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제74회 시험지 PDF 다운로드
제74회

자료의 서울 암사동 유적은 빗살무늬 토기와 갈돌·갈판, 움집 터가 출토된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조·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과 가축 사육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식량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목책과 환호를 갖춘 취락, 고인돌 축조, 거푸집을 이용한 세형 동검 제작은 모두 청동기·철기 시대의 모습이고,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 시대 이후이다.

강화 참성단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는 제단으로, 밑줄 그은 '이 나라'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왕 아래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을 두어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사출도는 부여, 동맹은 고구려, 민며느리제는 옥저, 책화는 동예의 풍습이다.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계단처럼 쌓아 올린 장군총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므로 (가)는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지방에 경당을 두어 청소년에게 유학과 활쏘기 등 무예를 함께 가르쳤다. 녹과전과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22담로는 백제, 황룡사 구층 목탑 건의는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다.
(가) 백제왕 명농이 가야와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의] 군주(軍主)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나) 8월에 [백제왕이]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로 보냈다.
(가)는 백제 성왕(명농)이 신라를 공격하다 전사한 관산성 전투(554)이고, (나)는 백제가 윤충을 보내 신라 대야성을 함락한 사건(642)이다. 그 사이인 562년 신라 진흥왕은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 연맹을 완전히 병합하였다.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 것과 신주 설치는 관산성 전투 이전, 황산벌 전투와 김춘추의 나당 동맹 체결은 대야성 함락 이후의 일이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 동하총과 공주 송산리 6호분은 백제의 고분 벽화를 보여 주는 유적이므로 (가)는 백제이다. 백제는 왕족인 부여씨와 진씨·해씨 등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루었다. 일길찬·사찬은 신라의 관등, 욕살·처려근지는 고구려의 지방관, 단궁·과하마·반어피는 동예의 특산물, 범금 8조는 고조선의 법이다.

감은사는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부처의 힘으로 왜구를 막고자 짓기 시작하여 아들 신문왕이 완성한 절이고, 대왕암은 문무왕의 수중릉이므로 밑줄 그은 '이 왕'은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파견하였다. 우산국 복속은 지증왕, 건원 연호는 법흥왕, 관료전 지급과 녹읍 폐지는 신문왕, 국사 편찬은 진흥왕 때의 일이다.

상경·중경·동경·남경·서경을 잇고 거란도·영주도·조공도·일본도·신라도가 표시된 교통로 지도이므로 (가)는 발해이다. 발해는 문적원을 두어 서적 관리와 주요 문서 작성을 맡겼다. 칠지도는 백제, 9서당 10정은 통일 신라, 광평성은 후고구려, 천군과 소도는 삼한과 관련이 있다.

