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61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61회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 약 8천 년 전 집터, 빗살무늬 토기와 덧무늬 토기, 이음낚시·그물추가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가)는 신석기 시대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조·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과 가축 사육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강가나 바닷가에 정착해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다. 동굴이나 막집 거주는 구석기, 고인돌·돌널무덤과 비파형 동검은 청동기, 명도전을 이용한 중국과의 교역은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칠판 - 한국사 발표 대회]
여러 나라의 성장: (가)
- 5월과 10월에 제천 행사를 지냈습니다.
- 신지, 읍차 등으로 불리는 지배자가 있었습니다.
- 목지국, 사로국, 구야국 등 여러 소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월과 10월의 제천 행사, 신지·읍차로 불린 지배자, 목지국·사로국·구야국 같은 소국의 존재는 모두 삼한의 특징이다. 삼한에는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어 죄인이 도망하여도 잡아가지 못하였는데, 이는 제사와 정치가 분리된 제정 분리 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연의 장수 진개의 공격은 고조선, 민며느리제는 옥저, 사출도는 부여, 단궁·과하마·반어피는 동예에 해당한다.
- 벼슬은 16품계가 있다. 좌평은 5명으로 1품, 달솔은 30명으로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이다. 6품 이상은 관(冠)을 은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하였다.
- 그 나라의 지방에는 5방이 있다. 중방은 고사성, 동방은 득안성, 남방은 구지하성, 서방은 도선성, 북방은 웅진성이라 한다.
- 『주서』 -
좌평 이하 16관등을 두고 6품 이상이 은제 관식을 사용하였으며 지방을 중방 고사성 등 5방으로 나누었다는 『주서』의 기록은 백제에 대한 것이다. 백제는 왕족인 부여씨와 사씨·연씨·협씨·해씨·진씨·국씨·목씨·백씨의 이른바 8성 귀족이 지배층을 이루었다. 골품제와 외화부·영객부는 신라, 제가 회의와 욕살·처려근지는 고구려의 제도이다.
[한국사 전자 사료관 검색 화면 - 고구려 왕대별 보기]
| 원년 |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다 |
| 10년 |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다 |
| 13년 | 후연을 공격하다 |
| 18년 |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다 |
즉위 원년에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였으며, 후연을 공격하고 왕자 거련(뒷날 장수왕)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치적이다. 광개토 대왕은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주 의식을 드러냈다. 태학 설립과 낙랑군 축출은 각각 소수림왕과 미천왕, 을파소 등용과 진대법은 고국천왕, 천리장성 축조는 영류왕 때의 일이다.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를 저술하고 무애가를 지어 정토 신앙을 퍼뜨려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가)는 신라의 승려 원효이다. 원효는 모든 존재가 한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종파 간의 대립을 조화시키려는 화쟁 사상을 주장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 건의와 걸사표는 자장·원광, 해동고승전은 고려의 각훈이 남긴 것이다.
연흥 2년에 여경[개로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렸다.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우호가 돈독하였는데, 고구려의 선조인 쇠[고국원왕]가 우호를 가벼이 깨트리고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우리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신의 선조인 수[근구수왕]는 군대를 정비하고 공격하여 쇠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다니, 이후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점점 강성해져 침략하고 위협하니 원한이 쌓였고 전쟁의 참화가 30여 년 이어졌습니다. …… 속히 장수를 보내 구원하여 주십시오."
- 『위서』 -
제시된 자료는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압박을 호소하며 군사를 요청한 국서이다. 고구려의 남진에 30여 년간 시달렸다고 호소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상황의 배경은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진 정책을 본격화한 것이다.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성왕의 관산성 전사, 황산벌 전투는 모두 이보다 뒤의 일이고 동성왕의 나제 동맹 강화는 개로왕 사후의 대응이다.
- (가)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가 12성과 3,500여 명의 백성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해 왔다. 왕이 연정토와 그를 따르는 관리 24명에게 의복·물품·식량·집을 주었다.
- (나)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다. 신라 군사가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고 말 3만여 필을 얻었는데, 남겨 놓은 병장기의 수도 그 정도 되었다.
(가)는 고구려 멸망 직전 대신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한 일(666년)이고, (나)는 나당 전쟁의 분수령이 된 매소성 전투(675년)이다. 두 사건 사이인 674년에 문무왕은 고구려 왕족 안승을 보덕왕으로 책봉하여 고구려 부흥 세력을 끌어안고 당에 맞서는 힘으로 삼았다. 대야성 함락(642), 나당 군사 동맹(648), 연개소문의 정변(642), 백강 전투(663)는 모두 (가) 이전의 일이다.
며칠 전에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난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으로 정했다더군.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모양이야.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나라 이름을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고 일으킨 반란은 822년의 일로,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데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이 대화 이후에 해당하는 것은 진성 여왕 때인 889년에 사벌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봉기이다. 거칠부의 국사 편찬,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 상대,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신문왕 때의 일로 모두 이전 시기이다.

