1909년 말의 일이다.

고종실록에서 1895년 11월 16일 다음 날이 1896년 1월 1일이 된 것은 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을미개혁에서는 건양이라는 새 연호를 정하고 단발령과 종두법 시행 등을 함께 추진하였다. 지계아문 설립과 대한국 국제 반포는 광무개혁, 교정청 설치와 5군영의 2영 통합은 다른 시기의 일이다.

갤릭호를 타고 건너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호놀룰루에 터전을 잡았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포와라 불리던 하와이다.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을 중심으로 대조선 국민군단이 조직되어 군사 훈련을 하며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중광단과 신흥 무관 학교는 만주, 권업회와 한인 사회당은 연해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문 기사]
총독의 임용 범위를 확장하고, 지방 자치 제도를 실시한다. ……이로써 관민이 서로 협력 일치하여 조선에서 문화적 정치의 기초를 확립한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내세워도 이러한 통치 방식은 결국 우리 조선인을 기만하는 거야.”
기사는 총독의 임용 범위를 넓히고 지방 자치를 실시하겠다는 이른바 문화 통치의 방침을 전한다. 일제는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면서 무단 통치가 한계에 이르자 통치 방식을 겉으로만 바꾸었다.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과 황국 신민 서사는 민족 말살 통치기, 브나로드 운동과 노농 총동맹 결성은 문화 통치가 시작된 뒤의 일이다.

(가)는 임시 정부가 국무령제로 개편되며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한 1925년, (다)는 중일 전쟁 이후 일본군을 피해 창사에서 광저우로 청사를 옮긴 1938년의 일이다. (나)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한 대일 선전 성명서다. 따라서 작성 순서는 (가) → (다) → (나)가 된다.
검사: 폭탄을 구해 숨겨 놓은 이유가 무엇인가?
곽재기: 재작년 3월 이후로 조선 독립을 평화적으로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하이로 가서 육혈포와 폭탄을 구해 피로써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성우: 폭탄으로 고위 관리를 죽이고 중요 건물을 파괴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과 함께 (가) 을/를 조직한 이유이다.
- 1921년 6월 7일 밀양 폭탄 사건 공판 기록 -
밀양 폭탄 사건 공판 기록에서 김원봉과 함께 중국 지린성에서 조직했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1919년 결성된 의열단이다. 의열단은 1923년 신채호가 지은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의 직접 혁명을 내세웠다. 황무지 개간권 저지는 보안회, 삼균주의 건국 강령은 임시 정부, 이봉창 의거는 한인 애국단의 일이다.

국민 징용령이 공포된 1939년 이후는 일제가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하던 민족 말살 통치기다. 이 시기 일제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말단 조직으로 애국반을 만들어 배급과 상호 감시를 통해 한국인의 일상을 통제하였다. 헌병 경찰 제도와 회사령, 토지 조사 사업은 1910년대, 치안 유지법 제정은 1925년의 일이다.

오희영과 신송식이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충칭에서 창설된 부대에서 활동했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19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이다. 광복군은 미국 전략정보국과 협력하여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영릉가 전투는 조선혁명군, 팔로군 편제는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 자유시 이동은 대한독립군단과 관련된다.
우리는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직 민족 자결 원칙에 의하여 조국의 남북통일과 민주 독립을 촉진해야겠다. 우리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회는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의 제안에 의하여 실현되는 남북 정치 협상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아울러 그 성공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결의한다.
*관두: 가장 중요한 지점
자료는 김규식이 이끌던 민족자주연맹이 김구·김규식이 추진한 1948년 남북 협상을 지지한 결의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소련과 북한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막자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가 접근 가능한 지역, 곧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농지 개혁법과 보안법 파동, 허정 과도 정부의 개헌은 모두 정부 수립 이후의 일이다.
(가) 군사적 안전 보장의 입장에서 볼 때 태평양 지역의 정세 및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어떤 것인가. 태평양 지역 방위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 필리핀 군도로 이어진다.
(나)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락해 주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
(가)는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1950년 1월의 애치슨 선언이고, (나)는 1953년 10월 체결된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다. 그 사이인 1953년 6월 이승만 정부는 휴전 회담에 반발하여 거제도 등지의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였다. 좌우 합작 위원회 출범과 여수 순천 10·19 사건, 트루먼 독트린은 (가) 이전, 브라운 각서는 (나) 이후의 일이다.

벽보에 자유당과 민주당 후보가 함께 붙어 있고 현 대통령의 3선이 쟁점이었다는 점에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임을 알 수 있다. 이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은 조봉암은 이듬해 진보당을 창당해 평화 통일론을 내세웠으나, 이승만 정부는 1958년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정당을 해체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국민 방위군 사건 폭로와 반민특위 습격, 사사오입 개헌은 모두 이 선거보다 앞선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남북 학생 회담을 요구한 집회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통일 논의가 활발해진 1961년에 열렸다. 당시 장면 내각은 유엔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치르자는 평화 통일 정책을 내세워 학생들과 입장이 달랐다. 연표에서 1961년은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과 6·3 시위가 벌어진 1964년 사이에 놓인다.

