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66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66회

제시된 자료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뗀석기(주먹도끼)는 (가)가 구석기 시대임을 알려 준다.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먹을거리를 구하며 이동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동굴이나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반달 돌칼로 벼를 수확한 것은 청동기, 빗살무늬 토기와 가락바퀴·뼈바늘은 신석기, 반량전·명도전 사용은 철기 시대의 모습이다.
호의 수는 5천인데 대군왕은 없으며 읍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가 있다. …… 여러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스스로를 삼로라 일컬었다. …… 장사를 지낼 때에는 큰 나무 곽을 만든다.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며 한쪽을 열어 놓아 문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임시로 매장한다. 겨우 시체가 덮일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곽 속에 넣는다. 온 집 식구를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만큼 나무를 깎아 생전의 모습과 같이 만들었다.
- 『삼국지』 동이전 -
자료는 『삼국지』 동이전에 실린 옥저에 대한 기록이다. 읍락의 우두머리를 삼로라 부른 점, 시신을 임시로 묻었다가 뼈만 추려 온 집안 식구를 하나의 목곽에 넣는 가족 공동 무덤(골장제) 풍습이 옥저를 특정하는 근거이다. 옥저에는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운 뒤 며느리로 삼는 민며느리제 혼인 풍습이 있었다. 소도는 삼한, 범금 8조는 고조선, 사출도는 부여, 정사암 회의는 백제의 것이다.






천마총, 돌무지덧널무덤, 천마도는 모두 (가)가 신라임을 알려 준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이 어려워 껴묻거리가 잘 남았고, 그 대표적 유물이 나뭇가지·사슴뿔 모양 세움 장식에 곱은옥과 달개를 매단 신라 금관이다. 정답 자료가 바로 이 금관과 금제 드리개(수하식)이다.
- 기해년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순행하여 평양으로 내려갔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 귀부하여 명을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서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군대가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왜적이 많았다. 군대가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기해년 백제와 왜의 화통,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고 왜를 물리쳤다는 내용은 광개토 대왕릉비의 기록으로, 밑줄 그은 '왕'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다. 광개토 대왕은 '영락'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백제를 압박하고 만주와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넓혔다. 평양 천도는 장수왕, 대가야 병합은 신라 진흥왕, 22담로 왕족 파견은 백제 무령왕, 낙랑군 축출은 미천왕의 일이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영기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된 미륵사와 관련되므로 (가)는 무왕이다. 무왕의 재위 기간(600~641)에 해당하는 삼국의 상황은 612년 고구려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대군을 크게 무찌른 살수 대첩이다. 고흥의 서기 편찬은 근초고왕, 계백의 황산벌 항전은 의자왕 때이며,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은 지증왕, 기벌포 승리는 문무왕 때의 일이다.

청해진과 산둥반도의 법화원을 잇는 교역로 지도는 장보고가 활동하던 통일 신라의 상황을 보여 준다. 통일 신라는 조세 수취와 노동력 동원을 위해 3년마다 촌락의 인구·토지·가축·수목 등을 기록한 촌락 문서(민정 문서)를 작성하였다. 삼한통보와 해동통보는 고려, 솔빈부의 말은 발해, 고구마·감자 등 구황 작물 재배는 조선 후기, 특수 행정 구역인 소는 고려의 것이다.
(가) 선덕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여러 신하들이 회의를 한 후에 왕의 조카인 김주원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주원의 집은 왕경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마침 큰비가 와서 알천의 물이 넘쳐 주원이 건너 오지 못하였다. …… 여러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김경신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
(나) 나라 안의 모든 주군에서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삼국사기』 -
(가)는 선덕왕이 죽은 뒤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한 785년의 일이고, (나)는 진성 여왕 때인 889년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일으킨 봉기이다. 두 시기 사이에 해당하는 것은 822년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이다. 계백료서는 고려 태조, 녹읍 폐지는 신문왕, 성균관 수학은 고려 말 이후, 초조대장경 조판은 고려 현종 때의 모습이다.

크라스키노 성과 콕샤로프카 평지성은 연해주 일대에 남아 있는 발해의 유적이다. 온돌 시설과 연꽃무늬 수막새는 고구려 유적에서도 확인되는 요소여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보여 주는 근거로 활용된다. 따라서 탐구 주제로는 발해와 고구려의 문화적 연관성이 가장 적절하다.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세웠고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한 밑줄 그은 '인물'은 견훤이다. 견훤은 중국의 후당과 오월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으며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으려 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신라 원성왕, 동진에서의 불교 수용은 백제 침류왕, 광평성 설치는 궁예, 화랑도의 국가 조직 개편은 신라 진흥왕의 일이다.