공산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왕을 구하고 전사한 신숭겸을 기리는 대구 표충단이 소개되고 있으므로, 밑줄 그은 '왕'은 고려 태조 왕건이다. 태조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빌려주는 흑창을 설치하였다. 12목에 지방관 파견은 성종, 개경 나성 축조는 현종, 양현고 운영은 예종, 쌍기의 건의에 따른 과거제 시행은 광종 때의 일이다.
#36. 궁궐 안
왕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대문예에게 말하고 있다.
왕: 흑수 말갈이 몰래 당에 조공하였으니, 이는 당과 공모하여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 군대를 이끌고 가서 흑수 말갈을 정벌하라.
대문예: 당에 조공하였다 하여 그들을 바로 공격한다면 이는 당에 맞서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당과 원수를 지면 멸망을 자초할 수 있습니다.
흑수 말갈이 당에 조공한 것을 문제 삼아 동생 대문예에게 정벌을 명한 왕은 발해 무왕(대무예)이다. 무왕은 당이 흑수 말갈과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려 하자 장문휴에게 수군을 주어 당의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9서당 10정과 외사정은 통일 신라, 사비 천도와 남부여 개칭은 백제 성왕, 동모산에서의 건국은 고왕(대조영)의 일이다.

신라 왕족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철원을 도읍으로 태봉을 세운 (가)는 궁예이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미륵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며 신하와 백성을 억압해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거란 적대와 발해 유민 포용은 고려 태조, 신라 공격으로 경애왕을 죽게 한 것은 견훤, 노비안검법은 광종, 청해진 설치는 장보고와 관련된다.
[문학으로 만나는 한국사]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이 시의 제목은 '송인(送人)'으로, 고려 시대의 문인 정지상이 서경을 배경으로 지은 작품이다. 서경 출신인 그는 묘청 등과 함께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개경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중 이 사건이 일어나자 김부식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 918 | 1019 | 1126 | 1270 | 1351 | 1392 | |||||
| (가) | (나) | (다) | (라) | (마) | ||||||
| 고려 건국 | 귀주 대첩 | 이자겸의 난 | 개경 환도 | 공민왕 즉위 | 고려 멸망 |
정지상은 묘청 등과 함께 서경 천도를 주장하다가 개경 세력과 대립하였고, 서경 천도 운동이 좌절된 뒤 일어난 묘청의 난(1135) 때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따라서 밑줄 그은 '이 사건'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으로, 연표에서 이자겸의 난(1126)과 개경 환도(1270) 사이 구간에 해당한다.
- (가) 최충헌 형제가 왕을 협박하여 창락궁에 유폐하고 태자 왕숙은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 (나) 유경이 최의를 죽인 뒤, 왕에게 아뢰어 정방을 편전 옆에 두어 인사권을 장악하고, 국가의 주요 사무를 모두 결정하였다.
(가)는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하고 창락궁에 유폐한 1197년의 일이고, (나)는 유경 등이 최의를 제거하여 최씨 무신 정권이 무너진 1258년의 일이다. 두 사건 사이인 1198년에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이 개경에서 노비들을 모아 신분 해방을 내건 봉기를 모의하였다가 발각되었다. 강조의 정변(1009)은 이전이고, 김보당의 난(1173)과 조위총의 난(1174)도 최충헌 집권 이전이며 삼별초의 진도 항전(1270)은 (나) 이후이다.

