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62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62회

제시된 자료는 사유 재산과 계급이 발생한 (가) 시대, 곧 청동기 시대의 문화상품 공모 포스터로 민무늬 토기·비파형 동검·고인돌을 소재로 삼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가 보급되어 반달 돌칼로 이삭을 거두었다. 동굴이나 막집 거주는 구석기 시대,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한 옷 제작은 신석기 시대의 모습이고, 철제 농기구 제작과 우경의 일반화는 그보다 뒤의 일이다.

쑹화강 유역에서 성장하였고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으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기록이 있는 나라는 부여이다. 부여는 왕 아래 마가·우가·저가·구가 등 여러 가(加)가 각각 사출도라는 별도의 행정 구역을 다스렸다. 정사암 회의는 백제, 책화는 동예, 범금 8조는 고조선, 천군과 소도는 삼한의 풍속이다.

해반천을 따라 봉황동 유적·수로왕릉·대성동 고분군·구지봉·파사석탑을 답사하는 경로이므로 (가)는 김해에 자리했던 금관가야이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덩이쇠를 만들어 화폐처럼 사용하고 낙랑·왜 등에 수출하였다. 한 무제의 공격으로 멸망한 나라는 고조선, 민며느리제는 옥저, 골품제는 신라, 진대법은 고구려와 관련된다.
〈다큐멘터리 기획안〉
위기에 빠진 고구려를 구하라!
◈ 기획 의도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의 위기 극복 노력을 살펴본다.
◈ 구성
1부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다.
2부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다.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 뒤 즉위하여 전진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운 왕은 고구려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고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다졌다. 평양 천도는 장수왕, 병부와 상대등 설치는 신라 법흥왕, 22담로 왕족 파견과 고흥의 서기 편찬은 백제의 일이다.






2009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금제 사리봉영기가 발견되어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세웠음이 밝혀진 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다. 이 발견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서동 왕자와 선화 공주 설화의 진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답에 해당하는 사진은 목탑 양식을 본떠 여러 층의 옥개석을 얹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 (가) 왕은 당과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 (나) 검모잠이 국가를 부흥하려고 하여 당을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승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병력을 내어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가)는 계백의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군에 패한 660년의 상황이고, (나)는 검모잠이 안승을 왕으로 세워 고구려 부흥 운동을 벌이다 실패한 670년의 일이다. 그 사이인 660년 백제 멸망 직후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에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기벌포 전투와 안동도호부의 요동 이전은 나당 전쟁 시기로 (나) 뒤의 일이며, 나당 군사 동맹과 관산성 전투는 (가) 이전의 일이다.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고 당의 상경성 구조를 받아들였으며 말갈계 토기와 서역 교류를 보여 주는 청동 낙타상을 남긴 (가) 국가는 발해이다. 발해는 유학 교육 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를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후당과 오월에 사신을 보낸 것은 후백제, 9서당 10정과 화백 회의는 신라, 6좌평 관제는 백제의 제도이다.
한국사 웹툰 기획안
| 제목 | ○○왕, 왕권을 강화하다. | |
| 구성 내용 | 1화 | 진골 귀족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다. |
| 2화 | 국학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다. | |
| 3화 | 9주를 정비하여 지방 통치 체제를 갖추다. | |
| 4화 | (가) | |
| 주의 사항 | 사료에 기반하여 제작한다. | |
진골 귀족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고 국학을 설치하였으며 9주를 정비한 왕은 통일 신라 신문왕이다. 신문왕은 관리에게 조세만 거둘 수 있는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던 녹읍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마립간 칭호 사용은 내물왕, 우산국 복속은 지증왕, 화랑도의 국가 조직 개편은 진흥왕,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한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의 일이다.