문종 3년 5월 양반 공음전시법을 정하였다. 1품은 문하시랑평장사 이상으로 전지 25결, 시지 15결이다. 2품은 참정 이상으로 전지 22결, 시지 12결이다. 3품은 전지 20결, 시지 10결이다. 4품은 전지 17결, 시지 8결이다. 5품은 전지 15결, 시지 5결이다. 이를 모두 자손에게 전하여 주게 한다. …… 공음전을 받은 자의 자손이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을 꾀하거나 모반이나 대역에 연좌되거나, 여러 공죄나 사죄를 범하여 제명된 것 이외에는 비록 그 아들에게 죄가 있더라도 그 손자에게 죄가 없다면 공음전시의 3분의 1을 지급한다.
문종 때 정해진 양반 공음전시법은 고려의 토지 제도이므로 고려의 경제 상황을 묻는 문항이다. 고려에서는 활구라 불린 은병이 유통되고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으며, 개경에 서적점·다점 같은 관영 상점이 운영되고 경시서가 수도의 시전을 감독하였다. 반면 설점수세제로 민간의 광산 개발이 허용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므로 고려의 경제 상황으로 볼 수 없다.
<한국사 주제 발표>
주제: 거란에 대한 고려의 대응
- (가) 광군을 창설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 (나)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 (다) 서희가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여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하였습니다.
세 학생의 발표는 모두 거란의 침입에 대한 고려의 대응이다. 광군은 정종 때인 947년에 조직되었고,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한 것은 거란의 1차 침입 때인 993년,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3차 침입 때인 1019년이다. 따라서 광군 창설 → 서희의 외교 담판 → 귀주 대첩 순서가 된다.
[역사 용어 해설] (가)
1. 개요
고려의 관청으로 정치의 잘잘못을 가리고 풍속을 교정하며, 관리들의 부정을 감찰하고 탄핵하는 일을 담당함.
2. 관련 사료
유사(有司)에서 아뢰기를, “중광사 조성도감의 책임자 정장이 관리 감독하는 물품을 이서(吏胥) 승적과 함께 도둑질하였으니, 법에 따라 장형에 처하고 유배 보내길 청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가) 에서 논박하기를, “법에 의거하여 판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를 윤허하였다.
- 『고려사』 -
정치의 잘잘못을 가리고 관리의 부정을 감찰·탄핵한 고려의 관청은 어사대이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리며 관리 임명에 동의하는 서경권과 간쟁·봉박권을 행사하였다. 무신 집권기 최고 권력 기구는 교정도감, 첨의부로 격하된 것은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도평의사사로 개편된 것은 도병마사, 검서관을 둔 곳은 조선 후기의 규장각이다.

강화도로 천도한 뒤 강화중성을 쌓은 것은 (가) 몽골의 침략에 맞선 대응이므로 몽골 침입기의 사실을 골라야 한다. 김윤후는 처인성에 이어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관노비들과 함께 몽골군을 물리쳤고, 송문주는 죽주성에서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양규의 무로대 승리는 거란의 2차 침입, 윤관의 별무반과 동북 9성은 여진 정벌과 관련된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자, 조정 신하들이 대궐에 나아가 축하하였다. 경대승이 말하기를, “임금을 죽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인가?”라고 하였다. 이의민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날랜 사람들을 모아서 대비하였다. 또한 경대승의 도방(都房)에서 자기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죽일 것을 모의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의민이 더욱 두려워하여 마을에 큰 문을 세워 밤마다 경계하였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하고 도방을 두어 신변을 지키던 무신 집권기의 상황으로, 이의민이 이를 두려워하던 때이다. 경대승이 죽은 뒤 이의민이 권력을 잡았고,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한 다음 국왕에게 시정 개혁안인 봉사 10조를 올렸다.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강조의 정변,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은 모두 무신 정변 이전의 일이고 김보당의 난은 정중부 집권기의 일이다.
이자춘이 쌍성 등지의 천호들을 거느리고 내조하니 왕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어리석은 민(民)을 보살펴 편안하게 하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았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기철이 쌍성의 반민(叛民)들과 몰래 내통하여 한패로 삼아 역모를 도모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왕이 이자춘에게 이르기를, “경은 마땅히 돌아가서 우리 민을 진정시키고, 만일 변란이 일어나면 마땅히 내 명령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 이자춘이 명령을 듣고 곧 행군하여 유인우와 합세한 후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을 문제 삼고 유인우·이자춘을 보내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되찾은(1356) 밑줄 그은 '왕'은 고려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두고,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하였다. 초량 왜관과 동의보감은 조선, 주자감은 발해, 황룡사 구층 목탑은 신라 선덕 여왕 때의 것이다.

