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71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71회
[체험 프로그램 기획안]
(가) 시대로 떠나는 시간 여행■ 기획 의도
뗀석기를 처음 사용한 (가)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다양한 활동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함.
■ 체험 프로그램 예시
- 주먹도끼로 고기 자르기
- 마찰식 점화법으로 불 피우기
자료의 (가)는 뗀석기를 처음 사용하고 연천 전곡리 유적을 남긴 구석기 시대이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이동 생활을 하며 동굴이나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청동 방울과 세형동검은 청동기·철기 시대, 따비와 괭이를 이용한 농경과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 이후의 것이어서 구석기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
[사료로 보는 한국사 검색 화면 — 검색 결과 ○○○건]
- 1. 위치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군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 2. 형벌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사람은 적몰(籍沒)하여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케 했다. - 3. 풍습
전쟁을 하게 되면 그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했다.
장성 북쪽에 있고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와 접하며, 살인자의 집안사람을 노비로 삼고 도둑질에 12배를 물리며 전쟁 때 소 발굽으로 길흉을 점쳤다는 것은 부여에 대한 기록이다. 부여는 왕 아래 마가·우가·저가·구가 등 여러 가(加)가 있어 이들이 각각 사출도를 주관하였다. 소도는 삼한, 민며느리제는 옥저, 책화는 동예, 범금 8조는 고조선의 것이다.

수로왕이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가)는 금관가야이며,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금동허리띠, 왜와의 교류를 보여 주는 바람개비모양 동기, 북방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청동솥은 김해 일대에서 나온 대표적인 유물이다. 금관가야는 532년 법흥왕 때 구해왕이 나라를 바치면서 신라에 복속되었다. 서옥제는 고구려, 6좌평과 22담로는 백제, 화백 회의는 신라의 것이다.
왕이 고구려가 자주 국경을 침략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이에 (가) 에게 명하여 걸사표를 짓도록 하였다. (가) 이/가 말하기를, “자기가 살고자 남을 멸하는 것은 출가한 승려로서 적합한 행동은 아니지만, 제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글을 써서 올렸다.
수에 군사를 청하는 걸사표를 지은 승려는 신라의 원광이다. 원광은 화랑에게 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의 세속 5계를 제시하여 청년들의 행동 규범을 마련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황룡사 구층 목탑 건립 건의는 자장, 무애가를 통한 불교 대중화는 원효의 일이다.
[한국사 주제 발표] 백제의 성장과 발전
- (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어요.
- (나)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어요.
- (다)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고 황해도 일부 지역을 차지하였어요.
(가)는 사비 천도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 성왕 때, (나)는 동진의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침류왕 때, (다)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황해도 일부를 차지한 근초고왕 때의 일이다. 시간 순으로 배열하면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371) → 침류왕의 불교 수용(384) → 성왕의 사비 천도(538)가 된다.
- 여러 신하들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임금의 호칭을 신라 국왕으로 하자고 건의하니, 왕께서 이를 따르셨다고 하네.
- 나도 들었네. 작년에는 순장을 금지한다는 명을 내리셨지. 앞으로 우리나라의 발전이 기대되는구먼.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임금의 칭호를 신라 국왕으로 삼았으며 순장을 금지한 것은 신라 지증왕 때의 일이다. 지증왕은 512년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정복하여 복속시켰다. 병부와 상대등 설치는 법흥왕, 나제 동맹 체결은 눌지왕, 매소성 전투는 문무왕, 김흠돌의 난 진압은 신문왕 때의 일이다.
[국가유산 정보 서비스 검색 화면 — 종목별: 국보]
(가)-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 지정(등록)일: 1962.12.20.
- 설명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무영탑이라고도 불린다. 8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불국사 대웅전 앞뜰 서쪽에 세워져 있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전체적인 균형이 알맞아 세련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1966년 도굴로 탑이 손상되자, 이를 수리하다가 탑의 내부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발견하였다.