왕족 왕온의 부인이었던 수령옹주의 딸이 공녀로 원에 끌려갔다는 묘지명의 내용으로 보아 밑줄 그은 '이 시기'는 원 간섭기이다. 이 시기 고려에는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되었다가 내정 간섭 기구로 남은 정동행성이 있었고, 그곳의 이문소가 사법권을 행사하며 고려 정치에 관여하였다. 농사직설과 삼강행실도는 조선 세종,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백운동 서원은 조선 중종 때의 일이다.
- (가) 은/는 화엄 사상의 요지를 정리한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였다. 또한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였고, 현세의 고난에서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강조하였다.
- (나) 은/는 귀법사의 주지로서, 왕명에 따라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향가인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어 화엄 사상을 대중에게 전파하였다.
- (다) 은/는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였다. 31세에 송으로 건너가 고승들과 불법을 토론하고 불교 서적을 수집하여 귀국하였다. 국청사를 중심으로 천태종을 창시하였으며, 교선 통합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 (라) 은/는 12세에 출가하였다. 수행상의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천태의 교리에 의지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법화 신앙을 바탕으로 강진 만덕사에서 백련 결사를 결성하였다.
(가)는 화엄일승법계도를 짓고 부석사를 세운 의상, (나)는 귀법사 주지로 보현십원가를 지은 균여, (다)는 문종의 아들로 천태종을 창시하고 교관겸수를 제창한 의천, (라)는 강진 만덕사에서 백련 결사를 일으킨 요세이다. 의천은 송·요·일본에서 모은 불교 주석서를 정리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교장을 간행하였다. 유불 일치설은 혜심,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는 지눌, 가지산문 개창은 도의와 관련된다.
이 작품은 이규보가 예성강 하구의 정경을 묘사한 시입니다. 이곳에 있던 벽란도는 (가) 의 국제 무역항으로 송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왕래할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조수가 들고나니
오고 가는 배의 꼬리가 이어졌구나
아침에 이 누각 밑을 떠나면
한낮이 되지 않아
돛대는 남만(南蠻)에 이르도다
사람들은 배를 보고
물 위의 역마라고 하지만
바람처럼 달리는 준마도
이보다 빠르지는 못하리
이규보가 예성강 하구의 번성을 노래하였고 그곳의 벽란도가 송과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든 국제 무역항이었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고려이다. 고려 숙종 때에는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든 은병을 주조하였는데, 이를 활구라고 불렀다. 송상의 송방은 조선 후기, 동시전은 신라 지증왕, 상품 작물 재배는 조선 후기, 3포 개항은 조선 세종 때의 일이다.
김윤후가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었는데 (가) 의 군대가 쳐들어 와 충주성을 70여 일간 포위하였다. 군량이 거의 바닥나자 김윤후가 군사들에게 "만약 힘내 싸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내리겠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관노비의 문서를 불태우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니 적의 기세가 꺾여 남쪽으로 침략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충주산성 방호별감 김윤후가 관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70여 일의 포위를 견뎌 낸 것은 몽골의 5차 침입 때의 일이므로 (가)는 몽골이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최우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동북 9성 축조는 여진, 쓰시마 정벌은 왜구, 서희의 담판은 거란, 요동 정벌 추진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대한 대응이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나전 국화 넝쿨무늬 합을 소개하면서 밑줄 그은 '문화유산'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고려 시대의 문화유산을 찾는 문항이다. 정답으로 제시된 법주사 팔상전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으로 고려의 문화유산이 아니다. 나머지 보기는 모두 고려 시대에 조성된 문화유산이다.
★ 역사 인물 다큐멘터리 기획안 ★
화약 무기 연구의 선구자, ○○○
1. 기획 의도
중국의 군사 기밀이었던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해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의 자체 생산에 성공한 ○○○. 그의 활동을 통해 국방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되새겨 본다.
2. 장면
#1. 중국인 이원에게 염초 제조법을 배우다
#2. (가)
#3. 나세, 심덕부 등과 함께 진포에서 왜구를 크게 격퇴하다
⋮
중국인 이원에게 염초 제조법을 배워 화약의 자체 생산에 성공하고 나세·심덕부와 함께 진포에서 왜구를 격퇴한 인물은 고려 말의 최무선이다. 그는 화약과 화포를 국가가 직접 만들도록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여 1377년 이를 관철시켰고, 여기서 만든 화포로 진포 대첩을 이끌었다. 신기전과 화차는 조선 세종, 불랑기포를 이용한 평양성 탈환과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나선 정벌은 조선 효종 때의 일이다.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장악원에 소장된 의궤와 악보를 새로이 교감하여 악학궤범을 완성하였습니다.
예조 판서 성현을 비롯하여 편찬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도록 하라.
성현 등이 장악원의 의궤와 악보를 교감하여 악학궤범을 완성하였다는 대화이므로 등장하는 왕은 조선 성종이다. 성종 대에는 각 도의 지리와 풍속, 인물 등을 수록한 관찬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계미자 주조는 태종, 동의보감 완성은 광해군, 속대전 간행은 영조, 칠정산 제작은 세종 때의 일이다.
- (가) 윤필상, 유순 등이 폐비(廢妃) 윤씨의 시호를 의논하며 "시호와 휘호를 함께 의논하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시호만 정하는 것이 합당하겠다."라고 하였다. ……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폐비할 때 의논에 참여한 재상, 궁궐에서 나갈 때 시위한 재상, 사약을 내릴 때 나가 참여한 재상 등을 승정원일기에서 조사하여 아뢰라."라고 하였다.
- (나) 의정부에 하교하기를 "조광조 등이 서로 결탁하여, 자신들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신들과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해서 …… 후진을 유인하여 궤격(詭激)*이 버릇되게 하고, 일을 의논할 때에도 조금만 이의를 세우면 반드시 극심한 말로 배척하여 꺾어서 따르게 하였다. …… 조광조·김정 등을 원방(遠方)에 안치하라."라고 하였다.
*궤격(詭激): 언행이 정상을 벗어나고 격렬함
(가)는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의 시호를 정하고 폐비에 관여한 재상들을 조사하게 한 일로 갑자사화(1504)로 이어진 상황이고, (나)는 조광조와 김정 등을 유배 보내라는 하교로 기묘사화(1519)에 해당한다. 두 사건 사이인 1506년에 성희안·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웠다. 단종 복위 시도(1456)와 무오사화(1498)는 (가) 이전, 을사사화(1545)와 이괄의 난(1624)은 (나) 이후의 일이다.
[역사 용어 해설]
(가)
1. 개요
조선 시대에 언론 활동, 풍속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을 관장하던 기구이다. 대사헌, 집의, 장령, 감찰 등의 직제로 구성되어 있다.
2. 관련 사료
건국 초기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설치하였다. …… 『경국대전』에는 "정사를 논평하고,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허위를 금지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라고 하였다.
- 『순암집』 -
언론 활동과 풍속 교정, 백관에 대한 규찰·탄핵을 맡고 대사헌·집의·장령·감찰의 직제로 구성된 (가) 기구는 사헌부이다. 사헌부는 사간원과 함께 양사를 이루어 5품 이하 관리를 임명할 때 그 자격을 심사해 동의하는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내각일력은 규장각, 화폐와 곡식의 회계는 조선의 호조, 은대·후원이라는 별칭은 승정원, 임진왜란 이후 국정 총괄은 비변사에 해당한다.
- (가) 임금이 궐내에 있던 기름 먹인 장막을 허적이 벌써 가져갔음을 듣고 노하여 이르기를, "궐내에서 쓰는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것은 한명회도 못하던 짓이다."라고 하였다. …… 임금이 허적의 당파가 많아 기세가 당당하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제거하고자 결심하였다.
- (나) 비망기를 내려, "국운이 안정되어 왕비가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장씨의 왕후 지위를 거두고 옛 작호인 희빈을 내려 주되, 세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는 폐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시열은 산림의 영수로서 나라의 형세가 험난한 때에 감히 원자(元子)의 명호를 정한 것이 너무 이르다고 하였으니, 삭탈 관작하고 성문 밖으로 내쳐라. 반드시 송시열을 구하려는 자가 있겠지만, 그런 자는 비록 대신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는 허적의 유악 사용을 문제 삼아 남인을 제거하기로 한 경신환국(1680), (나)는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장씨가 희빈으로 강등된 갑술환국(1694), (다)는 원자 명호 문제로 송시열을 삭탈관작한 기사환국(1689)이다. 모두 숙종 대의 환국으로, 일어난 순서대로 배열하면 (가) - (다) - (나)가 된다.