강진 월남사지에 비가 있고, 지눌의 제자로 수선사의 제2대 사주가 되었으며 집권자 최우가 두 아들을 출가시킨 (가)는 진각국사 혜심이다. 혜심은 선문염송집을 편찬하고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는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여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화엄일승법계도는 의상, 해동 천태종은 의천, 권수정혜결사문은 지눌, 보현십원가는 균여의 것이다.
[문화유산 DB > 문화유산 검색]
검색어: (가)
- 종목: 국보
- 소재지: 강원도 평창군
- 소개: 고려 시대 다각 다층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탑의 꼭대기 머리 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고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2000년대 들어 실시된 조사 결과 석탑의 조성 연대가 고려 전기로 밝혀졌다.





국보이면서 강원도 평창군에 있고 고려 전기에 조성된 다각 다층 석탑은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이다. 정답 자료가 바로 이 석탑으로, 팔각 평면의 몸돌이 여러 층으로 올라가고 꼭대기에 금동으로 만든 머리 장식이 온전히 남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이처럼 다각 다층의 개성 있는 석탑이 여럿 세워졌다.
#12. 이성계의 집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다고 말하자 이성계가 크게 화를 낸다.
이성계: 대신을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우리 가문은 평소 충효로 소문났는데, 네가 감히 불효를 저질러 이렇게 되었구나.
이방원: 정몽주 등이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효입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한 것은 1392년의 일로, 곧이어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1400년에는 권근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족과 공신들이 거느리던 사병이 혁파되었고 병권이 국왕에게 집중되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홍건적 격퇴, 망이·망소이의 봉기, 쌍기의 건의에 따른 과거제 시행은 모두 고려 시대의 일이다.
이전에 주조한 활자가 크고 고르지 않았다. 이에 왕께서 경자년에 다시 주조하셨다. 그리하여 그 모양이 작고 바르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인쇄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이를 경자자라고 하였다. 갑인년에 다시 『위선음즐(爲善陰騭)』의 글자 모양을 본떠 갑인자를 주조하니, 경자자에 비하여 조금 크고 활자 모양이 매우 좋았다.
경자자와 갑인자를 주조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이므로 밑줄 그은 '왕'은 세종이다. 세종은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정리하기 위해 삼남 지방 농민들의 실제 경험을 모아 농사직설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국대전 반포는 성종, 동국문헌비고 간행은 영조, 영정법 제정은 인조, 삼정이정청 설치는 철종 때의 일이다.
(가) 정문형, 한치례 등이 아뢰기를, “지금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니,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차마 눈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 마땅히 대역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해서 그 죄를 분명히 밝혀 신하와 백성의 분을 씻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 왕이 정문형 등의 의견을 따랐다.
(나)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조광조, 김정 등은 서로 사귀어 무리를 이루고 자기 편은 천거하고 자기 편이 아닌 자는 배척하면서, 위세를 높여 서로 의지하며 권세가 있는 요직을 차지하였다. …… 이 모든 일들을 조사하여 밝혀라.”라고 하였다.
(가)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1498), (나)는 조광조 일파가 제거된 기묘사화(1519)이다. 두 시기 사이에 해당하는 것은 1504년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문제 삼아 김굉필 등을 처형한 갑자사화이다. 기축옥사는 1589년, 윤임이 제거된 을사사화는 1545년, 예송과 환국은 모두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4월 누르하치의 군대가 무순을 함락하고, 7월에는 청하를 함락하였다. 이에 명에서 정벌을 결정하고 우리나라에 군사 징발을 요구하였다. 명의 총독 왕가수의 군문(軍門)에서 약 4만의 병사를 요구하였으나, 경략(經略) 양호가 조선의 병사와 군마가 적다고 하여 마침내 그 수를 줄여서 총수(銃手) 1만 명만 징발하였다. 7월 조정에서 강홍립을 도원수로,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았다.
- 『책중일록』 -
| 1453 | 1510 | 1597 | 1627 | 1728 | 1811 | |||||
| (가) | (나) | (다) | (라) | (마) | ||||||
| 계유정난 | 삼포왜란 | 정유재란 | 정묘호란 | 이인좌의 난 | 홍경래의 난 |
누르하치의 후금이 무순을 함락하자 명이 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였고, 조선이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총수 1만여 명을 보낸 것은 광해군 때인 1619년(사르후 전투)의 일이다. 이는 연표에서 정유재란(1597)과 정묘호란(1627)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

동래부순절도, 금산 칠백의총, 유성룡의 징비록은 모두 (가) 임진왜란과 관련된 문화유산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2년 진주 목사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 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김상용의 강화도 순절과 정봉수·이립의 용골산성 항전은 호란, 이괄의 난은 인조 때, 이종무의 쓰시마섬 정벌은 세종 때의 일이다.