무영탑이라고도 불리고 불국사 대웅전 앞뜰 서쪽에 있으며 수리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가)는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이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균형 잡히고 단정한 형태가 설명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12월에 황제가 함원전에서 포로를 받아들였다. [황제가] 왕은 정사를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였기에 용서하여 사평태상백 원외동정으로 삼았다. 천남산은 사재소경으로, 승려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로, 천남생은 우위대장군으로 삼았다. …… 천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를 보냈다.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
보장왕과 천남생·천남건 등이 당에 포로로 잡히고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의 상황이다. 그 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이끌던 안승을 받아들여 674년 보덕국왕으로 삼고 당을 견제하는 데 이용하였다. 살수 대첩, 나당 군사 동맹, 대야성 함락, 연개소문의 정변은 모두 고구려 멸망 이전의 일이다.
개원(開元) 20년에 발해가 천자의 조정을 원망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습격하여 자사 위준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에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하행성 등에게 군사를 징발하여 바다를 건너 공격해 토벌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아울러 당에 숙위하고 있던 신라인 김사란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 겨울은 깊어 가고 눈이 많이 내려 신라와 당의 군대가 추위에 고생하므로 회군을 명령하였습니다.
| 발해 건국 | (가) | 무왕 즉위 | (나) | 문왕 상경 천도 | (다) | 선왕 즉위 | (라) | 고려 건국 | (마) | 발해 멸망 |
개원 20년(732)에 발해가 등주를 습격해 자사 위준을 죽이자 당이 신라에 발해 공격을 요청한 사건으로, 발해 무왕이 장문휴를 보내 산둥반도의 등주를 공격한 일을 가리킨다. 이는 무왕이 즉위한 뒤이면서 문왕이 상경으로 천도하기 전의 일이므로, 연표에서 무왕 즉위와 문왕 상경 천도 사이에 놓인다.
왕이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전화(錢貨)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서북의 양조(兩朝)에서는 이를 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우리나라는 홀로 아직 행하지 않고 있다. 이제 처음으로 화폐를 주조하는 법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주조한 동전 15,000관(貫)을 재추(宰樞)와 문무 양반 및 군인에게 나누어 하사하여 화폐 사용의 시작점으로 삼고자 한다. 전문(錢文)은 해동통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화폐 주조법을 정하고 동전 15,000관을 나누어 주며 그 이름을 해동통보라 하였다는 것은 고려 숙종 때의 화폐 정책이다. 고려 시대에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여 송·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송상의 송방, 감자·고구마 재배, 설점수세제는 조선 후기의 일이고 동시전 설치는 신라 지증왕 때의 일이다.
(가) 처음으로 역분전을 정하였다. 통일할 때 조정의 관리들과 군사들에게 관계(官階)는 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성품과 행동이 착하고 악함과 공로가 크고 작음을 참작하여 차등 있게 주었다.
(나) 12월에 문무 양반 및 군인들의 전시과를 개정하였다. 제1과는 전지 100결, 시지 70결을 지급한다. …… 제18과는 전지 20결을 지급한다. 이 한(限)에 들지 못한 자에게는 모두 전지 17결을 주기로 하고 이것을 통상의 법식으로 한다.
(가)는 태조가 후삼국 통일 직후 인품과 공로를 기준으로 준 역분전이고, (나)는 관품을 기준으로 18과로 나누어 지급한 목종 대의 개정 전시과이다. 그 사이인 광종 때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가 처음 시행되었다. 과전법은 고려 말, 전민변정도감과 만적의 모의, 최충헌의 봉사 10조는 모두 개정 전시과보다 뒤의 일이다.