9산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중심 사찰인 장흥 보림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하대에 유행한 선종 불교를 대표하는 유산이므로 (가)는 선종이다. 선종은 경전 연구보다 참선과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강조하여 지방 호족의 호응을 얻었다. 초제와 신선 사상은 도교, 시경·서경·역경은 유교, 인내천은 동학의 내용이다.
[한국사 동영상 제작 기획안]
○○○,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다△학년 △반 △모둠
■ 기획 의도
신라인으로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한 ○○○의 생애를 다룬 동영상을 제작하여, 당시의 상황과 그의 활동을 살펴본다.
■ 장면별 구성 내용
- #1. 당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다
- #2. (가)
- #3.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주도하다
- #4.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암살당하다
당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고 청해진을 설치해 동아시아 무역을 주도하다가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 암살된 인물은 장보고이다. 그는 당의 산둥반도 적산촌에 법화원을 세워 재당 신라인 사회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화왕계는 설총, 청방인문표와 격황소서는 최치원, 왕오천축국전은 혜초의 저술이다.
[가상 대화]
- 며칠 전에 신라 왕 김부가 우리 고려에 항복하였다는군.
- 전해 들었네. 우리 왕께서 신라국을 없애 경주라 하고, 그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셨다더군.
신라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항복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은 것은 935년의 일이다. 이듬해인 936년 왕건은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안승의 보덕국왕 책봉은 통일 신라 초기, 공산 전투와 고창 전투는 935년 이전, 원종과 애노의 난은 신라 하대의 일이다.
[스스로 탐구하는 역사 수업 게시판 화면]
호족 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한 이 왕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올려주세요.| 정치 | 외교 | 사회 |
|---|---|---|
|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양인으로 풀어주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어요. | 후주와의 사신 왕래로 대외 관계 안정을 꾀하였어요. |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어요. |
노비안검법을 실시하고 제위보를 설치하였으며 후주와 사신을 왕래한 밑줄 그은 '이 왕'은 고려 광종이다. 광종은 광덕·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대내적으로 황제국의 위상을 드러냈다. 정치도감은 충목왕, 12목 설치는 성종, 등급에 따른 전지·시지 지급인 전시과는 경종 때 처음 마련되었다.
(가) 거란에서 사신을 파견하며 낙타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지속적으로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하여 친선 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빙을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 죽었다.
(나) 왕이 나주로 들어갔는데, 밤에 척후병이 잘못 보고하기를, “거란 군사들이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놀라서 밖으로 달려 나오자 지채문이 아뢰어 이르기를, “주상께서 밤중에 행차하시면 백성들이 놀라 혼란하게 되니, 바라옵건대 행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제가 염탐하여 알아보고 나서, 그 후에 움직이셔도 됩니다.”라고 하였다.
(가)는 태조 왕건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942)이고, (나)는 거란의 2차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한 상황(1011)이다. 그 사이인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흥화진 전투는 거란의 3차 침입 때이고 묘청의 칭제 건원, 별무반과 동북 9성, 강화 천도는 모두 (나) 이후의 일이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을 소재로 삼았으므로 (가)는 고려이다. 정답으로 제시된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는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신라의 유물이므로 고려의 문화유산으로 적절하지 않다.
(가) 김보당이 정중부·이의방을 토벌하고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과 군사를 일으켜 함께 하도록 했다. …… 정중부·이의방이 이 소식을 듣고 장군 이의민, 산원(散員) 박존위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가도록 했고, 또 군사를 서해도로 파견하여 대응하도록 했다.
(나) 최충헌은 최충수와 함께 봉사를 올렸다. “……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심에 오로지 태조의 올바른 법을 따르시어 중흥의 길을 환히 여시길 바랍니다. 삼가 열 가지 사항을 아뢰옵니다.”
(다) 왕과 세자가 몽골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이후,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세우고 진도에 웅거하였다.
(가)는 무신 정변 직후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내걸고 일으킨 난(1173), (나)는 최충헌이 봉사 10조를 올린 일(1196), (다)는 개경 환도 이후 삼별초가 왕온을 받들고 진도에서 항전한 사건(1270)이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는 (가) → (나) → (다)이다.
- 7재를 설치하였다. 주역을 [공부하는 곳은] 이택재, 상서는 대빙재, 모시(毛詩)는 경덕재, 주례는 구인재, 대례는 복응재, 춘추는 양정재, 무학은 강예재라고 하였다.
- 왕이 결정하시기를 “…… 무학이 점차 번성하여 장차 문학하는 사람들과 각을 세워 불화하게 되면 매우 편치 못하게 될 것이다. …… 무학으로 무사를 선발하는 일과 무학재의 호칭은 모두 혁파하겠다.”라고 하였다.
국자감에 7재를 설치한 것은 고려 예종, 무학재를 혁파한 것은 인종 때의 일이므로 자료는 고려 중기의 상황을 보여 준다. 예종 때에는 병자에게 약을 지급하고 치료를 담당하는 혜민국이 설치되었다. 서얼의 통청 운동, 사창절목에 따른 사창제 시행, 정감록 유포, 향약집성방 간행은 모두 조선 시대의 사실이다.