산둥반도의 신라인 거주지에 적산 법화원을 세웠고 당에서 무령군 소장을 지내다 흥덕왕 때 귀국한 뒤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암살된 인물은 장보고이다.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시무책 10여 조는 최치원, 가지산문 개창은 도의, 이두 정리는 설총과 관련된다.
왕이 천덕전에 거둥하여 백관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신라와 굳게 동맹을 맺은 것은 두 나라가 길이 우호를 유지하고 각자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있겠다고 요청하고 그대들도 그것이 옳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부끄러우나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렵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뜰에서 예를 올리니 여러 신하가 하례하여 함성이 궁궐을 진동하였다. …… 신라국을 없애 경주라 하고, 그 지역을 김부의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신라왕 김부(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라 하여 그 지역을 식읍으로 내린 왕은 고려 태조 왕건이다. 태조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흑창을 설치하였다. 12목 설치는 성종, 국자감 7재 운영은 예종, 광덕·준풍 연호 사용은 광종, 전시과 제정은 경종 때의 일이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역의 경계는 공험진(公嶮鎭)으로 삼았다는 말이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공험진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 윤관이 (가) 을/를 쫓고 9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 쪽에 있는가.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라고 하였다.
윤관이 몰아내고 9성을 쌓은 대상이므로 (가)는 여진이다. 조선 태종은 여진을 회유하기 위해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교역을 허용하는 한편 국경 방어를 강화하였다. 청방인문표는 당에 보낸 글이고, 진포 대첩과 박위의 쓰시마 토벌, 기유약조는 모두 왜(일본)와 관련된 대응이다.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는 상서호부의 승인으로 세워졌고 국사·왕사 제도를 두어 불교를 장려한 나라의 문화유산이므로 (가)는 고려이다. 고려는 숙종 때 주전도감을 두고 삼한통보·해동통보와 활구(은병) 등을 발행하였다. 솔빈부의 말은 발해의 특산품이고, 만상의 대청 무역과 덕대의 등장은 조선 후기, 동시전 설치는 신라 지증왕 때의 일이다.

벨기에 왕립예술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상감청자와 청동 정병, 금동 침통을 공개한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고려이다. 자개를 오려 붙여 만든 나전 칠기 합과 아미타·관음 신앙을 담아 그린 불화인 수월관음도는 고려를 대표하는 공예품과 회화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돌짐승(진묘수)은 백제, 화려한 금관은 신라의 문화유산이다.
[성종 대] 누가 거란 진영에 가서 담판을 벌여 군대를 물러가게 하겠는가?
[서희] 신, 서희가 폐하의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 (가) →
[현종 대] 양규가 적을 무로대와 이수 등지에서 크게 무찌르고 포로를 되찾았다고 하옵니다.
왼쪽은 성종 때 서희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담판을 벌이겠다고 나서는 장면(993)이고, 오른쪽은 현종 때 양규가 무로대·이수 등지에서 거란군을 무찌르고 포로를 되찾았다는 보고를 받는 장면(1010~1011)이다. 그 사이인 1009년 강조는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세웠으며, 거란은 이를 구실로 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묘청의 난, 이자겸 축출, 처인성 전투, 다인철소 항전은 모두 이보다 뒤의 일이다.
제국 대장 공주가 일찍이 잣과 인삼을 [원의] 강남 지역으로 보내 많은 이익을 얻었다. 나중에는 환관을 각지에 파견하여 잣과 인삼을 구하게 하였다. 비록 나오지 않는 땅이라 하더라도 강제로 거두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제국 대장 공주는 충렬왕의 비이자 원 세조의 딸이므로 제시된 상황은 원 간섭기의 모습이다. 이 시기에는 원과의 인적·물적 교류가 잦아지면서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과 호복 같은 몽골풍이 유행하였다. 원종과 애노의 봉기는 신라 하대,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 초조대장경 조판은 고려 전기, 구황촬요 간행은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조위총이 동·북 양계(兩界)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불러 모아 말하기를, "소문에 따르면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은 거칠고 사나운 무리를 많이 거느리고 있으니 토벌해야 한다.'고 논의하고 이미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 하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죽을 수 있겠는가? 각자 군사와 말을 규합하여 빨리 서경으로 달려와야 한다."라고 하였다.
제시된 사건은 서경 유수 조위총이 개경의 중방이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 한다며 군사를 일으킨 조위총의 난(1174)이다. 이 봉기는 1170년 정중부·이의방 등이 정변을 일으켜 무신 정권을 세우고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휘두른 데 반발하여 일어났다. 만적의 모의, 명학소 봉기, 교정도감 설치, 전민변정도감 운영은 모두 이 사건 이후의 일이다.
처음에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 순행하면서 포악한 짓들을 금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름을 야별초(夜別抄)라고 하였다. 도적들이 여러 도에서도 일어났으므로 별초를 나누어 보내 이들을 잡게 하였다. 그 군사가 매우 많아 마침내 나누어 좌우로 삼았다. 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몽골로부터 도망쳐 돌아온 자들을 한 부대로 삼아 신의군(神義軍)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가) 이/가 되었다.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에서 갈라진 좌·우별초에 몽골에서 도망쳐 온 이들로 편성한 신의군을 더한 (가)는 삼별초이다. 삼별초는 1270년 고려 정부가 몽골과 강화하고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하자 이에 반발하여 강화도에서 진도·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항쟁하였다. 광군사의 통제를 받은 것은 광군, 정미 7조약으로 해산된 것은 대한 제국 군대, 4군 6진 개척은 조선 세종 때의 일이며 향토 방위 예비군은 현대의 조직이다.