- 북원의 도적 우두머리인 양길은 (가) 이/가 자신을 배신한 것을 미워하여 국원 등 10여 곳의 성주들과 그를 칠 것을 모의하고 비뇌성 아래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양길의 병사는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 『삼국사기』 -
- [태조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光州) 부근에 이르러 금성군을 쳐서 함락하고 10여 군현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에 금성군을 고쳐서 나주라 하고 군사를 나누어서 지키게 한 뒤 돌아왔다. …… (가) 이/가 변경의 일을 물었는데,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키고 경계를 넓힐 전략을 보고하였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태조를] 주목하게 되었다. - 『고려사』 -
양길의 부하로 있다가 그를 배신하고 세력을 키웠으며 왕건에게 변경의 일을 물었다는 (가)는 궁예이다.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운 뒤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서를 두어 중앙 정치 기구를 마련하였다. 일리천 전투와 정계·계백료서 저술은 고려 태조 왕건, 가지산문 개창은 도의, 문무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신문왕의 일이다.
- 문헌공도 등 사학의 발달로 관학이 위축된 시기에 관학 진흥을 위하여 시행한 정책에 대해 말해 보자.
- 서적포를 두어 출판을 담당하게 하였어.
- (가)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융성하면서 관학이 위축되자 고려 정부는 관학 진흥책을 폈는데, 숙종은 서적포를 두어 서적 간행을 맡겼고 예종은 국자감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두고 양현고라는 장학 재단을 설치하였다. 사액 서원 지원과 초계문신제는 조선, 독서삼품과는 통일 신라의 제도이며, 교장도감은 관학 진흥책이 아니라 의천이 속장경을 간행하기 위해 둔 기구이다.
[서술형 평가] ○학년 ○○반 이름: ○○○
◎ 다음 상황들이 나타난 시기의 사회 모습을 서술하시오.- 이의방은 평소 자기를 핍박하는 이고를 미워하였는데, 이고가 난을 모의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살해하였다.
-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두경승이 향산동 통로역에서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 최우가 정방(政房)을 자기 집에 설치하고 문사를 선발하여 여기에 소속시켰다.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최우가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한 것은 모두 고려 무신 집권기의 일이다. 이 시기에는 지배 질서가 흔들리면서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의 난을 비롯한 하층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서얼의 통청 운동, 정감록 유포, 역관 등의 위항 문학은 조선 후기, 청해진을 거점으로 한 국제 무역은 통일 신라 때의 일이다.
- 박서는 김중온의 군사로 성의 동서쪽을, 김경손의 군사로는 성의 남쪽을, 별초 250여 인은 나누어 3면을 지키게 하였다. (가) 의 군사들이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자 성안의 군사들이 갑자기 나가 싸워 그들을 패주시켰다.
- 송문주는 귀주에서 종군하였던 사람인데 그 공으로 낭장(郎將)으로 초수(超授)되었다. 이후 죽주 방호별감이 되었을 때, (가) 이/가 죽주성에 이르러 보름 동안이나 다방면으로 공격하였으나 성을 빼앗지 못하고 물러갔다.
박서가 귀주성에서, 송문주가 죽주성에서 막아 낸 (가)는 몽골이다.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무신 집권자 최우는 장기 항전을 내세워 1232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저항하였다. 광군은 거란, 별무반은 여진, 화통도감은 왜구에 대비한 것이고, 요동 정벌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추진된 것이다.