'불일보조국사'라는 시호를 받고 정혜결사를 조직하였으며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은 (가) 인물은 지눌이다. 지눌은 단번에 깨친 뒤에도 꾸준한 수행이 필요하다는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내세워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백련결사는 요세, 해동고승전은 각훈, 선문염송집과 유불 일치설은 혜심, 성상융회는 균여와 관련이 있다.
[학생들의 대화]
- 권문세족이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대농장을 경영한 이 시기에 대해 말해볼까?
- 많은 여성이 공녀로 끌려갔어.
-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과 호복이 유행하였어.
권문세족이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공녀 차출과 변발·호복이 유행한 밑줄 그은 '이 시기'는 원 간섭기이다. 이 시기에는 이암이 원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들여와 소개하였다. 흑창은 고려 태조 때 설치되었고, 사섬서의 저화 발행과 선혜청의 공가 지급, 상평통보 유통은 모두 조선 시대의 일이다.
[고려의 중앙 관제 정리 노트]
- 고려의 중앙 관제
- 당의 영향: ㉠2성 6부, 어사대
- 송의 영향: ㉡중추원, ㉢삼사
- 독자적 정치 기구: ㉣도병마사, 식목도감
<보 기>
- ㄱ. ㉠ - 좌·우사정이 6부를 나누어 관할하였다.
- ㄴ. ㉡ - 군사 기밀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였다.
- ㄷ. ㉢ - 5품 이하의 관원에 대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 ㄹ. ㉣ - 재추를 중심으로 국방, 군사 문제를 논의하였다.
고려의 중앙 관제 가운데 중추원은 송의 제도를 본떠 설치되어 군사 기밀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였고, 도병마사는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신·추밀이 모여 국방과 군사 문제를 논의한 고려의 독자적 회의 기구이다. 좌·우사정이 6부를 나누어 관할한 것은 발해 정당성의 조직이고, 5품 이하 관원에 대한 서경권은 어사대와 중서문하성 낭사로 이루어진 대간이 행사하였으며, 고려의 삼사는 화폐와 곡식의 출납·회계를 맡은 기구였다.






창덕궁 옛 선원전에 임시로 모셨던 조선 왕과 왕비, 대한 제국 황제와 황후의 신위 49위를 다시 모셔오는 환안제가 열린 (가)는 종묘이다. 정답으로 제시된 사진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 정전으로, 길게 이어진 맞배지붕 건물과 넓은 월대가 특징이다.

호패법을 다시 실시하며 지방 세력 통제를 강화하자 이시애가 함길도에서 난을 일으켰고 이를 평정한 공으로 오자치 등이 적개공신에 책봉되었으므로 (가)는 세조이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간행하게 하였다. 조선경국전은 태조 때 정도전이 편찬하였고, 국조오례의는 성종 때 완성되었으며,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때의 일이다.

강화 교섭이 결렬된 뒤 일본이 다시 침입한 밑줄 그은 '이 전란'은 정유재란이며, 자료는 흥양 현감 최희량이 작성하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서명한 전과 보고서이다. 전쟁이 끝난 뒤 1607년 조선은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진포에서의 왜구 격퇴, 사량진 왜변, 비변사 설치는 모두 이 전란 이전의 일이다.
[가상 대화 - 시간 순 세 장면]
(첫 번째 장면)
부왕께서 승하하신 기해년에는 고대 중국의 예가 아닌 경국대전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 오늘의 대공복 또한 경국대전에 따라 정한 것인가?(두 번째 장면) (가)
(세 번째 장면)
- 성상을 시해하려는 자가 있다는 목호룡의 고변으로 조정이 큰 혼란에 휩싸였다는군.
- 연잉군과 노론이 곤경에 처하게 될 것 같군.
첫 장면은 기해년(1659) 예송을 언급하며 대공복을 논한 갑인예송(1674)이고, 마지막 장면은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과 연잉군이 위기에 몰린 신임사화(1721~1722)이다. 그 사이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남인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인조반정과 기축옥사, 양재역 벽서 사건은 그 이전의 일이고, 탕평비 건립은 영조 때의 일이다.

도산 서원은 성학십도를 지어 군주의 수양을 강조하고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이황을 기리는 곳이므로 (가)는 이황이다. 이황은 향촌 교화를 위해 예안 향약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백운동 서원 건립은 주세붕, 기축봉사는 송시열, 동호문답은 이이, 가례집람은 김장생과 관련이 있다.

서울에 내영, 수원 화성에 외영을 두고 규장각과 함께 왕권 강화를 위해 운영된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조직한 (가)는 정조이다. 정조는 젊은 문신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개혁을 뒷받침할 인재를 길렀다. 나선 정벌은 효종, 호포제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 삼정이정청은 철종, 공노비 해방은 순조 때의 일이다.