'탕평 군주'라는 표제와 청계천 준설 공사를 지켜보는 모습을 담은 수문상친림관역도, 균역법의 제정 배경을 담은 균역사실로 보아 (가)는 영조이다. 영조는 경국대전 이후의 법령을 정리한 속대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집현전은 세종, 훈련도감은 선조, 악학궤범은 성종, 신해통공은 정조 때의 일이다.

호가 담헌이고 농수각을 세워 천문을 관측하였으며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에 다녀와 『연기』와 『을병연행록』을 남긴 인물은 홍대용이다.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지전설과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지봉유설은 이수광, 양반전은 박지원, 북학의는 박제가, 동의수세보원은 이제마의 저술이다.
2023년 한국사 교양 강좌
우리 학회는 조선의 역대 왕들에 대해 알아보는 교양 강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8월에는 제17대 왕에 대한 강좌를 준비하였으니,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강의 주제
- [제1강] 청에서의 볼모 생활과 귀국 후 즉위 과정
- [제2강] 제주도에 표착한 외국인 하멜과의 만남
- [제3강] (가)
- [제4강] 나선 정벌과 조총 부대 파병
- 일시: 2023년 8월 매주 수요일 16시
- 장소: □□ 대학교 인문대학 대강의실
- 주최: △△ 학회
청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 귀국하여 즉위하였고,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을 만났으며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보낸 조선 제17대 왕은 효종이다. 효종은 송시열·이완 등을 기용하고 어영청을 대폭 확대·개편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으므로 (가)에는 이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위화도 회군과 과전법은 고려 말, 초계문신제는 정조, 백두산정계비는 숙종, 기유약조는 광해군 때의 일이다.
- 5월 ○○일, 앞 밭에 담배를 파종했다.
- 5월 ○○일, 비록 비가 여러 날 내렸으나 큰비는 끝내 내리지 않았다. 가물어서 고답(高畓)은 모두 이앙을 하지 못하였다.
- 6월 ○○일, 목화 밭에 풀이 무성해서 노비 5명에게 김매기를 하도록 시켰다.
담배를 파종하고 이앙법으로 논농사를 지으며 목화를 재배하는 모습에서 조선 후기 농촌의 일기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되고 대동법 시행으로 공인이 활동하였으며, 보부상이 장시를 돌고 국경에서 개시·후시 무역이 이루어졌다. 반면 시장을 관리하기 위한 동시전은 신라 지증왕 때 설치된 것이므로 이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적절하지 않다.
(가) 복원 기공식 대통령 연설문
임진왜란 때 (가) 은/는 불길 속에 휩싸여 흥선 대원군이 그 당시의 국력을 기울여 중건할 때까지 270년의 오랜 세월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일제는 1910년 우리나라를 병탄한 뒤 우리 역사의 맥을 끊기 위해 350여 채에 이르던 전각 대부분을 헐어내고 옮겼습니다. 국권의 상징이던 근정전을 가로막아 총독부 건물을 세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궁을 복원하려는 것은 남에 의해 훼손된 민족사에 대한 긍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흥선 대원군이 국력을 기울여 중건하였고 근정전 앞을 가로막아 조선 총독부 청사가 세워진 (가)는 경복궁이다. 일제는 1915년 경복궁에서 조선 물산 공진회를 열면서 전각을 헐어 내고 궁궐을 크게 훼손하였다. 동물원이 설치된 곳은 창경궁,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린 곳은 덕수궁, 서궐로 불린 곳은 경희궁, 태종이 한양 재천도 때 세운 곳은 창덕궁이다.
평양부 방수성 앞 물가에 큰 이양선 한 척이 머무르다가 끝내 물러가지 않으며 상선을 약탈하고 총을 쏴 백성들을 살상하였습니다. 이에 평안 감사 박규수가 관민을 이끌고 공격하여 불태웠다고 합니다.
평양 대동강에 들어온 이양선을 평안 감사 박규수와 관민이 불태운 사건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미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1871년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강화도에 보냈고,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안핵사 이용태 파견은 동학 농민 운동, 대동법 건의는 광해군 때,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는 1801년의 일이다.
홍영식이 우정국에서 개업식을 명목으로 연회를 열어 세인들이 독립당이라고 칭하는 사람들과 각국 사관(使官) 등을 초대하였다. 연회가 끝날 무렵에 우정국 옆에서 불이 일어났다. …… 마침내 어젯밤의 사변에 따라 독립당이 정권을 획득하였다. 조보(朝報)에서는 새롭게 관리를 임명하겠다는 취지를 포고하였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은 승지가 되었고, 김옥균은 혜상공국 당상을 겸하였다.