상감 청자의 생산지였던 강진에서 국보 순회전이 열리고 청자 상감 모란무늬 항아리, 청자 상감 물가풍경무늬 매병이 공개된다는 데서 (가)는 고려임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국가유산이 아닌 것은 마당의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순간을 포착한 조선 후기 김득신의 풍속화 파적도(야묘도추)이다.
- 최근에 역옹패설을 저술하셨는데 독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내용을 소개해 주세요.
- 고위 관리 유청신이 원의 사신과 몽골말로 직접 대화하자 홍자번이 역관을 심하게 꾸짖었고, 이에 유청신이 부끄러워 한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역옹패설을 저술한 인물은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이제현이다. 이제현은 충선왕이 원의 수도 연경에 세운 만권당에 머물며 조맹부·요수 등 원의 문인들과 교유하고 성리학을 깊이 받아들였다. 불씨잡변은 정도전, 정혜결사는 지눌, 동명왕편은 이규보의 저술이다.

하회마을과 하회별신굿탈놀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봉정사 극락전,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 서원이 있고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피란한 (가)는 경북 안동이다. 안동은 고려 초 고창으로 불렸으며, 930년 왕건이 이곳 고창 전투에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크게 이겨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았다. 묘청의 난은 서경, 직지심체요절 간행은 청주 흥덕사, 보현원 정변은 개경 부근, 황산 대첩은 남원 일대의 일이다.
임금이 무악에 이르러서 도읍을 정할 땅을 물색하였다. 좌시중 조준, 우시중 김사형에게 말하였다. “고려 말에 서운관에서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는 이유로 여러 번 글을 올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다. 근래에는 계룡이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기에 백성을 공사에 동원하여 힘들게 하였다.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유한우 등이 도리어 무악보다는 송도가 더 명당이라고 고집한다. 그대들은 도읍할 만한 곳을 서운관 관리에게 다시 보고받도록 하라.”
무악과 계룡, 송도를 두고 도읍지를 물색하며 좌시중 조준, 우시중 김사형과 의논한 밑줄 그은 '임금'은 조선 태조 이성계이다. 태조 재위 말년에 세자 책봉과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이방원이 정도전 등을 제거한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훈민정음 반포는 세종, 경국대전 완성은 성종, 금위영 창설은 숙종,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시도는 세조 때의 일이다.

비국 또는 주사라고도 불렸고 본래 변방의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 기구였던 (가)는 비변사이다. 비변사는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가 되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국정 전반을 총괄하였으나, 왕권을 제약한다는 이유로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사실상 혁파되어 그 기능이 의정부와 삼군부로 나뉘었다. 수도의 행정과 치안은 한성부, 반역죄 처결은 의금부, 서경권 행사는 사헌부와 사간원, 도승지를 수장으로 한 기구는 승정원이다.

이언적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고 뒤에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는 계기가 된 '이 사건'은 1545년의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는 인종의 외척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과 명종의 외척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투다가 대윤 세력이 몰락한 사건으로, 왕실 외척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조의제문은 무오사화, 폐비 윤씨 사사는 갑자사화, 위훈 삭제 주장은 기묘사화와 관련된다.
(가) 임금이 여러 도(道)에 명을 내렸다. “나라의 운세가 매우 좋지 않아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 여러 장수들이 좌시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 예로부터 반역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이처럼 극도로 흉악한 역적은 없었다. 종사와 자전*을 염려하여 남쪽으로 피란하기로 결정하였다.”
(나) 정명수가 심양에 있는 소현 세자의 관소에 와서 용골대의 뜻을 전하기를, “세자가 이곳에 들어온 지가 이미 5년이 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먹고살 길을 마련하지 않는가. 세자와 인질들에게 어찌 먹고살 식량을 늘 지급해 줄 수가 있겠는가. 경작할 땅을 주어 내년부터 각자 농사를 지어 먹도록 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
(가)는 인조가 공주로 피란하게 만든 1624년 이괄의 난이고, (나)는 병자호란 뒤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 세자가 심양에 머문 지 5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사이인 1636년 병자호란 때 김상헌 등은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화의에 반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정문부의 의병 활동과 훈련도감 설치는 임진왜란, 영창 대군 사사와 인목 대비 유폐는 광해군 때의 일이다.
좌의정 채제공이 왕에게 아뢰었다. “빈둥거리는 무뢰배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상점을 개설하고 일용품을 거래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큰 물건에서 작은 물건까지 싼값에 억지로 사들이기 일쑤입니다. 혹 물건 주인이 말을 듣지 않으면 난전(亂廛)으로 몰아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로 끌고 가 혹독한 형벌을 당하도록 합니다. 이 때문에 물건 주인은 본전에서 밑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팔고 갑니다. 그리고 무뢰배들은 제각기 가게를 벌여놓고 배나 되는 값을 받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야 하는 사람은 그 가게 외에서는 물건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물건 값이 날마다 치솟고 있습니다.”
좌의정 채제공이 물건 주인을 난전으로 몰아 처벌하는 폐단과 물가 상승을 아뢴 자료로, 시전 상인이 가진 금난전권의 문제를 보여 준다. 정조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1791년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단행하였으므로, 신해통공을 단행하게 된 배경을 조사하는 활동이 알맞다.