제천 배론성지는 순조 1년(1801)에 일어난 신유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에서 비롯되었고, 황사영이 백서를 쓰며 은신한 토굴이 남아 있으므로 (가)는 신유박해이다. 신유박해 과정에서 이승훈이 처형되고 정약용 형제가 유배되는 등 남인 계열 인사들이 대거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한성 조약은 갑신정변, 청군의 진압은 임오군란, 박규수의 안핵사 파견은 임술 농민 봉기와 관련된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서당 교육이 확대되면서 봉산 탈춤·송파산대놀이·고성오광대·수영야류 같은 탈춤이 성행한 밑줄 그은 '이 시기'는 조선 후기이다. 주자소에서 계미자를 주조한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므로 조선 후기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판소리 공연과 한글 소설의 유통, 중인의 시사 활동, 민화 제작은 모두 조선 후기의 문화이다.

수선총도에 종로의 시전뿐 아니라 이현과 칠패 같은 난전이 표기되어 시장이 도성 밖으로 확대되던 밑줄 그은 '이 시기'는 조선 후기이다. 이 시기 조선은 부산에 설치된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과 교역하였다. 정전 지급과 동시전 설치는 신라, 해동통보 발행과 벽란도의 번성은 고려의 사실이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묄렌도르프가 왕명을 받아 영국인 스트리플링을 인천 해관 초대 세무사로 임명한 문서로, 조선 정부가 해관을 창설해 관세 부과 업무를 시작하였음을 보여 준다. 조선이 관세 규정을 처음 명문화한 것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므로 그 내용을 분석하는 탐구 활동이 가장 적절하다. 한일 의정서와 헤이그 특사, 미쓰야 협정은 시기가 맞지 않고, 강화도 조약은 오히려 관세 조항이 없었던 조약이다.
[역사 다큐멘터리 기획안]
격랑의 시대, 그들이 걸어간 길■ 기획 의도
개항 전후 격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각 인물이 마주한 고민과 선택을 중심으로 그들의 활동을 살펴본다.
■ 회차별 방송 내용
- 1회. 박규수, (가)
- 2회. 이만손, (나)
- 3회. 김홍집, (다)
- 4회. 유길준, (라)
- 5회. 박성춘, (마)
개항 전후 시기 인물들의 활동을 다룬 기획안으로, 김홍집은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들여왔고 이후 갑오개혁 내각을 이끌었다.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와 개화 정책을 추진한 인물은 민영익·홍영식·서광범 등이므로 김홍집과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박규수의 통상 개화론,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 유길준의 서유견문, 백정 출신 박성춘의 관민 공동회 연설은 모두 알맞은 연결이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뒤 구본신참을 내세워 추진한 밑줄 그은 '개혁'은 광무개혁이다. 대한 제국은 양전 사업을 벌이고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토지 소유권 증명서인 지계를 발급하였다. 건양 연호 채택과 홍범 14조 반포는 각각 을미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 박문국의 한성순보 발행과 기기창 설립은 1880년대 개화 정책의 결과이다.

정읍 고부에서 전봉준 등이 조병갑의 횡포에 맞서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일으킨 고부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전개된 (가)는 동학 농민 운동이다.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한 뒤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 개혁을 추진하였으므로 그 과정을 살펴보는 활동이 적절하다. 삼국 간섭, 척화비 건립, 거문도 사건, 외규장각 도서 약탈은 모두 동학 농민 운동과 직접 관련이 없다.
[가상 대화]
- 몇 달 전 한성에서 시위대 부대원들과 일본군 사이에 시가전이 있었습니다. 애비슨 선생님께서는 이때 다친 부대원들을 치료해 주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 군대 해산 명령에 맞서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한 후 전개된 시가전에서 부상 입은 부대원들이 실려 왔습니다. 여자 간호사들은 그동안 남자 환자들의 치료를 꺼리던 관습과 달리 헌신적으로 치료에 나섰습니다. 오래된 관습이 한순간에 깨지는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과 뒤이은 서울 시가전은 1907년 대한 제국 군대 해산 때의 일이다.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이 확산되었고, 이듬해 이인영·허위가 이끈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의 태인 의병 봉기, 일본의 독도 불법 편입, 스티븐스의 외교 고문 부임, 유인석 부대의 충주성 점령은 모두 그 이전의 일이다.