봉림 대군과 인평 대군 등이 강화로 피란하고 국왕과 세자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강도일기의 내용으로 보아 밑줄 그은 '전란'은 병자호란(1636)이다. 이때 임경업은 의주의 백마산성을 지키며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정문부의 길주 의병과 김시민의 진주 대첩은 임진왜란, 강홍립의 사르후 참전은 광해군 대의 파병, 최윤덕의 이만주 정벌은 세종 때의 일이다.
[역사 신문] 제△△호 / ○○○○년 ○○월 ○○일
거상(巨商) 임상옥, 북경에서 인삼 무역으로 큰 수익
연행사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간 만상(灣商) 임상옥이 인삼 무역으로 큰 수익을 거두었다. 북경 상인들이 불매 동맹을 통해 인삼을 헐값에 사려 하자, 그는 가져간 인삼 보따리를 태우는 기지를 발휘해 북경 상인에게 인삼을 높은 가격에 매각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은 것이다.
연행사를 따라 북경에 가 인삼 무역으로 큰 이익을 남긴 만상 임상옥의 활동을 다룬 기사이므로 조선 후기의 상황이다. 조선 후기에는 왜관에서의 무역이 활발하여 동래의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과 인삼·은 등을 거래하였다. 삼한통보·해동통보는 고려 숙종, 솔빈부의 말은 발해, 당항성·영암의 번성은 통일 신라, 경시서의 시전 감독은 고려·조선 전기의 일이다.