조선과 청 사이의 경계를 밝히려고 청에서 파견한 오라총관 목극등과 조선 관리가 함께 세웠으며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새긴 비석은 1712년의 백두산정계비이다. 따라서 밑줄 그은 '이 왕'은 숙종이며, 그 재위기에는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처럼 집권 붕당이 한꺼번에 바뀌는 환국이 거듭되었다. 최제우 처형은 고종, 나선 정벌은 효종, 장용영 창설은 정조, 기축옥사는 선조 때의 일이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부인에게 한글 편지를 보냈고 독창적인 서체로 이름났으며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린 '이 인물'은 추사 김정희이다. 김정희는 금석문 연구에 힘써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에 있던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하였다. 사단칠정 논쟁은 이황, 강화학파 형성은 정제두, 시헌력 도입 건의는 김육, 열하일기는 박지원과 관련된다.
- 며칠 전 주상께서 각 궁방과 중앙 관청에 소속된 노비를 모두 양민으로 삼고, 노비 문서를 거두어 불태우라고 명하셨다는군.
- 나도 들었네. 선왕께서 노비추쇄관을 혁파하셨는데, 그 뜻을 이어받으신 것 아니겠는가.
궁방과 중앙 관청에 소속된 노비를 양민으로 삼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게 한 것은 1801년 순조 때의 공노비 해방이며, 선왕인 정조가 노비추쇄관을 없앤 뜻을 이었다는 말과도 들어맞는다. 염포는 조선 전기 삼포 개항으로 왜관이 설치된 곳이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부산포의 초량왜관만 유지되었으므로, 19세기 초에 염포 왜관에서 교역하는 상인은 볼 수 없다. 담배 농사, 세책가, 공인, 송파장의 산대놀이는 모두 조선 후기의 모습이다.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이 세 왕에 걸쳐 60여 년 동안 권력을 잡아 국왕의 실권이 위축되었다는 '이 시기'는 순조·헌종·철종 대의 세도 정치기이다. 1862년 임술 농민 봉기가 전국으로 번지자 정부는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겠다며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어영청 중심의 북벌 추진은 효종, 신해박해는 정조, 이필제의 난과 당백전 발행은 고종 즉위 뒤 흥선 대원군 집권기의 일이다.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서 항전하고 그의 수자기를 미군이 빼앗아 간 (가)는 1871년 미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이다. 신미양요 직후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종로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외규장각 도서 약탈은 병인양요, 홍경래의 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 황사영 백서는 모두 신미양요 이전의 일이다.
(가) 부산항에서 일본국 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 이정(里程)은 부두로부터 기산하여 조선 이법(里法)으로 동서남북 직경 10리로 정한다. 동래부는 이정 밖에 있지만 특별히 왕래할 수 있다. 일본국 인민은 마음대로 통행하며 조선 토산물과 일본국 물품을 사고팔 수 있다.
(나) 통상 지역에서 조선 이법 100리 이내, 혹은 장래 양국 관원이 서로 의논하여 정하는 경계 안에서 영국 인민은 여행증명서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여행증명서를 지닌 영국 인민은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며 통상하거나, 각종 화물을 들여와 팔거나(단, 조선 정부가 불허한 서적·인쇄물 등은 제외), 일체 토산물을 구매할 수 있다.
(가)는 부산항에서 일본인의 활동 범위를 사방 10리로 정한 조일 수호 조규 부록(1876)이고, (나)는 영국인의 내지 통상과 여행을 허용한 조영 수호 통상 조약(1883)이다. 그 사이인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청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맺어 청 상인의 내지 통상권을 확보하였다. 거문도 불법 점거와 절영도 조차 요구, 톈진 조약에 따른 일본군 철수는 1880년대 중반 이후, 남연군 묘 도굴 시도는 1868년의 일이다.