고려 말 삼은의 한 사람인 목은, 곧 이곡의 아들이자 고려와 원의 과거에 모두 급제하고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은 이색이다. 이색은 공민왕 때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 등을 학관으로 천거하고 성리학 교육을 확산시켰다. 역옹패설과 사략은 이제현, 삼국사기는 김부식, 문헌공도는 최충, 수선사 결사는 지눌의 활동이다.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즉위하였고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의 능을 옮기면서 나온 석물을 광통교 제작에 쓰게 한 (가)는 조선 태종이다. 태종 대에는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제작되었다. 화통도감 설치는 고려 우왕, 경국대전 완성은 성종, 비변사 설치는 중종, 칠정산 간행은 세종 때의 일이다.

1870년 흥선 대원군이 편찬한 은대조례는 은대라 불린 승정원의 업무 처리 규정을 정리한 책이므로 밑줄 그은 '이 기구'는 승정원이다.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은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도승지 이하 여섯 승지가 6조의 업무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3사의 하나로 꼽힌 것은 홍문관, 천문·기상 관측은 관상감, 실록 보관은 춘추관, 강상죄와 반역죄 처결은 의금부의 일이다.

1417년에 태어나 1475년에 죽었고 호가 희현당·보한재이며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고 계유정난으로 정난공신에 책훈된 인물은 신숙주이다. 신숙주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정치·사회·지리를 정리한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였다. 기해예송의 기년설은 송시열, 위훈 삭제 건의는 조광조, 예안 향약은 이황, 100리 척의 동국지도는 정상기와 관련된다.

박연의 상소를 계기로 시각장애인 악사인 관현맹이 관직과 곡식을 받게 되었고 여민락을 지었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조선 세종이다. 세종은 유교 윤리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글과 그림으로 엮은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신문고 설치는 태종, 훈련도감 창설은 선조, 탕평비 건립은 영조, 대전통편 간행은 정조 때의 일이다.
[우리 역사 속 직업의 세계] (앞면)
나의 직업은 무엇일까요?
(뒷면)
■ 직업 소개
선혜청 등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여 궁궐과 관청에 납품하는 상인
■ 요구 능력
물품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기일에 맞춰 조달할 수 있는 능력
정답 ○○
선혜청 등에서 공가를 받아 궁궐과 관청에 물품을 납품하는 상인은 공인이다. 공인은 공납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베·동전으로 거두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등장하였고, 이들의 대량 구매는 상품 화폐 경제와 수공업 발달을 촉진하였다. 관수 관급제 시행은 조선 전기 토지 제도의 변화, 건원중보 주조는 고려 성종, 대동 상회 설립은 개항 이후, 금난전권 폐지는 정조 때의 일이다.