사채 신고를 받아 그 상환을 동결시킨 긴급 명령은 1972년의 8·3 조치로, 경부 고속 도로를 개통한 박정희 정부가 발표하였다. 이 정부는 같은 해부터 중화학 공업 육성을 중심으로 하는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한미 자유 무역 협정은 노무현 정부, 신한 공사는 미군정, 최저 임금 위원회는 1980년대 후반, 금융 실명제는 김영삼 정부의 일이다.

박종철 고문 은폐 조작 폭로 장소와 6·10 국민 대회가 시작된 곳이 답사 지점으로 나오므로 (가)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다. 시민들은 전두환 정부의 4·13 호헌 조치에 맞서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켰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비상계엄 확대와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는 5·18 민주화 운동, 경무대 행진은 4·19 혁명, 3·1 민주 구국 선언은 유신 체제 때의 일이다.

뉴스는 경의선 복원 사업으로 지은 도라산역을 대통령이 미국 부시 대통령과 함께 찾은 2002년의 일로, 김대중 정부 시기에 해당한다. 이 정부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펴면서 2000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 회담을 열고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7·7 선언과 남북 기본 합의서는 노태우 정부, 이산가족 고향 방문은 전두환 정부, 남북 조절 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때의 일이다.
[역사 돋보기] 역사 속 왕의 호칭
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이름을 높여 부르는 호칭을 묘호라고 한다. 원칙적으로 나라를 세운 왕은 ‘조’를, 그 나머지는 ‘종’을 붙였다.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묘호를 쓴 왕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다. 고려 시대는 ㉡태조만 조의 묘호가 붙여졌지만, 조선 시대에는 다양한 이유로 ㉢정조처럼 조를 붙인 왕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처럼 조, 종을 붙이지 못한 왕들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연산군, ㉤광해군처럼 묘호를 받지 못하고 군으로 격하되어 불린 경우도 있었다.
자료는 묘호가 붙는 원칙과 그렇지 못한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목된 광해군은 중립 외교와 폐모살제를 빌미로 서인 세력이 일으킨 인조반정(1623)으로 폐위되었다. 중종반정(1506)으로 쫓겨난 왕은 연산군이므로 두 사건을 바꿔 말한 의견이 적절하지 않다.
“나는 방호별감 김윤후입니다.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충주산성을 방어할 때 (가) 의 신분 문서를 불태워 그들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나는 군국기무처의 총재 김홍집입니다. 신분 차별 폐지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여 (가) 에 관한 법을 폐지하였습니다.”
김윤후가 충주에서 신분 문서를 불태워 사기를 높였고 군국기무처가 관련 법을 폐지했다는 점에서 (가)는 노비다. 순조 1년(1801)에는 궁방과 중앙 관서에 소속되어 있던 공노비 6만여 명이 해방되어 양인으로 편입되었다. 득난이라 불린 것은 6두품, 향·부곡·소 거주민은 고려의 특수 행정 구역민, 봉수와 역졸은 신량역천, 통청 운동은 서얼의 움직임이다.

자료의 세시 풍속은 음력 3월 3일 중삼일을 가리키는 답청절로, 삼짇날이라고도 부른다. 이날에는 들에 나가 새로 돋은 풀을 밟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부쳐 먹었으므로 그 유래를 알아보는 활동이 알맞다. 칠석은 음력 7월 7일, 한식은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 동지는 한겨울,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모두 다른 날이다.
[답사 보고서]
- 주제: 우리 고장의 역사
- 날짜: 2022년 ○○월 ○○일
- 개관
금성산과 영산강을 끼고 있는 우리 고장은 삼한 시대부터 마한의 주요 지역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였고, 후삼국 시대에는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의 의기가 드높았던 지역이다. ‘전라도’라는 이름은 전주와 우리 고장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 목차
1. 마한 세력의 성장, 반남면 고분군
2. □□목(牧)의 관아 부속 건물
3.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도화선, □□역
금성산과 영산강을 끼고 있으며 반남면 고분군이 있고 ‘전라도’의 뒷 글자를 딴 고장은 나주다. 왕건은 궁예 휘하의 장수로서 수군을 이끌고 나주를 차지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인조의 항전은 남한산성, 유인석의 거병은 제천, 정문부의 북관대첩은 함경도, 국채 보상 운동의 시작은 대구다.

1946년 연합국 최고 사령부 문서에서 제주도·울릉도와 함께 일본의 통치 범위에서 제외된 우리나라 동쪽 끝 섬은 독도다. 독도는 안용복의 도일 활동, 1877년 태정관 문서, 울릉 군수의 관할을 정한 대한 제국 칙령, 러일 전쟁 중 일본의 불법 편입 등이 모두 얽혀 있는 곳이다. 반면 영국군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불법 점령한 섬은 독도가 아니라 거문도이므로 옳지 않은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