- 「조난기사」 -
홍영식이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정변을 일으키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이 요직을 차지한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이다. 정변이 삼일 만에 실패한 뒤 조선과 일본은 일본인 피해 배상과 공사관 신축 비용 등을 규정한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다. 별기군 창설, 영선사 파견, 운요호의 영종도 공격, 통리기무아문 설치는 모두 갑신정변 이전의 일이다.
- (가) 고대 여러 나라들도 역시 각각 사관(史官)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께서 이르시기를, "진(晉)의 승(乘)과 초(楚)의 도올(檮杌)과 노(魯)의 춘추(春秋)는 모두 한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해동(海東) 삼국도 역사가 길고 오래되어 마땅히 그 사실이 책으로 기록되어야 하므로 폐하께서 이 늙은 신하에게 명하시어 편집하도록 하셨습니다. …… 신의 학술이 이처럼 부족하고 얕으며, 옛말과 지나간 일은 그처럼 아득하고 희미합니다. 그러므로 온 정신과 힘을 다 쏟아 부어 겨우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보잘것 없기에 스스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나) 고려가 끝내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아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진을 책망하려 하여도 할 말이 없고, 거란을 책망하려 하여도 할 말이 없다. 고려가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탄식할 수밖에 없다. …… 내가 내규장각 관리로 있으면서 비밀스런 책[秘書]을 꽤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에 관한 일을 차례로 편찬하여,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등 9편으로 구성된 ㉡책을 만들었다.
- (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정신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 역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인 것이다.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 무릇 주체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는데, 이를테면 조선 사람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을 '비아'라 하지만, 그들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은 '비아'라 하며, ……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가) 고대 여러 나라들도 역시 각각 사관(史官)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께서 이르시기를, "진(晉)의 승(乘)과 초(楚)의 도올(檮杌)과 노(魯)의 춘추(春秋)는 모두 한가지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해동(海東) 삼국도 역사가 길고 오래되어 마땅히 그 사실이 책으로 기록되어야 하므로 폐하께서 이 늙은 신하에게 명하시어 편집하도록 하셨습니다. …… 신의 학술이 이처럼 부족하고 얕으며, 옛말과 지나간 일은 그처럼 아득하고 희미합니다. 그러므로 온 정신과 힘을 다 쏟아 부어 겨우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보잘것 없기에 스스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나) 고려가 끝내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아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진을 책망하려 하여도 할 말이 없고, 거란을 책망하려 하여도 할 말이 없다. 고려가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탄식할 수밖에 없다. …… 내가 내규장각 관리로 있으면서 비밀스런 책[秘書]을 꽤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에 관한 일을 차례로 편찬하여,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등 9편으로 구성된 ㉡책을 만들었다.
- (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정신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 역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인 것이다.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 무릇 주체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는데, 이를테면 조선 사람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을 '비아'라 하지만, 그들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은 '비아'라 하며, ……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가)는 왕명을 받아 해동 삼국의 역사를 편집해 올린다는 김부식의 글이므로 ㉠은 삼국사기이고, (나)는 규장각 관리로 있으면서 발해에 관한 기록을 군고·신고·지리고 등 9편으로 정리했다는 유득공의 글이므로 ㉡은 발해고이다. 삼국사기는 중국 정사의 서술 방식을 따라 본기·연표·잡지·열전으로 짜인 기전체 사서로,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불교사와 고대의 민간 설화를 실은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편찬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고구려 건국 시조의 일대기를 서사시로 노래한 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며,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출발을 단군 조선으로 삼지 않았다. 참고로 (다)는 아와 비아의 투쟁을 역사로 규정한 신채호의 글이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교세를 크게 확장하고 1897년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한 (가)는 동학이다. 동학은 교조 최제우가 지은 동경대전을 경전으로 삼았으며, 한글 가사인 용담유사와 함께 교리의 근간이 되었다. 중광단은 대종교, 박중빈의 새생활 운동은 원불교, 배재 학당은 개신교, 조프 수호 통상 조약으로 포교가 허용된 것은 천주교와 관련된다.
각국 공관에 보내는 호소문
지금 일본 공사가 우리 외부(外部)에 공문을 보내어 산림, 천택(川澤), 들판, 황무지에 대한 권리를 청구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2~3년 걸러 윤작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를 외국인에게 주어버린다면 전국의 강토를 모두 빼앗기게 되며 수많은 사람이 참혹한 빈곤에 빠져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침략을 막고 우리 강토를 보전하도록 힘써 주십시오.
1904년 ○○월 ○○일
1904년 일본이 산림·천택·들판·황무지에 대한 개간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이때 결성된 보안회는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켰으므로, 이 자료로는 보안회의 활동 내용을 파악하는 탐구가 적절하다. 독립문 건립과 황국 중앙 총상회는 1890년대 후반, 조일 통상 장정은 1880년대, 화폐 정리 사업은 1905년의 일이다.