한성부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4대문과 4소문, 암문·수문·여장·옹성을 갖춘 둘레 약 18km의 성곽은 한양 도성이다. 후금의 침입에 맞서 정봉수가 항전한 곳은 평안도 철산의 용골산성으로 한양 도성과는 관계가 없다. 한양 도성은 개국 초 정도전 등이 설계하고 도성조축도감이 축조를 관장하였으며, 시기별 축성 기술의 변화가 남아 있고 일제 강점기 도시 정비 계획을 구실로 크게 훼손되었다.
권율이 정병 4천 명을 뽑아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는 책(柵)을 설치하여 방비하였다. …… 적은 올려다보고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 탄환도 맞히지 못하는데 반해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은 모두 활쏘기를 잘하여 쏘는 대로 적중시켰다. …… 적이 결국 패해 후퇴하였다.
-『선조수정실록』-
권율이 행주산성에 목책을 세우고 일본군을 물리친 행주 대첩(1593)을 전하는 자료이다. 이후 명과 일본 사이에 휴전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이 다시 침입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최영의 홍산 대첩과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은 고려 말·조선 초의 일이고, 한산도 대첩과 신립의 탄금대 전투는 행주 대첩보다 앞선 임진왜란 초기의 일이다.
[선비 1] 감히 대비마마를 욕보이다니. 당장 이 벽서를 떼어다 임금께 올리세.
[선비 2] 게다가 누구나 볼 수 있는 양재역 벽에 이런 참담한 내용을 써 붙이다니 당장 고하러 가세나.
[벽서]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그믐날
여주(女主)가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부린다는 글이 양재역 벽에 나붙은 사건은 1547년의 양재역 벽서 사건이므로 밑줄 그은 '임금'은 명종이다. 명종 즉위 직후인 1545년에는 문정 왕후의 동생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몰아낸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은 선조, 서인의 반정은 광해군 말,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은 성종, 폐비 윤씨 사사 사건으로 김굉필 등이 화를 입은 갑자사화는 연산군 때의 일이다.

정조가 정치적 이상을 담아 축조하였고 행궁과 장용영 군사를 지휘하던 서장대가 남아 있는 (가)는 수원 화성이다. 화성은 포루·공심돈 등 새로운 방어 시설을 갖추었고,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와 녹로 등을 이용해 짧은 기간에 축조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환궁한 곳은 경운궁이고, 당백전을 발행해 비용을 충당한 것은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다.
- (가) 실옹이 웃으며 말하기를, "…… 대저 땅덩이는 하루 동안에 한 바퀴를 도는데, 땅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이다. 9만 리 넓은 둘레를 12시간에 도니 번개나 포탄보다도 더 빠른 셈이다."라고 하였다.
- (나) 허생이 말하기를, "우리 조선은 배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국내에 두루 다니지 못하는 까닭에 온갖 물건이 나라 안에서 생산되어 소비되곤 하지 않나. …… 어떤 물건 하나를 슬그머니 독점한다면, 그 물건은 한 곳에 갇혀서 유통되지 못하니 이는 백성을 못살게 하는 방법이야."라고 하였다.
(가)는 실옹의 입을 빌려 지전설을 편 홍대용의 의산문답이고, (나)는 수레와 배의 이용, 매점매석의 폐단을 지적한 박지원의 허생전이다. 두 사람은 모두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에 다녀와 각각 을병연행록과 열하일기 같은 연행록을 남긴 북학파 실학자이다. 강화학파 형성은 정제두, 규장각 검서관 기용은 서얼 출신 학자들, 화폐 사용 반대는 이익 등 중농학파의 주장과 관련된다.

책과 도자기, 문방구가 놓인 책가를 그린 책가도가 유행하고 다양한 민화가 서민에게까지 인기를 끈 '시기'는 조선 후기이다. 벽란도에서 송의 상인과 교역하는 모습은 고려 시대의 일이므로 조선 후기에는 볼 수 없다. 판소리 공연과 탈춤, 장시의 보부상, 한글 소설을 읽어 주는 전기수는 모두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모습이다.