궁중 무용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다섯 사람이 중앙과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오방색 옷을 입고 추며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가)는 처용무이다. 처용무는 역신을 물리쳤다는 신라의 처용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악귀를 쫓는 벽사의 뜻을 담고 있다. 종묘 제례악, 영산재, 판소리, 탈춤은 각각 다른 무형유산이다.
- 어제 발행된 관보를 보았는가? 지난 8월 국모 시해 사건 이후 김홍집 내각에서 추진한 개혁의 일환으로 태양력을 시행한다더니, 그에 맞추어 연호를 새로 정하라는 조칙이 내려졌군.
- 그래서 내일부터 양력 1월 1일이 시작되고, 새로운 연호는 건양으로 정해졌다고 하네.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이 추진하였고 태양력 시행과 건양 연호 제정으로 이어진 '개혁'은 을미개혁이다. 을미개혁에서는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두어 군제를 개편하고 단발령과 종두법 시행 등을 함께 추진하였다. 지계 발급은 광무개혁, 8도를 23부로 개편한 것과 공사 노비법 혁파·과부 재가 허용, 교육 입국 조서 반포는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국내외 정세에 대응하고 개화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영선사 파견을 건의한 (가)는 통리기무아문이다. 통리기무아문은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개편하는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원수부 설치는 대한 제국, 대전통편 편찬은 정조, 신문지법과 서당 규칙은 각각 통감부 시기와 조선 총독부 시기의 것이다.

영국인 배설(Ernest T. Bethell)이 발행인이었고 박은식·양기탁 등이 발간에 참여한 (가)는 대한매일신보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 보도하고 의연금 모금을 도우며 운동을 전국으로 넓히는 데 앞장섰다. 박문국에서 발행한 것은 한성순보,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 여권통문을 처음 실은 것은 황성신문, 최초의 순한글 신문은 독립신문이다.
독립문 주춧돌 놓는 예식을 독립 공원 부지에서 열었다. …… 회장 안경수 씨가 연설하기를, “ (가) 이/가 처음에 시작할 때 단지 회원이 네다섯 명이더니 오늘날 회원은 수천 명이다. 조선 인민들이 나라가 독립되는 것을 좋아하기에 심지어 궁벽한 시골에 사는 인민 중에서 독립문 세우는 데 돈을 보조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외국 사람 중에서도 돈 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을 보면 조선 사람들도 오늘부터 조선에서 모든 일을 (가) 하듯이 시작하여 모두 합심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회장 안경수가 독립문 정초식에서 연설하고 회원이 수천 명으로 늘었다는 (가)는 1896년에 창립된 독립 협회이다. 독립 협회는 관민 공동회에서 헌의 6조를 결의하고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세우려 하였다.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은 대한 자강회,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는 보안회, 대성 학교 설립은 신민회, 독립 공채 발행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일이다.

메가타 다네타로가 주도하여 전환국을 폐지하고 백동화와 엽전을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바꾼 밑줄 그은 '사업'은 1905년의 화폐 정리 사업이다. 메가타는 러일 전쟁 중 체결된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대한 제국의 재정 고문으로 파견된 인물이므로, 이 협약이 끼친 영향을 알아보는 활동이 알맞다. 군국기무처는 갑오개혁, 당오전 발행은 1880년대, 삼국 간섭은 청일 전쟁 직후, 대한 광복회는 1915년의 일이다.

1937년 스탈린이 승인한 명령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지역의 한인 10만여 명이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당했다는 (가)는 연해주이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권업신문을 발행하며 민족 운동을 폈다. 경학사와 서전서숙·명동 학교는 만주 지역, 2·8 독립 선언은 일본 도쿄, 대조선 국민 군단은 하와이에서의 일이다.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앞두고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가)는 안중근이다. 안중근은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하였다. 이완용 습격은 이재명, 타이중 의거는 조명하, 스티븐스 처단은 장인환·전명운, 서울역 폭탄 투척은 강우규의 일이다.