1903년 대한 제국이 발행한 여행권을 들고 첫 공식 이민을 떠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밑줄 그은 '이곳'은 하와이이다.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경학사는 서간도, 권업신문은 연해주, 2·8 독립 선언은 일본 도쿄, 신한 청년당의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은 상하이와 관련된다.

경부선 개통 이후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잇는 관부 연락선 잇키마루가 취항한 1905년의 기사이다. 이 무렵에는 양기탁과 베델이 1904년에 창간한 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되고 있었다. 경성 제국 대학 입학과 천도교 소년회의 어린이날 행사는 1920년대, 원각사의 은세계 공연은 1908년의 일이고,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되었다가 이미 폐지된 뒤였다.
- 어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씨가 용천군 용암포 삼림회사의 편의를 위하여 전화와 전선을 추가로 가설할 뜻으로 외부(外部)에 조회하였으니, 외부에서 답 조회하기를 “해당 사안은 결코 인준하기 어려우니 귀 공사도 해당 회사에 훈칙하여 전신주 가설 사항은 절대 마음먹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더라. - 황성신문 -
- 일본, 영국, 미국의 각 공사가 우리 정부에 의주의 개방을 권고하더니, 영국 공사가 다시 조회하기를 “의주는 육지로 연결되어 화물을 운반하기가 매우 어렵고, …… 용암포는 크고 작은 선박들이 지장 없이 왕래할 수 있으니 용암포를 개항하라”고 하였고, 일본 공사가 또 조회하기를 “용암포 개항이 합당하니 속히 타결하라” 하였더라. - 황성신문 -
| 신미양요 | 갑신정변 | 청일 전쟁 발발 | 아관 파천 | 러일 전쟁 발발 | 국권 피탈 | |||||
| (가) | (나) | (다) | (라) | (마) |
러시아가 용암포 일대의 삼림 이권을 확보하려 하자 일본·영국·미국이 용암포 개항을 압박한 용암포 사건은 1903년에 일어났다. 따라서 아관 파천(1896)과 러일 전쟁 발발(1904)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
[한국근대사료DB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상세 내용]
| 이름 | 장채극 | 나이 | 23세 |
|---|---|---|---|
| 판결기관 | 경성복심법원 | 죄명 |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
| 주문 | 징역 2년 | ||
| 사건설명 | (가) 당시,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독립 선언서를 탑골 공원과 종로 인근에 배포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선은 독립국이므로 이에 적국인 일본에 납세하지 말 것, 재판 및 경찰과 행정 명령을 받지 말 것’ 등의 요지를 담은 국민 대회 취지서를 동료에게 전달하였다. 국민 대회 당일에는 남대문 앞에서 선포문과 취지서 등을 배포하고,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 붙잡혔다. | ||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독립 선언서를 탑골 공원과 종로 일대에 배포하고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판결문이므로 (가)는 3·1 운동이다. 일제는 3·1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성 제암리에서 주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우회 선언은 신간회 창립, 순종 인산일은 6·10 만세 운동, 성진회와 독서회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과 관련되며, 3·1 운동 당시에는 통감부가 아니라 조선 총독부가 탄압을 주도하였다.