수원 화성과 장용영 운영을 위한 둔전에 물을 대던 축만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주변에 심은 노송지대, 순조가 아버지의 효심을 기려 세운 지지대비를 답사한다고 하였으므로 (가) 왕은 정조이다. 정조는 1791년 신해통공을 단행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허용하였다. 경기도 대동법은 광해군, 균역법은 영조, 계해약조는 세종, 직전법은 세조 때의 일이다.
진주 안핵사 박규수에게 하교하기를, "얼마 전에 있었던 진주의 일은 전에 없던 변괴였다. 관원은 백성을 달래지 못하였고, 백성은 패악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다. 누가 그 허물을 책임져야 하겠는가. 신중을 기하여 혹시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처벌 받는 일이 없게 하라. 그리고 포리(逋吏)*를 법에 따라 처벌할 경우 죄인을 심리하여 처단할 방법을 상세히 구별하라."라고 하였다.
*포리(逋吏): 관아의 물건을 사사로이 써버린 아전
진주에서 일어난 변괴를 수습하기 위해 박규수를 안핵사로 보냈다는 하교이므로 이 사건은 1862년의 임술 농민 봉기이다. 정부는 봉기의 원인이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에 있다고 보아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 남접과 북접의 연합은 동학 농민 운동, 우정총국 축하연은 갑신정변, 윤원형 일파가 주도한 시기는 명종 대이다.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풍속화·산수화·인물화에 두루 뛰어났고 노년에 추성부도를 남긴 (가)는 단원 김홍도이다. 정답 그림은 마당에서 볏단을 개상에 내리쳐 벼를 떠는 일꾼들과, 그 위쪽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긴 담뱃대를 문 마름을 함께 담은 「타작」으로, 김홍도의 대표적인 풍속화이다. 나머지 보기는 김홍도가 아닌 다른 화가들의 작품이다.
- (가) 우리 해동의 삼국도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책을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이 늙은 신하에게 편찬하도록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이르시기를, “삼국은 중국과 통교하였으므로 『후한서』나 『신당서』에 모두 삼국의 열전이 있지만, 상세히 실리지 않았다. 우리의 옛 기록은 빠진 사실이 많아 후세에 교훈을 주기 어렵다. 그러므로 뛰어난 역사서를 완성하여 물려주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 (나) 삼가 삼국 이후의 여러 역사서를 모으고 중국의 역사서에서 가려내어 연도에 따라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범례는 『자치통감』에 의거하였고, 『자치통감강목』의 취지에 따라 번잡한 것은 줄이고 요령만 남겨두도록 힘썼습니다. 삼국이 서로 대치한 때는 삼국기라고 하였고, 신라가 통합한 시대는 신라기라고 하였으며, 고려 시대는 고려기라 하였고, 삼한 이전은 외기라고 하였습니다.
- (다) 옛 성인은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켰고 인의로 가르침을 폈으니 괴력난신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고, 그러한 후에야 제왕의 지위를 얻고 대업을 이루었다. ……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고 해서 무엇이 괴이하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책 첫머리에 기이편이 실린 까닭이다.
- (라)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살면서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살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살면서 신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삼국이다. 그러니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니 김씨가 그 남쪽 땅을 차지하고 대씨가 그 북쪽 땅을 차지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한다.
<보 기>
- ㄱ. (가) -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기전체 형식을 저술하였다.
- ㄴ. (나) -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실록청에서 편찬하였다.
- ㄷ. (다) - 불교사를 중심으로 민간 설화 등을 수록하였다.
- ㄹ. (라) -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하였다.
- (가) 우리 해동의 삼국도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책을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이 늙은 신하에게 편찬하도록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이르시기를, “삼국은 중국과 통교하였으므로 『후한서』나 『신당서』에 모두 삼국의 열전이 있지만, 상세히 실리지 않았다. 우리의 옛 기록은 빠진 사실이 많아 후세에 교훈을 주기 어렵다. 그러므로 뛰어난 역사서를 완성하여 물려주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 (나) 삼가 삼국 이후의 여러 역사서를 모으고 중국의 역사서에서 가려내어 연도에 따라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범례는 『자치통감』에 의거하였고, 『자치통감강목』의 취지에 따라 번잡한 것은 줄이고 요령만 남겨두도록 힘썼습니다. 삼국이 서로 대치한 때는 삼국기라고 하였고, 신라가 통합한 시대는 신라기라고 하였으며, 고려 시대는 고려기라 하였고, 삼한 이전은 외기라고 하였습니다.
- (다) 옛 성인은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켰고 인의로 가르침을 폈으니 괴력난신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고, 그러한 후에야 제왕의 지위를 얻고 대업을 이루었다. ……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고 해서 무엇이 괴이하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책 첫머리에 기이편이 실린 까닭이다.
- (라)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살면서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살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살면서 신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삼국이다. 그러니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니 김씨가 그 남쪽 땅을 차지하고 대씨가 그 북쪽 땅을 차지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그러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한다.
(가)는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 (나)는 삼국부터 고려까지를 편년체로 정리한 동국통감, (다)는 기이편을 책 첫머리에 둔 일연의 삼국유사, (라)는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내세운 유득공의 발해고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해 본기·열전·지·연표를 갖춘 기전체로 서술되었고,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에 두고 단군 신화를 비롯한 민간 설화와 향가를 폭넓게 실었다.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실록청에서 편찬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이고, 고조선부터 고려까지를 편년체로 정리한 것은 동국통감이어서 발해고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어재연 장군의 부대가 광성보에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1871년의 신미양요이다. 미군이 물러난 뒤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과 문수산성 항전(병인양요), 신유박해(1801),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은 모두 신미양요 이전의 일이다.
- (가)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리하여 판결한다. …… - (나) 제1관 앞으로 대조선국 군주와 대미국 대통령 및 그 인민은 각각 모두 영원히 화평하고 우애 있게 지낸다. ……
제5관 …… 미국 상인과 상선이 조선에 와서 무역을 할 때 입출항하는 화물은 모두 세금을 바쳐야 하며, 세금을 거두는 권한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행사한다. ……
(가)는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면서 일본에 영사 재판권을 인정한 강화도 조약(1876), (나)는 조선의 관세 자주권을 명시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이다. 두 조약 사이인 1880년에 정부는 개화 정책을 총괄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아래 12사를 두었다. 공사 노비법 혁파와 23부 개편은 갑오개혁, 건양 연호는 을미개혁, 한성 전기 회사 설립(1898)은 대한 제국 시기의 일이다.
발신: 조선 주재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수신: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달 23일 오후 5시 성난 군중 수백 명이 갑자기 공사관을 습격하여 돌을 던지고 총을 쏘며 방화함. 전력으로 방어한 지 7시간이 지났지만 원병이 오지 않았음. 한쪽을 돌파하여 왕궁으로 가려 해도 성문이 열리지 않았음. …… 성난 군중이 왕궁 및 민태호와 민겸호의 집도 습격했다고 들었음. …… 교관 호리모토 외 8명의 생사는 알 수 없음.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공사관이 습격당하고 군중이 왕궁과 민겸호의 집까지 습격했다고 본국에 보고한 전문이므로, 이 사건은 1882년의 임오군란이다. 임오군란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급료와 대우에서 차별받던 구식 군인들이 13개월 만에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전주 화약과 김기수의 수신사 파견,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다른 사건에 해당한다.