근일에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각처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정부에 변란이 자주 나고 각처에 도적이 일어나며 대군주 폐하께서 외국 공사관에 파천하여 환궁하실 기약이 없고 일본 사람들이 조선 인민을 어지럽게 하는 고로, 의병을 일으켜 서울에 올라와 궁궐을 지키고 대군주 폐하를 환궁하시게 한다.”라고 하였다.
대군주가 외국 공사관에 파천해 있고 의병이 서울로 올라가 환궁시키겠다고 한 상황은 아관 파천(1896) 직후 을미의병과 관련된 자료이다. 을미의병은 1895년 일본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뒤이은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 군대 해산은 모두 1905년 이후, 용암포 사건은 1903년의 일이다.
<원수부 관제>
대황제 폐하는 대원수로서 군기(軍機)를 총람하고 육해군을 통령하며, 황태자 전하는 원수로서 육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한다. 이에 원수부를 설치한다.
제1조
원수부는 국방과 용병(用兵)과 군사에 관한 각 항의 명령을 관장하며 특별히 세운 권한을 가지고 군부와 경외(京外)의 각 부대를 지휘 감독한다.
대황제가 대원수로서 군기를 총람한다는 원수부 관제는 대한 제국이 광무개혁을 추진하던 1899년에 반포되었다. 이후 대한 제국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901년 지계아문을 설치하고 토지 소유자에게 지계를 발급하였다. 군국기무처 창설과 건양 연호 제정, 한성 사범 학교 설립, 5군영의 2영 통합은 모두 이보다 앞선 시기의 일이다.
남대관, 권수정 등은 전 한족총연합회 간부였던 지청천, 신숙 등과 함께 아성현(阿城縣)에서 한국대독립당을 조직하고 지청천을 총사령, 남대관을 부사령으로 하는 (가) 을/를 편성하였다. …… (가) 은/는 딩차오(丁超)의 군으로부터 무기를 지급받고 대원을 모집하여 일본 측 기관의 파괴, 일본 요인의 암살 등을 기도하였다.
지청천을 총사령, 남대관을 부사령으로 하여 북만주에서 편성된 (가)는 한국 독립군이다.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 등과 연합하여 쌍성보·사도하자·동경성 전투에 이어 1933년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 대첩은 북로 군정서 등, 미군과 연계한 국내 진공 작전 준비는 한국광복군,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는 조선 의용대, 봉오동 전투는 대한 독립군의 활동이다.
□□신문 제△△호 ○○○○년 ○○월 ○○일
어려움에 빠진 한인 회사
회사를 설립할 때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후 한인의 회사는 큰 영향을 받아 손해가 적지 않기에 실업계의 원성이 자자하다. 전국에 있는 회사를 헤아려보니 한국에 본점을 두고 설립한 회사가 171개인데 자본 총액이 5,021만여 원이요, 외국에 본점을 두고 지점을 한국에 설립한 회사가 52개인데 자본 총액이 1억 1,230만여 원이다. 그중에 일본인의 회사가 3분의 2 이상이고, 몇 개 되지 않는 한인의 회사는 상업 경쟁에 밀리고 회사 세납에 몰려 도무지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회사를 설립할 때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한 밑줄 그은 '법령'은 1910년에 공포된 회사령으로, 1920년 폐지될 때까지 시행되었다. 이 시기 일제는 무단 통치를 펴면서 1910년부터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토지를 약탈하고 지세 수입을 늘렸다. 신문지법은 1907년, 미쓰야 협정은 1925년, 경성 제국 대학 설립은 1924년,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은 1941년의 일이다.
판결문
피 고 인: 박상진, 김한종
주 문: 피고 박상진, 김한종을 사형에 처한다.
이 유
피고 박상진, 김한종은 한일 병합에 불평을 가지고 구한국의 국권 회복을 명분으로 (가) 을/를 조직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조선 각도의 자산가에게 공갈로 돈을 받아내기로 하고 …… 채기중 등을 교사하여 장승원의 집에 침입하여 자금을 강취하고 살해하도록 한 죄가 인정되므로 위와 같이 판결한다.
박상진과 김한종이 국권 회복을 명분으로 조직하고 자산가에게서 군자금을 걷다가 친일 부호 장승원을 처단한 (가)는 대한 광복회이다.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 광복회는 총사령과 지휘장을 두는 군대식 조직을 갖춘 비밀 결사로 공화 정체의 국가 수립을 지향하였다. 중일 전쟁 직후 결성,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 105인 사건으로 와해, 만민 공동회 개최는 모두 다른 단체와 관련된 사실이다.