백산 상회가 백산 무역 주식회사로 개편된 뒤 연통제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독립신문을 보급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임시 정부는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 공채를 발행하였다.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은 대한 자강회,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는 보안회, 독립문 건립은 독립 협회, 국권 반환 요구서 제출 시도는 독립 의군부의 활동이다.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이 속한 밑줄 그은 '이 단체'는 김원봉이 만주에서 조직한 의열단이다. 의열단에는 조선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 종로 경찰서를 공격한 김상옥 등이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원산 노동자 총파업 지원은 신간회, 신흥 강습소 설립은 신민회, 상덕태상회를 통한 군자금 모집은 대한 광복회, 이봉창 의거 계획은 한인 애국단과 관련된다.
[사료로 보는 한국사]
조선사 연구는 과거 역사적, 사회적 발전의 변동 과정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구명함과 동시에 실천적 동향을 이론화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인류 사회의 일반적 운동 법칙인 사적 변증법으로 그 민족 생활의 계급적 제관계와 더불어 사회 체제의 역사적 변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그 법칙성을 일반적으로 추상화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해설] 이 사료는 (가) 이/가 저술한 조선사회경제사의 일부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법칙에 따라 발전하였다는 주장을 펼치며 한국 고대 경제사를 원시 씨족 사회, 원시 부족 국가의 제형태, 노예 국가 시대로 체계화하여 서술하였습니다.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여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따라 전개되었음을 밝히려 한 (가) 인물은 백남운이다. 그는 유물 사관에 입각한 사회 경제 사학으로 한국사가 정체되어 있었다는 식민 사학의 정체성론을 반박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은 한용운, 진단 학회 설립과 실증주의 사학은 이병도·손진태, 독사신론은 신채호와 관련이 있다.
[한국사 웹 드라마 기획안]
| 제목 | 식민지 조선인의 삶 | |
|---|---|---|
| 구성 내용 | 1화 | 단성사, 영화 아리랑을 상영하다 |
| 2화 | 몸뻬, 새로운 일상복으로 강요되다 | |
| 3화 | 목포의 눈물, 나라 잃은 설움을 노래하다 | |
| 4화 | (가) | |
| 주의 사항 |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여 각 30분 분량으로 제작함 | |
단성사의 영화 아리랑 상영, 몸뻬 강요, 노래 목포의 눈물은 모두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삶을 보여 주는 소재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에 근면·자조·협동을 내걸고 추진된 것이므로 식민지 조선인의 삶을 다루는 회차의 내용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모둠별 과제 게시판 화면]
■ 모둠별 과제 안내일제 강점기 국외 동포들의 삶과 시련을 주제로 보고서를 작성한 후 제목과 함께 게시판에 올려주세요.
× 과제 마감일은 5월 24일입니다.
| 번호 | 제 목 |
|---|---|
| 1 | 1모둠 - 만주, (가) |
| 2 | 2모둠 - 일본, (나) |
| 3 | 3모둠 - 연해주, (다) |
| 4 | 4모둠 - 중앙아시아, (라) |
| 5 | 5모둠 - 미국, (마) |
일제 강점기 국외 동포의 삶을 지역별로 정리한 과제 게시판이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고된 노동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 동포들이 겪은 일이므로 연해주와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만주의 간도 참변, 일본의 관동 대지진 학살,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미국에서의 흥사단 창립은 모두 알맞은 연결이다.

오광선이 만주 사변 이후 총사령관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군과 연합하여 1933년 대전자령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였으므로 (가)는 한국 독립군이다. 한국 독립군은 한국 독립당의 군사 조직으로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며 쌍성보·사도하자·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대한 독립군, 국내 진공 작전 계획은 한국광복군, 영릉가 전투는 조선 혁명군,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 부대는 조선 의용대이다.

국가 총동원법이 시행되던 시기에 일제가 조선어 학회 회원들을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고 조선말 사전 원고를 압수한 조선어 학회 사건을 다룬 자료이다. 이 시기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하였다. 조선 태형령 반포와 임시 토지 조사국 설립은 1910년대, 조선 노농 총동맹 결성과 민립 대학 기성회 창립은 1920년대의 일이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한 무장대와 이를 진압하는 토벌대의 충돌, 그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된 (가)는 제주 4·3 사건이다. 이후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와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대통령 하야,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구호, 통일 주체 국민 회의 구성, 6·3 시위는 모두 다른 사건과 관련된다.

임시 수도였던 부산의 천막 교실 사진이므로 밑줄 그은 '이 전쟁'은 6·25 전쟁이다. 전쟁 중이던 1952년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여수·순천 10·19 사건은 전쟁 이전,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은 정전 협정 이후, 삼청 교육대 설치와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 구성은 1980년의 일이다.