호가 한힌샘이고 독립신문사 교보원으로 일하며 보자기에 책을 넣어 다녀 '주보따리'로 불린 (가)는 국어학자 주시경이다. 주시경은 1907년 학부 안에 설치된 국문 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석영 등과 함께 국문의 정리와 표기법 통일을 연구하였다. 조선어 학회 사건 피해는 이극로·최현배 등, 한국통사는 박은식, 사민필지는 헐버트, 여유당전서 간행과 조선학 운동은 정인보·안재홍 등과 관련된다.
우리나라가 채무를 지고 우리 백성이 채노(債奴)*가 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 대황제 폐하께서 진 외채가 1,300만 원이지만 채무를 청산할 방법이 없어 밤낮으로 걱정하시니, 백성된 자로서 있는 힘을 다하여 보상하려고 해도 겨를이 없습니다. …… 우리 동포는 빨리 단체를 결성하여 열성적으로 의연금을 내어 채무를 상환하고 채노에서 벗어나, 머리는 대한의 하늘을 이고, 발은 대한의 땅을 밟도록 해 주시기를 눈물을 머금고 간절히 요구합니다.
*채노(債奴): 빚을 갚지 못해 노비가 된 사람
대황제가 진 외채 1,300만 원을 국민의 의연금으로 갚자고 호소하는 취지서이므로 이 민족 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이다.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황성신문·제국신문 등 당시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모금을 주도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치안 유지법 적용은 1925년 이후, 백정 차별 철폐는 형평 운동, 독립문 건립 모금은 독립 협회, 자작회·토산 애용 부인회는 물산 장려 운동과 관련된다.