수신: 육군 대신
발신: 조선 헌병대 사령관
오늘 1일 새벽 경성에서 조선 독립에 관한 선언서를 발견함. 위 선언서에는 천도교, 기독교 신도들의 서명이 있었는데, 이면에는 일본 및 조선의 학생들과 비밀리에 연락했을 가능성이 있어 수사 중. 오후 2시에 이르러 중학(中學) 정도의 학생 약 1,000명이 모이자, 민중이 이에 어울려 시내를 행진하고 시위 운동을 시작함. 지금 수배 중. 위 집단은 각 장소에서 한국 독립 만세를 외치나 난폭한 행동으로 나오지는 않아 매우 불온한 형세는 없음. 주모자를 체포하고 해산시킬 예정이고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대부분은 즉시 체포함.
1일 새벽 경성에서 천도교·기독교 인사들이 서명한 독립 선언서가 발견되고 학생과 민중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는 보고는 1919년 3·1 운동에 대한 것이다. 밑줄 그은 '시위 운동'의 배경으로는 그해 2월 도쿄 유학생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의 이름으로 발표한 2·8 독립 선언이 있다. 간도 참변, 국민 대표 회의, 브나로드 운동, 조선 노동·농민 총동맹 결성은 모두 3·1 운동 이후의 일이다.
문학으로 보는 한국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해설]
이 시는 독립 운동가이자 문학가인 (가) 의 ‘청포도’이다. 그는 이 시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에서 식민지 현실에 맞서 꺼지지 않는 민족의식을 표현하였다.
그의 본명은 이원록으로 안동에서 태어났고,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탄 의거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943년 체포되어 이듬해 베이징의 일본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청포도'의 작가이며 본명이 이원록이고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탄 의거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한 (가)는 이육사이다. 이육사는 '광야', '절정' 등 강인한 저항 의지를 담은 시를 남겼다. 상록수는 심훈, 타이완에서 일본 육군 대장을 저격한 인물은 조명하, 삼균주의 건국 강령은 조소앙, 여유당전서 간행과 조선학 운동은 정인보·안재홍 등과 관련된다.
□□신문 제△△호 1924년 ○○월 ○○일
이중교 폭탄 사건 주역은 (가) 의 김지섭
9월 1일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이 도화선
금년 1월 5일 오후 7시에 동경 궁성 이중교 앞에서 일어난 폭탄 투척 사건은 전일본을 경악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 게재 일체를 금지하였고, 동경 지방 재판소의 검사와 예심 판사가 수사를 진행하였다. 이번에 예심이 결정되고 당국의 보도 금지가 해제되었기에, 피고 김지섭 외 4명은 전부 유죄로 공판에 회부되었음을 보도한다. 김지섭은 조선 독립을 위해 (가) 의 단장 김원봉과 함께 과격한 방법을 강구하였고, 이를 일본에서 실행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1924년 도쿄 궁성 이중교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이 속하였고 단장이 김원봉인 (가)는 의열단이다. 의열단은 1923년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의 직접 혁명을 내세우며 식민 통치 기관 파괴와 요인 처단에 나섰다. 상하이에서 김구가 조직한 것은 한인 애국단, 연통제 운영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신흥 무관 학교는 신민회 계열, 국권 반환 요구서는 독립 의군부와 관련된다.
2천만 피압박 민중 제군이여!
우리 2천만 생령(生靈)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광주 학생 남녀 수십 명이 빈사(瀕死)의 중상을 입었다. 고뇌하는 청년 학생 2백 명이 불법으로 철창 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정의를 위하여 거리로 나가 시위를 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의 미친개의 이빨에 물리고 말았다. 우리들은 광주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피눈물로 시위 대열에 나가는 것이다.
- 감금된 학생을 탈환하자
- 총독 폭압 정치 절대 반대
- 교육에 경찰 간섭 반대
- 치안 유지법을 철폐하라
광주 학생들이 다치고 투옥된 것에 항의하며 학생 석방과 총독 폭압 정치 반대를 외친 격문으로, 1929년에 일어난 광주 학생 항일 운동과 관련된 자료이다.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계획하는 등 이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그 결과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순종 인산일 가두시위는 6·10 만세 운동, '조선 사람 조선 것'은 물산 장려 운동,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준 것은 3·1 운동이다.
조선 민사령 중 개정의 건 (제령 제19호)
조선인 호주는 본령 시행 후 6개월 이내에 새로 씨(氏)를 정하고 이를 부윤 또는 읍면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 신고를 하지 않을 때는 본령 시행 당시 호주의 성을 씨로 삼는다.
교사: 일제는 조선 민사령을 개정하여 일본식 씨명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렇게 개정한 이후에 일제가 추진한 정책에 대해 말해 볼까요?