일제가 조선 태형령을 시행하여 사소한 사안에도 태형을 집행하던 '시기'는 1910년대 무단 통치기이다. 이 시기인 1915년 일제는 이른바 시정 5주년을 내세워 경복궁에서 조선 물산 공진회를 처음으로 열어 식민 통치의 성과를 선전하였다. 육영 공원은 개항기, 애국반 편성은 1930년대 말 이후, 조선 형평사 창립과 영화 아리랑 개봉은 1920년대의 일이다.
(가) 회사령 폐지에 관한 건
회사령은 폐지한다.
- 부칙
1. 이 영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2. 구령에 의하여 설립한 회사로 이 영 시행 당시 존재하는 것은 조선 민사령에 의하여 설립한 것으로 본다.
(나) 조선 총독부 농촌 진흥 위원회 규정
제1조 조선의 농산어촌 진흥에 관한 방침, 시설 및 통제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조선 총독부에 조선 총독부 농촌 진흥 위원회를 둔다.
제3조 위원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한다.
(가)는 1920년의 회사령 폐지이고, (나)는 1930년대 초 농촌 진흥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마련한 조선 총독부 농촌 진흥 위원회 규정이다. 그 사이인 1920년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창립하여 국산품 애용을 내건 물산 장려 운동을 일으켰다. 방곡령 선포와 황국 중앙 총상회의 상권 수호 운동은 개항기, 농지 개혁법 제정은 광복 이후, 국가 총동원법 제정은 1938년의 일이다.
대학을 세운다는 일은 극히 거창하여 여간 몇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바가 아니므로 금일까지 실지의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라. 그러나 일이 거창하고 어렵다고 시작을 아니하면 언제까지든지 조선 사람의 대학이라는 것은 생겨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조선 전도의 다수한 유지를 망라하여 민중적 운동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의 힘을 합하여 민립 대학 한 곳을 세워 보고자 이상재, 이승훈 등의 주창으로 수일 전에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장차 각 부·군에서 다수한 발기인의 참가를 구하여 경성에서 발기회를 열고 실행 방법을 결정할 터이다.
| 1895 한성 사범 학교 설립 | (가) | 1911 제1차 조선 교육령 | (나) | 1919 3·1 운동 | (다) | 1924 경성 제국 대학 개교 | (라) | 1938 제3차 조선 교육령 | (마) | 1942 조선어 학회 사건 |
이상재·이승훈 등의 주창으로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조직하였다는 자료는 1922년 무렵 시작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보여 준다. 이는 3·1 운동(1919) 뒤이면서, 일제가 이 운동을 무마하려고 세운 경성 제국 대학이 개교(1924)하기 전의 일이므로 연표에서 3·1 운동과 경성 제국 대학 개교 사이에 해당한다.