재무를 총괄한 전덕기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이고 105인 사건으로 양기탁·이승훈 등이 형을 선고받았으며 대성 학교가 언급되었으므로 밑줄 그은 '이 단체'는 신민회이다. 신민회는 계몽 서적과 교과서를 보급하기 위해 평양과 대구 등에 태극 서관을 운영하였고, 자기 회사를 세워 민족 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정우회 선언의 영향으로 결성된 것은 신간회, 조선 혁명 선언은 의열단,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는 보안회, 중추원 개편을 통한 의회 설립 추진은 독립 협회의 활동이다.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 조사 사업을 진행하던 시기에 작성된 지적 원도를 소개하고 있으므로 밑줄 그은 '시기'는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이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 태형령을 제정하여 헌병 경찰이 한국인에게만 태형을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경성 제국 대학 설립(1924)과 근우회 창립(1927)은 1920년대, 보빙사 파견(1883)과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1887)은 개항기의 일이다.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활동을 폈고 총사령이 박상진이며 상덕태상회를 비밀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는 데서 (가)는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 광복회임을 알 수 있다. 대한 광복회는 이전의 복벽주의 단체들과 달리 공화정체의 국민 국가 수립을 목표로 내걸었다.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은 대한 자강회, 파리 강화 회의 청원서는 신한청년당·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내 진공 작전은 한국 광복군, 만민 공동회는 독립 협회와 관련된다.

앨버트 테일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견해 외신으로 알리고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해 보도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3·1 운동이다. 3·1 운동으로 무단 통치의 한계를 확인한 일제는 통치 방식을 바꾸어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신간회의 진상 조사단 파견과 한일 학생 충돌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순종 인산일 만세 시위와 사회주의자 사전 검거는 6·10 만세 운동에 해당한다.

임시 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삼권 분립에 기초한 헌법 제정에 기여하고 국무총리·주석을 지냈으며 상하이를 떠나 이동하는 과정을 함께했다는 이동녕의 설명으로 보아 (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임시 정부는 미국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 등이 외교 활동을 펴게 하였고, 만주 단둥의 이륭양행에 교통국을 설치해 국내와 연락하며 자금과 정보를 주고받았다. 만세보 발행은 천도교, 신흥 강습소 설립은 신민회·서간도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이다.

일제가 미국·영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만들어진 쌀 공출 선전 포스터를 소개하고 있으므로 밑줄 그은 '시기'는 태평양 전쟁이 벌어진 1940년대 전반이다. 일제는 1944년 여자 정신 근로령을 공포하여 한국인 여성을 군수 공장 등에 강제 동원하였다. 화폐 정리 사업은 1905년, 미쓰야 협정은 1925년, 암태도 소작 쟁의는 1923~1924년, 회사령 공포는 1910년의 일이다.
[○○○ 한국 근대사 강의실 - 과제 제출방]
■ 한국 근대사 조별 과제 안내
일제 강점기 종교계의 활동을 주제로 보고서를 작성한 후 제목과 함께 게시판에 올려주세요.
※ 과제 마감일은 10월 22일입니다.
| 번호 | 제목 |
| 1 | 1조 - 개신교, (가) |
| 2 | 2조 - 대종교, (나) |
| 3 | 3조 - 원불교, (다) |
| 4 | 4조 - 천도교, (라) |
| 5 | 5조 - 천주교, (마) |
일제 강점기 종교계의 활동을 조별로 정리하는 과제이므로 각 종교의 대표적 활동을 짝지어야 한다.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저축 조합을 만들어 간척 사업을 벌이고 허례허식 폐지와 근검절약을 내건 새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단군 숭배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는 대종교, 의민단 조직은 천주교, 배재 학당 설립은 개신교, 어린이날 제정과 소년 운동은 천도교의 활동이다.
조선 민족 혁명당 창립 제8주년 기념 선언
우리는 중국의 난징에서 5개 당을 통합하여 전체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당인 조선 민족 혁명당을 창립하였다. …… 아울러 중국과 한국의 연합 항일 진영을 건립하여야 했다. …… 이 때문에 우리는 1938년 (가) 을/를 조직하고 조선의 혁명 청년들을 단결시켜 장제스 위원장의 영도 아래 직접 중국의 항전에 참가하였고, 각 전쟁터에서 찬란한 전투 성과를 만들어냈다. …… 지난해 가을 (가) 와/과 한국 광복군의 통합 편성을 기반으로 전 민족의 통일을 성공적으로 구현하였다.
조선 민족 혁명당이 1938년에 조직하였고 뒤에 한국 광복군에 통합 편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가) 부대는 조선 의용대이다. 조선 의용대는 김원봉·윤세주 등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중국 관내에서 창설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였다. 자유시 참변은 대한 독립군단,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 독립군, 동북 항일 연군으로의 개편은 만주의 항일 유격대, 청산리 전투는 북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군의 활동이다.