대구의 2·28 민주 운동이 대전의 3·8 민주 의거, 마산의 3·15 의거와 함께 도화선이 된 (가)는 4·19 혁명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출범하여 내각 책임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이한열의 희생과 5년 단임 직선제 개헌은 6월 민주 항쟁,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는 5·18 민주화 운동, 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은 부마 민주 항쟁과 관련된다.
이 자료는 종교계와 재야 인사들이 명동 성당에서 독재 정권을 비판하며 발표한 3·1 민주 구국 선언의 일부입니다. 이 선언이 발표된 이후에 있었던 사실에 대해 말해 볼까요?
민주 구국 선언1.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
첫째로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 조치를 곧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 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도록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둘째로 우리는 유신 헌법으로 허울만 남은 의회 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이 표현되는 민의를 국회는 입법에 반영해야 하고 정부는 이를 행정에 반영시켜야 한다. 이것을 꺼리고 막는 정권은 국민을 위한다면서 실은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는 정권이다.
⋮
제시된 자료는 1976년 명동 성당에서 재야 인사들이 긴급 조치 철폐와 유신 헌법 아래 무력해진 의회 정치의 회복을 요구하며 발표한 3·1 민주 구국 선언이다. 이 선언 이후인 1979년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폐업에 항의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고, 이 사건은 부마 민주 항쟁과 유신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3선 개헌안 통과는 1969년, 경향신문 폐간과 조봉암 처형은 1950년대, 국가 재건 최고 회의 구성은 1961년의 일이다.
□□신문 제△△호 ○○○○년 ○○월 ○○일
IMF 구제 금융 조기 상환오늘 정부는 외환 위기 당시 국제 통화 기금(IMF)으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고 밝혔다. 구제 금융을 신청한 지 3년 8개월 만에 전액 조기 상환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앞으로 정책 수립 과정에서 IMF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며, 회원국이면 누구나 해마다 진행하는 연례 협의만 하면 된다.
외환 위기 때 도입한 IMF 구제 금융을 신청 3년 8개월 만에 조기 상환한 것은 2001년 김대중 정부 시기의 일이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자 대통령 직속 자문 기구로 노사정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경제기획원 발족은 1961년,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1970년대 후반, 3저 호황은 1980년대 중후반,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 체결은 노무현 정부 때의 일이다.
6·15 공동 선언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 남북 당국 간 회담이 100여 차례 이상 열리고, 인적·물적 교류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 참여 정부는 햇볕 정책과 6·15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의 질서가 구축되고,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동북아 시대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 간 신뢰 구축입니다. 각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시키고,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6·15 공동 선언을 계승한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한다고 밝힌 연설이므로 참여 정부, 곧 노무현 정부 시기의 자료이다. 노무현 정부는 남북 경제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2003년 개성 공단 착공식을 열었다. 판문점에서의 남북 정상 회담은 문재인 정부, 이산가족 고향 방문 성사는 전두환 정부, 남북한 UN 동시 가입은 노태우 정부, 6·23 특별 성명은 박정희 정부 때의 일이다.
[한국사 톺아보기 - 역사 속 관리 선발 방식]
신라는 국학 학생 등을 대상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를 평가하여 관리로 선발하는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골품제 때문에 관료제 운영에 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고려 시대에는 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가 도입되어 운영되면서 제술과, 명경과, 잡과가 승과와 함께 시행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과거로만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음서 등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관리는 과거, 취재, 음서, 천거 등을 통해 선발되었다.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로 구성되었는데 문과와 무과를 중심으로 하여 양반 관료 체제가 갖추어졌다. 한편 조선 중기에는 ㉣현량과를 통해서 조정에 진출한 신진 세력들이 훈구 세력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개항기에는 군국기무처의 주도로 과거를 폐지하고 별도의 ㉤선거조례를 제정하여 과거 시험에서 평가하였던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이나 문장력보다는 실무에 적합한 재능과 능력을 갖춘 인재를 관리로 등용하고자 하였다.
신라의 독서삼품과부터 개항기의 선거조례까지 관리 선발 방식의 변천을 정리한 자료이다. 선거조례는 대한 제국 수립 이후가 아니라 1894년 군국기무처가 주도한 제1차 갑오개혁 때 과거제를 폐지하면서 제정된 것이므로 설명이 옳지 않다. 독서삼품과는 원성왕 때 시행되었고, 고려의 과거는 광종 때 쌍기의 건의로 도입되었으며, 조선의 문과는 식년시·알성시·증광시 등으로 운영되었고, 현량과는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주장으로 실시되었다.