강화도 광성보와 용두돈대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침입한 미군에 맞서 결사 항전한 '이 사건'은 1871년의 신미양요이다. 신미양요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뒤에 일어났고, 그 직후 흥선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밝혔다. 따라서 연표에서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척화비 건립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

파리 만국 박람회 한국관을 그린 프랑스 일간지 삽화로, 황제로 즉위한 뒤 고종이 추진한 '개혁'은 대한 제국의 광무개혁이다. 광무개혁 시기에는 근대 의료 인력을 기르는 관립 의학교와 국립 병원인 광제원이 설립되었다. 건양 연호 사용은 을미개혁, 별기군 창설과 박문국 설치는 개항 이후의 개화 정책, 한일 관계 사료집 편찬과 독립 공채 발행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이다.

고부 농민 봉기에서 황토현 전투와 전주 화약을 거쳐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우금치 전투로 이어지는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이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농민군이 다시 봉기하였고,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연합한 뒤 서울로 북상하다가 우금치에서 패하였다. 교정청 설치와 안핵사 이용태 파견은 이보다 앞선 일이고, 전봉준 체포는 우금치 전투 뒤의 일이며 13도 창의군은 정미의병 때 결성되었다.

청의 알선으로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은 1882년에 체결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선은 이 조약에 따라 미국 공사가 부임하자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부산·원산·인천 개항과 운요호의 영종도 공격은 강화도 조약과 관련되고, 김홍집의 조선책략 소개와 통리기무아문 설치는 이 조약 체결 이전의 일이다.

대한매일신보에 서적 할인 광고를 낸 태극 서관을 운영하고 인재 양성을 위해 대성 학교를 세운 (가) 단체는 신민회이다. 신민회는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이 국권 회복과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조직한 비밀 결사로, 105인 사건을 계기로 와해되었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는 독립 협회, 파리 강화 회의 독립 청원서 제출은 신한청년당, 국문 연구소 설립은 대한 제국 학부의 일이다.

23세에 육영 공원 교사로 조선에 와 학생을 가르쳤고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를 방문하였으며 대한 제국 멸망사를 쓴 인물은 미국인 호머 헐버트이다. 헐버트는 세계의 지리와 정세를 한글로 소개한 교과서 사민필지를 집필하여 근대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화폐 정리 사업을 주도한 것은 재정 고문 메가타, 이화 학당 설립은 선교사 스크랜턴, 스티븐스 사살은 장인환·전명운의 일이며 단연보국채 논설을 쓴 인물도 헐버트가 아니다.
[아버지] 아들아, 제중원 의학교 1회 졸업생이 된 것을 축하한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차별을 극복하고 의사가 된다니 정말 자랑스럽구나.
[아들] 10년 전 (가) 이/가 주관한 관민 공동회 개회식에서 당당하게 충군애국의 뜻을 밝히신 아버지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관민 공동회를 주관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가) 단체는 독립 협회이다. 독립 협회는 1898년 관민 공동회에서 헌의 6조를 결의하고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려 하였으나 황국 협회의 방해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는 보안회,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 구미 위원부 설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이고, 여권통문은 서울 북촌의 여성들이 발표한 것이다.
- (가) 조선 사회 운동 단체인 정우회는 며칠 전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선언서에서 민족주의적 세력과 과도기적 동맹자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히고 타협과 항쟁을 분리시켜 사회 운동 본래의 사명을 잊지 말자는 것을 말하였다.
- (나) 조선 민족 운동의 중추 기관이 되려는 사명을 띠고 창립되었던 신간회가 비로소 첫 번째 전체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간신히 열리는 전체 대회에서 해소 문제 토의를 최대 의제로 하게 된 것은 조선의 현 상황이 아니고서는 보기 어려운 기현상이다.
(가)는 1926년 정우회 선언, (나)는 1931년 신간회 전체 대회에서 해소 문제가 최대 의제로 다루어진 상황이다. 그 사이인 1929년에는 광주에서 한일 학생의 충돌을 계기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고,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이를 지원하려 하였다. 독립 의군부 조직과 2·8 독립 선언, 봉오동 전투는 (가) 이전의 일이고, 조선 의용대 창설은 (나) 이후의 일이다.