김약연이 세운 명동 학교,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 윤동주가 자란 용정촌을 답사한다고 하였으므로 (가) 지역은 북간도이다. 북간도에서는 대종교 계열의 중광단이 발전한 북로 군정서가 조직되어 김좌진의 지휘 아래 청산리 대첩 등 독립 전쟁을 이끌었다. 권업회는 연해주, 이봉창 의거는 일본 도쿄, 대조선 국민군단은 하와이, 2·8 독립 선언은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활동이다.

서윤복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뒤 열린 환영회에 하지 중장 등 군정청 인사가 참석하였다는 기사이므로, 밑줄 그은 '군정청'이 있었던 시기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까지의 미군정기이다. 미군정은 1946년 신한 공사를 설립하여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 재산과 농지를 관리하게 하였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1953),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 반민 특위 설치(1948년 10월), 보안법 파동(1958)은 모두 이후의 일이다.

대성동 마을이 정전 협정 체결 직후 비무장 지대에 조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가) 전쟁은 6·25 전쟁이다. 옳지 않은 것을 고르는 문항인데, 애치슨 선언은 1950년 1월 미국이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한다고 밝힌 것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다. 부산 임시 수도 결정,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흥남 철수, 국민 방위군 사건 폭로는 모두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이다.

정부와 여당인 민주 공화당이 3선 개헌을 추진하고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 세력이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결성했다고 하였으므로, 사진 속 사건은 1969년의 3선 개헌 반대 운동이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1972년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의 일부 효력을 정지하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 내각 책임제 정부 출범(1960)과 경향신문 폐간(1959), 국가 재건 최고 회의 구성(1961), 진보당 사건(1958)은 모두 이전의 일이다.
전국의 언론인 여러분!
지금 광주에서는 젊은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를 질서 유지, 진압이라는 명목 아래 저 잔인한 공수 부대를 투입하여 시민과 학생을 무차별 살육하였고 더군다나 발포 명령까지 내렸던 것입니다. …… 그러나 일부 언론은 순수한 광주 시민의 의거를 불순배의 선동이니, 폭도의 소행이니, 난동이니 하여 몰아부치고만 있습니다. …… 이번 광주 의거를 몇십 년 뒤의 '사건 비화'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로 만들지 않기 위해, 사실 그대로 보도하여 주시기를 수많은 사망자의 피맺힌 원혼과 광주 시민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공수 부대가 투입되어 광주의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진압하고 발포 명령까지 내렸음을 폭로하며 언론의 정확한 보도를 호소하는 성명서이므로, 이 민주화 운동은 1980년의 5·18 민주화 운동이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허정 과도 정부 출범과 3·15 부정 선거 항의는 4·19 혁명,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는 6·3 시위, 호헌 철폐·독재 타도 구호는 6월 민주 항쟁에 해당한다.
오늘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이 되게 되었습니다. …… 한국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시장 경제 체제의 장점을 살리는 경제 개발 전략을 추진해 왔습니다. 이를 통해 폐허 속에서 한 세대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이 되었다고 밝힌 연설이므로 이는 1996년 가입 당시, 곧 김영삼 정부 시기의 일이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 대통령 긴급 재정 경제 명령으로 금융 실명제를 전격 실시하여 모든 금융 거래를 실명으로 하도록 하였다. 수출 100억 달러 달성(1977)은 박정희 정부, 개성 공단과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은 김대중 정부, 한미 자유 무역 협정 체결(2007)은 노무현 정부 때의 일이다.

정주영의 소 떼 방북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되었다는 보도이므로 이 뉴스가 나온 때는 1998년, 곧 김대중 정부 시기이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평양에서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열고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남북 조절 위원회는 박정희 정부, 유엔 동시 가입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노태우 정부, 이산가족 최초 교환 방문(1985)은 전두환 정부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