조선 민사령을 고쳐 6개월 안에 새로 씨(氏)를 정해 신고하게 한 것은 1939년 개정되어 이듬해 시행된 창씨개명 조치이다. 이 시기 일제는 민족 말살 통치와 전시 총동원 체제를 강화하여 1944년 여자 정신 근로령을 공포하고 여성까지 노동력으로 동원하였다. 통감부 설치는 1906년, 조선 태형령과 헌병 경찰제는 1910년대, 동양 척식 주식회사 설립은 1908년의 일이다.
항복 전에 정무총감 엔도 등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가) 와/과 논의하였다. …… 일본인들은 그가 유혈 사태를 막아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 그런데 (가) 은/는 조선 총독부가 생각했던 바를 따르지 않았다. 일본이 원했던 것은 연합군이 올 때까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평화 유지 위원회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인 정부로 여겨질 수 있는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다.
일제 패망 직전 정무총감 엔도 등과 교섭하여 치안권을 넘겨받고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든 (가)는 여운형이다. 여운형은 광복 후 좌우 대립이 심해지자 1946년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위원회를 조직하고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흥사단은 안창호,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이극로·최현배 등,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와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는 다른 인물들과 관련된다.

중국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유엔군이 끊은 대동강 철교와 그 위를 건너는 피난민 사진은 (가) 6·25 전쟁 중 1950년 12월의 장면이다. 전쟁 중인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어 전세가 뒤집혔고, 1952년에는 임시 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애치슨 라인 발표(1950. 1.)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 12.)는 전쟁 이전의 일이다.

대전-대구 구간을 마지막으로 경부 고속 도로가 완공된 것은 1970년으로, 박정희 정부 시기의 일이다. 이 정부에서는 1967년부터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어 사회 간접 자본이 확충되고 수출 주도 성장이 이루어졌다. 삼백 산업과 신한 공사는 1950년대 이전, 금융 실명제는 김영삼 정부, 최저 임금 위원회 설치는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정부는 최근 겪고 있는 금융·외환 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 통화 기금(IMF)에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유동성 부족 상태가 조속한 시일 안에 해결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과 참여국의 지원과 함께 우리 스스로도 원활한 외화 조달을 위한 다각적인 대책을 함께 적극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
| 1949 | 1965 | 1977 | 1988 | 1998 | 2007 | |||||
| (가) | (나) | (다) | (라) | (마) | ||||||
| 농지 개혁법 제정 | 한일 기본 조약 체결 | 100억 달러 수출 달성 | 서울 올림픽 개최 | 노사정 위원회 구성 | 한미 자유 무역 협정(FTA) 체결 |
금융·외환 시장의 어려움을 이유로 국제 통화 기금(IMF)에 유동성 조절 자금 지원을 요청한다는 발표는 1997년 11월의 외환 위기 상황이다. 이는 연표에서 서울 올림픽 개최(1988)와 노사정 위원회 구성(1998)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가 있는 곳은 강원도 강릉이며, 대화창에 언급된 선교장과 굴산사지도 모두 강릉에 있다. 따라서 (가)에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을 추천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송산리 고분군은 공주, 광성보는 강화, 해인사는 합천, 항파두리 항몽 유적은 제주에 있다.
○○○○년 ○○월 ○○일
학생 대표의 연설이 끝나자 우리는 단단하게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행진했다. 3·15 부정 선거에 대한 분노와 얼마 전 마산에서 일어난 규탄 대회에서 김주열 군이 최루탄에 눈 부분을 맞고 마산 앞바다에 죽은 채 떠올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던 터였다. …… 시위대의 물결이 경무대로 향했다. 그때 귀청을 뚫을 듯한 총소리가 연발로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총소리가 멈춘 후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같은 반 친구가 바지가 찢어진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가 그를 안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힘이 없었다.
3·15 부정 선거에 대한 분노, 마산에서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 경무대로 향하던 시위대에 대한 발포는 1960년 4·19 혁명의 상황이다. 4·19 혁명의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으며 이후 내각 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는 5·18 민주화 운동, 호헌 철폐·독재 타도 구호는 6월 민주 항쟁, 3선 개헌 반대 투쟁과 3·1 민주 구국 선언은 박정희 정부 시기의 일이다.
(가) 남북 간의 제반 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나라의 통일 문제를 다루는 남북 조절 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남북 조절 위원회는 판문점에 공동 사무국을 두기로 하였으며, 회의는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진행하기로 하였다.
(나)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특히 이번 합의서에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양측의 국호를 사용하였다.
(가)는 7·4 남북 공동 성명에 따라 남북 조절 위원회가 발족한 1972년, (나)는 남북 기본 합의서가 채택된 1991년의 일이다. 두 시기 사이인 1985년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교환 방문이 이루어졌다. 6·15 남북 공동 선언과 개성 공업 지구 조성, 금강산 육로 관광은 2000년 이후,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 단일팀은 2018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