박용만이 네브래스카주에서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우고 국민개병설을 집필한 뒤 건너가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한 '이곳'은 하와이이다. 대조선 국민군단은 1914년 하와이에서 조직되어 군사 훈련을 실시하며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지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표시된 하와이가 이에 해당한다.

(가)는 대한 통의부 의군으로 활동하다 조선 혁명군 총사령관으로 항일 투쟁을 이끌고 일제의 밀정에게 살해된 양세봉이고, (나)는 신흥 무관 학교 교성대장을 지내고 한국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지청천이다. 지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설립은 김원봉, 대한 광복회 조직은 박상진, 중광단을 바탕으로 한 북로 군정서는 서일과 관련된다.

중일 전쟁 이후 침략 전쟁을 확대하며 한국인을 탄광과 군수 공장에 강제 동원하던 '시기'는 1930년대 후반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기이다. 이 시기 일제는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식량 배급제와 미곡 공출제를 실시하여 농민을 수탈하였다. 치안 유지법 공포는 1920년대, 토지 조사령 제정과 헌병 경찰 제도, 보통학교 수업 연한 4년 규정은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의 정책이다.

충칭에서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요인들의 가족이 한국 혁명 여성 동맹을 만들어 지원한 (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임시 정부는 1941년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내세운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선포하였다. 좌우 합작 7원칙은 좌우 합작 위원회, 경학사는 서간도의 신민회 계열 인사들, 조선 혁명 선언은 의열단,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은 조선어 학회와 관련된다.

제주도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무장대와 이를 진압하는 토벌대가 충돌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된 (가)는 제주 4·3 사건이다. 2000년에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 조사와 명예 회복이 추진되었고, 기념관의 백비는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역사적 평가를 상징한다. 유신 헌법 철폐 요구와 통일 주체 국민 회의, 4·13 호헌 철폐 구호는 1970~80년대의 일이고, 신한 공사는 미군정기 귀속 재산 관리 기구이다.
국민 보도 연맹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입니다.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국민 보도 연맹에 가입되었고, (가) 의 와중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 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가족들은 연좌제의 굴레에서 고통받으며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수십 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서 당시 국가 권력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울산 국민 보도 연맹 사건 희생자 추모식에 보내는 편지」-
국민 보도 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희생된 (가) 전쟁은 6·25 전쟁이다. 전쟁 중인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전세를 뒤집고 서울을 되찾았다. 애치슨 선언은 전쟁 발발 전인 1950년 초에 발표되었고, 6·3 시위와 브라운 각서 체결, 부마 민주 항쟁은 모두 1960~70년대의 일이다.

여야 합의로 통과되어 허정 과도 정부가 총선을 실시하는 근거가 된 '개헌안'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의 내각 책임제 개헌안이다. 이 개헌으로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로 운영되었고 총선 결과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 조봉암 구속, 농지 개혁법 제정은 모두 이보다 앞선 일이다.