라이징 선 석유 주식회사 문평 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일이 발단이 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운동은 1929년의 원산 총파업이다. 그 이후인 1931년 평양 평원 고무 공장의 강주룡이 임금 삭감에 맞서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였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 설립(1908), 대한 천일 은행 창립(1899), 조선 노농 총동맹 결성(1924), 암태도 소작 쟁의(1923)는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고 한국사 교실 수업 과제 화면]
■ 조별 과제 안내일제 강점기 사회 및 문화의 변화를 일상생활의 변동과 연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후 제목과 함께 게시판에 올려 주세요.
| 번호 | 제목 |
|---|---|
| 1 | 1조 - 소비 문화의 정점, 백화점의 탄생 |
| 2 | 2조 - 수학여행을 통해 본 식민지 근대 관광 |
| 3 | 3조 - 문화 주택과 토막집 |
| 4 | 4조 - (가) |
과제 주제가 백화점의 등장, 수학여행, 문화 주택과 토막집처럼 일제 강점기 일상생활의 변동을 다루고 있으므로 (가)에도 같은 시기의 생활 문화가 들어가야 한다. 몸뻬는 중일 전쟁 이후 전시 통제 체제에서 일제가 여성에게 입도록 강요한 일본식 작업 바지로, 이 시기 일상의 변화를 잘 보여 준다. 광혜원과 우정총국은 개항기, 새마을 운동과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광복 이후의 일이다.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열었고 지청천이 총사령관이었으며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한 (가)는 한국광복군이다.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자유시 참변은 대한 독립 군단, 영릉가 전투는 조선 혁명군, 봉오동 전투는 대한 독립군, 쌍성보 전투는 한국 독립군과 관련된다.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지부가 지원병으로 끌려가는 청년을 환송하려고 장행기를 만들고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을 적었다는 데서 밑줄 그은 '시기'가 중일 전쟁 이후 민족 말살 통치기임을 알 수 있다. 원각사에서 신극 은세계가 공연된 것은 1908년 대한 제국 시기의 일이므로 이 시기에는 볼 수 없다. 국방헌금 모금,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강요, 내선일체 선전, 국민 징용령에 따른 강제 동원은 모두 이 시기의 모습이다.
학생 여러분, 이번 시간에는 우리 고장의 유적과 기념물을 조사해서 발표하는 활동을 하겠습니다. 우리 고장은 금강 중류에 위치한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남한에서 최초로 발굴된 구석기 유적이 있어 선사 시대부터 우리 고장에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이 상호 경쟁하던 시기에는 백제의 수도로서 백제 중흥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던 곳으로 백제 고분을 통해 당시의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설치된 12목 중의 하나였고, 이후 조선 시대에도 감영이 있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근대에는 동학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는 등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민족 운동이 펼쳐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모둠별로 우리 고장의 다양한 유적과 기념물에 대해 조사한 후 알게 된 내용을 발표해 봅시다.
금강 중류에 있고 남한에서 처음 발굴된 구석기 유적(석장리 유적)과 백제의 두 번째 수도, 고려의 12목, 조선의 충청 감영, 동학 농민군의 우금치 전투가 모두 얽힌 고장은 충남 공주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이 있어 무령왕이 남조·왜 등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 준다. 수양개 유적은 단양, 만인의총은 남원, 만석보 유지비는 정읍, 아우내 만세 시위는 천안의 것이다.

부산 재한 유엔 기념 공원의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는 (가) 6·25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4만여 명의 유엔군을 기리기 위한 시설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가운데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애치슨 라인 발표와 남북 협상은 전쟁 이전, 한일 기본 조약과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는 훨씬 뒤의 일이다.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시된 밑줄 그은 '총선거'는 1948년의 5·10 총선거이다. 이 선거는 임기 2년의 제헌 국회의원을 뽑기 위한 것으로, 여기서 구성된 제헌 국회가 헌법을 만들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를 놓았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실시된 선거,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의 투표, 양원제 국회 구성, 신한 민주당의 돌풍은 모두 뒷날의 일이다.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회식이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것은 1988년으로, 노태우 정부 시기의 일이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90년 민주 정의당·통일 민주당·신민주 공화당이 합쳐 민주 자유당을 창당하는 3당 합당이 이루어졌다. 국민 교육 헌장 발표는 박정희 정부, 하나회 해체는 김영삼 정부, 삼청 교육대 설치는 전두환 정권 초기, 금 모으기 운동은 김대중 정부 때의 일이다.

부산과 마산의 시민·학생이 일으켰고 YH 무역 사건과 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배경이 된 (가)는 1979년의 부마 민주 항쟁이다. 부마 민주 항쟁은 시위 진압을 둘러싼 정권 내부의 갈등을 키워 10·26 사태로 이어졌고, 결국 유신 체제가 무너지는 배경이 되었다. 시민군 조직은 5·18 민주화 운동, 김주열의 죽음과 대통령 하야는 4·19 혁명, 6·29 선언은 6월 민주 항쟁과 관련된다.
노벨 위원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해 준 최근의 남북 관계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습니다. …… 우리의 일관되고 성의 있는 자세와 노르웨이를 비롯한 전 세계 모든 나라의 햇볕 정책에 대한 지지는 북한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노벨 위원회 앞에서 그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고 밝히고 햇볕 정책을 언급한 연설은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의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에서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남북 기본 합의서 교환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은 노태우 정부, 7·4 남북 공동 성명은 박정희 정부,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최초 교환은 전두환 정부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