포항 제철소 착공식, 제1차 석유 파동,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보여 주는 자료이므로 박정희 정부 시기이다. 1971년에는 서울 도심에서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정부의 도시 정책에 반발하여 광주 대단지 사건을 일으켰다. 최저 임금법 제정은 1980년대 후반, 금융 실명제 실시와 전국 민주 노동조합 총연맹 창립은 1990년대, 한·칠레 자유 무역 협정 비준은 2000년대의 일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희생된 윤상원과 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에 헌정된 노래이므로 (가)는 5·18 민주화 운동이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맞서 광주의 학생과 시민이 저항한 사건이다. 이한열의 희생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진상 규명 요구는 6월 민주 항쟁, 경무대로 향하던 시위대에 대한 총격은 4·19 혁명, 3·1 민주 구국 선언은 유신 체제 시기의 일이다.
- (가)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6·15 남북 공동 선언」-
- (나) 4. 남과 북은 현 정전 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10·4 남북 정상 선언」-
(가)는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에서 나온 6·15 남북 공동 선언이고, (나)는 2007년의 10·4 남북 정상 선언이다. 그 사이인 2003년에는 개성 공업 지구 건설이 착공되어 남북 경제 협력이 본격화되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과 남북 조절 위원회 구성,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의 최초 교환, 남북한 비핵화 공동 선언은 모두 (가) 이전의 일이다.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이며 영조와 정순 왕후의 혼례식 행렬을 재현하는 근거가 된 (가)는 의궤이다. 의궤는 왕이 열람하는 어람용을 따로 고급 재료로 정성껏 제작하였고,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어람용 의궤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되었다.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연대순의 편년체로 서술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다.
<보 기>
ㄱ. (가) -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달라진 제도를 살펴본다.ㄴ. (나) - 광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추진한 정책에 대해 알아본다.
ㄷ. (다) - 중종 때 사림파 언관들이 제기한 주장을 조사해 본다.
ㄹ. (라) - 임술 농민 봉기를 수습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을 파악한다.
- (가) 처음으로 독서삼품을 정하여 관리를 선발하였다.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을 읽고 그 뜻에 능통하면서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곡례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으로,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하였다.
- (나) 쌍기가 의견을 올리니 처음으로 ㉠이 제도를 마련하여 시행하였다. 시·부·송 및 시무책으로 시험하여 진사를 뽑았으며, 겸하여 명경업·의업·복업 등도 뽑았다.
- (다) 조광조가 아뢰기를, “중앙에서는 홍문관·육경·대간, 지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천거한 사람들을 대궐에 모아 시험을 치르면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도는 한(漢)에서 시행한 현량방정과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라) 제4조 의정부 및 각 부 판임관을 임명할 시에는 각기 관하 학도 및 외국 유학생 졸업자 중에서 시험을 거쳐 해당 주무 장관이 전권으로 임명한다. 단, 졸업자가 없을 시에는 문필과 산술이 있고 시무에 통달한 자로 시험을 거쳐서 임명한다.
- (가) 처음으로 독서삼품을 정하여 관리를 선발하였다.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을 읽고 그 뜻에 능통하면서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곡례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으로,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하였다.
- (나) 쌍기가 의견을 올리니 처음으로 ㉠이 제도를 마련하여 시행하였다. 시·부·송 및 시무책으로 시험하여 진사를 뽑았으며, 겸하여 명경업·의업·복업 등도 뽑았다.
- (다) 조광조가 아뢰기를, “중앙에서는 홍문관·육경·대간, 지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천거한 사람들을 대궐에 모아 시험을 치르면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도는 한(漢)에서 시행한 현량방정과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라) 제4조 의정부 및 각 부 판임관을 임명할 시에는 각기 관하 학도 및 외국 유학생 졸업자 중에서 시험을 거쳐 해당 주무 장관이 전권으로 임명한다. 단, 졸업자가 없을 시에는 문필과 산술이 있고 시무에 통달한 자로 시험을 거쳐서 임명한다.
(나)는 고려 광종이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 시행한 과거제이고, (다)는 조선 중종 때 조광조가 한(漢)의 현량방정과를 본떠 실시를 건의한 현량과이다. 고려의 과거에서는 시험을 주관한 지공거와 급제자 사이에 좌주와 문생이라는 사제 관계가 맺어져 이후 정치적 유대의 바탕이 되었다. 제술과·명경과·잡과·승과로 나뉜 것은 고려의 과거이지 현량과가 아니며, 관시·한성시·향시로 나뉜 것은 조선 문과의 초시다. 역분전은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준 토지로 과거제와 관계가 없고, 홍범 14조는 갑오개혁기의 개혁 강령이어서 고려·조선의 두 제도와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